제62화
하지만 아린이 미리 활성화한 사운드 보정 시스템이 그 소음을 대부분 차단시켰다. 그래서, 로한이 어느 정도 깊숙이 파고 내려갔을 때에는 아린의 귀에도 어떠한 소음도 들려오지 않을 정도였다.
한 5분 정도 지냈을 때, 통신이 들려왔다.
[이제 내려와.]
[네.]
아린은 사운드 보정 시스템을 종료한 후, 바로 구멍 안으로 쏙 들어갔다.
30분쯤 지났을까?
저택에서 1km 정도 밑의 지하에는, 로한과 아린이 파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동굴이 생겨났다. 높이와 반경이 각각 10미터 이상이나 되는 드넓은 공간이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이제 마나석 갖다줘.”
“네.”
아린은 곧장 점프해서 로한이 만든 싱크홀 안으로 솟아 올라갔다.
순식간에 지하실까지 올라온 그녀는 미리 저택에 쌓아둔 마나석들을 모두 지하실로 옮겨 싱크홀에 하나씩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하 공간에 서 있는 로한이 그걸 받아서 옆에 내려놓는 작업을 반복했다.
모든 마나석을 다 떨어뜨린 아린은 다시 싱크홀 안으로 몸을 던졌다. 지하 공간에 가볍게 착지한 그녀의 시선에, 마나석을 들고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로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켜보던 아린이 말했다.
“차원 문 오랜만에 봐요.”
지금 로한이 만들고 있는 네모난 문 모양의 마나석 건축물. 그것은 둘이 지구에서 이 엘도르로 넘어올 때 이용했던 차원 문과 똑같았다.
차원 문 제작은 금방 끝이 났다. 제작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기 위해 로한이 미리 구르카 일족에게 마나석을 기둥 모양의 직사각형으로 제련해 달라고 부탁했었던 게 큰 도움이 되었다. 제련된 마나석을 쌓아서 접합만 잘 하니까 완성된 것이다.
“자, 이제 활성화만 하면….”
로한은 천천히 두 손을 차원 문 중앙 공간으로 뻗었다. 동시에 들려오는 인공지능 도우미의 목소리.
[미리 저장된 ‘아공간’ 좌표를 불러오겠습니다.]
[해당 좌표로 이동하는 차원 이동 텔레포트를 생성합니다.]
[생성 작업에 1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동안 에너지원이 계속해서 소모됩니다….]
곧 로한의 두 손바닥 앞의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점점 큰 폭으로 일렁이던 공간은 얼마 후 천천히 갈라지면서 새로운 차원의 입구를 형성해 갔다.
[차원 이동 텔레포트 생성이 완료되었습니다.]
[에너지원의 변환이 종료되었습니다.]
[총 28.61%의 체내 에너지원을 사용하였습니다.]
도우미의 목소리를 들은 로한은 두 손을 내려놓았다.
“역시 힘든 작업이네. 에너지원을 1/4이나 사용했어.”
지금 이 말을 다른 대륙의 마법사들이 들었으면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발작을 일으켰을 것이다. 과거 신마대전 때 대륙의 내로라하는 대마법사들이 모조리 모여서,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붓고 나서야 생성할 수 있었던 차원 이동 문을 고작 1/4 정도의 내력만 쓰고 만들었다고?
심지어 당시 모였던 마법사들은 죄다 1년 동안 앓아누워 있었다. 지금 로한처럼 멀쩡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들어가자.”
“네.”
로한은 아린을 데리고 차원 문 안으로 들어갔다.
통과하는 순간, 주변 환경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어두컴컴한 동굴이 아닌, 엘도르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미래형 디자인을 한 거대한 창고 같은 공간이 둘은 반겨주었다.
“오랜만이네.”
로한은 추억에 젖은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구에서 사이보그 생활을 하던 당시, 전쟁터에서 지내는 날이 더 많았던 로한은 본인이 자주 사용하는 다양한 물품들을 언제든지 꺼내서 사용할 수 있는 개인 아공간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에드먼 박사에게 부탁해 언제든지 텔레포트로 이동이 가능한 공간을 만들었다.
이 장소는 한때 데르툴족 마법사의 소유였다. 하지만 이제는 엄연히 로한 고유의 공간이다. 해당 데르툴족을 납치해서 심문을 통해 강제로 빼앗은 비밀 과정이 존재하긴 했지만, 어쨌든.
