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그날 새벽 1시 무렵, 조프리 백작의 저택.
피터슨의 방 안에서는 은밀한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한다.”
피터슨이 검은 복면을 쓴 정체불명의 사내 넷을 향해 또다시 당부했다.
“납치할 때, 절대로 그녀의 털끝 하나라도 다치게 만들면 안 돼. 알았어? 동대륙의 고급 도자기보다 더 조심스럽게 그녀를 모시란 말이야. 만약 다치게 만든 놈은 나머지 의뢰금 못 받을 줄 알아. 명심해!”
그 말에 수장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난색을 표했다.
“목표물 혼자만 있으면 쉽게 가능하지만, 로한이라는 자가 곁에 있으면 불가능하오. 만약 그가 당신의 말대로 검강을 사용한다면 목표물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죽을 각오로 임해야 하오.”
“그놈은 신경 꺼. 내가 알아봤는데, 지금 아린이는 여관에 혼자 있어.”
“정말이오?”
“어. 그놈은 제 어미와 함께 한스라는 놈의 집에 찾아간 상태야. 정확한 정보니까 걱정 말라고.”
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쉬운 일이지.”
“좋아. 그럼 가지.”
피터슨은 복면을 썼다. 그도 함께 움직이려는 것이다.
눈앞의 이들이 이런 쪽으로는 틸란 성에서 가장 전문가라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이들이 아린을 안전하게 납치하는지 직접 두 눈으로 봐야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았다.
피터슨의 준비가 끝난 걸 확인한 수장이 모두에게 한마디 했다.
“이동한다.”
동시에 다섯 명의 신형이 방 안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갑자기 열린 창문이 바람 때문에 여닫히며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 * *
최소 준각성자 이상의 실력자로 구성된 피터슨 일당은 달리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그들은 1분도 안 되어서 봄날의 햇살 여관의 뒷마당에 도착했다.
“의뢰인은 여기서 대기하시오.”
수장이 일행들에게 지시하기 시작했다.
“우선 방해꾼이 있는지를 확인한다. 1호와 2호는 목표물이 있는 여관방 안을 확인하고, 3호는 여관 1층을 확인한다. 실시.”
대답은 없었다. 일행들은 바로 지시받은 대로 움직였다.
3호가 1층 창문 안쪽을 조심스레 확인하는 동안, 1호와 2호로 불린 자들이 여관의 벽을 능숙하게 타고 올라가 아린이 묵고 있는 여관방의 창문 안을 확인했다.
곧 세 명 모두 수장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수신호를 읽은 수장이 피터슨에게 말해주었다.
“방해꾼은 어디에도 없고, 방 안에는 목표물 혼자 자고 있다고 하오.”
“역시 정보가 맞았군.”
“이제 의뢰를 수행하겠소.”
수장은 다시 1호와 2호에게 수신호를 했다.
둘은 소리가 안 나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창문을 연 뒤,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피터슨은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창문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기다렸다.
그런데… 조용했다.
1분, 2분, 3분이 지나도 들어간 둘은 나올 기색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왜 안 나와?”
다급해진 피터슨이 수장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생긴 거 아냐?!”
“조용한 걸 보면 그건 아니오.”
애초에 이런 납치 작전 때 돌발 상황이 생기면 무조건 소란스러워진다. 조용한 걸 보면 도망쳐야 할 상황까지는 아닌데….
그래도 조용한 걸 떠나서 너무 오래 걸리긴 한다.
1분 정도 더 기다려도 감감무소식이자, 수장은 결국 직접 움직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우리 둘도 들어가겠소. 2분 안에 우리도 안 나오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니 무조건 자리를 뜨시오.”
수장은 피터슨에게 당부한 뒤 3호와 함께 벽을 타고 올라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또다시 조용해졌다.
1분이 지나고, 약속한 2분이 지났을 때도 그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인데?’
피터슨은 미치고 팔짝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로한도 없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한 명의 각성자와 세 명의 준각성자로 이루어진 집단이 고작 소녀 한 명을 지금까지 납치 못 하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잠깐만.’
