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버몬드 팀은 이후 10분 정도 더 앞으로 전진했다.
걸음을 멈춘 버몬드가 전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 대략 1km 정도 앞에 니베리우스가 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거의 폐허 수준으로 보이는 주변 환경을 보며 스콧이 대답했다. 메테오를 맞은 듯 여기저기 움푹 파인 땅과 모조리 꺾이고 부서져 있는 나무, 바위들의 모습.
이런 광경은 주로 초대형 포탈 몬스터들 중에서도 보스가 있는 곳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휴식하도록 하겠습니다.”
스콧의 말에 버몬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걸 긍정의 뜻으로 이해한 스콧은 바로 일행들에게 휴식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일행들 대부분이 편하게 제자리에 주저앉아 마나 운공법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중 일부는 재빨리 품에서 초록색 마법석을 꺼내서 주변에 설치했다.
‘경계석’으로, 주변에 적이 있으면 바로 빛을 발해 신호를 보내는 물품이었다. 휴식 때는 자연스럽게 전원 긴장이 풀리면서 경계가 느슨해지므로, 이 경계석을 세워서 대신 주변을 감시하는 것이다.
버몬드도 오랜만에 검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돌렸다. 초월자인 그는 다른 헌터들과는 달리 아직 멀쩡한 상태지만, 상대인 니베리우스를 잡으려면 마나가 체내에 가득 찬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내가 이겼군.’
버몬드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윌리엄 쪽의 중간 난입 등의 변수만 없다면, 이번에도 먼저 니베리우스를 처치하는 쪽은 버몬드가 될 확률이 아주 높다.
‘암살만 조심하면 되겠군. 분명 니베리우스와 싸울 때 뒤를 칠 가능성이 높을 테니….’
사실 이게 걱정이긴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윌리엄 정도의 강자가 대놓고 암살을 마음먹으면, 니베리우스와의 전투 도중에 정말 막심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버몬드에게는 최후의 보루가 하나 있다.
‘만약 정말 윌리엄이 붙었다면, 주인님이 알아서 해결해 주실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
버몬드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전방 멀리서 느껴지던 니베리우스의 기운이, 급격하게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근처까지 도달할 만큼 엄청나게 빠른 속도!
“기습이다! 모두 전투 준비!”
버몬드의 다급한 외침에 일행들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무기를 뽑아 들었다.
하지만 얼굴에 담긴 의아한 표정은 숨길 수가 없었다.
전방에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어디 쪽입니까?”
스콧이 모두를 대신해 물어보았고, 버몬드가 다급히 외쳤다.
“땅속!”
그와 동시에, 갑자기 땅이 드드드드… 하고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스콧 등의 헌터들은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땅 바로 밑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기운!
“바로 발밑이다!”
“모두 흩어져!”
일행들은 본능적으로 서 있는 쪽 바깥으로 일제히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일부 말단 헌터들은 당황한 나머지 바로 반응을 하지 못했다.
그 대가는 죽음이었다.
콰드득!
이 소리는 땅속에서 솟아난 거대한 검은 몬스터의 머리가, 도망치지 못한 헌터들을 그대로 입 속에 넣어 으스러뜨리는 소리였다.
이후 곧 거대한 그 몸뚱어리를 지상에 드러내기 시작하는 몬스터.
‘헙…!’
스콧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눈앞의 몬스터는 뱀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본 그 어떤 포탈 몬스터보다 큰 몸집을 가진, 거대한 검은 뱀 몬스터.
스콧은 저 몬스터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브리트라!”
딱 한 번, 실제로 저 브리트라를 상대한 적이 있었다.
테르디아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렸었던 S급 포탈.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 마리의 몬스터가 저 브리트라였다.
포탈 근처에 있던 두 개의 성이 완전히 박살 났고, 백 명 이상의 각성자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도합 5천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단 한 마리의 브리트라 때문에!
‘저 괴물이 대체 왜 여기에…!’
지금까지 브리트라 같은 S급 몬스터가 밑 등급의 포탈 안에 등장한 일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캬아아아!
