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뭐, 뭐라…?!”
고든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부릅떠졌다.
버몬드가 단번에 비정상적으로 강해진 건 이제 테르디아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마족, 말파스가 대량의 마기를 한꺼번에 주입해서 만들어진 헌터. 그게 버몬드였다.
지금 그 사례를 언급했다는 것은, 설마…?
“네놈도 마족이구나!”
르기에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인 고든은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분노를 퍼부었다.
“이런 무엄한 놈 같으니라고! 감히 나를 마족의 장난감으로 전락시키려 하다니!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당장 이 사악한 마족을 포박하여라!”
고든은 사방을 돌아보며 외쳤지만 그 누구도 오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르기에가 그런 그에게 말했다.
“역시, 충성심이 대단하시군요. 저도 단번에 넘어오리라 생각은 안 했습니다만….”
“나는 고든이다! 그 누구보다 폐하를 가까이 섬기는 궁내부 장관이란 말이다! 테르디아에서 가장 폐하께 충성하는 자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다!”
“알고 있습니다.”
르기에는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작별 인사를 하려는 것이다.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나죠. 하지만, 언제든지 마음이 바뀌면 저를 찾으십시오. 저는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흥! 그런 날은 해가 서쪽으로 뜨는 날이 오더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후후후… 과연 그럴까요? 기대하지요.”
르기에는 다시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면서,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당신을 맞이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테르디아 최고의 헌터가 될 당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말이죠. 후후후….”
“…으….”
갑자기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고든은 눈을 떴다.
이곳은 자신의 침실이었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 시간인 걸 확인한 고든은, 곧 상황 파악을 마쳤다.
“꿈이었군….”
어쩐지, 갑자기 마족이 자신한테 접근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긴 했다. 자신이 누군가? 테르디아에서 가장 충직하기로 이름난 고든 아닌가?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라면 훨씬 충성심이 약한 다른 놈을 찾아가는 게 더 쉬운 방법이라는 걸 알 텐데 말이다.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하긴 했지만… 윽. 여봐라! 물 좀 갖고 와라!”
순간 목이 타는 느낌에 고든은 밖에다 대고 소리쳤다. 어제 만찬에서 기분이 언짢은 나머지 연거푸 독주를 들이켠 탓이었다.
곧 하인이 가져다준 물을 벌컥벌컥 원샷 한 그는,
“아구구, 머리야….”
숙취로 몰려오는 두통에 인상을 쓰면서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아침 해가 뜨고 정오가 될 때까지 그는 결국 잠을 이루지 못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잡다한 생각들이 그를 불면 상태로 만든 것이다.
특히….
“당신을 맞이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테르디아 최고의 헌터가 될 당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말이죠.”
르기에라는 그 건방진 놈의 마지막 한마디가 왜 뇌리에 박힌 듯이 계속 남아서 맴도는 것일까?
고든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 * *
아침 해가 뜬 칼슈타인 성은 꽤 분주했다. 아로엘로 출발하는 로한 일행과 함께할 수많은 보급 병사들이 마차에 열심히 물자들을 싣고 있는 중이었다.
거의 다 완료가 되어가는 시점에 로한은 클리프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지원 많이 해줘서 고맙네. 이렇게까지 많이 안 해줘도 되는데….”
“아닙니다.”
웃으면서 대답하는 클리프의 얼굴은 하루 사이에 멀쩡해져 있었다. 역시, 초월자 이상의 고수들은 순수한 육체 회복 속도도 일반인과 비교가 안 된다.
“혹시 더 필요한 물자가 있으면 나중에 통신으로 연락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한 번 정도는 더 지원해 드려도 된다고 허락하셨습니다.”
“고맙네. 그나저나… 이안? 그자는 어디 있지?”
로한의 물음에 클리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출발할 시간이 다 되어가거늘, 아직도 로한과 함께 갈 이안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클리프가 그랜트한테 지시했다.
“당장 이안을 찾아 데려오도록.”
“네. 전원, 도련님이 있을 만한 곳으로 흩어져 찾는다!”
곧 기사들은 익숙하게 두 명씩 짝을 지어 뿔뿔이 흩어졌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걸 보니, 이런 지시를 한두 번 받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잠시 후, 두 명의 기사가 한 어린 소년의 팔을 한쪽씩 붙잡고 질질 끌듯이 데려오기 시작했다.
