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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는 사이보그-58화 (58/200)

제58화

“그만! 그만하란 말이다!”

절규하듯 소리치는 고든 공작은, 아무도 없는 깜깜한 미지의 공간 속에 홀로 서 있었다.

지난번 르기에를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그 장소다.

“아무리 나를 현혹시키려고 해도 나는 넘어가지 않는다! 난, 난 고든이다! 폐하께 가장 충성스러운 궁내부 장관이란 말이다!”

고래고래 소리치는 고든은 깨닫고 있을까? 그의 목소리는 듣는 이가 바로 두려움의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표정 역시 공포에 질려 잔뜩 굳어 있다는 사실을.

“이제 그만 단념해라! 이 악마야!”

어디선가 숨어 있을 르기에를 향해 외치는 고든.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다른 이의 목소리였다.

[노망난 늙은이….]

[아직도 주제를 모르고 날뛰기만 하네.]

[모두가 자기를 따르는 줄 아나 보지?]

동시에 고든의 눈앞에 보이는 몇 명의 젊은 남성들.

꽤 낯익은 인물들이었다. 그와 만찬을 같이 했던, 이번에 귀족으로 승격한 신입 헌터들이었으니까.

그들은 불쾌한 눈빛과 표정으로 고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윌리엄 경 때문에 여기 온 거지, 너 때문이 아니야.]

[마나 한 톨도 없는 늙은이 따위는 관심 없다고. 알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늙어빠진 노인네는 이제 그만 집에서 쉬지 그래?]

“이, 이…!”

고든은 분노로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그는 그 분노를 터트리는 멍청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저들이 실제 사람이 아닌, 르기에가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허공에 대고 분노를 터뜨렸다.

“당장 이 장난질을 그만두지 못할까! 열흘이나 넘어가지 않았으면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소리 좀 그만 지르시면 안 됩니까?]

그때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

정면을 보니, 어느새 신입 귀족들은 사라지고 새로운 두 명이 서서 한심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윌리엄 파의 2, 3인자인 헤이즈와 시모어 백작이었다.

[제발 체통 좀 지키십시오. 허구한 날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시니까 윌리엄 경께서 매번 곤란한 상황에 처하시지 않습니까?]

[우리 귀족들은 모두 윌리엄 경을 섬기기 위해 뭉친 겁니다. 아무 힘도 없는 늙은 당신이 아니라. 그걸 아직도 모르십니까?]

“그만, 그만!”

고든은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정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애석하게도 귀를 막아도 들려왔다. 머리에 직접 꽂히듯이 말이다.

이번에 들려오는 소리는 헌터 길드 마스터, 라가스의 것이었다.

[킁! 고집불통 늙은이 새끼…. 하루빨리 저놈이 뒤져야 윌리엄 경이 더 승승장구할 텐데 말이야. 그저 족쇄야, 족쇄! 쯧쯧쯧.]

“그만하란 말이다아!”

고든의 외침은 이젠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고든 공작.]

그때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 이번에는 고든도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정면에 서 있는 건장한 중년 남성은 바로….

“윌리엄…!”

고든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열흘 동안, 이곳에서 윌리엄이 그의 눈앞에 등장한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윌리엄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요즘 노환으로 인해 기력이 달린다는 소식을 들었소. 내 폐하께 말씀드릴 테니, 이제 국정에서 내려와 편히 남은 여생을 즐기시오.]

“그, 그게 무슨 소리요?!”

[폐하는 걱정하지 마시오. 당신 대신 보좌해 드릴 충직한 신하들이 내 휘하에도 많으니.]

윌리엄은 계속 말을 이었다. 고든 입장에서는 처음 듣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이다.

[어차피 당신 한 명 없다고 테르디아는 바뀌지 않소. 지금 이 나라의 신하들은 모두 내 부하들이기 때문이오. 당신의 부하가 아니라.]

“무, 무슨 말을 그렇게…!”

[이제 받아들이시오.]

윌리엄이 선언하듯 말을 마쳤다.

[이 나라는 이제 나의 것이오. 당신의 것이 아니라.]