곧 브리트라가 괴성을 내지르며 입을 쩍 벌렸다.
버몬드가 황급히 외쳤다.
“브레스다! 피해!”
다시 한번 일행들은 전력으로 서 있던 곳에서 바깥으로 내달렸다. 그와 동시에, 브리트라의 입에서 거대한 녹색 액체가 일직선으로 뿜어져 나왔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일부 헌터들이 그 브레스에 적중당했고,
“아악!”
“내 몸이… 아아아…!”
그들은 비명과 함께 빠른 속도로 온몸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모두의 몸이 뼈만 남을 때까지 걸린 시간은 3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강력한 독액 덩어리로 이루어진 브리트라 브레스의 위력이었다.
일부 헌터들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
“피해라!”
그들을 향해 버몬드가 또 한 번 외쳤다.
브리트라가 꼬리를 이용해 그 거대한 몸을 들어 올리더니, 일행들이 있는 쪽으로 바디 슬램을 하듯 수직 낙하했다.
곧 콰앙! 소리와 함께 공격당한 땅 부근이 움푹 파였다. 다행히 이번에는 모두 제때 피했기 때문에, 사망자는 없었다.
하지만,
쿠르르릉!
커다란 흔들림과 함께 브리트라의 머리 쪽으로 땅이 수직으로 쩌저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으, 으아악!”
“아아악!”
갈라진 땅속으로 몇 명의 헌터들이 비명과 함께 추락했다. 이후 갈라졌던 땅이 쿵! 소리와 함께 다시 붙었다. 마치 땅이 살아 움직여서 헌터들을 잡아먹은 것처럼.
땅에 잡아먹힌 저 헌터들은 이제 두 번 다시 햇빛을 볼 수 없으리라.
“이런 미친…!”
버몬드의 입에서 절로 욕지거리가 나왔다.
브리트라. 저 뱀 몬스터는 다른 이름으로 ‘대지의 마룡’이라 불린다. 땅을 그 누구보다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존재다.
몇 년 전 S급 포탈이 나타났을 때, 괜히 두 개의 성을 순식간에 지도상에서 삭제시킨 게 아니다. 방금 전 봤던 저 지진 공격 때문에 성 전체가 흔적도 없이 땅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백작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콧이 버몬드에게 다급히 물어왔다.
과연 저 괴물 몬스터를 상대로도 목숨을 건 전투를 펼칠 것인가?
버몬드는 고민도 없이 외쳤다.
“모두 왔던 길로 후퇴해라!”
이 팀은 니베리우스를 잡기 위해 만들어진 팀이다. 전력이 완전히 보존된 상태로 싸워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온 힘을 다해 전투를 펼쳐야 간신히 니베리우스를 잡을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브리트라를 상대로는 아니다. 저 괴물은, A+급 포탈의 보스인 니베리우스를 몇 배는 상회하는 위력을 가진 괴물 중의 괴물이다. 괜히 ‘스페셜’의 이니셜인 ‘S’ 글자가 등급으로 붙은 게 아니다.
괜히 무모하게 이 전력으로 싸웠다간 정말 전멸을 당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버몬드의 냉정한 판단이었다.
“모두 도망쳐라!”
스콧이 외치면서 버몬드의 뒤를 따라 전력으로 남쪽으로 달려 나갔다.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로 걸음아 날 살려라 내달렸다.
그들이 달려오는 방향 쪽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한 남자.
로한.
‘판단은 좋군.’
브리트라를 상대로 싸우는 멍청한 판단을 안 내린 건 충분히 칭찬할 만하다. 역시, 초월자라는 자리를 도박으로 딴 건 아닌가 보다.
‘완벽하게 내가 원하던 대로 이뤄졌다.’
한 시간 앞서 먼저 이 포탈 안으로 들어온 로한은, 일찍이 저 브리트라의 존재를 파악했었다. 그의 몸속에 내재된 스캔 기능은 단번에 브리트라의 위치를 정확히 짚어주었다.
그때부터 로한은 생각했다.
