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심지어 어중간한 신성 마법도 아닌, 무려 7클래스 광역 회복 마법인 썬라이트(Sunlight)다.
일반인들은 이 빛을 받으면 모든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지만, 마족은 반대다. 지금 말파스처럼 피부 전체가 타들어 가는 것처럼 썩어버린다.
“데르툴답지 못하군요.”
아린이 비올라와 말파스 사이를 막아섰다.
“설마 이런 상황도 대비 안 했을 거라 생각했나요?”
“큭…!”
그녀를 노려보던 말파스는, 갑자기 몸을 홱 돌렸다.
동시에 그의 등 뒤의 공간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그가 순간적으로 생성한 아공간이었다.
전력을 다해 그곳으로 몸을 날린 말파스. 지난번처럼 공간 이동을 이용해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퍼엉!
“컥!”
입구에 들어가기 직전, 아린의 헤드 킥이 정확히 그의 머리에 명중했다.
옆 벽에 부딪쳐 쓰러진 말파스의 신형을 아린은 바로 손으로 붙잡아 들어 올렸다. 또다시 도망치려는 행동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목을 잡은 아린의 머릿속에 인공지능 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너지원 일부를 푸르가티오(Purgátĭo) 속성으로 변환합니다.]
[정화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상대방을 정화시킬 수 있습니다.]
곧바로 아린은 체내에 생성된 푸르가티오, 즉 정화의 기운을 붙잡은 손을 통해 말파스의 신체에 주입하기 시작했다.
“아악! 아아아악!”
그 어느 때보다 처절한 비명이 말파스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동시에, 말파스의 온몸에서 많은 양의 마기가 한꺼번에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풍선의 묶인 입구를 풀면 바람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점점 몸이 쪼그라들기 시작하는 말파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린은 차갑게 말했다.
“마족의 체내 마기를 소멸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이에요. 천하의 마왕도 이 푸르가티오의 기운에는 버텨내지 못했습니다. 마기가 소멸되면 당신도 소멸되죠. 데르툴한테 있어 마기는 생명의 원천이니까요.”
“그, 그만… 아아악!”
“어머니를 죽이려고 한 대가입니다. 얌전히 소멸을 받아들이세요.”
아린이 말하는 도중에도 말파스의 몸은 계속해서 쪼그라들고 있었다.
벌써 갈비뼈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 조금만 더 있으면 완전 미라 같은 모습으로 변할 게 자명했다.
계속 비명을 지르던 말파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안광을 빛냈다.
“소멸? 누구 맘대로!”
동시에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쪼그라들던 그의 몸이 갑자기 다시 불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불어난 그의 몸은 곧 터질 것처럼 팽창했다.
“!”
아린의 눈이 커졌다.
이건 분명… 자폭이다!
그녀는 재빨리 방어 기술을 펼쳤다.
[에너지원을 에너지 실드로 변환합니다.]
[이제 에너지 실드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에너지 실드를 활성화합니다.]
그녀의 두 손에서 두터운 에너지 실드가 생성되던 그 순간.
콰아앙!
굉음과 함께 특실 전체가 폭발에 휩싸였다.
근처의 모든 가구들과 벽이 산산이 조각나서 흩날렸다.
하지만 에너지 실드의 영향력 안에 들어간 가구들은 하나같이 모두 멀쩡했다. 바로 뒤에 누워 있었던 비올라도 마찬가지였다.
“아!”
에너지 실드를 활성화하던 아린의 입에서 안타까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까 전 말파스가 생성했던 아공간 틈으로 무엇인가가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것이다.
분명 그건, 말파스의 머리였다.
동시에 닫혀버린 아공간의 모습에 아린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놓쳐버렸어!’
데르툴족은 재생력이 매우 뛰어나다. 뇌에 있는 특정 핵 부위를 파괴하지 않는 한 데르툴족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즉, 말파스는 죽지 않고 도주한 것이다.
아린 입장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비올라를 보호하기 위해선 에너지원을 실드 기술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녀의 아티팩트에 새겨진 썬라이트 마법이 다시 활성화되려면 최소 한 시간 이상의 쿨타임이 필요하기도 했고.
