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테르디아 왕국에서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마을이나 성에는 반드시 파누엘 신전이 있다. 테르디아가 공식적으로 섬기는 여신이 바로 희망의 여신 파누엘이기 때문이었다.
키넨 성도 마찬가지다.
이 성의 신전은 테르디아에서 꽤 유명하다. 왜냐하면 신전 건물의 규모 때문이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초라하고 작은 신전은 어디입니까?”
테르디아의 아무나 붙잡고 이런 질문을 한다면, 백이면 백 다 키넨 성의 신전을 뽑을 것이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호화롭고 드넓기로 유명한 알비치 백작가의 대저택 때문에 더 초라해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신전 건물이 작다고 여기 신관들마저 무시하면 큰일이 난다.
“이 나라에서 가장 평민들한테 친절한 신전은 어디입니까?”
이 질문의 대답도 키넨 성의 신전이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테르디아에서 가장 청렴한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신전 건물이 작은 것이다. 건물에 헛된 돈을 안 쓰니까.
게다가 이곳의 대신관은 왕국에서 손꼽히게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은 밀리오였다.
“다 됐습니다.”
밀리오는 지금, 자정이 넘어가는 이 늦은 시각에도 다친 아이를 정성을 다해 치료하고 있었다.
신성력으로 다리 골절상을 치료하던 밀리오가, 손을 거둔 뒤 누워 있던 아이한테 말했다.
“한번 일어서 볼래?”
“…어? 안 아파요! 안 아파!”
아이는 기쁜 얼굴로 폴짝폴짝 신전 안을 뛰어다녔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부모가 감격한 얼굴로 연신 허리를 숙였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평생 불구로 살아갈까 걱정했었는데…!”
밀리오는 그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아닙니다. 신의 종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앞으로 높은 나무에 또 올라가면 안 된다. 알겠지?”
“네, 대신관님!”
“이제 가보십시오. 늦은 시간이니 밤길 조심하시고요.”
오히려 가족들의 안전을 걱정하면서 친절하게 돌려보내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환자를 보낸 밀리오는 기지개를 쭉 켰다.
“끄응, 이제 기도 올리러 가야지…. 응?”
그때, 다시 신전의 정문이 열렸다.
밀리오는 당연히 새로운 환자라고 생각하고는 친절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파누엘 여신의 가호가 항상 깃들기를. 저는 여신의 종인 밀리오입니다. 어디가 아파서 찾아오셨습니까?”
“아파서 찾아온 건 아니야!”
대답은 키 작은 뚱뚱한 사내의 입에서 나왔다.
그제야 밀리오는 그가 드워프라는 걸 깨달았다.
“여전히 온몸이 쑤시긴 하지만… 아이고야! 역시나 3년 넘게 채찍 맞은 게 한 번에 낫진 않는구먼.”
“당분간 잘 먹고 푹 쉬십시오. 그게 최고입니다.”
같이 온 건장한 청년이 그의 말에 대답했다.
그는 밀리오를 돌아보며 인사했다.
“저는 B-급 헌터인 로한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구르카 족장님이고요.”
“로한 님이라….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군요.”
가물가물했지만, 최근에 헌터들을 치료하면서 얼핏 들어본 이름 같았다. 테르디아 남쪽에서 엄청난 헌터 유망주가 등장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인가 싶기도 하고.
결국 생각해 내지 못한 밀리오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치료가 목적이 아니라면,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혹시 지금이라도 이단 심판관들을 모으실 수 있습니까?”
“네?”
밀리오의 눈이 커졌다. 정말 상상치도 못한 단어가 튀어나온 것이다.
이단 심판관이라니?
“이단 심판관이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 말씀하시는 거죠?”
“당연합니다.”
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개 국가로서도 해결할 수 없는 대륙 차원의 중범죄를 여신의 이름 아래 처벌할 때에만 움직이는 신관들이 바로 이단 심판관이다.
당연하게도, 이들은 정말 비상시가 아니면 절대로 운용되지 않는다. 테르디아 왕국의 친위대들보다 더 기용하기 힘든 병력이라고 설명한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일단 무슨 일인지부터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밀리오가 로한에게 물었다.
이후 로한은, 옆의 구르카와 함께 자세하게 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설명이 끝난 후.
“…정말입니까?”
물어보는 밀리오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 표정 또한 매우 진지해졌다.
