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 회 - 괴물
햇살을 머금은 따스한 바람이 불어 왔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은 기분 좋게 흔들렸고, 바람에 실린 흙냄새는 싱그러웠다. 따스한 햇살에 얼어붙은 땅이 녹아내려 되살아난 땅 사이로 살며시 돋아나는 푸른 새싹의 파릇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그리고 바람 곁에 날리는 분홍빛 꽃잎은 마치 퍼레이드의 피날레처럼, 강원도의 함박눈처럼 온통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생일 축하 폭죽을 터뜨린 마냥 아름다운 빛깔로 휘날리는 꽃잎과 온화한 훈풍.
코끝을 맴도는 향기로운 꽃 내음과 생명력 넘치는 대지의 향기.
어머니의 품처럼 부드러운 햇살.
“아 좋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절로 스미는 아름다운 봄 날. 흐드러지듯 흔들리는 푸른 초원에 누워 그 광경 바라보고 있던 현성이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여기가 어딘지, 이곳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바람이 좋아서 저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따뜻하다…….”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도 무척이나 오랜만인 것 같았다. 매 순간, 순간 너무 열심히 내달려다 오다 보니 어디까지 달려온 것인지도 모르고 지쳐 있던 몸이 겨우 휴식을 마주한 것 같았다.
마치 김관수 관장의 산골 집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을 때, 그리고 아주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했던 때를 연상케 하는 느긋함이었다. 그 느긋함에 흠뻑 취해 현성이 포근한 초원에 등을 붙이고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흩날리는 분홍빛 벗 꽃이 새파란 하늘과 대조를 이뤄 마치 한 폭의 그림이 눈 앞에 펼쳐져 있는 듯 했다.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현성이 자그마한 손을 뻗어 만져 보려 하자 자그마한 꽃잎 하나가 톡 하고 그의 손에 닿아 어느 샌가 그의 얼굴을 향해 떨어졌다.
“아…….”
부드럽고 간질한 그 감촉에 저도 모르게 현성이 손을 올려 얼굴로 떨어진 꽃잎을 어루만져 보았다. 작고 부드러운 꽃잎 너머로 느껴지는 부드럽고 매끈한 피부. 언제였는지도 모를 그 멀쩡한 얼굴의 감촉에 현성이 저도 모르게 등을 붙이고 누워있던 초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
무엇인지 모를 기분 좋은 봄결 속에서 느껴지는 맨들 맨들한 피부는 화상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것 같았다. 문득 거울을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던지 현성이 봄의 느긋함, 향취에 취해 있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대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거울을 찾긴 힘이 들 것 같았다.
“여는 어디지……?”
참 이상하게도 아무런 궁금증도 없다가 그제야 궁금증이 밀려왔다.
그 사실에 현성이 참 나는 멍청하다 생각하며 푸른 초원을 향해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여전히 불어오는 바람과 따스한 볕이 좋아 걷는 것만으로도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스르륵 하고 내리 깔린 봄의 초원이 부대끼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다시 미소를 머금은 채 현성이 어딘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걸음을 내딛었다.
참 이상했다. 궁금하다가도 또 다시 바람을 맞으니 궁금한 것도 사라졌다. 무척이나 평화롭고 기분 좋은 곳이었다. 단조로워 보이기도 했지만 그건 차라리 행복이었다.
“아무 것도 없네…….”
여긴 더 이상 그에게 손가락질을 할 사람도, 냉담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도망칠 사람들도, 그리고 고통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홀로 남겨진 따스한 세상. 그게 무척이나 행복한 듯 현성이 미소 지었다. 여름과 겨울만 반복되던 기긴 계절 끝에 드디어 오래도록 편히 쉴 수 있는 봄이 온 것만 같았다.
“아…….”
한참을 걷던 그가 도무지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여길 또 왜 걷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던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초원 위에 몸을 내던졌다.
“빙시가……?”
-스르륵…….
바람에 부대끼는 잔디 소리가 기분 좋게 귓가를 흔들고 있었다. 따스한 볕에 잠이 솔솔 밀려와 이대로 눈을 감으면 무척이나 행복한 기분으로 편히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눈을 감으면 정말로 편안하게 잠이 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으음…….”
이불도, 배게도 없었지만 너무나도 편안해서 말이다. 마치 어머니의 뱃속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채 현성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바람에 춤을 추는 잔디들의 소리가 더욱 더 정겹게 들려왔다. 스윽, 스윽 하고 피부와 와 닿는 느낌 하나, 하나가 기분 좋게 보듬어 주는 손길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좋았다.
볕도 좋았다.
싱그러운 향기도.
모든 것이 너무나 좋게 느껴져 왔다.