버몬드 파를 저 브리트라랑 만나게 한다면? 그러면 좀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한 시간 동안 그는 여러 가지 계책을 궁리했다. 하지만 굳이 그가 고생할 필요도 없이, 버몬드는 알아서 브리트라 쪽으로 움직여 주었다.
‘브라트라가 이 포탈 안에 있는 게 좀 놀랍긴 하지만.’
이전에 듀란 파티와 D+급 던전에 들어갔을 때 겪었었다. 다른 던전 지역에 사는 몬스터들이 타 던전 지역으로 넘어오는 현상.
일명 ‘아데가 현상’ 말이다.
문제는 15년 전 과거에는 이 포탈 안에서 브리트라가 나타났다는 얘기를 일절 들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연한 것이, 지금은 아데가 현상이 일어날 시기가 아니다.
2~3년 뒤부터 일어나야 할 아데가가 왜 지금 일어났을까? 그것도 벌써 두 번이나.
‘설마 나 때문에 미래가 바뀐 건가?’
로한 입장에서는 이렇게밖에 판단할 수 없었다. 그가 귀환 이전과는 다르게 행동하면서 전멸할 뻔했던 윌리엄 파 귀족들이 살아 있고, 멀쩡히 살아 있어야 할 버몬드 쪽 귀족들은 로한의 손에 하나둘 죽어가고 있으니까.
그런데 고작 이 정도 미래가 바뀐 것으로 아데가 현상이 일어날 수 있나?
의문이 들었지만, 어차피 정답은 알 수 없는 상황. 그래서 로한은 바로 상념을 접었다.
‘이제 다시 움직여볼까.’
로한의 신형이 눈부신 속도로 도망치는 버몬드 쪽 헌터들로 달려갔다.
이제 진짜 ‘사냥’을 할 시간이다.
잠시 후.
버몬드 파는 진정한 지옥을 맛보고 있었다.
“아아악!”
“안 돼…!”
뒤에서 쫓아오는 브라트라의 브레스 혹은 지진 공격에 꾸준하게 한 명 이상의 헌터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서걱.
도망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로한이 틈만 보이면 신속하게 헌터 한 명의 목을 베어낸 후 빠지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한의 암살은 곧 들통이 났다. 스콧이 어느 순간 몇 명의 피해자가 브라트라한테 죽은 게 아니라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암살자가 또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걱.
스콧이 버몬드한테 외침과 동시에 또 한 명의 남작의 목이 잘려 나갔다. 마치 버몬드 일당에게 보란 듯이 대놓고 말이다.
“이익!”
버몬드는 이를 악물었다.
분명 암살자가 다가오는 게 느껴져야 하는데, 그래서 바로 반격을 해야 되는데, 아무리 기감을 최대한으로 올려도 상대방의 위치가 느껴지지 않았다.
‘윌리엄, 이 새끼가 진짜…!’
처음에는 분노가 차올라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공포감이 분노를 완전히 뒤덮은 상태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암살자는, 확실히 자신보다 한 수 이상 강하다. 자칫 잘못했다간 버몬드 자신도 암살당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가다간 괴멸합니다, 백작님!”
“나도 알아!”
스콧에게 버럭 외친 버몬드는, 결국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주인님!’
간절하게 속으로 외치자, 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지금 감히 먼저 나한테 말을 거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가…!’
대답하는 버몬드의 등 뒤에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주인님께서 자신이 먼저 말을 거는 행동을 싫어하신다는 건 알고 있지만, 지금 상황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뭔가?]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윌리엄 때문에 저희 팀 전체가 괴멸 직전입니다!’
[뭐라?!]
주인님의 목소리 톤이 급격히 올라갔다.
심기를 거슬렀다는 것을 깨달은 버몬드. 하지만 이 상황에서 비빌 수 있는 언덕은 그의 주인님밖에 없었다.
‘감히 부탁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제발, 한 번만 도와주신다면…!’
[무슨 헛소리냐!]
하지만 주인님은 다른 이유로 화를 내고 있었다.
[윌리엄은 지금 내 눈 앞에서 싸우고 있다!]
‘…네?’
버몬드는 자신도 모르게 되묻는 불경을 저질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