알비치 백작이, 이종족을 노예로 부렸다?
이건 사실이면 당연히 큰 문제였고,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큰 문제였다.
“지금 말씀하신 내용이 얼마나 큰 여파를 미칠지는 알고 계십니까? 만일 지금 하신 말씀이 모두 거짓말이라면, 저는 당신들을 지금 ‘여신 앞에서 거짓을 고한 죄’로 잡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에 대답한 것은 구르카였다.
“내 목숨을 대지의 여신, 가이아에게 맡기겠네.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모두 진실일세!”
동시에 구르카의 온몸이 순간 황토색 빛으로 환해졌다.
지금 그는 모든 것을 건 맹세를 한 것이다. 마치 드래곤의 용언(龍言)처럼 말이다.
만약 구르카의 말이 거짓이라면, 그는 가이아 여신의 분노를 받아 바로 온몸이 썩어서 죽게 될 것이다.
밀리오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5분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바로 신전 안쪽으로 뛰어갔다. 이단 심판관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였다.
지금 이건, 당연히 이단 심판관들을 기용해야 할 대형 사건이었다. 그리고 대신관인 그는 키넨 성의 이단 심판관들을 독자적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밀리오를 포함한 이단 심판관들은 곧장 로한의 뒤를 따랐다.
말조차 타지 않았다. 전원이 최소 각성자 이상으로 구성된 실력자들이라 달리는 게 훨씬 빨랐다.
유일하게 느린 건 구르카 한 명뿐이었다. 그도 로한이 등에 업고 달렸기에 문제가 없었다.
“으아아~! 좀 천천히 달려어어!”
“아직도 적응 못 하셨습니까? 아까보단 좀 느리잖아요.”
“그냥 빠른 거 자체가 싫다고오오!”
물론 애초에 빠른 걸 싫어하는 드워프 입장에서는, 이 속도로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아침 해가 뜰 때쯤, 마차로 하루 이상 걸리는 거리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단 심판관은 곧장 묶여 있던 병사들을 심문했다.
심문은 지하 채굴장에서 이뤄졌다. 그들만의 끔찍한 심문법을 차마 드워프들과 비올라 등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산 채로 손가락을 잘라내거나, 인두로 눈, 코, 귀 중 한 곳을 지지거나, 펄펄 끓는 물에 발 한쪽을 담가 녹여 버리거나….
병사들은 그 심문을 견디지 못하고 금방 모든 걸 실토했다.
“심문은 끝났습니다. 알비치 가문에서 직접 지시한 일이었습니다.”
밀리오가 로한 등에게 말해주었다.
“이제부터 저희는 알비치 백작을 잡으러 돌아갈 예정입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로한의 말에 밀리오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이단 심판관의 집행 과정에서 외부인의 참여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도와주신다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제가 또 다른 노예 감옥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
“네?”
밀리오의 눈이 커졌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알비치 백작이 비밀리에 키넨 성에서 운영하는 노예 시장이 한 곳 있습니다. 그 노예들을 가두는 장소도 따로 두 곳이 더 있고요. 제가 그 위치를 모두 알고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는 밀리토.
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못 믿으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평범한 인간이라 구르카 님처럼 맹세는 못 해서요.”
“…아닙니다. 안내해 주십시오. 모두 로한 님의 뒤를 따른다!”
이단 심판관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치는 밀리오였다.
* * *
로한의 말은 사실이었다.
키넨 성에서 평생 살아온 밀리오조차도 처음 보는 구석진 골목에 있는 주점. 그 내부와 연결된 지하 통로 끝에 노예 시장이 있었다.
이후 두 곳의 노예 감옥까지 모두 찾아냈고, 그곳에 갇혀 있는 수많은 이종족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엘프, 드워프, 수인족은 물론 바다에 사는 인어족인 세이렌까지.
그리고 그곳을 감시하던 병사들을 심문한 끝에, 역시 알비치 백작가의 짓이라는 것을 밝혀낼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알비치 백작을 잡으러 간다!”
밀리오는 분노한 얼굴로 이단 심판관을 이끌고 그대로 신전 바로 옆의 알비치 백작가에 들이닥쳤다.
콰앙! 하고 저택 문이 부서져라 열렸다. 그 소리를 들은 알비치는 화들짝 놀라 뛰쳐나갔다.
