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응?”
밀리오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성문 너머로 다수의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오는 모습을 본 것이다.
곧 촘촘하게 서서 성문을 막아서는 병사들. 그들 중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한 명이 일행들을 향해 다가왔다.
“로한 백작님이십니까?”
“맞다.”
“버몬드 백작님께서 로한 경의 브롬멜 성 출입을 금지하셨습니다. 죄송하지만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그 말에 로한은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같은 위치의 백작끼리 영지 출입을 제한하는 건 불법인 것으로 아는데?”
“…….”
“이유가 뭔가?”
“그건 저도 듣지 못했습니다. 단지 막아서라는 명만 받았을 뿐입니다.”
“말할 수 없으면 비켜.”
“죄송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감히 백작을 막아선 죄로 네 목부터 잘라줄까? 백작에게는 즉결처분권이라는 게 있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절 죽이시면 브롬멜 성의 모두를 상대하셔야 할 겁니다.”
그는 대화 내내 흔들림 한번 없이 단호했다. 그 모습에 로한은 이내 피식 웃었다.
“여전히 충직하군, 필립스.”
“…제 이름을 아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고개를 숙이는 필립스는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로한 입장에선 모를 수가 없었다. 과거에 버몬드 밑에서 일하면서 얼마나 이 성을 자주 왔다 갔다 했던가?
필립스는, 당시에도 버몬드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했던 브롬멜 성의 경비대장이었다.
로한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시선을 받은 밀리오가 인사했다.
“파누엘 여신의 가호가 항상 깃들기를. 저는 여신의 종인 밀리오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신관님. 하지만 아무리 밀리오 님이라 할지라도….”
“저는 교황님의 명을 받고 이곳에 왔습니다.”
밀리오가 품 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그에게 펼쳤다.
“테르디아 대신전의 공식 조사 허가서입니다. 이 성 안에 마기가 느껴진다는 보고를 받고 조사하러 왔으니, 당장 길을 여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필립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교황 쪽의 공식 조사라고?
그러면 제아무리 버몬드의 명을 받았다 해도 막아설 수가 없다.
이를 거부했다간 자신은 물론, 버몬드까지 잡혀가서 심문을 당할 것이다. 그만큼 테르디아에서 교황의 힘은 절대적이다.
“설마 대신관의 공식 조사마저 막으려는 건 아니겠지요?”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로한을 들일 수는 없었다.
“밀리오 님 혼자 들어가십시오. 로한 백작님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이번 조사의 조력자로 로한 백작님께서 공식적으로 함께하기로 하셨습니다.”
“네?”
“허가서를 읽어 보십시오.”
필립스는 밀리오가 내민 서류를 읽어보았다. 정말로, 조력자로 로한 백작이 함께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
이러면 더 이상 로한을 막아설 수 없다. 조력자는 해당 조사 기간 동안에는 대신관과 동일한 대우를 받기 때문이다.
즉, 로한을 막아서는 건 밀리오를 막아서는 것과 똑같다.
“이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가십시오.”
필립스는 결국 성문을 막고 있던 병사들을 물렸다.
“고맙습니다.”
밀리오는 인사와 함께 마차를 몰고 브롬멜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잠깐 지켜보던 필립스는 곧 다급하게 행정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직접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마부석의 밀리오가,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 막을 줄은 몰랐는데 의외군요. 버몬드가 다른 귀족의 영지 입장을 금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까지는 윌리엄 파 귀족들의 진입도 절대 막지 않던 버몬드였다. 오히려 웃으면서 직접 저택에 초대해 식사까지 함께하는 통 큰 모습을 보여줬었다.
즉, 로한은 버몬드가 막아선 최초의 인물이다.
“그만큼 찔리는 게 많은 거겠죠. 괜히 제가 대신관님께 조사서를 부탁한 게 아닙니다.”
로한은 이럴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래서 일부러 밀리오가 따라온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조사서를 부탁한 것이다.
