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아로엘.
테르디아의 북동쪽 가장 끝자락에 위치한 영지. 대륙을 동서로 나누는 거대한 산맥, 아틸러스가 바로 동쪽에 붙어 있다.
이곳은 귀족들 사이에서는 ‘버려진 땅’이라고 불린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1. 땅이 굉장히 척박하다.
영지의 대부분이 험난한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어, 농사를 지을 만한 평지가 30%도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 평지마저도 물이 부족한 황무지라는 거다.
아틸러스 산맥과 붙어 있는 영지면 모두 산맥에서 내려오는 강물 덕분에 물이 부족하지 않은데, 유일하게 아로엘만 물줄기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영지민 대다수가 수렵으로 먹고살고 있다.
2. 몬스터들이 너무 많다.
이건 ‘몬스터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아틸러스 산맥과 붙어 있는 영지들의 공통적인 문제점이다. 인간들을 잡아먹기 위해 매일같이 산맥에서 내려오는 몬스터들 때문에 매년 수많은 실종자가 발생하는데, 아로엘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세 번째 이유와 비교하면 위 두 가지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다.
‘큭큭큭. 이제 사갈 새끼들의 지독함에 밤잠을 못 이룰 거다, 시건방진 꼬마 녀석아.’
북동쪽 끝에 붙어 있는 아로엘은 북쪽에는 사갈 공국과 국경선을, 동쪽에는 오스크만 제국과 국경선을 맞대고 있다.
사실 오스크만 제국은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천혜의 방벽인 아틸러스 산맥이 철통같이 방어해 주고 있으니까.
문제는 사갈이다.
3백 년이 넘게 서로 견원지간처럼 싸워온 숙적, 사갈 공국은 요즘도 늘 국경선 근처에서 간간이 무력시위를 하면서 호시탐탐 테르디아의 빈틈을 찾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윌리엄의 영지인 칼슈타인 성이 북쪽 국경선에 버티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사갈은 진즉에 전군을 몰고 국경선을 넘어왔을 것이다.
문제는 칼슈타인 성을 제외한 나머지 영토가 늘 고통받는다는 점이다.
윌리엄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영지의 백성들은 늘 사갈 병사들의 비밀리 습격 및 침략, 약탈을 두려워하면서 살고 있는 현실이다.
그중 가장 피해를 크게 보는 영지로 아로엘이 뽑힌다. 실제로, 몬스터들에게 입은 피해보다 그동안 사갈 병사들의 침략으로 입은 피해가 더 많은 곳이다.
‘이 모든 게 다 주인님의 혜안 덕분이다. 로한을 상대로 이보다 더 좋은 결과는 없을 거야.’
이 척박하고 위험한 아로엘 영지에 로한을 보내기 위해 어제 얼마나 오랜 설전을 벌였는가?
당시 버몬드는 이렇게 주장했었다.
“저는 로한을 테르디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보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S급 헌터의 실력이라면, 그동안 모두가 기피했던 지역으로 보내도 능히 그곳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되옵니다.”
“그곳이 어디요?”
“아로엘입니다.”
그 순간, 당연히 윌리엄 측에서는 거세게 반발했다.
S급 헌터에게 그런 험난한 영지를 보상으로 주느냐, 만약 큰 부상을 입거나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러느냐.
등등의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핵심적인 반대 이유는 이것이었다.
“아로엘 영지로 갔다가 실망해서 행여 다른 나라로 넘어가면 어쩌려고!”
하지만 버몬드의 대답은 청산유수였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대신관 한 명을 감시 역할로 로한에게 붙여 보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마침 아로엘의 대신관이 공석이라 명분도 충분합니다. 제 생각에는 밀리오 대신관이 제일 적격이라 생각합니다. 대신관들 중 가장 테르디아에 충성을 다하는 인물이 아닙니까?”
“음….”
“거기에 근처에 영지를 둔 윌리엄 경께서 친히 몇 번 방문해 주신다면, 로한 입장에서도 딱히 넘어갈 생각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안 그렇습니까?”
버몬드는 윌리엄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반박하기에는, 버몬드가 지금 한 말은 모두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입장에서도 버몬드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로한이라는 초대형 전력을 사갈에게 뺏기게 내버려 둘 수 없다. 실제로 버몬드의 주장이 없었어도 로한을 도와줄 생각을 하고 있었던 그였다.