“지구에서는 여길 정말 자주 이용했었는데.”
로한은 한쪽에 정렬되어 있는 다양한 무기들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손때가 묻어 있는 익숙한 최첨단 무기들을 비롯해 그 외 비상시에 활용할 만한 다양한 용도의 물품들이 창고 곳곳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아린이 말했다.
“이젠 다시 지구처럼 이용할 수 있어요, 오빠.”
“그래.”
지구에서는 차원 이동이 아닌, 그저 텔레포트 마법진만 있으면 언제든지 이용이 가능했다. 하지만 엘도르로 넘어온 지금은 반드시 차원 이동을 할 수 있는 차원 문이 필요했다.
다수의 마나석 재료가 필요하다는 매우 어려운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로한은 차원 문을 만들어 내었다. 이제 로한은 언제든지 이 아공간의 물품들을 사용할 수 있다.
“이 물품들이 있어야 빠르게 아로엘을 발전시킬 수 있어.”
로한에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정확히 4년 뒤에, 동쪽의 오스크만 제국이 대군을 이끌고 아틸러스 산맥을 넘어온다. 신마대전 이후 천 년을 넘게 웅크리고 있던 그들이 다시 한번 세계 정복의 야욕을 드러내는 것이다.
4년 안에 아로엘을 안정화시키고, 발전시켜서 로한 본인만의 거대한 세력을 생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테르디아는 오스크만 제국의 강력한 군대에 힘없이 휩쓸릴 것이다. 4년 전처럼 말이다.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말이지.’
물론, 로한과 아린만 있으면 비올라 한 명의 신상쯤은 쉽게 지켜낼 순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한이 바라는 건 어머니의 단순한 생존이 아닌 평화로운 행복이다.
그리고 평화에는 힘이 필요하다. 저 강대한 오스크만조차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강력한 세력 말이다.
“자, 그럼 뭐부터 사용해야 하나….”
로한은 주변을 돌아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지금은 아로엘 곳곳에 숨어 있는 첩자들부터 잡아내는 게 우선순위다. 첩자들이 있으면 당연히 안정적인 아로엘 운영은 불가능하며, 안정 없이는 발전도 없다.
그렇다면, 첩자들을 잡아낼 수 있는 용도의 물품부터 사용하는 게 최선책이다.
“이게 좋겠어.”
마음을 정한 로한은 시선이 멈춘 물품 쪽으로 걸어갔다.
* * *
저녁 식사를 앞둔 6시경.
아로엘 내성에 위치한 드넓은 창고 건물 안에 영지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모였다.
로한이 창고를 둘러보며 물었다.
“꽤 좋은 창고인데. 여기 한 곳 정도는 비워도 괜찮다고 했지?”
“네. 창고는 남아돌 정도로 많습니다.”
그나마 아로엘의 장점이라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어마어마하게 넓은 영토였다. 성 내부 역시 남아도는 땅이나 건물들이 꽤 많은 편이었다.
“그나저나, 워프진도 그릴 줄 아시는군요.”
힉스가 신기한 눈빛으로 중앙에서 커다란 워프진을 그리고 있는 아린을 쳐다보았다.
아로엘은 마법사가 한 명도 없다. 그래서 힉스 역시 태어나서 처음 목격하는 광경이었다.
로한이 대답했다.
“배운 지 오래되지는 않았어. 한 2년 정도?”
이건 사실이었다. 지구에서 데르툴 마법사들을 고문해서 워프진을 배운 게 딱 2년 전 일이다.
“이제 워프하기 위해서 굳이 칼슈타인까지 왔다 갔다 할 수고를 할 필요가 없게 된 거지. 보급품도 이걸 통해 쉽게 받을 수 있고.”
“그렇겠군요.”
“완성됐어요.”
힉스가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막 작업을 마친 아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 바로 시작하자.”
“네.”
아린은 곧바로 워프진 마법에 손을 가져갔다.
[메모리에 저장된 ‘워프진’ 마법을 로드합니다.]
[에너지원의 일부를 해당 마법 마나로 변환합니다.]
[워프진 활성이 완료될 때까지 15초 정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동안 에너지원이 계속해서 소모됩니다….]