“아, 진짜~ 내 발로 걸어간다니까~”
졸린 얼굴로 투덜대면서 끌려온 이안은, 곧 클리프와 로한 등에게 머리를 긁적이면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그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일찍 오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느냐?”
클리프가 딱딱한 얼굴로 이안을 질타했다. 이것도 지금 로한 앞이라 최대한 자제하는 거지, 평상시였다면 정말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안은 능글맞게 변명했다.
“아, 죄송하다니까요, 형님~ 그래도 출발하기 전에는 어떻게든 왔잖아요? 헤헤헤.”
“…….”
순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클리프. 욱하고 올라온 분노가, 로한의 앞이라는 상황이 만들어낸 인내심을 뚫고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클리프의 표정을 본 이안은 이를 눈치채고는 식겁했다.
“히익…. 저, 저기, 로한 공작님이시죠?”
그래서 그는 재빨리 로한에게 말을 걸어서 화제를 전환시키는 처세술을 선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 칼슈타인 가문의 막내아들, 이안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허리를 숙이는 그 모습마저도 왠지 능글맞아 보이는 느낌이었다.
로한은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윌리엄이 유일하게 포기했던 자식이 이놈이었군.’
과거에도 이안은 칼슈타인 가문의 유일한 오점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유명했다.
굉장히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성격으로, 윌리엄이 없으면 아예 검을 손에 잡지도 않았으며 매일 늘어지게 잠을 자거나 몰래 저택 밖으로 나가 음주가무를 즐겼다. 술에 취한 후 사고도 많이 쳐서, 들려오는 소문 자체가 굉장히 안 좋았다.
가문 내에서도 방법이 없어서 결국 왕립 학교에 강제로 입학을 시켜 버리지만, 여기서도 맨날 놀고먹느라 낙제 점수를 받아 제적당해 버린다. 퇴학당한 이후에는 윌리엄도 아예 없는 자식으로 취급해서 죽을 때까지 평생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고 한다.
‘이놈을 대표자로 붙였다라…. 정말 버리는 패인가?’
참고로 지금 함께하는 보급 병력은 다시는 칼슈타인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 로한의 특별한 지시가 없으면 평생 아로엘에서 같이 사는 거다. 그래서 병사들의 가족들도 함께 이동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 있지 않은가.
이안도 마찬가지다.
“후…. 공작님, 앞으로 이 녀석을 잘 부탁드립니다.”
한숨으로 분노를 억지로 가라앉힌 클리프가 로한에게 부탁했다.
“이제부터 이안은 공작님의 직속 부하 신분이니, 앞으로 마음대로 다루셔도 됩니다. 정 마음에 안 드시면, 즉결 처형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네?! 아니, 서운하게 무슨 그런 농담을 하십니까, 형님~?”
“아버지의 명이다. 농담이 아니야.”
“허억…! 너무해애….”
충격받은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이안. 근데 전혀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몸에 배어 있는 능글맞음 때문인가? 모든 행동이 진심으로 안 느껴지고 장난처럼 보였다.
그때, 그랜트가 다가와서 보고했다.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보급 병력의 출발 준비가 완료되었으니, 이제 떠날 시간이다.
“그럼 가보겠네.”
“조심히 가십시오.”
곧 로한 가족과 이안이 마차에 탑승했다. 로한과 이안이 앞 마차에, 그리고 아린과 비올라가 뒤의 마차에.
넷이 탑승한 후에야 보급 병력 전체가 천천히 동쪽 성문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클리프가 서 있는 장소에서 점점 멀어지는 병력들. 그때, 마차 창문 밖으로 이안이 불쑥 상체를 내밀면서 손을 흔들었다.
“저 갑니다, 형님~!”
“…….”
“와, 서운하게 얼굴에 슬픈 감정이 쥐꼬리만큼도 안 담겨 있네~ 평생을 함께한 아우가 먼 길을 떠나가는데 슬프지도 않으십니까? 흑흑흑.”
“…이제 돌아가지, 그랜트.”
이안을 깔끔하게 무시하면서 몸을 돌리는 클리프와 그랜트의 모습이었다.
그걸 본 이안은 억지로 슬퍼하던 표정을 일순간에 풀었다.
“쳇. 하도 했더니 속지도 않네….”
그는 바로 앞에 앉은 로한한테 물었다.
“저기, 혹시 저 조금만 자도 되나요? 어제 새벽 내내 딴짓하느라 잠을 못 자서 피곤해서요.”
