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과거에 로한이 사라를 처음 만난 건, 벨타디아에서 헌터 생활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 로한은 버몬드 백작의 헌터 팀에서 허드렛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애초에 E급 헌터가 버몬드 정도의 위세 좋은 가문 밑에서 돈을 벌려면 거의 하인 수준의 잡일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날도 시체 처리반 일을 마친 후 고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골목길 한쪽에 쓰러져서 펑펑 울고 있던 아이를 발견했었다.
그 아이가 톰이었다.
“괜찮니?”
“으어엉~!”
서럽게 울어대던 톰은 얼굴을 맞아서 심하게 퉁퉁 부은 상태였다.
과일 가게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가다가 양아치들한테 얻어맞고 하루 일당을 모두 빼앗겼다고 했다.
로한은 톰을 달랜 후, 그를 업고 희망 보육원까지 걸어갔었다. 당시 톰의 상태를 보고 기겁하던 사라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연신 로한에게 허리를 숙이던 사라. 눈물을 글썽이던 그녀의 얼굴이, 순간 엄청 귀엽게 느껴졌었다.
이후 로한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보육원을 찾아갔었다. 톰을 보호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사라를 매일 보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선한 미소를 보면, 하루 종일 헌터 생활을 하면서 얻은 스트레스, 피로, 굴욕감 등등이 한꺼번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며칠 보육원을 찾아가니, 곧 로한의 심경에도 변화가 생겼다.
어느 순간부터 사라가 보살피는 아이들에게 더 정을 쏟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었다.
왜 그럴까? 이유는 금방 알아챘다.
‘생각해 보니, 나도 얼마 전까지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였구나.’
당시 비올라를 비롯, 모든 마을 사람들을 잃었던 로한은 매일매일 외로움 속에서 살았다.
틸란 성의 한스 아저씨마저 없었다면, 외로움에 못 이겨서 이 벨타디아 성에 오기 전에 삐뚤어졌을지도 모른다.
그 외로움을 알기에, 보육원의 아이들에게 동질감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아이들의 외로움을 덜어주려 정을 쏟았던 것 같았다.
그런 로한의 행동은 자연히 로한에게 도움이 되었다.
사라가,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로한에게 점점 더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1개월 정도 뒤.
당일 갑작스럽게 헌터 일이 취소되어서 허탈한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던 로한.
“어?”
“어머!”
대로에서 그는 장을 보고 있던 사라랑 우연히 마주쳤다.
그래서 그날 둘은 예정에 없던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장도 같이 보고, 식당에서 밥도 먹었다.
분위기 좋게 하루를 보내던 로한은, 어느 순간 용기를 냈다. 사라와 잘 어울릴 법한 목걸이를 하나 사서 직접 그녀의 목에 걸어준 것이다.
쑥스러워하면서도 내심 좋아하던 그녀의 모습을 보았을 때, 로한은 속으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이후 보육원 정문 앞에서 헤어지고 돌아오면서 로한은 결심했었다.
다음에 또 데이트를 하게 되면, 그 날은 반드시 고백하겠다고.
동시에 헌터 일도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꽃집에서 예쁜 꽃다발을 사려면 돈이 아무래도 많이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다음 데이트는 없었다.
“……!”
언제나처럼 들뜬 마음으로 보육원을 찾아온 로한의 모든 사고가 정지되어 버렸다.
밝게 뛰어놀고 있어야 할 아이들이 전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있었다.
건물 안쪽에서 발견된 사라의 시체는 더 처참했다.
여자가 당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죽음이었다.
“사라… 사라! 아아아아!”
당시 로한은 사라를 끌어안고 얼마나 오열했는지 모른다.
그때는 버몬드 파가 윌리엄 파를 모두 숙청한 이후 테르디아의 전권을 잡았을 때였다.
정적을 모두 제거한 버몬드는 유일한 공작의 자리에 올랐고, 그때부터 평민들의 지옥이 시작되었다.
가뜩이나 과중했던 평민들의 세금을 평소보다 두 배로 올려버린 것이다.
평민들은 당연히 항의했다. 하지만 항의의 결말은 항상 죽음뿐이었다.
이제 눈치 볼 사람이 없어진 버몬드는 대놓고 철혈 정치를 펼쳤고, 항의했던 평민들은 모두 즉결 처형을 당했다.
문제는 세금을 못 낸 평민들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수입의 70%나 되는 돈을 세금으로 낼 수 있겠는가? 그건 굶어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 소리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평민들은 세금을 제때 내지 못했다.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빈민가는 그날 죽음의 거리로 바뀌었다.
당시 주변에 있던 공동묘지 자리가 꽉 차버린 바람에, 빈민가에 널려 있던 시체들이 오랫동안 길거리에 방치되어 있었던 기억이 아직도 로한의 머릿속에 생생했다.
그날 밤.
보고 때문에 버몬드가의 복도를 지나가다가, 어느 방 안쪽에서 나누는 담소를 로한은 우연히 들어버렸다.
당시 그 방은 B급 이상의 헌터만 출입할 수 있는, 이른바 버몬드가 핵심 헌터 멤버들만 출입 가능한 방이었다.
“이번에 빈민가 처리하던 애들이 재미 좀 봤다며?”
“아, 나도 들었어. 생각보다 거기에 반반한 애들이 많았다더라.”
“특히 보육원 운영하는 그 여자가 예뻤다던데….”