그리고 현성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려 했지만 쉽게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불현 듯 그가 손을 뻗어 다시 자신의 얼굴을 매만져 보았다.
“아…….”
맞아, 거울을 찾으려고 했지.
그리고 다시 현성이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과 볕. 그 모든 것들이 평온한 가운데 미소와 함께 현성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탁탁 털어 보았다.
“거울…….”
어딜 가면 찾을 수 있을까?
“여는 대체 어디지……?”
다시 한 번 더 호기심이 밀려왔다. 그렇지만 그걸 그렇게 알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곳은 너무나도 좋은 곳이고, 내내 이곳에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평화로운 곳이었다. 이전의 끔찍했던 전쟁 같은 삶과는 너무나도 다른 곳이었다.
바로 그 순간 현성이 ‘아…….’ 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무엇인가 아주 큰 뭔가를 잊고 있었던 것 같단 느낌이 불현 듯 그의 몸을 스쳤다.
“……뭐지?”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리고 굳이 생각을 돌이켜 볼 필요도 없단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해봤자 맘만 상하지…….”
이내 미소와 함께 현성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시 또 무엇을 하려 했던지 목적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렇게 기분 좋은 봄의 초원을 다시 걸어, 또 걷던 현성이 뭔가가 이상하다 싶었던지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도 가도 안 변하네.”
또 다시 쉬고 싶단 마음이 밀려 왔다. 그리고 현성이 고민에 빠진 듯 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울을 찾아야 되는데…….”
거울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아니, 그런 게 있기나 한 걸까?
그 생각에 현성이 다시 주저앉아 쉬고 싶다 생각한 듯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몰라도 몸엔 힘이 없는 것 같았다. 이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여기에 머물러 계속해서 쉬고 싶단 생각만 들었다.
그리고 현성이 다시 한 번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져 보았다. 자그마한 손엔 화상 따윈 전혀 만져지지도 않았다. 맨들맨들, 아기피부처럼 보드라운 피부가 만져져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도 궁금한데.”
왜 사라져 버린 걸까?
얼굴의 상처가 말이다. 그게 참 궁금했던지 현성이 ‘에이…….’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거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그 비슷한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을까? 그 생각과 함께 현성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신발도 신지 않은 맨 발 아래로 느껴지는 흙들이 무척 부드러워 느낌이 좋았다. 다시 한 번 더 걸음을 내딛으며 현성이 거울과 비슷한 무엇인가를 찾아야지 하고 주변을 돌아보다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왜…… 나는 가만히 있질 못 하노……?”
이젠 쉬어도 될 텐데 말이다. 그렇게 힘들게 달려왔으니 이제는 쉬어도 될 텐 데 말이다. 하지만 걸음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아주 평화롭고, 아주 좋은 곳이었지만 거울을 찾고 싶었다. 거울, 아니면 그것과 비슷한 뭔가를 말이다. 왜인지는 현성도 알 수 없었다. 단지 그것을 찾아내고 싶었다. 아무리 편안한 곳이라도, 아무리 잘 잊어버리는 곳이라 해도 그걸 찾아서 얼굴을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어디쯤 왔을까? 얼마만큼 걸었을까?
문득 다시 의문이 들었을 때 현성이 그 자리에 멈춰서 웃음 짓고 말았다. 옮겨진 발걸음을 또 다시 옮길까? 다시 생각을 해보았지만 여전히 주변은 변하지 않았고, 길도 보이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풍경 속. 더 이상 불어오는 바람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괜시리 서러운 맘이 밀려와 그 맘 달래려 걸음을 옮기던 현성이 점차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서 봄의 초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지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달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달리고 또 다시 달려 이 넓고 푸른 초원의 끝까지 가면 거울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 그 비슷한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을까?
그렇게 한참을 내달리던 현성이 어느 샌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휙 쓰러지고 말았다.
“아…….”
왜 자꾸 멍청하게 거울을 찾는 걸까? 왜 자꾸 멍청하게 이 좋은 곳에서 쉬지 못하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마는 것일까?
“그래도…….”
그걸 찾지 못하면 앉아서 쉴 수가 없을 것 같아.
그 생각과 함께 현성이 다시 한 번 더 지친 몸을 일으켰을 때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어왔다. 눈을 뜰 수 없게 만드는 강한 바람에 잠깐 현성이 눈을 감고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불어온 돌풍이 다시 잠잠해지고 따스한 바람이 되었을 때.
그 봄바람 속에서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 그 자리엔 무척이나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어딜 그렇게 가노?”
인자한 얼굴로 물음을 던지는 그는 현성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현성이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내 얼굴…… 볼라고요. 거울 찾으러 가요.”
