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는 사이보그-61화 (61/200)

제61화

거울 속 강인한 인상의 중년 사내, 카르스트가 입을 열었다.

-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천하의 르기에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듣는 날이 오다니. 주인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었어.

“훗….”

피식 웃은 르기에가 말했다.

“저도 당신이 이렇게 쉽게 부탁을 들어주리라는 생각은 전혀 못 했습니다. 당신이라면 최소한, 어려운 조건이라도 하나 달 줄 알았는데 말이죠.”

- 대업에 그런 사사로운 감정은 넣지 않는다. 주인님을 위해 도와줬을 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역시 충직하시군요.”

- 자네만 할까?

이후 말없이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던 둘.

왠지 모르게 숨 막힐 것 같던 침묵은, 르기에가 화제를 돌리면서 끝이 났다.

“당신 덕분에, 이제 로한은 더더욱 사갈 공국을 신경 쓰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저도 테르디아에서 자리 잡을 시간을 더 많이 벌게 되었죠.”

- 원한다면 계속 꾸준하게 병력을 투입시켜 주겠다.

카르스트의 말에 르기에의 눈빛이 바뀌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만.”

- 이건 나의 의지다.

“의지라….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 로한 가족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가족?

카르스트는 분명 로한 한 명이 아닌, 가족이라는 단어를 추가로 언급했다.

- 이번 작전 때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는 로한이 아니라, 그의 여동생이라고 하더군.

“여동생…. 아린 말입니까?”

- 그녀가 아로엘의 모든 병력을 완벽하게 진두지휘했으며, 내성에 침입한 데르마들을 단 한 방의 전격 마법으로 전멸시켰다는 보고가 있었다.

“한 방이라…. 당신이 직접 키운 데르마라면 절대 나약하지는 않을 텐데요.”

- 전원 중급 각성자 이상이고, 초월자 직전도 한 명 끼어 있었다.

“흠….”

톡. 톡. 톡.

이야기를 듣는 르기에는 계속해서 손톱으로 팔걸이 끝부분을 일정한 박자로 두드리고 있었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자주 보이는 버릇이었다.

‘그 정도면 최소 8클래스 이상의 대마법사라는 말인데….’

이건 좀 큰 변수다.

자신의 세력이 두터운 윌리엄과는 달리, 로한은 본인 한 명만 경계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도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조력자가 붙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하물며 대마법사라.

참고로, 마법사라는 존재는 개개인의 무력은 헌터보다 뒤떨어지지만, 그 외의 범용성은 훨씬 뛰어나다. 특히 한 영지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는 한 명의 대마법사가 헌터들 몇십 명 이상의 존재감을 발휘한다.

‘생각해 보니, 버몬드 파가 전멸당할 때 말파스와 싸운 건 로한이 아니라는 정보가 있었는데….’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말파스를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든 건 로한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르기에는 의아해했었다. 로한이 아니면 누가 감히 데르툴족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만약 그 상대가 대마법사라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 마법의 변수는 주인님도 항상 경계하고 계시니까.’

데르툴이 천 년 전 신마대전 때 결국 이 대륙을 정벌하지 못했던 가장 큰 변수는 마법이었다. 단순 화염, 얼음, 번개 같은 원소계뿐만 아니라 정신계, 환영계, 저주계, 진법계 등 예상치 못한 수많은 패턴의 마법에 데르툴들이 당했었다.

하급 데르툴인 말파스 정도는 충분히 제압하고도 남을 만한 힘을 가진 것이 이 대륙의 마법이다.

‘물론 나한테는 소용없는 이야기지만.’

상위 귀족인 자신과 말파스 따위를 비교하는 것은 실례다. 라고 르기에가 생각할 때, 카르스트가 말을 이어왔다.

