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테르디아의 알비치 백작이 이종족들을 노예로 삼았다!
심지어 노예 시장을 운영해서 몰래 팔아넘겼다!
이 소식은 신전 내의 통신 마법구를 통해 순식간에 대륙 전체로 퍼져 나갔다.
당연히, 테르디아 왕실은 난리가 났다.
“지금 당장 삼족을 멸해야 하옵니다!”
이곳은 왕궁 회의실.
긴급회의가 열린 이곳에서, 한 노년의 귀족이 큰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현재 테르디아의 2명의 공작 중 한 명인 고든이었다.
“이건 근래 들어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커다란 중죄이옵니다, 폐하! 당장 알비치 백작가의 삼족을 멸하고, 알비치 백작은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거열형에 처하는 게 마땅하옵니다!”
고든 공작의 말을 들은 필리프 국왕이 모두를 돌아보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의견이오? 버몬드 백작의 의견은 어떻소?”
모두의 시선이 버몬드 백작에게 향했다.
버몬드.
현재 A+등급 헌터로, 불과 몇 년 만에 테르디아 내에서 윌리엄 칼슈타인에 이은 이인자의 자리에 올라섰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임에도 성장 속도가 엄청나서, 곧 윌리엄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냐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백작의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테르디아 내에서 발언권이 공작 못지않다. 지금 국왕이 대놓고 그의 의견을 물어보는 장면만 봐도 알 수가 있다.
“크흠, 흠.”
버몬드가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만약 노예 시장을 알비치 백작이 운영한 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엄벌로 다스려도 모자랍니다만… 한 가지 의심되는 것이 있습니다.”
“의심될 게 뭐가 있소?”
고든 공작이 퉁명스레 되물었다. 표정만 봐도, 버몬드를 안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버몬드는 흘끗 고든을 바라보았다.
‘저 노망난 새끼가.’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말을 잇는 버몬드.
“밀리오 대신관의 보고에 따르면 한 명의 제보자가 모든 장소를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름이 로한이라 하더군요.”
“알고 있네. 얼마 전 헌터 길드 본사에서 보고했던 그 청년 아닌가?”
지금 말하는 필리프 말고도, 백작들과 공작들 역시 모두 로한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제가 조금 조사해 봤는데, 로한은 살면서 키넨 성을 단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알비치 백작과의 접촉도 없었고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모든 노예 감옥의 위치를 알고 있었을까요?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음….”
“어쩌면, 로한을 이용한 누군가의 계략에 알비치가 억울하게 당한 것은 아닐까요? 전 이 정도의 합리적인 의심은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버몬드 파 귀족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고든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요?”
“일단 로한을 잡아서 자초지종을 들어봐야 합니다. 알비치 백작의 처벌은 그 뒤에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선의의 제보자를 되레 잡아서 심문하라는 소리요?”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방지하려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고든 공작의 외침에 지지 않고 맞서 말하는 버몬드.
필리프 국왕이 싸움을 말렸다.
“자자, 그만하시오. 마지막으로 윌리엄 공작의 말을 들어보고 싶소.”
모두의 시선이 필리프의 바로 오른쪽 옆자리로 향했다.
정자세로 앉아 있는 건장한 미중년. ‘테르디아의 검’, 윌리엄 칼슈타인이 입을 열었다.
“제보자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 됩니다. 그것은 대신관 밀리오와 이단 심판관들의 판단을 의심한다는 소리와도 같습니다. 파누엘 여신의 종들이 어찌 거짓을 고하여 대륙 모두를 속일 수 있겠습니까?”
“음….”
그제야 필리프 국왕은 생각해 냈다.
여신의 힘을 사용하는 이단 심판관들은 거짓을 고하는 그 순간 온몸이 타들어 가 소멸한다는 것을. 그들을 이끄는 대신관인 밀리오 역시 마찬가지다.
“당연히 고든 공작의 말대로 알비치는 처형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알비치를 더 심문해서 어떤 귀족들에게 노예를 팔았는지를 알아내야 합니다.”