“…새벽에 뭐 했는데?”
“밖에 나가서 놀았죠! 이제 평생 못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펑펑 놀았어요. 술도 마시고, 포커도 치고… 흐아암~ 놀 때는 좋은데, 새벽까지 잠을 못 자니까 피곤해요….”
곧 이안은 로한이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스르륵 누워버렸다. 잠시 후, 작게 코고는 소리가 마차 전체를 울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로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짐덩이가 하나 굴러들어 왔군.’
생각보다 로한 일행의 이동 속도는 느렸다. 물품이 워낙 많이 실려 있는 마차들이다 보니 빠른 속도로 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첫날은 어쩔 수 없이 노숙을 해야 했다.
“모두 미리 준비해 온 텐트를 설치한다!”
칼슈타인 성의 병사들은 노련하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텐트를 설치하고 식사 준비를 하는 데까지 10분이 채 걸리지가 않았다.
가족들까지 포함해서 500명에 달하는 병력들이 한꺼번에 진을 치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식사를 위해 태운 모닥불에서 흘러나온 검은 연기들이 하늘 전체를 자욱이 덮을 정도였다.
이 과정 속에서 로한은 할 게 없었다. 병사들이 알아서 텐트도 쳐주고, 식사도 직접 해서 갖다줬기 때문이다.
이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잘 먹겠습니다~ 앙!”
크게 입을 벌려 고기를 한 입 크게 베어 물더니, 곧 주변을 둘러본다.
“어… 술은 없나? 난 술 없으면 고기 안 먹는데. 잠깐, 잠깐만요.”
이안은 갑자기 근처에 있는 마차로 향하더니, 자신의 짐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러고는 와인 병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노숙을 대비해서 미리 챙겨 온 모양이었다.
“헤헤헤, 공작님도 한잔하실래요?”
“…됐어.”
로한은 혼내지도 않고 그냥 고개를 돌렸다. 이안은 옳다구나! 싶어서 바로 또 와인 병 입구를 입에 갖다 대었다.
“크~! 아, 또 술 마시니 여자가 생각나네…. 저기, 공작님. 혹시 텐트 안에 계신 아린 님? 그분이랑 같이 한잔해도….”
“…….”
“히이익! 아, 아니에요. 그냥 혼잣말해 봤어요. 헤헤헤.”
순간 로한의 눈빛이 돌변하려는 걸 본 이안은 바로 손을 휘저었다. 확실히,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편이었다.
“크으! 근데, 공작님 진짜 좋은 사람 같아요.”
“……?”
“제가 아는 귀족들은 저처럼 예의 없이 굴면 당장 화부터 내거든요. 근데 공작님은 화를 안 내잖아요. 솔직히, 아까 마차에서 자는 것도 뭐라 하실 수도 있었는데….”
그걸 아는 놈이 그렇게 행동한 거야?
로한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대답했다.
“너한테 원하는 게 없어서 그래.”
“네? 어… 왜요?”
“너를 쓸 만한 전력으로 생각했다면 아침부터 제대로 굴렸을 거다. 그럼 노숙을 시작했을 때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도 부하들이 아닌 너였겠지.”
“히익…. 저 요리할 줄 모르는데요?”
“그럴 것 같았어.”
로한은 벌써 대충 이놈의 성격이 파악되어 가고 있었다. 일단 확실한 건, 이놈은 아무리 혼내고 달래도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기만 할 뿐, 절대 성격이 바뀌지 않을 놈이다.
이런 놈은 쓸 만한 전력으로 만드는 데 시간이 엄청나게 소모된다. 그 시간에 다른 쓸 만한 헌터들을 몇 명 더 발굴해 내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일 것이다.
“앞으로 그냥 이렇게 지내. 아로엘 가서도 자유롭게 다녀도 좋아. 단, 사고만 치지 말고. 법을 어기면 일반 평민처럼 똑같이 처벌할 테니까.”
“에이~ 저 착해요. 사람들한테 법 없이도 산다는 소리 듣고 자랐다니까요?”
“클리프는 법 없으면 큰일 나는 놈이라고 설명하던데?”
“네에? 아, 큰형님 너무하시네, 증말. 그런 식으로 설명하면 내 이미지가 뭐가 되냐~”
그가 투덜대던 그때였다.
땡땡땡땡땡!
“몬스터가 나타났다!”
비상 종소리와 경비병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