- 그래서 이번에 아로엘에 큰 관심이 생겼다. 안 그래도 요즘 심심했는데, 좋은 놀이터가 생긴 셈이지. 오늘은 기점으로 이제 주기적으로 아로엘에 병력을 투입하겠다. 이건 네가 말려도 소용없다, 르기에.

“훗, 그러시겠죠. 당신의 고집을 주인님이 아니면 누가 꺾을 수 있을까요.”

르기에는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했다.

“어쨌거나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저한테도 그 정보는 로한을 공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 내가 아닌 주인님에게 감사하도록. 그럼.

말이 끝나자마자 마법 거울 속 카르스트는 사라졌다. 르기에는 손을 휘저어 마법 거울을 눈앞에서 없애 버렸다.

그는 옆의 와인 잔을 입에 가져가면서 생각했다.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아로엘을 공략한다고? 카르스트, 네가?’

정말 말도 안 되는 변명이다.

르기에는 카르스트를 꽤 잘 아는 데르툴 중 하나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게 1순위이며, 흔히 말하는 ‘배려’라는 단어와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이다.

하물며 경쟁자나 다름없는 르기에, 본인을 도와주기 위해 움직일 리가?

‘분명, 나에게 말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을 텐데….’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르기에의 손톱은 오랫동안 그의 의자 팔걸이를 두드렸다.

그때, 마법 영상 통신기를 종료한 카르스트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아로엘의 그 방어 기지에 뭔가가 있다.’

그가 르기에에게 얘기하지 않은 유일한 정보.

왜 하루 만에 지어진 긴급 방어 기지에, 아로엘보다 많은 병력이 투입되어 있었을까? 심지어 로한과, 아로엘의 최고 핵심 인물인 힉스까지 그곳에 있었다.

보통 중요한 장소가 아니면 그렇게까지 핵심 병력들을 배치시킬 리가 없다. 사갈 공국에 맞서 본성도 지키기 힘들어하는 아로엘의 병력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말이다.

과연, 황무지와 다름없는 그 카데시 지방에 뭐가 있길래?

‘일단 알아내는 것이 최우선.’

카르스트는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공손한 자세로 대기하고 있는 관리에게 지시했다.

“피와 모래 중 ‘선혈’들만 소집해라.”

“네.”

관리는 빠른 속도로, 그러면서도 카르스트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도록 조용하게 집무실 밖으로 나섰다.

* * *

여기는 아로엘 내성의 회의실.

탁자에 초대형 아로엘 지도를 놓아둔 채로, 아로엘의 최고 책임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이게 지금까지 저희가 파악한 사갈 공국의 스파이들이 숨어 있는 위치입니다.”

힉스는 설명하면서 빨간 원을 끊임없이 그려갔다. 주로, 아틸러스 산맥이 있는 동쪽 지역에 동그라미가 집중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전통적으로 스파이들은 아틸러스 산맥을 통해 넘어옵니다. 이쪽에 저희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산맥을 통해 넘어오면 피해도 많지 않을까?”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넘어옵니다. 실제로 산맥 쪽을 정찰하다 보면 몬스터들에게 잡아먹혀서 뼈와 복면만 남은 모습을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지독하게 넘어오는 이유가 있나요?”

이번 질문은 로한이 아닌 아린의 것이었다. 그녀는 오늘 새벽에 해낸 완벽한 전공으로 인해, 단 한 명의 반대도 없이 당당하게 회의실의 일원으로 참석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도 사갈과 테르디아는 전쟁 중이기 때문이죠. 두 국가는 400년 동안 단 한 번도 휴전 협정을 맺은 적이 없습니다.”

“그건 알고 있어요.”

사갈과 테르디아는 400년 동안 100번이 넘는 전쟁을 펼친, 엘도르의 대표적인 앙숙 국가다.

가장 큰 이유는 칼슈타인 성에 존재하는 마나석 광산 때문이다. 항상 병력 규모는 많지만 마나석 자원이 부족했던 사갈은 시도 때도 없이 칼슈타인을 점령하기 위해 대군을 보내왔었다.

