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킁.”
접견실에 마주 앉자마자 들려오는 코 먹는 소리.
라가스의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베론이랑 듀란, 그 두 놈이 그렇게 극찬하길래 어떻게 생겨먹었나 궁금했는데….”
로한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을 잇는 라가스.
“그럴 만하네! 킁. 딱 봐도 겁나게 싸움 잘하게 생겼어.”
“감사합니다. 저도 소문으로만 듣던 라가스 님을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킁. 영광은 무슨? 그냥 술 좋아하는 아저씬데 뭐.”
대답하며 손으로 배를 퉁, 퉁 소리가 나도록 두드리는 라가스. 그러면서 씨익 미소까지 지으니, 정말 영락없이 성격 좋은 평범한 배불뚝이 아저씨처럼 보였다.
하지만 저 겉모습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의 헌터 등급은 무려 S. 요즘 기세 좋다는 버몬드 백작보다 랭크가 높다.
버몬드는 물론, 천하의 그 윌리엄 공작까지도 라가스 앞에서는 강자에 대한 예의를 갖출 정도다.
괜히 테르디아의 모든 헌터를 통솔하고 있는 자리에 있는 게 아니다.
“내일 있을 500주년 파티에 참석하러 왔지?”
라가스의 물음에 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생 좀 하겠네! 귀족들 모두 너 영입하려고 입맛 다시고 있을게 뻔하거든. 킁. 팁 하나 줄까? 귀족들이 주는 술 다 받아먹지 말어. 만취해서 이성적 판단이 흐려지는 그 순간이 제일 위험해.”
“명심하겠습니다.”
“파티 끝나고 나한테 찾아와서 노예 계약서 썼다고 질질 짜도 소용없어! 그건 나도 어떻게 해결 못 해 줘. 만취해서 제멋대로 사인한 지 실수를 나보고 어떡하라고? 킁!”
라가스는 앞에 놓인 커다란 커피 통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무슨 맥주 마시듯이 말이다.
“크~! 거, 파티 가서 제일 만나고 싶은 사람이 누구야?”
“필리프 국왕 폐하입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폐하 다음 말이야.”
물어보면서 로한을 쳐다보는 라가스.
순간 그의 눈빛이 변한 것을 로한은 알아챘다. 갑자기 형형하게 빛나기 시작한 두 눈동자.
동시에 라가스의 의도도 눈치챘다.
‘내가 어느 쪽 사람인지 판가름하려는 거군.’
윌리엄 파 혹은 버몬드 파,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 알아내려는 질문이다.
로한은 대답했다.
“버몬드 백작님입니다.”
그 순간, 라가스의 눈빛이 훨씬 더 강렬해졌다. 너무 강해서, 언뜻 살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로한의 대답이 이어졌다.
“그 전에 윌리엄 공작님부터 뵙고 싶습니다.”
동시에 라가스의 눈빛이 확 풀렸다.
“킁. 그래?”
순식간에 아까 전 평범한 배불뚝이 아저씨 모드로 돌아온 그를 보며 로한은 속으로 웃었다.
‘역시 대놓고 윌리엄 쪽이야.’
과거에도 라가스는 윌리엄 공작을 좋아했다. 그리고 버몬드를 굉장히 싫어했다.
헌터 길드 총책임자라는 위치라서 대놓고 어느 파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둘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어느 쪽 성향인지 모를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몇 년 후 버몬드 파가 전권을 잡았을 때, 라가스는 바로 길드장 자리를 때려치우고 행적을 감췄다.
이후 용병 국가인 로터스로 망명해서 활동했다는 소문을 얼핏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로한이 생각을 접고 이유를 설명했다.
“테르디아에서 날고 기는 헌터들 모두 윌리엄 공작님 앞에만 서면 그 태산 같은 위엄에 굴복하고 만다고요. 그 위엄을 직접 한번 느껴보고 싶습니다.”
“킁. 취향 한번 특이하네. 굳이 그 패배감을 맛보고 싶어?”
“내일이 아니면 두 번 다시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라. 킁. 아직 젊으니까 상관없겠지.”
거기까지 말한 뒤 라가스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려 했다.
“그럼 들어가. 난 또 만날 사람이 있어서….”
“아, 저 일 하나 알아봐도 되겠습니까?”
“응?”
일을 알아본다. 즉, 던전을 예약한다는 소리다.
라가스는 이내 손을 내저었다.
“뭘 오자마자 일을 알아봐? 파티 끝나고 천천히 알아봐. 안 그래도 500주년 준비 때문에 당분간 던전 예약도 안 받고 있다고. 킁.”
