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아마 지금 여기 있는 헌터 귀족들은 저 마기를 못 느낄 것이다. 아린과 로한도 아주 미세하게 느낄 정도니 말이다.
‘예상대로군’
버몬드 쪽에서 보낸 캄튼 등의 암살 팀이 마기를 사용하는 걸 겪었던 로한이다. 당연히 수장인 버몬드도 마기를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생각보다, 느껴지는 마기가 매우 정제된 상태라는 것이 문제지만.
[좀 더 제대로 확인을 해봐야겠어.]
[근데 오빠, 저렇게 대놓고 하극상을 해도 돼요?]
아린이 이번에는 다른 질문을 했다.
[오빠 말대로 이 세계의 귀족 사회가 지구의 중세 시대 느낌이라면, 버몬드도 중죄를 면치 못하지 않을까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어.]
로한이 대답했다.
[하지만 포탈이 등장하고 나서부터 귀족 사회도 많이 바뀌었지.]
던전들이 생겨난 이후 대륙의 많은 것이 바뀌었다.
포탈 몬스터들로부터 주민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높은 등급의 헌터 실력자가 반드시 필요했고, 주민들은 자연스레 그런 실력자들을 자신들의 영주로 삼기를 원했다.
왕실은 그런 민심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포탈 몬스터들 때문에 영지 하나가 쑥대밭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까.
나라를 위해, 더 나아가서는 왕실의 보전을 위해 그들도 실력자들에게 높은 지위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현재 테르디아의 70%가 넘는 귀족들이 헌터 출신으로 채워진 상태다. 그리고 강한 실력을 가진 귀족일수록 왕실에서 훨씬 더 좋은 대접을 받는다. 직위가 높고 낮고를 떠나서 말이다.
괜히 버몬드가 백작 신분임에도 공작들하고 맞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 왕국에서 유일하게 윌리엄과 비견할 수 있는 실력자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공작인 고든이라 할지라도, 지금 버몬드한테는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어. 고든은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아 직위를 물려받은 전통적인 기존 귀족이거든.]
[와…. 그런 식이면, 곧 헌터가 왕이 될 수도 있겠네요?]
[실제로 그런 국가도 있어.]
이미 저 남쪽의 용병 국가, 로터스는 최근에 왕이 S급 헌터로 교체된 상태다. 이처럼 실력자에게 귀족이라는 명예마저 넘어가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현시대의 흐름이었다.
그때였다.
또다시 입구 쪽에서 관리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윌리엄 공작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 순간.
고든 일행을 뒤덮었던 강력한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버몬드가 뿜어내던 기운을 바로 걷어낸 것이다.
이후 굳은 얼굴로 정문 쪽을 돌아보는 버몬드.
강인한 인상의 중년 남성, 윌리엄이 성큼성큼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지나가는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모두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윌리엄이 걸어가는 길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알아서 양쪽으로 물러섰다.
딱 봐도, 아까 전 버몬드가 지나갈 때보다 더더욱 조심스럽고 공손한 태도들이었다.
심지어,
“공작님을 뵙습니다.”
“공작님을 뵙습니다….”
버몬드와 스콧을 제외한 다른 버몬드 파의 귀족들마저 윌리엄에게 공손히 예를 갖추는 모습이었다. 아까 고든한테 입도 벙끗 안 하던 이들과 동일인들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였던 로한은 다시 고개를 들어 윌리엄을 바라보았다.
‘정말 오랜만이군.’
테르디아의 탄생 때부터 역사를 함께한 왕국 내 최고의 가문, 칼슈타인의 현 가주.
테르디아 최고의 실력자이자, 대륙 전체에서도 한 손 안에 꼽히는 엘도르를 대표하는 최강의 검사 중 한 명.
청렴하고 올곧은 성격으로, 왕실과 귀족, 평민들 모두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
실력, 출신, 성품. 무엇 하나 흠 잡을 데 없기에, 모두가 절로 우러나오는 경외심으로 고개를 숙이게끔 만드는 존재.
이게 ‘테르디아의 검’, 윌리엄이었다.
‘……?’