그리고 천하의 윌리엄이 호의적으로 대하는데 싫어할 인물이 테르디아에 있을까? 심지어 버몬드와 적대적 관계로 보이는 로한이라면 더더욱 친해지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로한을 아로엘로 보내시면 그의 행정 능력도 빠른 속도로 발전할 것입니다. 밑바닥에서 시작하면 힘들지만, 동시에 성장 속도도 빨라집니다. 사자는 자신의 새끼를 벼랑에 던져서 키운다 하지 않습니까? 또한 현재 빈 영지 중에서 아로엘보다 더 큰 땅덩어리는 테르디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록 지금은 척박하지만, 개발만 성공한다면 공작령에 버금가는 영지를 소유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들을 들어 저는 로한을 아로엘로 보내야 된다고 생각하옵니다, 폐하.”
버몬드의 이러한 주장을 필두로, 휘하 버몬드 파들도 모두 이 의견에 찬성했다. 거기에 평소 밀리오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던 교황 측 대신관들까지 모두 버몬드의 주장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한참을 고민하던 필리프는 결국 버몬드의 손을 들어줬던 것이다.
‘이로써 골치 아픈 놈들을 모조리 멀리 내쫓았다.’
로한과 밀리오는 이제 아로엘에서 한동안 고생할 게 뻔하다. 거기에 윌리엄 역시 사갈 공국을 견제하기 위해 북쪽의 영지로 돌아가게 되면, 이제 버몬드를 방해할 만한 인물들은 거의 다 멀어지는 셈이다.
그나마 위험 인물은 라가스 정도.
하지만 그도 평소에 헌터 관리에 바쁜 사람이라 버몬드를 대놓고 견제하지는 못한다.
약해 빠진 고든 늙은이 따위는 애초에 고려 대상도 아니고.
‘그동안 다시 세력을 키우는 데 집중할 수 있겠어. 내 경지도 다시 끌어올리고 말이지.’
본인의 실력 및 부하들의 실력을 끌어올리는 것을 포함, 주인님 역시 마기를 더 끌어모을 시간이 필요하다 하셨다.
최소 몇 개월의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걱정 없다. 로한이 아로엘을 안정화시키는 데는 적어도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괜히 아로엘 영지가 ‘버려진 땅’으로 불리겠는가?
* * *
하지만.
“흐흑… 훌쩍.”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있는 비올라는 지금, 버려진 땅에 살게 되었다는 사실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그저 자신의 아들이 백작이 되었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기쁠 뿐.
“정말, 정말 거짓말 아니지? 나 꿈꾸는 거 아니지?”
“몇 번을 말씀드려요, 어머니.”
“훌쩍… 그게, 너무 믿기지가 않아서….”
평생 허름한 산골 마을에서 살아가던 비올라. 당연히 살아오면서 백작은 구경조차 못 했었다.
종종 세금과 관련된 일로 준남작 출신 관리가 마을에 찾아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런 사람조차 완전히 자신들과 다른 존재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런데 백작이라니. 그 준남작을 몇 백, 혹은 몇 천 명을 거느리며 사는 백작이라니!
말 그대로 인생 역전이었다. 아들 하나 잘 둔 덕에 산골에 살던 시골 처녀가 한순간에 백작의 어머니로 급격히 신분이 상승해 버렸다.
마음 여린 비올라 입장에서는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이제 그만 우세요. 곧 공작님 저택에 도착하는데, 거기서도 우시면 오해하실 거예요.”
“알았어… 훌쩍.”
비올라가 최대한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 동안, 그들이 탄 화려한 마차는 점점 윌리엄 공작의 저택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늘 귀족 작위 수여식이 끝난 직후, 윌리엄이 로한과 가족들을 모두 저녁 만찬에 초대한 것이었다. 로한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도착했어요.”
아린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근위병들이 활짝 연 대저택의 정문 안쪽으로 천천히 들어가는 로한 일가의 마차. 공작치고는 꽤나 수수한 정원을 지나친 뒤에야 마차는 멈춰 섰다.