“그 일이 아닙니다.”
“그럼 뭔데?”
“내일 새로 열릴 포탈을 선점하려고 합니다.”
그 말에 라가스의 행동이 멈췄다.
포탈이 열린다!
길드장인 그의 입장에서 가장 싫어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니, 그것보다 지금 로한이 한 말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포탈이 새롭게 열리는 위치를 네가 어떻게 알아?”
아직 포탈이 언제, 어디서 열리는지 알아낸 자는 대륙 내에 아무도 없다.
기본적으로 포탈은 언제, 어디서 열릴지 모르기 때문에, 보고를 받자마자 곧바로 전 직원을 데리고 달려가서 포탈 밖으로 뛰쳐나오는 몬스터들을 상대해야 한다.
문제는 포탈 등급이 높을 때다.
C급 이하면 사실 큰 문제는 없다. 왕성인 벨타디아 내에 C급 이상의 헌터는 차고 넘치니까. 문제는 B급 이상일 때다.
B급 이상의 포탈 몬스터는 조금만 늦게 처리해도 순식간에 성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놈들이다. 즉, 시간 싸움이라는 소리다.
희생을 불사하고 일단 최대한 빠르게 포탈 입구를 봉쇄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직원들의 피해가 발생하기 일쑤다. 한 달 전에는 A급 포탈을 막아내느라 열 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저는 알아낼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열리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눈썹을 꿈틀하는 라가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걸 눈앞의 애송이가 알아낼 정도라면 이미 라가스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랬다면 해마다 길드 직원들이 백 명 가까이 죽어 나가지도 않았을 거다.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
라가스의 물음에, 로한은 일단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했다.
“포탈은 내일, 벨타디아 성 안에서 열릴 겁니다.”
* * *
다음 날.
테르디아 왕국의 500주년을 기념하는 축제는 벨타디아 전체에서 매우 성대하게 열렸다.
생업에 지친 평민들도 오랜만에 시름을 잊고 축제 분위기 속에 빠져들었다. 테르디아 전역에서 올라온 특산품 및 요리들, 그리고 각종 술들은 늦은 밤까지 왕성 내 모든 이들이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차고 넘쳤다.
왕실 파티 또한 그 어느 때보다 특별했다.
다른 국가에서 보낸 축하 사절들도 평소보다 많고, 이들 역시 파티에 모두 참여하는 터라 규모가 그 어느 때보다 컸다.
당연히, 왕국 내 주요 귀족들도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해야 하는 자리다.
“백작님.”
막 마법석 통신기를 끊은 말파스 남작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호화스럽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마차의 상석. 그곳에 버몬드 백작이 앉아 있었다.
“저희 쪽 귀족들은 모두 참석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반대쪽은?”
“두 공작을 빼고 모두 모여 있다고 합니다.”
“마차 속도 더 늦춰.”
“네.”
곧, 가뜩이나 천천히 이동하던 마차 속도가 거의 굼벵이 수준으로 느려졌다.
버몬드는 혼잣말을 했다.
“두 늙은이보다 빨리 도착할 순 없지.”
이건 자존심 싸움이었다. 파티에 가장 늦게 도착해서 진정한 이 나라의 주인공은 나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모두에게 각인시켜야만 한다.
버몬드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둘 다 준비는 마쳤겠지?”
“네, 공작님.”
젊은 두 미인 남매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둘의 이름은 각각 루이스, 스튜어트. 버몬드의 사촌 동생들이었다.
버몬드는 스튜어트한테 먼저 말을 걸었다.
“내가 가르친 대로 한번 해보거라.”
그 말에 스튜어트는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눈동자에서 익숙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기였다.
그녀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버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정도면 됐다.”
지금 스튜어트가 뿜어낸 마기는 정신 지배류 흑마법의 일종이다.
마법명은 ‘유혹’.
정신 계열 흑마법에 내성이 없는 사람은 저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한순간에 상대방에게 마음을 사로잡혀 버린다.
그리고 흑마법이 공식적으로 금지된 지 천년이 지난 지금, 정신 계열 흑마법에 내성을 가진 사람은 대륙 내에 전멸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기껏해야 같은 마기를 보유한 버몬드 쪽 귀족 일부와, 압도적으로 강한 윌리엄 정도.
“윌리엄 같은 늙은이를 제외하면 너의 그 눈빛을 버틸 사람은 없다. 로한도 마찬가지야.”