로한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 윌리엄이, 걸음을 멈추고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쳐다보는 것 외에는 아무 행동도 없었지만, 로한은 그의 두 눈빛을 읽는 데 성공했다.
‘나를 관찰하고 있다.’
그의 깊은 두 눈빛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기운. 어제, 헌터 길드장 라가스가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내력을 파악하려고 했던 그 눈빛과 똑같았다.
그렇게 몇 초 동안 쳐다보던 윌리엄은 다시 고개를 원래대로 돌렸다. 버몬드가 서 있는 쪽으로 말이다.
“이게 무슨 짓인가?”
그의 입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나왔다. 마나가 실려 있지 않음에도, 듣는 사람이 절로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카리스마 가득한 목소리.
하지만 앞에 있는 버몬드는 그 정도 위압감에 흔들릴 존재가 아니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오늘 같은 중요한 자리에서 왜 마음대로 기운을 내뿜는 것인가?”
버몬드는 태연하게 되받아쳤다.
“증거 있습니까?”
그 뻔뻔함에 윌리엄은 버몬드의 두 눈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을, 태연한 표정으로 자연스레 되받아치는 버몬드.
둘의 눈싸움은 5초 정도 지속되었다. 지켜보던 이들은 극도로 긴장해서 마치 1분이 넘는 시간이 흐른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말이다.
먼저 물러선 쪽은 윌리엄이었다.
“…곧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실 테니, 모두 품위를 지키시오.”
그는 당장의 자존심보다, 500주년 파티를 먼저 생각한 것이다.
몸을 돌린 그는 고든 일행 쪽으로 다가갔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버몬드도 이내 몸을 돌려 자신의 파벌이 서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것으로 두 파 간의 기세 싸움은 일단락이 되었다.
“괜찮소, 고든?”
“쿨럭, 쿨럭! 나, 나는 괜찮소….”
윌리엄의 물음에 전혀 안 괜찮은 모습으로 대답하는 고든.
“폐하께서 오시기 전까지 잠깐 구석에서 안정을 취하고 계시오.”
“쿨럭… 저놈들은,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둘 거요?”
“이 파티의 중요성을 먼저 생각하시오, 고든. 더 이상의 소란은 아니 되오.”
“…….”
윌리엄의 단호한 어투에 고든은 더 입을 열지 못했다.
그가 부축을 받으며 뒤쪽의 의자로 향하는 동안, 윌리엄은 몸을 돌려 로한에게로 다가갔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윌리엄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로한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작님.”
공손히 허리를 숙이는 로한.
“자네가 그 로한이었군. 만나서 반갑네.”
윌리엄은 인사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변 귀족들의 눈이 모두 커졌다.
‘윌리엄 경이 손을?!’
‘처음 보는 평민한테 악수를 청한다고?’
‘최근 들어 저런 적이 없으셨는데…?’
고든 공작 정도의 아주 높은 신분이 아니면, 윌리엄이 먼저 악수를 청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딱 두 가지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첫 번째. 그가 상대방의 실력을 인정했을 경우.
지금 여기선 버몬드가 백작 작위를 받기 전에 유일하게 윌리엄의 악수를 받아봤었다.
두 번째 경우는 바로….
‘상대방의 내력을 시험할 때지.’
속으로 생각한 로한은, 바로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
동시에 들려오는 인공지능 도우미의 목소리.
[능력치 스캔 기능을 활성화합니다.]
[접촉한 상대방의 능력치 측정을 시작하겠습니다.]
검사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1초도 지나지 않아서, 능력치 스캔 결과가 각막 스크린 앞에 좌르륵 떠올랐다.
- 상대방 능력치
힘 : S+
체력 : SS-
지구력 : S+
마나량 : SS+
마나 정제도 : SS-
- 총 평가 : 상대방은 현재 초월자 마스터 단계이며, 불멸자 경지 진입을 앞두고 있습니다.
‘……!’
로한은 속으로 흠칫 놀랐다.
불멸자 경지를 앞두고 있다고?
‘이 정도로 강했었다고?’