그때 그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 한 가지.
‘이 새끼들, 아린이 납치해서 다른 곳으로 튄 거 아냐?’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응당 남자라면, 아린을 보자마자 다른 마음을 품을 것이다. 아름다운 그녀를 보고 반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평상시라면 전혀 생각지도 못할 이 말도 안 되는 가정이 피터슨의 뇌 전체를 장악해 버렸다.
콩깍지가 제대로 씐 그는 지금 이성적인 판단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결국 그 의심은, 수장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가 직접 여관방 창문 쪽으로 움직이게끔 했다.
창문에 붙어서 안쪽을 바라보는 피터슨.
‘아무도 없잖아!’
방 안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동시에 그의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 새끼들이!’
이를 악물면서 피터슨은 바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갑자기 깜깜했던 방 안이 환해졌다.
‘엇?’
“이제 오셨네요.”
그때 뒤쪽에서 들려오는 아린의 목소리.
홱 고개를 돌린 피터슨은,
“……!”
곧 눈이 부릅떠졌다.
수장을 비롯한 네 명이 전부 의식을 잃은 채로 방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지 않은가!
누가 이렇게 만든 거지? 설마?
“안 오시면 쫓아가려고 했는데, 다행히 그런 수고를 할 필요는 없겠네요.”
그렇게 말하는 아린의 얼굴은 첫 만남 때와는 달랐다. 만찬 내내 걸려 있던 그 따뜻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었고, 지금은 냉기가 뚝뚝 떨어질 만큼 차가운 표정이었다.
말투 또한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왜 저를 납치하려고 했죠?”
“뭐? 아, 아니…. 난 납치하려고 한 게 아니라…!”
당황한 피터슨은 자신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를 말들을 더듬어댔다. 그러자, 아린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바닥에는 촘촘한 그물 모양의 동그란 무언가가 생성되어 있었다.
[스피커 시스템을 활성화합니다.]
[’녹음 파일_001.wav’를 재생합니다.]
인공지능 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손바닥의 스피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시 한번 말한다. 납치할 때, 절대로 그녀의 털끝 하나라도 다치게 만들면 안 돼. 알았어? 동대륙의 고급 도자기보다 더….]
“!”
피터슨의 두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저건 아까 전 내 방 안에서 했던 말이잖아?
“그, 그걸 어떻게…?”
“어떻게 녹음했는지가 지금 중요한가요?”
대답하면서 스피커 시스템을 다시 비활성화한 아린.
“지금 당신에게 중요한 건, 여기서 살아서 나갈 수 있는지가 아닌가요?”
말을 마친 아린의 몸에서, 갑자기 엄청난 내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 내력은 순식간에 피터슨의 온몸을 집어삼켰다.
‘허억!’
피터슨은 경악했다.
이건 생전 처음 겪어보는 경지의 내력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이 정도로 강한 내력을 뿜어내진 않았다.
눈앞의 이 여리여리한 소녀가 자신의 아버지보다 강하다고?
‘마, 말도 안… 히이익!’
곧 그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면서 아린이 주먹을 들었는데, 하얀색의 마나가 그 주먹 전체를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저게 무슨 현상인지 피터슨은 안다.
아버지가 전력을 다해 검강을 발현했을 때와 똑같은 현상이었다.
‘초, 초월자의 경지…?’
그 어마어마한 위력을 담은 주먹이, 지금 피터슨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
“으, 으아아악!”
그날 새벽.
틸란 성의 한 여관방 안에서는 빠르게 북을 두들기는 것 같은 소리와 처절한 비명이 함께 섞여서 한참 동안 들려왔다고 전해진다.
* * *
다음 날 오전.
로한 가족이 탄 마차가 틸란 성의 북문을 지났다.
북쪽으로 계속 이동하는 마차의 마부석에 탄 로한이 고삐를 잡은 상태로 비올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승차감 어떠세요?”