그렇게 로한은 범인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멍했던 그의 눈빛이, 곧 거대한 분노의 불길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이 문을 박차고 들어가 저놈들의 머리를 모조리 베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그는 D급도 안 되는, 일명 쓰레기 취급을 받는 하찮은 존재였고, 눈앞의 저들은 대륙 어디를 가더라도 극진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높으신 분들이었다.
심지어 같은 버몬드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하극상을 펼쳤다가는 버몬드의 분노를 사서 즉결 처분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단지, 집으로 돌아가 가장 독한 술을 병째로 들이키면서 혼자 서럽게 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 *
‘…다시 떠올려 버렸군.’
로한은 표정 관리를 하려고 애썼다.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얼굴이 갑자기 굳어질까 봐.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감정 조절이 안 되는군.’
동시에 다시 한번 로한은 되새길 수 있었다.
버몬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놈이라고.
“저기요?”
그때, 사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실수였다. 불러놓고 혼자 생각에 잠겨 인사도 안 하고 있었으니.
“아, 죄송합니다. 저는 로한이라고 합니다. 이거 받으세요.”
로한은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사라에게 내밀었다.
받은 사라는 바로 열어보았고,
“어머!”
동시에 화들짝 놀랐다.
안에서 빛나는 화폐의 색깔은 분명 금색이었다.
지금 보육원을 한 달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이 은화 5개가 조금 안 된다. 금화 1개면 은화 100개니까, 아껴 쓰면 보육원을 2년 넘게 운영할 수 있는 거금이다.
“이, 이, 이런 거금을 왜…?”
“보육원 운영비로 쓰십시오.”
“네에?!”
무슨 기부금을 금화로 준단 말인가?
보육원을 운영하면서 가장 많이 받아본 기부 금액이 은화 10개였었다. 당연히 금화는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아니, 태어나서 금화를 본 건 사라 입장에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놀란 그녀에게 로한은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 더 드리고 싶은데, 사정이 안 되어서 금화 한 개밖에 못 드리는 겁니다. 좋은 일 하시는 데 쓰시라고 드리는 거니 사양하지 말고 받으시죠.”
“아… 고,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격에 겨운 얼굴로 연신 허리를 숙여대는 사라.
감동받아 벌써부터 글썽이기 시작한 저 두 눈망울…. 그래, 솔직한 감정이 드러나는 저 두 눈을 로한은 참 좋아했었다.
예전엔 말이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네? 아니, 그냥 가시려고요? 차라도 한잔….”
“일이 있어서요. 수고하세요.”
사라 옆에 서 있던 톰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은 뒤 바로 몸을 돌리는 로한.
멀어지는 그의 등 뒤에서 “감사합니다, 로한 님!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는 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한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따뜻한 미소가 아니었다. 의외로, 쓴웃음이었다.
‘확실히, 예전의 그 감정이 들지는 않는구나.’
과거의 로한이었으면 무조건 차 한잔하면서 최대한 오래 사라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땐 사라의 얼굴을 1분 1초라도 더 보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멀어지고 있는 로한의 마음엔, 과거의 그 두근거리는 감정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왜일까?
세월이 많이 지나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내가 지금 사람이 아니라서 그럴 지도.’
과거의 로한과 지금의 로한은 완전히 다르다. 성격도, 그리고 신체도.
사라를 볼 때마다 두근거렸던 심장은, 이제 에너지원으로 돌아가는 기계 코어 시스템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이제 그는 사라를 이성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때의 따뜻했던 정마저 없어진 건 아니다.
‘이번에는 과거와 같은 참사가 없도록 해야지.’
그러기 위해선, 버몬드부터 처리하는 게 1순위였다.
그놈만 없어져도 최소한 빈민가 전원이 싸늘한 주검으로 변하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 * *
보육원을 떠난 로한이 두 번째로 들른 장소는 헌터 길드 본사 건물이었다.
여긴 틸란 성의 헌터 길드 건물과 차원이 달랐다. 규모도, 내부에서 북적이는 사람 숫자도, 그리고 경호원들 숫자도.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경호를 서고 있던 헌터가 로한을 막아섰다.
“길드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혹시 예약하셨습니까?”
“아뇨.”
“죄송합니다. 길드장님께서는 워낙 바쁘셔서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찾아뵐 수 없습니다. 저기 옆에 있는 예약 요청서에 이름과 용건을 적으신 다음….”
“로한이라고 전해 주십시오.”
그때, 헌터의 눈이 커졌다.
로한?
최근에 가장 많이 들은 그 이름 아닌가?
“혹시 헌터 팔찌 갖고 계십니까?”
“여깄습니다.”
로한이 왼팔을 내밀었다. 헌터는 바로 들고 있던 마법석을 그의 팔찌에 갖다 대었다.
그러자 팔찌에 바로 글씨들이 떠올랐다.
- 헌터 전용 가이드 시스템이 활성화되었습니다.
- 사용자 이름 : 로한
- 사용자 헌터 등급 : B-
B-급을 가진 로한이라는 이름의 헌터는 지금 테르디아에 딱 한 명밖에 없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헌터는 부리나케 건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배불뚝이 중년 남성을 한 명 데리고 돌아왔다.
“킁, 너냐? 그 틸란 성에서 헌터 시작한 로한이?”
“맞습니다, 라가스 님. 만나서 영광입니다.”
“하하하! 나야말로 만나서 반가워. 정말 보고 싶었어! 어서 들어와!”
호탕하게 웃으면서 로한을 응접실로 데려가는 라가스.
테르디아 왕국의 헌터들을 모두 책임지고 있는 마스터이자, 헌터들의 왕이라 불리는 사나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