동시에 마차 문이 열렸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하인이 연 것이었다. 비올라는 굳이 하인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면서 로한 등과 함께 마차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어머!”
밖으로 나온 비올라는 더 놀랐다.
테르디아에서 날고 긴다 하는 수많은 귀족들이, 무려 저택 밖으로 나와서 로한 일가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백작 이하의 귀족들은 모두 그녀에게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어찌 감히 백작이자, S급 헌터의 친어머니 앞에서 낮은 지위의 귀족들이 고개를 빳빳이 들 수 있겠는가?
정작 당사자인 비올라는 난생처음 받아보는 상급자 대접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그저 로한의 등에 붙어 뒤를 졸졸 따라갈 뿐이었다.
반면 로한의 행동은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수많은 귀족들을 모두 제치고 바로 윌리엄을 향해 직진해서 걸어갔다.
그는 윌리엄에게 허리를 숙였다.
“이렇게 친히 나와서 맞이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S급 헌터를 마중하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
윌리엄은 대답하며 손을 내밀었고, 로한은 당당한 자세로 맞잡았다.
동시에 마주치는 두 눈빛.
강렬했지만, 적의는 없었다. 서로 호감이 담겨 있는 두 눈빛의 만남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긴장감이 아닌 든든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내가 부를 수 있는 모든 귀족들을 불렀네. 아, 고든 공작만 빼고. 몸살 기운이 있어서 못 오신다고 하더군.”
고든만 빠졌다라….
갑자기, 오늘 귀족 작위 수여식에서 유난히 혼자 표정이 안 좋던 고든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로한이었다.
‘아직도 파티 때 일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건가?’
과거의 기억에도 워낙 꼬장꼬장한 성격의 인물이라 그럴 가능성이 꽤 높다.
“어서 들어가지.”
“네, 공작님.”
로한에게 말한 윌리엄은 이어 모두에게 말했다. 무려, 초월자의 마나가 실린 목소리로 말이다.
“다들 들어오라.”
그 말에 일행들은 모두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아린에게서 아쉬운 표정으로 시선을 떼어낸 후 윌리엄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귀족들.
그때 로한의 머릿속에 아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대륙 남자들은 지구보다 훨씬 노골적이네요.]
그 말에 로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젊은 남자도 아니고, 손자까지 둔 늙은 노인네들이 ‘내 첩으로 두면 딱이겠군’이라는 음탕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해해라. 어쩔 수 없잖아.]
[이해는 하고 있죠.]
들려오는 아린의 통신 목소리는 별로 밝지 않아 보였다.
만찬 자리는 화기애애했다.
이전에 록버튼 가문에 초대받았을 때처럼 무슨 목적이 있는 자리가 아니라, 단순히 친목을 다지기 위한 자리이다 보니 훨씬 편안한 분위기였다. 그래서 비올라의 표정도 그때보다 긴장이 풀려서 밝은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모두 로한에게 한마디씩 말을 걸려던 분위기였지만, 이내 분위기는 아린에게로 쏠렸다.
나중에 가서는 누가 주인공인지 모를 만큼, 죄다 아린에게 말을 걸고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덕분에 로한은 윌리엄과 단둘이서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언제 영지로 출발하나?”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이틀 뒤 출발하려 합니다.”
“빠르군.”
“‘버려진 땅’을 발전시키려면 하루라도 빨리 가서 관리해야죠.”
고개를 끄덕인 윌리엄이 제안했다.
“나는 3일 뒤에 출발하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루만 더 쉬고 같이 가지.”
아로엘 영지는 칼슈타인 성 바로 오른쪽에 붙어 있다. 윌리엄이 칼슈타인 성에 도착할 때까지 가는 길이 똑같다는 소리다.
이러면 무조건 윌리엄과 같이 가는 게 맞다. 안전상으로 따져도 그렇고, 윌리엄과 더 친분을 다질 수 있다는 것도 그렇고.
하지만 로한은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영지로 가기 전에 먼저 들를 곳이 따로 있습니다.”
“어딘가?”
“브롬멜 성입니다.”
순간 윌리엄의 눈빛이 변했다.
브롬멜 성은 그의 숙적, 버몬드 백작의 영지 아닌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