인공지능 도우미의 목소리와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변환된 마나가 뿜어져 나갔고, 동시에 워프진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모두의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빛나던 빛은, 정확히 15초 뒤에 확 꺼졌다.
“성공이에요.”
아린이 워프진 중앙에 놓여 있는 물품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오!”
“저게 뭐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물품인데?”
구르카 일족들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그들이 눈을 반짝이면서 쳐다보는 워프진 중앙의 물품을 향해 로한이 천천히 걸어갔다.
“지금부터 하나씩 설명을 해줄게.”
그는 우선 오른쪽에 여러 개 쌓여 있는 굵은 막대기 같은 물품을 집어 들어 올렸다.
“이건 ‘적군 탐지기’야. 이걸 설치하면, 반경 5km 내에 있는 적군이나 몬스터들의 움직임을 바로 감지해서 아군에게 신호를 보내주지.”
“5킬로나… 말입니까?”
힉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보통 마탑에서나 구매할 수 있는 천문학적인 금액의 마나 탐지기도 기껏해야 100미터 전후를 감지할 수 있는데?
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린과 내가 같이 개발한 최첨단 아티팩트니까.”
“오오!”
“아티팩트라니!”
아티팩트라는 단어에 극도로 흥분하는 구르카 일족. 로한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걸 내성과 마나석 광산을 포함해 아로엘 전체에 설치할 거야. 특히 국경선 곳곳에 설치해 놓으면, 사갈에서 어느 곳을 통해 잠입하는지 알 수 있게 되겠지.”
“몬스터들의 습격도 미리 알 수 있겠군요!”
“그렇지.”
지금까지는 로한과 아린, 둘의 체내에 내장되어 있는 비상시 휴대용 레이더 막대기로만 버티고 있었다. 감지 범위도 매우 좁아서, 기껏해야 아로엘 성과 광산 주변에 설치하는 게 전부였었다.
하지만 이 최첨단 감지기라면 아로엘 영지 전체에 빼곡히 설치해도 남는다. 게다가 이 감지기의 가장 큰 장점은, 로한과 아린뿐만 아니라 다른 일반인들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바로 사용법을 알려줄 테니, 설명이 끝난 후 군사령부에 속한 이들은 모두 나를 따라오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로한은 왼쪽의 커다란 정사각형 물품을 손바닥으로 만지면서 설명했다.
“워프 이동식 인공위성이라고 불러.”
인공위성?
다들 단어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인공은 알 거 같은데… 위성은 뭐지?
당연한 것이, 지구의 중세 시대와 비슷한 시대에 살고 있는 엘도르 대륙인들이 어찌 우주에 대해 알겠는가? 이들은 지구 과학 수업을 필수적으로 받은 대한민국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로한은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았다. 말해도 이해를 못 할 테니까.
“이건 좀 이해하는 데 오래 걸리는 물품이라, 나중에 사용하면서 차근차근 설명해 줄게. 어차피 아린이나 나 정도 경지가 아니면 사용도 못 하는 거니까.”
“알겠습니다, 영주님.”
“자, 그러면 일단 옮기자.”
로한이 모두를 돌아보았다.
“마나 감지기는 지금 즉시 전 영지에 설치해. 아로엘과 광석 주변부터 우선적으로 설치하고, 이후 국경선까지 천천히 넓혀가는 식으로. 이해했어?”
“네, 영주님.”
“그리고 이안.”
“네?”
구석에서 멀뚱히 서 있던 이안에게 로한은 턱으로 인공위성을 가리켰다.
“옮겨.”
“네?!”
이안은 경악한 얼굴로 인공위성을 쳐다보았다. 딱 봐도 건장한 병사들이 여덟 명 이상은 붙어야 옮길 수 있어 보이는 저 무거운 걸 혼자서 들고 옮기라고?
“어, 죄송한데, 제가 아직 힘이 약해서 이걸 들어 올리기가… 많이… 버거운데…요.”
“지금부터 이안은 아린의 주변 10미터 이내 접근 금지를….”
“으랏찻차아아!”
곧 모두는, 근육이 하나도 없는 16살의 마른 청년이 자기 몸의 최소 5배는 더 나갈 듯한 짐을 번쩍 들어 올리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짝사랑의 힘은 정말 위대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