“으… 으으… 그만… 그만…!”

침대 위에 누워서, 눈을 감은 채 식은땀을 흘리면서 신음을 하는 고든. 그러다가 중간중간에 갑자기 알 수 없는 말을 큰 목소리로 외치기를 반복한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한 중년의 남성이 있었다. 고든 저택의 집사였다.

“오늘도 악몽을 꾸시는구나….”

벌써 10일째다. 정확히, 귀족 작위 수여식 후 윌리엄 파 귀족들의 축하 만찬이 있었던 날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고든은 밤마다 저 증상을 보이고 있다.

“악몽 때문에 날이 갈수록 수척해져 가시니… 이걸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가뜩이나 말랐던 고든은 요즘 악몽의 영향으로 팔뚝의 뼈 연골이 고스란히 드러날 정도로 야위었다.

당연히, 악몽을 치료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마탑주에게 값비싼 심신 안정 물약도 구매해 봤고, 대신전의 신관을 불러서 매일 기도와 함께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심지어 지금 입고 있는 잠옷은 악몽에 가장 효과적이라는 최면 마법이 새겨져 있는 거액의 아티팩트다.

하지만 그 어떠한 것도 소용이 없었다. 집사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렇게 쳐다만 볼 수밖에.

“휴우… 어서 땀을 닦아드려라.”

“네.”

옆에서 같이 기다리던 하인 둘이 고든에게 다가가, 들고 있던 고급 수건으로 고든의 온몸에 흐르기 시작한 식은땀을 깨끗이 닦아내었다.

오늘도 수건을 열 개 이상 사용해야 할 것 같았다. 늘 그랬듯이 말이다.

같은 시각.

고든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는 남성이 있었다.

르기에였다.

“후후후….”

마법으로 생성된 거울을 통해 악몽을 꾸는 고든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는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넘어오겠어.”

열흘간 계속된 악몽 최면으로 인해 고든의 정신력은 점점 무너져가고 있었다.

특히, 오늘 윌리엄의 환영을 처음 보여준 것이 결정타로 작용한 듯했다. 악몽 속에서 큰 충격을 받아 울부짖듯이 소리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말이다.

“섭외할 시기만 잘 정하면 되겠군.”

르기에는 옆에 놓인 와인 잔을 입에 갖다 대었다. 테르디아 내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굉장히 귀하고 비싼 고급 레드 와인의 향과 맛을 천천히 음미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로한을 좀 괴롭혀 볼까?”

르기에는 다른 한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마법 거울 안의 모습이 갑자기 뒤바뀌었다.

동시에 고든 대신 등장한 한 중년의 남성이 똑바로 르기에를 바라보았다.

- 르기에군. 무슨 일인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중년의 눈썹이 꿈틀했다.

- …놀랍군. 천하의 르기에가 나한테 도움을 다 청하는 날이 있다니.

“지금은 주인님의 명을 수행 중이기 때문이죠.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전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 그 이유가 아니라면?

“당연히.”

르기에의 눈빛이 순간 빛났다 사라졌다.

“이렇게 연락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 역시나군. 그래, 무슨 부탁인가?

“로한.”

르기에는 말을 이었다.

“그의 영지, 아로엘을 괴롭혀 주십시오.”

* * *

다시, 여기는 아로엘의 카데시 지방.

광산 주변에 구축된 임시 방어 진지의 한쪽에 서 있던 힉스가 동쪽을 바라보았다.

“곧 해가 뜨겠군.”

아틸러스 산맥과 겹쳐 있는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는 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늦어도 30분 뒤에는 태양이 올라올 것으로 보였다.

“벌써 4시인가….”

시계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진지를 구축한다고 한숨도 못 잤기 때문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마법사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기사단장님, 본성에서 연락입니다.”

힉스는 그가 내민 마나석 통신기를 받아 든 뒤 말했다.

“힉스다.”

- 여기는 아로엘입니다. 아린 영애님을 모시고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달합니다.

“수고했다!”

