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아린아, 와봐.”
로한이 마차 쪽을 바라보며 아린을 불렀다. 곧 문이 열리고, 아린이 로한 쪽으로 걸어왔다.
발치에 쓰러져 있는 1호를 바라보며 그가 물었다.
“느껴져?”
“네.”
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봤던 포탈 몬스터들과 똑같은 기운이에요.”
“맞아.”
1호의 몸에서는 분명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주 미세했지만, 로한과 아린은 확실하게 그걸 느낄 수 있었다.
로한이 말했다.
“지구에서는 인간이 마기를 내뿜는 경우는 한 가지밖에 없었어.”
“데르툴족이 정신을 지배했을 때죠.”
“그래.”
지구와 데르툴족 간의 전쟁 초반.
지구의 유일한 희망인 사이보그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데르툴족은 포로로 사로잡은 사이보그들의 정신을 마기로 지배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지구에서는 그들을 ‘현혹된 사이보그’라고 불렀다.
초창기에는 잡혔다가 탈출한 사이보그들이 현혹된 걸 몰랐기에 지구 측에서 자주 큰 피해를 입었다. 모두가 방심한 틈을 타 동료들을 암살하거나 주요 시설을 자폭 공격으로 폭파하는 등의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에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로한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지배당한 놈들은 마기로 급격한 성장을 이룰 수가 있었지.”
“이자도 그래서 초월자가 된 걸까요?”
“그럴 확률이 높아.”
지구에서도 현혹된 사이보그들은 포로로 잡히기 전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해져서 돌아왔었다. 응축된 마기는, 당시 지구에서 개발했던 에너지원들보다 훨씬 강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기계보다 내성이 약하기 때문에, 마기로 더 쉽게 강하게 만들 수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뇌가 녹아가는 아주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다. 하지만 단순히 이들을 도구로 사용할 목적인 놈들은, 그들이 차후 어떻게 되든지 간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문제는, 이 현상이 왜 여기서도 나타났냐는 거야.”
로한의 걱정은 이것이었다. 여긴 지구가 아니라, 엘도르 대륙이다.
그의 마음을 읽은 아린이 물었다.
“혹시, 이 대륙도 데르툴족들이 손을 뻗친 게 아닐까요?”
“아닐 가능성이 더 높긴 해. 대륙에는 흑마법사라는 놈들이 존재하거든. 걔네들 하는 짓이 딱 데르툴 마법사들이랑 똑같아.”
아마 고위 클래스의 흑마법사 정도면 데르툴 마법사들과 마나 수준이 비슷할 것이다. 즉, 그들이라면 눈앞의 이런 도구들을 충분히 만들고도 남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데르툴일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 되겠지.”
원래 이런 안 좋은 현상은, 최악의 최악까지 가정하면서 행동해야 하는 법.
그리고 로한에게 있어 가장 최악의 가정은 바로 데르툴 놈들이 이 대륙에까지 손은 뻗쳤을 가능성이었다.
“일단 이놈만 생포해서 마차에 가둬. 나머지는 내가 처리할게.”
“네.”
곧 아린이 1호를 꽁꽁 묶은 뒤 한 손으로 가볍게 어깨에 둘러멨다. 그녀가 마차로 향하는 동안, 로한은 나머지 암살자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 넣었다.
그들을 한데 묶어 놓으면서 로한은 생각했다.
‘이제 슬슬 나머지도 공격해 올 때가 됐는데.’
그의 시선은 저 멀리 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은 정확히 캄튼의 본대가 숨어 있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캄튼 역시, 로한 일행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검강의 고수, 즉 초월자인 그의 시야에는 로한이 1팀 전원을 포박하고 있는 모습이 생생하게 보였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1팀 전원이 당했소.”
본대 전원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언제 어느 상황에도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한 혹독한 훈련을 거친 이들이었기에, 단 한 명도 눈동자에 가느다란 떨림조차 없었다.
2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어떻게 당했나?”
“그걸 모르겠소. 전투도 없이 전원이 갑자기 쓰러졌소. 이런 현상은 독이나 수면 가루 같은 걸 뿌릴 때나 볼 수 있는 장면인데….”
“1호는 초월자다.”
“나도 알고 있소.”
초월자라서 일반적인 상태 이상 공격에는 당하지 않는다는 2호의 말뜻을 캄튼도 바로 이해한 것이다.
“일단 늦기 전에 쳐야겠소. 로한이 심문을 시작하려는 것 같으니.”
말하는 캄튼의 시야에, 로한이 마차에서 작은 망치 및 펜치, 꼬챙이 등을 챙겨오는 모습이 보였다. 딱 봐도 고문 전용 기구들이었다.
“다만 적들이 생각보다 더 처리하기 까다로운 것 같으니, 기존 계획을 조금 수정하겠소.”
“…….”
“전원, 봉인된 마기를 개방하시오.”