“너무 좋단다. 어쩜 이렇게 편안할 수가….”
대답하는 비올라의 표정은 밝았다.
로한은 비올라를 위해 일부러 제일 푹신한 쿠션으로 내부 의자가 만들어진 마차를 구했다. 때문에 틸란 성에서 제일 비싼 고급 마차를 구해야 했지만, 이제 로한에게 돈 걱정은 의미가 없었다.
“작별 인사 안 한 사람은 없겠지?”
“할 사람은 다 했어요. 한스 아저씨네 가족, 헌터 길드 사무소 직원분들, 듀란 헌터 팀도요.”
“그렇구나. 그, 피터슨 님은?”
비올라의 물음에 로한은 고개를 저었다.
“평민 주제에 감히 백작가를 찾아가서 인사를 드릴 순 없죠. 그리고 베론 님 말로는 오늘 갑자기 몸살이 심하게 걸리셨다고 해요.”
“저런….”
“그러면 찾아갔어도 못 만났을 거예요.”
자초지종을 모르는 비올라는 안타까운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아는 로한과 아린은, 어머니 몰래 서로 마주 보며 슬쩍 웃었다.
몸살. 틀린 말은 아니다. 어제 그 정도로 맞았으면 제아무리 피터슨 정도의 실력자라도 몸살이 안 걸릴 수가 없을 테니까.
너무나 많이 사랑한 죄.
그래서 잘못된 선택을 해버린 죄.
그 결과는 최소 전치 12주였다. 사지의 뼈가 전부 부러졌으니, 최소 세 달은 꼼짝없이 누워서 지내야 할 거다.
* * *
로한 가족의 최종 목적지는 테르디아의 왕성, 벨타디아였다. 대략 지금 속도면 5일 정도를 꾸준히 달려야 도착하는 거리다.
물론 5일 내내 노숙할 필요는 없었다. 당장 2일 정도만 더 가면 키넨 성에 도착한다.
그렇다면 로한 가족의 첫 번째 목적지는 키넨 성이냐?
그것도 아니었다.
“…응? 로한아, 우리 어디로 가는 거니?”
마차가 어느 순간 대로가 아닌 산길로 들어서자 비올라가 놀라 물어왔다.
로한이 대답했다.
“오늘은 노숙하지 않고 지붕 있는 집에서 잠을 자려고요. 여기로 가면 목적지가 있어요.”
“아~ 이 주변에 산골 마을이 있나 보구나?”
“그건 아니고, 대저택이 있어요.”
“대저택? 이런 곳에?”
비올라는 의아해했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안 느껴지는 이 산등성이 중턱에?
[맵핑 시스템을 가동 중입니다.]
[목적지까지 851m 남았습니다.]
인공지능 도우미의 목소리에 로한은 다시 한번 각막 스크린에 떠오른 지도에 집중했다.
마치 내비게이션처럼 목적지까지 화살표가 길게 그어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산길을 따라 쭉 올라가니, 곧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공터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머!”
비올라의 눈이 커졌다.
정말로, 이곳과 안 어울리는 커다란 저택 하나가 돌산 절벽에 딱 붙어서 지어져 있었다.
“누구냐!”
동시에 저택 입구에 서 있던 감시병 둘이 급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들을 향해 로한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에너지원을 썬더볼트(Thunder Bolt)로 변환합니다.]
[이제 썬더볼트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썬더볼트를 발사합니다.]
그의 손바닥에서 가느다란 번개가 발사되었다.
파지직! 하고 번개에 감전된 감시병들은 그대로 기절해서 바닥에 쓰러졌다.
“어머!”
“오늘 저희가 묵을 곳이에요.”
놀란 비올라에게 로한은 태연하게 설명했다.
“아린아, 어머니랑 마차를 잘 부탁해.”
“네, 오빠.”
마차에서 내린 로한은 스트레칭으로 온몸의 기계 관절을 풀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그러면, 미래의 동료들을 만나러 가볼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