어쩌면 말파스는 그 점을 이용해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빠, 큰일이에요!]
아린은 바로 로한한테 통신을 했다.
[왜?]
[말파스를 놓쳐 버렸어요.]
[이런….]
[죄송해요. 자폭 공격까지 할 수 있다는 걸 예상했었어야 했는데….]
자책하는 아린에게 로한이 물어왔다.
[트레이서(Tracer)는?]
[그건 발라놨어요.]
[아, 그러면 됐어.]
트레이서. 일명 추적제다.
에너지원을 변환시켜 만든 소량의 트레이서를 상대방의 몸속에 투여하면, 그것이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언제나 상대방의 위치를 스캔 기능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다.
아까 말파스에게 푸르가티오를 주입할 때 아린은 트레이서도 같이 섞어서 주입시켰다.
그 성분은 순식간에 말파스의 온몸에 퍼졌을 것이고, 당연히 머리에도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 스캔 기능을 켜기만 해도 확인이 가능하다.
[말파스는 지금 이 성 남동쪽 끝 집의 지하 5층 깊이에 있어요.]
[알았어. 빨리 마무리하고 연락할게.]
[네, 오빠.]
[어머니는 무사하시지?]
아린은 비올라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네. 잘 주무시고 계세요.]
이 난리가 났는데도 세상모르고 곤히 자고 있는 비올라의 모습.
물론,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아린이 미리 숙면제를 소량 그녀에게 투입하긴 했었다. 이렇게 효과가 좋을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그리고 오빠, 아무래도 수리비가 많이 나올 것 같아요.]
아린은 통신을 하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비올라 주변을 제외하면, 나머지 특실 안의 가구들은 뭐 하나 멀쩡한 것이 없었다. 벽도 대부분 무너지고 일부 천장은 내려앉기까지 한 모습.
[이 정도면 새로 짓는 게 나을 정도로 보여요.]
[알았어.]
대답한 로한은 거기서 통신을 끊었다.
통신을 마친 로한은 버몬드에게 물었다.
“너 돈 많지?”
“……?”
“하긴, 백성들 세금을 그렇게 뜯어먹었는데 돈이 없겠어? 남은 돈 내가 조금 가져다 쓸게.”
일방적으로 통보한 뒤 로한은 본론을 꺼냈다.
“방금 연락 왔다. 말파스가 우리 가족을 납치하려다가 실패해서 도망쳤다고. 지금 남동쪽 끝에 있는 집 지하 5층에 숨어 있다는데?”
“……!”
버몬드의 남은 한쪽 눈이 흔들렸다.
남동쪽 끝 집? 평소 주인님이 마기를 연마하던 그 비밀 장소가 있는 곳이 맞는데…. 그걸 어떻게?
설마, 정말로 계획이 실패하셨다는 건가?
“말파스의 위치까지 알았으니, 더 건질 정보는 없겠군.”
로한은 곧바로 몸속의 에너지원을 푸르가티오로 변환시켰다. 그리고 바로 목을 잡은 손을 통해 버몬드의 체내에 주입하기 시작했다.
“흐어어어…!”
버몬드의 바람 빠지는 신음과 함께, 그의 몸속에 저장되어 있던 마기가 빠른 속도로 사방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마기가 빠져나갈수록 점점 쪼그라들던 버몬드의 신체는, 이내 완전히 말라비틀어져 앙상하게 살가죽만 남아버렸다.
모든 정화를 마친 로한은 그의 신체를 던지듯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버몬드는 바닥에 쓰러진 이후에도 신음만 흘릴 뿐, 꿈틀대는 행동조차 기력이 없어 하지 못했다.
“이제 슬슬 밀리오가 올 때가 됐는데.”
밀리오와 마지막으로 통신한 지도 벌써 3분 정도 지났다. 이단 심판관을 소집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최대 5분을 넘기지 않으니, 이제 슬슬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그 전에 할 일이 있지.’
로한은 근처에 기절해 쓰러져 있던 집사 복장의 중년을 향해 다가갔다.