그 말에 버몬드 파 귀족들이 순간 움찔했다. 이들 대부분이 알비치에게 노예를 구매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윌리엄은 그들 모두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마치, 이들이 범인이라는 걸 알기라도 하는 듯한 눈빛으로 말이다.
“그리고, 노예를 사들인 이들 역시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대륙에 사는 모든 이종족들의 분노를 조금이나마 진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윌리엄의 시선이 딱 버몬드의 얼굴에서 멈췄다.
그의 깊은 눈빛이, 버몬드의 차가운 눈빛과 맞부딪쳤다.
‘윌리엄…!’
버몬드가 속으로 이를 갈고 있을 그때, 필리프 국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두 공작이 모두 처벌에 동의했으니, 판결을 내리겠소. 알비치 백작은 교수형으로 다스리고, 그의 가족들은 처형 혹은 오지로 유배 보내도록 하겠소.”
“예, 폐하.”
귀족들이 일제히 대답했는데, 그중 유난히 윌리엄 파 귀족들의 목소리가 컸다.
“그 전에 알비치를 심문해 노예를 구매한 귀족들을 조사하겠소. 매우 위중한 사건이니, 이건 윌리엄 공작이 직접 맡아주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윌리엄이 공손하게, 그러면서도 절도 있게 국왕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 순간, 버몬드 파 귀족들은 하나같이 썩어가는 표정이었다.
‘X발, X 됐네.’
‘왜 하필 윌리엄이 조사를 맡는데?’
‘당장 내일이라도 망명해 버릴까?’
공적인 업무를 수행할 때에는 사적인 감정을 전혀 섞지 않고 오로지 법에 따라 공명정대하게 조사하기로 유명한 윌리엄이다. 당연히 인맥, 정, 협박, 뇌물 같은 건 씨알도 안 먹힌다.
안 봐도 미래가 보였다. 여기 있는 버몬드 파 대부분이 잡혀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모습이.
버몬드의 표정도 당연히 안 좋았다.
‘알비치, 이 개자식! 그렇게 믿고 맡겼는데…!’
자연스레 그의 분노는 알비치에게로 향했다.
알비치가 운영하는 노예 시장 및 채굴장은 버몬드 파의 가장 큰 자금원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좋은 ‘재료’를 수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노예 시장은 버몬드에게 반드시 필요한 장소였다.
그래서 그렇게 보안에 신경 쓰라고 경고했거늘!
‘교수형까지 갈 필요도 없어. 그 전에 내 손으로 죽여 버리겠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버몬드의 두 눈빛에 살기가 일렁였다.
* * *
그 시각.
키넨 성 온 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드디어 알비치 백작이 잡혀갔다!”
“만세!”
“이제 그 말도 안 되는 세금 안 내도 되는 거지?”
“다행이야…. 우리 아이들 굶어 죽진 않겠어!”
키넨 성에 사는 이들 중 누구도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거리의 모든 사람의 얼굴에 오랜만에 웃음꽃이 피었다. 이른 대낮 시간임에도 벌써 여관에서 축배를 드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이 이렇게 좋아하는 이유는 한둘이 아니었다. 일단,
1. 평민들은 수입의 절반 이상을 세금으로 꼬박꼬박 내야 했다. 그래서 당연히 평생을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2. 알비치 백작가 사람들의 더러운 성격.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유 없이 폭언 및 폭행을 일삼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3. 특히 알비치 백작은 난봉꾼으로 유명했다. 지나가다 만난 예쁜 여자들은 전부 반강제로 밤에 저택으로 끌고 가기 일쑤였고, 거부하는 여자들은 다음 날 변사체로 발견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4. 무엇보다 노예 시장. 이게 컸다. 이종족들 말고 노예로 끌려가 쥐도 새도 없이 사라진 일반 영지민들 숫자도 생각보다 꽤 되는 모양이었다.
이외에도 으레 귀족들이 평민에게 할 수 있는 안 좋고 나쁜 짓은 죄다 골라서 했었다. 오죽하면 병사, 관리, 상인, 천민 할 것 없이 온 성 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겠나.
“대신관님께서 이단 심판관을 이끌고 잡으셨다지?”
“역시 밀리오 님이야! 내가 언젠간 직접 그분 손으로 끌어내릴 줄 알았다니까!”