“무, 무슨 일이냐!”
당황해서 외치는 그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속옷 차림에, 낮술을 해서 얼굴이 타오르듯 벌게진 모습.
그의 침실 안에 다수의 어린 여인들이 함께 있는 걸 보니, 대낮부터 방탕하게 놀고 있었던 것이 확실했다.
“아니, 대신관님이 여길 왜…!”
“알비치 백작! ‘바스티뉴 서약’을 위반한 혐의로 널 체포한다!”
“!”
알비치의 두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천 년 전, 신마대전이 끝난 후 모든 종족의 대표들이 북쪽의 성, 바스티뉴에 모여서 함께 서약한 내용이 있다.
‘대륙에 사는 모든 종족은 서로를 노예로 삼을 수 없다.’
그 내용을 모르는 귀족은 대륙에 아무도 없다. 그래서 알비치는 당황한 것이다.
“그, 그게 무슨…!”
“이미 네가 운영하고 있던 노예 시장과 감옥을 모두 찾아냈다, 알비치.”
“뭐…?”
거길 어떻게? 완벽한 보안하에서 운영되고 있던 곳이었는데?
“당장 알비치를 체포해라!”
밀리오의 외침에 이단 심판관들이 일제히 알비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걸 본 알비치의 얼굴색이 하얗게 바뀌었다. 단번에 취기가 싹 사라진 것이다.
이단 심판관한테 잡히는 순간, 이후 결과는 뻔하다.
최소 교수형이다!
‘일단 튀고 보자!’
알비치는 일단 몸을 돌려 전력으로 방 안으로 달려갔다. 그대로 창문으로 돌격해서 밖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역시, 각성자 헌터 출신인 알비치의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방 안 창문까지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촤악!
“아악!”
순간 다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그는 창문 바로 앞에서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양쪽 허벅지가 절반 가까이 베여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바로 뒤쪽에는 검을 든 밀리오가 서 있었다. 그는 훨씬 빠른 속도로 알비치의 뒤를 순식간에 따라잡은 것이다.
이후 그는 검집을 들어 알비치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더는 반항을 못 하도록 만들기 위한 무력화 작업이었다.
퍽! 퍽! 퍽!
“컥! 억! 윽…!”
한참을 얻어맞은 알비치가 신음도 못 지를 정도로 반죽음 상태가 되었을 때야 밀리오는 검집을 내려놓았다.
이후 뒤따라온 이단 심판관들이 곧바로 알비치의 온몸을 포박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로한은, 그때 정문 쪽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강하군, 밀리오.’
로한이 알고 있는 과거의 밀리오에 대해 정리하자면 이렇다.
- 밀리오 :
키넨 성의 대신관으로, 무려 검강을 사용할 수 있는 실력자다. 당시 윌리엄 공작은 최소 A급 헌터 이상의 수준이라고 평가했었다.
청렴하고, 타고난 성품이 선하고, 전형적인 강강약약 성격이라 평민들에게 그렇게 인기가 많았다. 이후에 실력과 인품 모두를 인정받아, 테르디아 교황 바로 밑인 추기경 자리까지 오른다.
이후 테르디아를 병들게 만든 버몬드 공작과 칼슈타인 공작 간의 파벌 싸움에서 그는 추기경 중 유일하게 칼슈타인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버몬드 공작이 왕국의 권력을 잡음과 동시에 ‘부정부패’라는 말도 안 되는 죄목을 받아 교수형에 처해지게 된다.
이날, 키넨 성을 비롯한 수많은 테르디아 평민들이 슬피 울었다고 전해진다.
밀리오는 몰락의 길을 걸었던 과거 테르디아 왕국의 그나마 몇 안 되는 희망의 불씨였다. 버몬드가 권력을 잡음과 동시에 그 불씨들은 모조리 꺼져 버렸지만.
‘이런 사람은 무조건 지켜줘야지.’
이번에는 절대로 과거처럼 억울하게 죽는 일이 없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만약 자신의 아군으로 만들 수 있다면 금상첨화고.
확실한 건, 벌써 미래는 바뀌었다.
당시에는 끝까지 살아서 버몬드의 심복으로 활약하던 알비치 백작이 지금은 이단 심판관한테 잡혀 버렸으니까.
그리고 이단 심판관한테 잡혔던 이는, 대륙 역사를 통틀어 단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