하지만 늘 소드 마스터, 즉 초월자 이상의 강자들을 배출해 내었던 칼슈타인 가문은 한 번도 사갈에게 성을 내어주지 않았다. 400년 동안 단 한 번도.

“400년간 칼슈타인 공략에 실패한 사갈은, 최근에는 칼슈타인이 아닌 그 주변의 영지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만만한 곳이 아로엘이죠.”

“아마 아틸러스 산맥의 몬스터들이 없었다면 이곳은 진즉에 사갈 공국령이었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로한의 말에 대답하는 힉스였다.

아틸러스 산맥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포탈 몬스터들의 존재는 아로엘에게 있어 적군의 진군을 막아주는 방파제 같은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많이 버겁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스파이들의 숫자가 이제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많아진 탓입니다. 몬스터들도 막기 힘든데, 스파이들이 뒷공작으로 병력들을 괴롭히기까지 해서….”

“오늘 사건이 대표적인 예시겠지.”

“네. 설마 홀튼 마을까지 숨어들어 올 줄은…. 이러면 성내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사실 어제도 굉장히 위험했다. 주요 핵심 병력이 방어 기지로 빠진 상태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이른 시간에 성 내부에 암살자들이 침입했었으니까. 아린이 없었다면 어제 아로엘은 큰 봉변을 당했을 것이다

성 내부에 스파이가 있다? 그러면 더더욱 위험하다. 당장 근처의 하인으로 숨어 있다가 등 뒤를 습격한다면?

이런 걸 따져보면 지금 아로엘은 굉장히 심각한 비상시국이다.

“일단 오늘까지는 경계 태세를 강화시켜. 방어 진지도 마찬가지야. 오늘만 어떻게든 버티면, 내일부터는 스파이들 박멸 작전에 돌입할 수 있어.”

“무슨 특별한 대책이라도 있으십니까?”

스파이들을 박멸하는 건 지금껏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일이다. 이미 색출해 내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스파이들이 잠입했고, 또 신분 위장을 마친 상태니까.

그래서 물어본 힉스의 질문에 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안에 구르카 일족이 내가 요구한 만큼의 마나석을 캐오면, 그걸로 해결할 수 있어. 자세한 건 내일 알려줄게.”

“아, 영주님. 그, 어제 말씀하셨던 할당량은 이미 다 캔 상태입니다.”

“벌써?”

“네. 현재 제련 작업을 거치고 있습니다. 늦어도 점심 전후에는 아로엘 성으로 운반되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좋아.”

로한은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아로엘 영주로 부임한 후 가장 필요했던 재료가 반나절도 안 되어서 확보되었다. 본래는 내일 정도에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로한의 예상을 훨씬 웃돌 정도로, 드워프족의 채굴 속도는 빨랐다.

정말로, 오후 4시경에 로한은 정제된 마나석들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마나석을 가지고, 아린과 함께 자신들이 묵는 대저택으로 이동했다.

저택의 깊숙한 지하실로 들어온 로한이 물었다.

“다들 자고 있지?”

“네. 밤새 일해서 다들 피곤한가 봐요.”

지금 힉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주요 인물들은 잠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밤새 잠 한숨 못 자고 진지를 공사하고 광산을 캐고 침입자들을 잡느라 고생하고, 그것도 모자라 회의까지 오래 했으니….

“방음 시스템부터 가동시켜.”

“네.”

대답과 동시에, 아린의 몸에서 음파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노이즈 캔슬링 기법을 사용한 사운드 보정 음파였다.

이제 이 지하실에서 나는 소리는 바깥으로 들리지 않을 것이며, 그로 인해 비올라와 하인들 모두 지금 로한이 작업하는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그럼 시작해 볼까?”

위이이잉~!

순간 드릴로 변한 로한의 양발이, 큰 소리를 내면서 수직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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