“……!”
그 말에 처음으로 2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지금, 캄튼은 여기 전원에게 본연의 마나인 마기를 대놓고 사용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2호는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진심인가?”
“이렇게 해야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소.”
대답하는 캄튼의 표정은 진지했다.
적들은 단순히 검강의 고수라는 걸 넘어서, 캄튼이 아직 모르는 또 다른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초월자인 1호를 포함한 1팀 전원을 저렇게 조용하게 단번에 처리할 수는 없다.
그래서 마기를 개봉하라 한 것이다. 마기를 사용하면, 어지간한 상태 이상은 모두 견뎌낼 수 있으니까.
2호가 다시 물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실패하면, 뒷일은 어떻게 될지 잘 알 텐데?”
“그냥 실패해도 뒷일이 어떻게 될지 알지 않소?”
“…….”
맞는 말이었다.
어차피 버몬드 앞에 실패라는 결과를 가지고 가면, 어떤 방식이든 간에 미래는 없었다. 버몬드는 절대로 기회를 두 번 이상 주지 않는 남자다.
“마기를 개방하시오.”
말과 함께 캄튼이 먼저 봉인된 마기를 풀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력이 몇 배는 더 강해졌다.
동시에 그의 의지에 찬 눈빛 역시 몇 배 더 강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한다!’
그의 성공하겠다는 열망.
인정받겠다는 열망.
그리고 귀족이 되겠다는 열망!
그것은 결국 마기를 개방하는 결과까지 낳고 말았다.
“…….”
지켜보던 2호도 곧 마기를 개방했다. 다른 일행들도 어쩔 수 없이 따라서 행동했다.
곧, 그들이 있는 숲 전체는 암살단이 내뿜는 마기에 완전히 지배당했다.
그들이 내뿜는 마기를 로한이 못 느낄 리가 없다.
“제대로 작정했군.”
숲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를 느낀 로한의 한마디였다.
신마대전 이후, 엘도르 대륙은 공식적인 마기 사용이 완전히 금지되었다. 마기를 대놓고 사용하는 순간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그 인간은 최소 사형이다.
그런데 저렇게 대놓고 뿜어낸다?
배수의 진을 치고 무조건 로한 일행을 죽이겠다는 소리다.
‘온다.’
그 마기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로한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암살자들이 전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숫자는 대략 25명. 거기에 초월자가 두 명.
그리고 전원이 봉인을 풀고 마기를 내뿜은 상태라….
곧, 로한의 판단은 끝났다.
‘간만에 힘 좀 써봐야겠군.’
다른 건 모르겠는데, 마기를 내뿜는 상태라면 본연의 힘을 좀 사용할 필요가 있다.
마기는 일반인을 각성자로, 각성자를 초월자로, 초월자를 그 이상의 경지로 만들어주는 힘이 있으니까 말이다.
‘레기스트륨을 활성화시키는 건 처음이군.’
과연 에드먼이 만들어낸 최첨단 에너지원, 레기스트륨의 진정한 전투력은 기존의 렐리기륨보다 얼마나 강할까?
확인해 볼 좋은 기회다.
곧, 로한의 머릿속에 들려오는 인공지능 도우미의 목소리.
[에너지원의 일부를 전투력으로 전환합니다.]
[모든 신체 능력치가 250% 상승했습니다.]
‘소량만 사용했을 뿐인데 250% 상승이라고?’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로한은 벌써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이 정도 수치면, 기존 렐리기륨과는 아예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진짜 전투력은 어느 정도일까?
로한은 확인해 보기로 했다.
“……!”
암살자 무리의 제일 앞에서 달려오던 캄튼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 멀리 서 있던 로한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바로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것 아닌가!
‘아,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은 마기의 봉인을 푼 상태라, 검강보다 한 단계 높은 경지의 상태였다.
현재 테르디아에서 가장 강한 윌리엄 칼슈타인과도 견줄 수 있을 만한 경지란 말이다!
그런 자신이 느끼지도 못할 만큼 빠른 속도라고?
‘말도 안…!’
뻐억!
곧 턱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생각은 중단되었다.
달려오는 속도만큼 로한이 주먹을 내지르는 속도도 빨랐고, 그만큼 위력도 강했다. 저 건장한 체격의 캄튼이 하늘 높이 날아오른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전투는 그것이 시작이었다.
퍼퍼퍼퍼퍽!
기관총 연사도 지금 소리보다 빠르게 들리진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 로한의 스피드는 빨랐다.
당연히 워낙 빨라서 눈으로는 로한의 움직임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퍽퍽 하는 토마토 터지는 소리 한 번에 꼭 한 명의 암살자의 머리가 박살 나는 걸 보면 대충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파악이 가능했다.
이건 전투가 아니었다. 그냥 학살이었다.
‘일단 도망쳐야…!’