밀리오는 아린 때문인지 버몬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흔쾌히 조사서를 작성해 주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쉽게 성내로 들어오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성에 마기의 근원이 존재한다는 건 사실입니까? 교황님의 이름을 빌린 이 조사서를 가져온 이상 최소한 확실한 증거라도 찾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로한 님이 위험해집니다.”
조사서를 작성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른 대신관도 아닌, 교황 다음으로 영향력이 센 밀리오니까. 하물며 보고자가 로한이기도 하고.
하지만 절대 권력을 가진 이 조사서에는 그만큼 큰 책임도 따른다. 만약 증거조차 못 찾는다면, 보고자인 로한이 교황에게 끌려가 추궁을 당할 것이다.
로한의 표정은 자신이 넘쳤다.
“확실합니다. 저, 키넨 성 노예 감옥도 제보한 사람입니다. 잊으신 건 아니죠?”
“알고말고요. 어찌 그걸 제가 잊겠습니까?”
“다행이네요. 아깐 브롬멜로 이동한다는 것도 까먹으셨다 해서 걱정했었는데.”
“…크흠, 흠.”
민망해져서 헛기침을 하는 밀리오에게 로한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밤에 바로 찾으러 갈 겁니다.”
여기는 버몬드 대저택 집무실.
“뭐? 들어왔다고?!”
“네. 밀리오 대신관이 공식 조사 허가서를 내미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고….”
그 말에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버몬드.
“공식 조사서?”
파누엘교의 공식 조사 허가서는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만 발급되는 서류인데?
그렇다면 설마 ‘재료’에 대해 증거를 수집했다는 뜻?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성에서도 몇 명밖에 모르는 사실인데!’
지금까지 절대 소문 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했던 버몬드였다.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사람이 있으면 증거가 있든 없든 모조리 목을 베어 버렸으니까.
하지만, 혹시 모르는 ‘만약’이라는 게 있다.
‘만약 걸리기라도 하면 모든 게 끝이다!’
그 순간은 단순히 꼬리 자르기로 끝날 게 아니다. 영지에서 마기의 재료가 다수 발견되면, 천하의 버몬드라도 포박되어 무조건 교황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을 것이 뻔하다.
그때도 교황이 자신을 도와줄까? 그 돈에 미친 늙은이라면 더 이상 뇌물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고 바로 등을 돌리지 않을까?
안 그럴 가능성도 높지만, 이런 중대한 사태일수록 최악의 최악까지 생각해서 대비해야 하는 법이다.
“지금 당장 사람을 붙여! 보호 목적으로 24시간 그놈들을 감시하고, 10분에 한 번씩 위치를 보고하라고 해. 대신, 너처럼 마기 풀풀 풍기는 놈들은 절대 얼씬도 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백작님.”
“만약 마주쳤다가 마기를 들키는 놈이 있으면, 내가 직접 달려가서 목을 베어버린다! 알았어?”
“명심하겠습니다, 백작… 히익!”
쩅그랑!
“대답 그만하고 빨리 움직여!”
버몬드가 던진 재떨이를 운 좋게 피한 엘긴은 허겁지겁 집무실을 벗어났다.
홀로 남은 버몬드는 잠시 고민하더니,
“아무래도 보고해야겠어.”
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도착한 곳은 브롬멜 성 동남쪽 끝에 있는 허름한 집이었다.
그는 혹시 지켜보는 눈이 있나 한 번 더 주변을 둘러본 뒤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 한쪽에 위치한 먼지 쌓인 책장으로 다가가 구석에 있는 책을 빼내듯 잡아당겼다.
바로 책장이 스르륵 열리면서 지하로 통하는 비밀 입구가 나왔다. 버몬드가 안으로 들어서자 책장은 다시 자동으로 닫혔다.
계단은 굉장히 길었다. 한참을 내려가는 동안 버몬드의 얼굴에 드러나는 긴장감은 더욱 진해져 갔다.