과거에는 윌리엄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만날 일도 없었고, 측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세간에 떠도는 소문만 듣고 초월자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정도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불멸자 진입 직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불멸자란 말 그대로 본인이 원하면 평생 죽지 않을 수 있는 경지다. 즉 본인의 생명조차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말 그대로 무의 극에 달한 상태를 뜻한다.
‘내 생각 이상으로 괴물이었군.’
로한은 경외감마저 들었다. 만약 그가 지구에서 최고가 되어서 돌아오지 않았다면, 평생 쳐다도 못 볼 경지에 윌리엄은 이미 올라서 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비록 기계의 몸이지만, 로한은 지금 윌리엄의 경지가 전혀 부럽지 않을 수준으로 강하다.
눈앞의 윌리엄이 속으로 크게 놀랄 정도로 말이다.
‘이게 무슨…?’
그 역시, 현재 로한의 내력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런데 느껴지는 기운이 너무 이상했다.
보통 대륙에서 마나를 저장하는 방법은 두 가지로 나뉜다. 심장 주위, 혹은 단전 주변이다.
마법 계열 헌터 및 신관들은 심장 주위에, 무인들은 단전 주위에 마나를 응축시키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지금 로한은 달랐다. 아주 강하게 응축된 마나가, 특정 부위가 아닌 신체 전체에서 똑같은 강도로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몸 전체가 마나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처음 느껴보는 재질의 마나로군.’
솔직히 너무 이질적이라 마나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기 같은 탁한 기운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정순해서, 일반 마나보다 훨씬 더 강력한 위력을 지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악수를 마쳤을 때, 윌리엄은 이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종족이오?”
그의 경험상, 이건 인간의 몸으로 가질 수 있는 내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실례했군.”
바로 사과한 윌리엄은, 이번엔 로한의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린이 있었다.
시선을 받은 아린은 치마를 손가락으로 살짝 잡으며 공손히 인사했다.
“동생인 아린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지만 윌리엄의 대답은 없었다.
오히려 인사가 끝난 다음에도, 몇 초 동안 말없이 뚫어져라 바라보는 모습.
지켜보던 로한이 통신했다.
[너의 내력도 대충 느낀 것 같다.]
[최대한 숨긴다고 숨겼는데, 들켰을까요?]
[들켰겠지.]
지금 불멸자 경지를 앞둔 윌리엄이라면, 아린의 몸속 에너지원인 레기스트륨을 못 알아채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곧 윌리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로한을 바라보았다.
“조금 뒤에 다시 보지.”
한마디를 남긴 후, 몸을 돌려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이 있는 쪽으로 돌아가는 윌리엄.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말이 남긴 여파는 엄청났다.
특히 지켜보던 귀족들한테 말이다.
‘다시 보자고 했다고?’
‘윌리엄한테 인정받았다는 소리잖아!’
‘부럽다! 한 방에 인생 역전했네.’
로한이 지금, 윌리엄의 눈에 들었다. 귀족들 모두가 이 사실을 알아채 버렸다.
윌리엄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테르디아 최고의 가문 칼슈타인의 눈에 들었다는 소리와도 같다.
그리고 테르디아 역사를 통틀어 칼슈타인 가문에 좋은 평가를 받은 사람 중 성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역시, 인정받았군.’
로한은 이런 반응을 예상했었다.
공작 이전에 무술에 미쳐 있는 자, 윌리엄이라면 자신의 내력을 확인하자마자 관심을 가질 것이 뻔했으니까.
그때, 통신을 통해 아린의 안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휴우…. 다행히 저한테 악수는 안 건넸어요.]
[윌리엄 성격상, 가족도 아닌 다른 여인의 몸을 터치할 리가 없거든.]
윌리엄 같은 자가 만약 아린과 악수라도 한다? 그걸 목격한 귀족들이 별의별 소문을 다 퍼트릴 것이 뻔하다.
아린을 첩으로 찍어뒀다, 불륜이다 등등 지구의 3류 연예 기자들 지라시 뺨치는 자극적인 소문들로 테르디아 전체가 발칵 뒤집어지겠지.
“오호~ 자네가 로한이었나?”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로한은 고개를 돌렸다.
버몬드 백작.
그가 루이스, 스튜어트와 함께 로한과 아린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