광산 개발이 끝난 뒤 힉스는 일부 기사들에게 아린의 호위를 맡겨 아로엘로 귀환시켰다. 아린이 여기서 더 할 일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여기 남아 있는 게 군 사기에 큰 문제가 되기 때문이었다.

‘다들 눈 뒤집어져서 헤벌레 하는 꼴이라니! 쯧쯧….’

아린이 쓰고 있던 면사포가 바람에 살짝 살짝 들리면서, 여기 있는 대부분의 병사들이 의도치 않게 그녀의 얼굴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방어 진지 구축 때문에 쉬지 않고 삽질을 해도 모자랄 병사들이, 죄다 아린에게 시선을 고정하고는 일할 생각을 하질 않으니….

‘진지 공사 끝나고 보자, 이 자식들. 그때부터 철야 훈련이다!’

이 순간 병사들의 미래에 지옥이 예정되었다는 불행한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근데 정말 예쁘시긴 하더군…. 괜히 면사포를 쓰고 다니는 게 아니었어.’

정작 힉스 본인도 아린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오랫동안 행복한 감정에 젖어 있던 그때였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그의 온몸을 스쳐 지나갔다.

‘…응?’

힉스는 바로 집중해서 사방을 돌아보았다.

지금껏, 그의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이 버려진 땅에서 최고의 기사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누구보다 뛰어난 감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날카롭게 이동하던 그의 시선이 곧 한 곳에 고정되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어둑어둑한 숲. 하지만 분명 힉스는, 그곳에서 빛이 반사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저기다!’

미개발 지역인 아틸러스 산맥 근처에 갑자기 빛이 반사된다? 뻔했다. 철로 만들어진 병장기다!

힉스는 바로 옆의 경비병이 들고 있는 활을 빼앗듯이 집어 든 뒤, 화살을 장전해서 힘껏 당겼다. 그러고는, 방금 빛이 난 곳을 향해 정확하게 쐈다.

그가 날린 것은 그냥 화살이 아니었다. B+급 헌터인 힉스의 마나가 한껏 담겨 있는, 초월자의 힘이 담긴 화살이었다.

푹.

“으윽!”

곧 피부가 꿰뚫리는 소리와 함께 약하게 들려오는 신음.

힉스는 곧바로 외쳤다.

“동북쪽에 적이다!”

근처의 경비병들은 큰 목소리로 합창했고, 곧 진지 사방에서 시끄러운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화살을 날린 쪽에서 다수의 검은 복장을 입은 인물들이 빠른 속도로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힉스는 휘하의 부하 기사에게 외쳤다.

“오스캄! 기사들 데리고 저놈들 쫓아!”

“네!”

“나머지는 혹시 모르는 2차 습격에 대비한다!”

힉스는 이어지는 2차, 3차 습격을 생각해서 모든 병력을 추격에 투입하지 않았다. 그동안 겪은 수없는 실전 경험이 만든 노련함이었다.

곧 오스캄이 일부 기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진지 바깥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었다.

콰앙!

의문의 적들이 도망치기 전에 있었던 자리에서 갑자기 굉음이 터져 나온 것이다.

그 여파로 자욱하게 번진 먼지가 곧 걷히면서, 힉스 등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공작님!”

그곳에 홀로 우뚝 서 있는 로한을 본 힉스의 외침이었다.

모두 쓰러뜨렸다는 듯 손을 흔들어 수신호를 보내는 로한의 모습과, 그 주변에 잔뜩 널브러져 있는 적들의 모습을 본 힉스는, 이내 풀썩 웃어버렸다.

“허, 참…. 진짜 장난 아니시네.”

저 먼 거리까지 도망치고 있는 적들을 이렇게 쉽고, 빠르고, 완벽하게 모조리 제압한 적이 그동안 있었던가? 일단 힉스가 태어난 이래로는 없었다.

그 시각.

아로엘 영지 근처에서 아주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카데시 쪽 팀이 움직였다. 우리도 작전을 시작한다.”

곧, 어둠 속에서 열 명 남짓한 검은 인영이 소리 없이 아로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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