곧 계단 끝 철문에 도착한 버몬드.
“후우….”
떨리는 심정을 가라앉히고 최대한 용기를 낸 후, 아주 조심스럽게 철문을 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공간. 하지만 버몬드는, 이 중앙에 자신의 주인님이 계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주인님. 보고드릴 게 있어… 컥!”
버몬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멱살을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말파스 남작.
그가 분노로 일렁이는 눈동자로 그를 희번덕 노려보면서 외쳤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오지 말라고 했지 않느냐!”
동시에 버몬드의 몸을 압박해 오는 거대한 마기!
온몸의 내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에 그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 주인님이, 찾아와도, 된다는… 유일한 이유로… 찾아왔… 컥!”
그 말에 말파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로한?”
“네… 그놈이… 브롬멜에… 왔… 허윽… 사, 살려…!”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느낌에 버몬드는 애원했다.
이후에도 몇 초를 더 노려보던 말파스가 이내 바닥에 버몬드를 내던졌다.
쿠당탕! 소리와 함께 내동댕이쳐진 버몬드는 관성에 의해 한참 동안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쿨럭, 쿨럭! 헉, 헉, 헉….”
“자세히 말하라.”
다급히 숨을 몰아쉬던 버몬드는 그 말에 바로 정자세로 고쳐 앉았다.
“그, 밀리오와 함께 마기에 대해 조사할 것이 있다고 찾아왔습니다.”
“밀리오?”
“네. 로한과 함께 공식 조사를 한다고 합니다.”
설명을 들은 말파스의 눈빛이 점점 가라앉아 갔다.
* * *
그날 밤.
최고급 여관 특실 안에 로한을 포함한 네 명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그럼 주무세요. 저희는 다녀올게요.”
“너무 늦은 시간 아니니?”
“사람 없을 때 조사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어요. 금방 다녀올 테니 걱정 마세요.”
“그래. 몸 성히 서둘러 다녀오거라.”
여전히 걱정이 한가득 들어 있는 비올라. 로한의 시선이 그녀의 목으로 향했다.
“다시 봐도 목걸이 정말 잘 어울려요. 어머니와 가장 잘 맞는 디자인으로 잘 골랐네요.”
“그러니?”
그제야 표정이 풀어지며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는 그녀. 저 목걸이는, 이틀 전 벨타디아 마탑주 올리버한테 받은 그 아티팩트였다.
그 누가 저 아름다운 디자인의 목걸이를 아티팩트라 생각하겠는가? 그저 값비싼 귀족 전용 목걸이라고밖에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아린이는 어머니 잘 지켜드리고.”
“네, 오빠.”
아린은 밀리오에게도 인사했다.
“몸조심하세요, 대신관님.”
“아,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한 그는 급히 몸을 돌렸다. 순간 절로 피어 나오는 미소를 감추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을, 옆에 서 있던 로한은 눈치챘다.
속으로 혀를 차면서 로한 역시 마무리 인사를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바로 특실을 나온 로한과 밀리오. 문을 열자마자 양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네 명의 건장한 남성들이 바로 둘한테 붙었다.
버몬드가 보낸 감시병들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둘을 보호하기 위해 붙인 호위병이라고 말했지만, 그걸 순진하게 믿을 로한과 밀리오가 아니었다.
“이제부터 조사를 하러 이동할 겁니다. 밤새 작업할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습니다.”
단호하게 대답하는 호위병. 로한은 더 말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관 정문을 향해 이동하는 여섯 명. 그중 뒤편에 따라오는 호위병 한 명이 품에서 휴대용 마나 통신기를 꺼내 들었다.
“조사를 하기 위해 이동 중. 조사를 하기 위해 이동 중.”
아주 낮고 작은 목소리였지만, 분명 버몬드가 안에 있는 마법사의 귀에는 제대로 들렸을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