로한의 전투력을 본 2호의 머릿속에 바로 든 생각이었다.
이건 스콧 백작이 얘기했던 전력이 아니었다.
저놈은 지금까지 버몬드 파 휘하의 ‘괴물’들을 제외하면, 그가 본 인간들 중에서 제일 강했다!
‘이 사실을 백작님에게 알려야 한다.’
2호는 재빨리 로한에게 외쳤다.
“마차 쪽을 봐라!”
그 말에 로한이 고개를 돌렸다.
저 뒤쪽에서 마차를 향해 돌격하는 10명가량의 암살자가 보였다.
아까 캄튼이 본대의 인원 몇 명을 별동대로 삼아 후방을 공격하라고 지시했었는데, 그들이 지금 마차 쪽에 도달한 것이다.
2호는 속으로 외쳤다.
‘지금이다!’
로한이 한눈을 판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2호는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전력으로 뒤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러면 살았다.
마차 안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로한은 바로 마차로 달려갔을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신을 놓칠 수밖에 없다.
‘빨리 보고를 해야…!’
뻐억!
그때,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
동시에 느껴진 충격으로 2호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빠르게 의식을 잃어가는 그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로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왜…?’
가족을 구하러 가지 않았냐는 뒷말은 이을 수 없었다.
바로 눈앞이 깜깜해졌으니까.
“다 잡았겠지?”
2호를 쓰러뜨린 로한은 바로 맵핑 시스템을 활성화했다. 혹시나 도망치는 놈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절차였다.
도망친 자는 없었다. 로한이 모조리 처치한 것이다.
“좋아. 마음에 들어.”
로한은 자신의 전투력에 매우 만족했다.
소량으로 이 정도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면, 굳이 자폭 공격을 하지 않아도 마왕 샤훌리트를 상대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아쉽군. 여기선 샤훌리트 같은 강자랑 싸울 일은 없을 테니.’
로한은 쓰러진 2호와 캄튼을 한 손에 한 명씩 잡아서 질질 마차 쪽으로 끌고 갔다. 이들은 다른 암살자들과는 달리 머리가 터지지 않고 숨이 붙어 있는 상태였다.
마차에 도달한 로한이 물었다.
“이상 없지?”
“네, 오빠.”
아린이 손을 털면서 대답했다. 그녀의 주위에는, 아린의 손날에 모조리 목이 베여버린 암살자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얘네들도 묶어놔 줘.”
아린에게 두 명을 넘긴 후, 로한은 마차의 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있는 비올라와 밀리오의 모습이 보였다.
로한은 검지에 바늘을 뽑아 세운 뒤, 밀리오의 목에 살짝 꽂아 넣었다.
[에너지원의 일부를 해면제로 변환합니다.]
[총 0.15ml의 해면제 약물을 생성하였습니다.]
[투약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인공지능 도우미의 목소리와 함께, 주사 바늘을 통해 해면제가 모두 투약되었다.
바늘을 목에서 다시 뽑자마자 밀리오의 눈꺼풀이 스르르 떠지기 시작했다.
“…으음?”
“일어나셨어요?”
로한의 말에 그는 상황 파악부터 하려고 했다. 해면제 효과가 워낙 좋아서 그런지 졸린 기색도 없이 순식간에 멀쩡한 상태로 변한 모습이었다.
“아니?!”
곧 마차 문 바깥에 깔려 있는 수많은 시체들을 확인한 밀리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니, 그것보다 제가 왜 잠이 든 거죠?”
“암살자들이 수면 가루를 뿌렸습니다.”
“수면 가루요? 저는 그런 게 이제 안 통하는 경지입니다만…?”
“저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로한의 그 말에 밀리오는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다.
사실 밀리오는 수면 가루가 아니라, 로한의 수면 가스인 셔누스에 잠든 것이다. 그것도 전투가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말이다.
그는 극도로 당황한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말도 안 돼. 내가 수면 가루 따위에…. 그동안 수련을 너무 게을리 한 건가?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로한 님. 대신관씩이나 되어가지고 고작 수면 가루 따위에 당해 버리다니…!”
“괜찮습니다. 아무 일 없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왜 로한은 밀리오를 굳이 재웠을까?
과거에도 밀리오는 화학 물질을 사용하는 전투를 좋아하지 않았다. 당한 이들이 하나같이 신체에 부작용이 생기거나 불치병에 걸린다는 이유로 말이다. 전형적인 대신관다운 생각이었다.
밀리오한테 잘 보여야 하는 로한 입장에서는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만한 장면을 보여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정 미안하시면, 저 대신에 생포한 놈들을 심문해 주시겠습니까? 저 세 명이 이들의 우두머리입니다.”
로한이 말하면서 세 명을 가리켰다.
그들을 확인한 밀리오의 두 눈이 커졌다.
“캄튼…!”
밀리오. 그는 캄튼이 누구인지 아주 잘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