그의 말대로, 오늘 스튜어트의 목표는 로한이었다.
흔히 말하는 미인계로 로한을 홀려서 버몬드 파의 뜻대로 조종하는 것. 이것이 스콧이 세운 작전이었다.
“그러니 실수 없이 확실하게 로한을 홀려버려라. 알겠느냐?”
“걱정 마세요, 공작님.”
스튜어트는 자신 있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너무 화사해서 마치 한 송이 장미 같았다.
줄기에 가시가 가득 박혀 있는 붉은 장미 말이다.
버몬드는 이번엔 루이스에게 말했다.
“오늘 로한이 여동생과 같이 파티에 참석한다는 정보가 있었다. 너는 여동생을 맡아라.”
“네, 공작님.”
교양 있게 대답하는 루이스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 그 순간 약한 마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버몬드는 느낄 수 있었다.
루이스 역시 스튜어트와 같은 흑마법을 익힌 것이다.
둘을 본 버몬드는 확신했다.
‘최소 둘 중 한 명은 무조건 성공하겠군.’
설사 로한은 실패하더라도, 평범한 일반인일 게 분명한 그의 여동생은 100% 루이스에게 현혹되어 울며불며 매달릴 것이리라.
둘 중 한 명만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어도, 로한은 사실상 버몬드의 수중에 넘어온 것이나 다름없다.
* * *
버몬드의 마차가 거의 도착했을 때.
왕성 안에는 엄청난 마차 정체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왕국 내 남작 이상 귀족들은 모두 초대받은 자리다 보니 몰려드는 마차 숫자도 어마어마했다.
그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로한 일행의 마차가 드디어 파티장 입구 앞에 도착했다.
마차 안에서 내리는 로한을 관리가 막아섰다.
“초청장을 보여주시오.”
“여깄습니다.”
로한이 내민 초청장을 슥 읽어본 관리.
로한. B-급 헌터. 그 외에 신분이 안 적혀 있는 걸 보니, 평민이었다.
동시에 그의 말투가 순식간에 하대로 바뀌었다.
“혼자 왔나?”
“여동생을 데리고 왔습니다. 가족 한 명 동반이 가능하다고 적혀 있어서….”
“어디 있나?”
딱딱하게 물어보는 그의 말투.
바로 로한이 마차 안을 돌아보며 손짓했다.
자연스럽게 관리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
동시에 그의 두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마차 안에서 내리는, 청순한 스타일의 여인.
지금까지 수년간 파티장 입구에 서 있으면서, 몇 백 명에 가까운 귀족 영애들을 입장시켰던 그였다.
테르디아에서 아름답다고 소문난 여자들은 다 만나봤다는 소리다.
하지만 눈앞의 여인을 본 순간, 그는 아름다움이란 단어의 기준을 새롭게 정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단어는 저 정도의 미모를 가지고 있어야만 얻을 수 있으리라.
“……님?”
어찌 저 수수한 옷차림으로 저런 말도 안 되는 아름다움을 뿜어낼 수 있단 말인가?
“관리님?”
아니다. 오히려 저 화려하지 않은 수수한 드레스가 그녀의 청순한 미모를 더 돋보이게 만드는 것일지도…!
“관리님!”
“…어?”
로한이 강하게 소리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관리였다.
“입장해도 되나요?”
“어, 어. 그래. 들어가라….”
멍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그제야 로한과 아린이 파티장 안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관리는 둘이. 아니, 그녀가 완전히 건물 안쪽으로 모습을 감출 때까지 멍하니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으레 귀족들이 입장할 때 듣는 ‘로한 님이 입장하십니다!’ 같은 멘트는 없었다. 그들이 평민이기 때문이었다.
“와, 사람 많네요?”
아린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생각보다 내부도 넓었고, 모여 있는 귀족 수도 많았다. 딱 봐도 200명은 넘어 보였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근처의 귀족들이 자연스럽게 하나둘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
“!”
하나같이 모두 눈을 부릅뜬 채로 모든 행동을 멈췄다. 대화도 당연히 중단되었다.
그래서, 파티장 입구 쪽은 순간 충격으로 인한 고요함에 빠져들었다.
아린이 안쪽으로 걸음을 옮길수록 정적은 점점 더 심해졌다. 시끌벅적해야 할 파티장 분위기를 단신으로 적막이 흐르게끔 만들고 있었다.
그녀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 적막을 깬 것은 로한의 목소리였다.
“대신관님?”
저 멀리 서 있는 신관복 차림의 미남자, 밀리오를 발견한 로한이 외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