바로 해면제를 투약하자 그는 금방 눈을 떴다.
“으음… 허억!”
정신을 차리자마자 로한의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중년.
로한은 그를 똑바로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여기 집사인 버튼 맞지?”
“왜, 왜 그러시오?”
“너, 버몬드의 금고가 보관된 장소도 알고 있지?”
대답 없이 그저 파르르 떨기만 하는 버튼을 향해, 로한은 위압적인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야?”
* * *
“으윽…!”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인 공간 안에, 말파스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금 전 공간 이동을 통해 간신히 이 비밀 장소로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손해가 너무 막심했다.
자폭 공격을 사용하면서 머리만 남아버린 탓에, 자연스럽게 그동안 열심히 모아왔던 마기도 모조리 날아가 버렸다.
‘그래도 죽지는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 최대한 주변의 마기를 흡수하기 위해 노력했다. 빠른 신체 재생을 위해서였다.
다행히 이곳은 그 어느 곳보다 순수한 마기가 많은 장소. 그래서 신체 재생 속도도 평소보다 훨씬 빨랐다.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그의 신체가 흉부까지 재생된 것이다. 어느새 오른쪽 팔도 자라나기 시작했다.
‘최대한 빨리 회복하고 이 성을 벗어나야 한다.’
로한도 아닌 그의 여동생 아린한테 자신이 패한 이상, 버몬드 쪽은 안 봐도 결과가 뻔했다. 이미 로한에게 전멸당했겠지.
그 남매의 경지라면 언제 이 비밀 장소를 찾아내도 이상하지 않다. 공간 이동도 눈치챈 연놈들이 이곳의 마기라고 눈치채지 못할까?
그러니 최대한 빨리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는 상태까지 몸을 회복한 후 도망쳐야 한다. 일단은 살고 봐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으니까.
‘반드시 이 치욕을 갚아주겠다!’
로한과 아린의 얼굴을 떠올린 그가 분노의 불길을 가슴속에 일으키고 있던 그때였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정면의 철문이 박살이 났다.
화들짝 놀란 말파스가 상대방의 정체를 바로 확인했다.
두 명의 남녀가, 그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벌써 많이 회복했군.”
“조금만 늦게 왔으면 도망쳤겠어요.”
그 순간 말파스는 없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건 분명 로한과 아린의 목소리!
“라이트!”
뒤쪽에서 어떤 청년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곧바로 떠오른 라이트 마법 구체로 인해 방 안 전체가 환해졌다.
마법을 생성한 밀리오. 그리고 그의 뒤에서 우르르 나타나서 자신을 일제히 포위하는 이단 심판관들의 모습이 말파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벌써 여길 찾다니!’
도망친 지 10분밖에 안 됐는데 이 비밀 장소를 어떻게?
“이럴 수가…!”
그때 들려오는 밀리오의 경악한 목소리.
정말로, 머리 쪽만 남아 있는 말파스의 신체가 조금씩 재생되고 있지 않은가?
트롤도 심장 없이는 저렇게 재생이 불가능한데 말이다!
엘도르 대륙의 오랜 역사를 통틀어, 심장 없이 재생이 가능했던 종족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진짜 마족이었다니!”
“놀랄 시간이 없습니다.”
로한이 입을 열었다.
“조금만 시간을 주면 언제 아공간을 열어서 도망칠지 모릅니다. 생포하려면 아직 회복하지 못한 지금밖에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밀리오는 엄숙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 마족의 온몸에 디바인 마크를 새겨라!”
그 말에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이단 심판관들이 일제히 말파스에게 다가갔다.
이제 이들이 그의 몸에 마기를 완전히 봉인하는 디바인 마크를 새기게 되면, 더 이상 말파스는 마기를 모을 수도, 신체를 재생할 수도 없게 된다.
유일한 방법은 지금 어떻게든 반항하거나 도망치는 것뿐이지만 지금 말파스는 아공간을 다시 열 마나조차 없다.
“이… 이…! 다가오지 마라! 감히 인간 주제에…!”
거친 목소리로 발악을 해대는 말파스. 하지만 이단 심판관들의 발걸음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