“밀리오 님이 차기 영주 하시면 안 되나?”
자연스레 알비치를 잡은 밀리오에 대한 칭송도 온 성내에 자자하게 들렸다. 그동안에도 키넨 성의 유일한 희망의 불씨 같은 존재였는데, 지금은 거의 하나의 신앙처럼 찬양받고 있었다.
로한의 이름도 당연히 오르내렸다.
“대신관님께 제보한 게 그 로한이라며?”
“아, 그 남쪽 틸란 성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유망주 헌터?”
“혼자서 채굴장에 있던 병사를 40명 넘게 전부 박살을 냈대! 심지어 대장은 각성자였대!”
“그럴 만도 하지. 20살의 나이에 벌써 검강을 쓴다며?”
“히익, 완전 괴물이었잖아?”
그렇게 로한의 이름은 키넨 성 주민 모두에게 퍼지더니, 성 바깥 주민들한테도 빠른 속도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발 없는 말이 정말 천 리를 갈 기세였다.
귀족들과 헌터들 사이에서만 오르내리던 그의 이름이, 이젠 일반 평민들한테도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소문의 주인공인 로한은 처음 드워프들이 갇혀 있던 저택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제 우린 떠난다!”
구르카가 로한에게 외쳤다.
그의 뒤에는 떠날 채비를 마친 드워프들이 모두 로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가십니까? 키넨 성에서 며칠 묵고 가시지 그러세요. 밀리오 님이 편히 쉬실 수 있게 숙식도 제공해 주신다고 했는데.”
“됐어! 거기 갔다가 이번에 또 어떤 놈한테 잡혀갈 줄 알고? 이제 인간 세상은 얼씬도 하기 싫다! 원래 살던 바이카 산으로 돌아갈 거야!”
완고한 얼굴로 거부하는 구르카였다.
“하지만 너는 예외다, 로한! 넌 우리의 생명의 은인이자, 복수를 도와준 전우야!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우리를 찾아와라! 드워프는 반드시 빚을 갚는 종족이니까!”
그러면서 손을 내미는 구르카. 로한은 웃으면서 그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꼭 다시 만나요.”
“물론이지!”
“아, 가기 전에 이거 드릴게요.”
악수를 마친 로한은 바로 손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미니 통신기를 한 개 꺼냈습니다.]
[현재 체내에 남아 있는 미니 통신기 : 4개.]
손 위에 올려진 미니 통신기는 딱 한쪽 귀에 꽂을 수 있는 이어폰, 즉 에어팟 같은 모양이었다.
“받으세요. 마나석을 이용해 만든 초소형 통신기입니다.”
구르카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작은 거로 통신을 한다고?”
“한번 귀에 꽂아보세요.”
구르카가 미니 통신기를 귀에 꽂자마자 로한이 통신으로 말했다.
[아, 아. 들리세요?]
“오오오! 들린다, 들려! 진짜 통신이 되잖아?”
감탄하다 못해 흥분한 구르카.
“진짜야?”
“나도 해볼래! 나도!”
“이 안에 어떤 기술이 있길래?”
다른 드워프들도 모조리 구르카한테 몰려와 구경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미니 통신기를 보면서 눈빛을 반짝이는 모습. 로한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읽어냈다.
“그거, 절대로 분해하시면 안 됩니다.”
“어… 왜?”
대놓고 서운한 표정을 짓는 구르카.
“분해했다가 고장 나면 제가 연락을 못 하잖아요. 제가 나중에 만나면 여분으로 하나 더 드릴 테니까, 그때 분해하세요. 아셨죠?”
“어, 언제 다시 만날 거냐?”
묻는 구르카는 당장 내일이라도 다시 만나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다.
로한은 웃으며 대답했다.
“얼마 안 걸릴 겁니다. 그때까지 건강하게 지내고 계세요. 혹시나 무슨 일 생기시면 그 통신기로 연락해 주시고요.”
‘나중에 내 영지에 올 때까지 다치면 안 되니까.’
동시에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구르카 일족은, 그의 미래 영지에 반드시 필요한 일꾼들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