그 말에 그가 후후 웃으며 대답했다.
“거울 안 봐도 될 정도로 아주 잘 생깄는데?”
웃음 섞인 그 대답에 현성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빠 말은 안 믿을 건데. 다 잘 생깄다 칼 거니까.”
그리고 현성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두근두근 가슴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토록 그리워 하던 아버지를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다니! 너무나도 기분 좋고 행복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완벽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몸은 자꾸만, 자꾸만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현성아, 어디 가노? 아빠 여기 있는데?”
“내 거울 찾으러 간다, 아빠. 거울.”
“그런 거 찾지 말고 여서 아빠랑 같이 있자! 엄마도 여 있다!”
그 순간 현성이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바람이 불어 왔다. 계속해서 불어오던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흔들었고, 그리고 그 마음도 흔들고 말았다. 어느 샌가 밀려오는 슬픈 기분에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아빠. 내…… 얼굴 괜찮나? 한 개도 안 이상하나?”
“그래, 한 개도 안 이상하다! 우리 아들, 세상에서 제일 잘 생깄는데?”
그 말에 현성이 저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희뿌옇게 물든 시야와 자꾸만 파르르 떨리는 입술. 저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하고서 현성이 고개를 흔들었다.
“거짓말 치지 마라. 아빠…….”
“거짓말 아이다, 현성아! 우리 현성이 얼마나 잘 생깄는데!”
따스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를 아른아른 맴도는 것만 같았다. 환한 빛을 등 진 듯 잘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현성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다. 내 잘 생긴 건 아이다……. 그건 내도 안다. 그냥 보다 보면 괜찮은 호감형이지…….”
자기 자신은 자신이 가장 잘 안다는 듯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현성이 그리 이야기 했다. 그 말에 아버지가 ‘음!’ 하고 웃으며 말했다.
“맞나? 카면 우리 엄마한테 같이 가가 누구 말이 맞는지 함 물어 보까?”
그가 기억하는 그대로 젊은 날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버지는, 그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다정하게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현성이 무척이나 기쁘고 행복한데도 자꾸만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다……. 내 가야 된다.”
점차 거칠어지는 호흡 속에 더 이상 기분 좋은 바람은 불어오지 않았다. 완벽했던 볕도 점차 뜨거워 져 가기 시작했다. 흩날리던 꽃잎도 시들 듯 바스러져 버렸고, 푸른빛의 초원도 서서히 매말라 가기 시작했다.
“와……? 거울 찾을라고……?”
그런 현성을 무척이나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보며 아버지가 물음을 던졌다. 그 말에 현성이 어느 샌가 굳은살 박힌 크고 거친 손으로 다시 까칠까칠, 거칠어진 흉터를 어루만지며 ‘아니.’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거울 말고…… 가야 된다. 내…… 할 일이 있어가.”
그 말과 함께 현성이 점차 잊고 있었던 것들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숨이 막 힐 듯 고통스러운 감정들이 또 다시 밀려와 억장이 무너져 내려 앉는 것만 같았다. 가슴을 움켜쥔 채 괴로워하는 그를 보며 아버지가 안타까운 듯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글썽이는 눈으로 말했다.
“가지 마라, 현성아! 가가 힘든데, 차라리 여서 내랑 니랑 엄마랑 셋이 같이 있자! 가지 마라!”
“……안 된다. 내 가야 된다, 아빠…….”
“가면 니만 힘들다 아이가? 이래 힘든데, 이래 니 맘이 괴로운데 왜 갈라 카노! 가지 마라, 현성아.”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다는 듯 그가 소리쳤다. 그 애절한 애원에 현성이 거의 무너질 듯 흐느끼며 고개를 흔들었다.
좋은 시절은 가고 다시 여름이 시작된 것 같았다. 이 여름도 가시면 차디찬 겨울이 밀려오겠지. 그리고 그 시간은 다시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 차겠지.
하지만 만들어진 이 세계에 갇혀 있을 순 없었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완벽한 듯 보였지만 현성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 그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거칠고, 힘들더라도, 때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라져버리고 싶은 괴로운 곳이라 해도 그가 가야만 하는 곳이 있었다.
“돌아간다고 약속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봄, 그리운 사람들을 지나서 정말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서러운 대답을 토해내며 현성이 다시 한 번 고개를 흔들었다. 그와 함께 점차 아버지의 모습도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곳이 어디인지, 어떤 곳인지 전혀 알 길이 없었지만 이젠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면…… 또 힘만 들 건데 괜찮겠나……?”
그건 현성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렸던 봄. 끝나지 않는 봄의 세계. 그리고 그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그 시간에 멈춰버린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고 있는 곳.
“응……. 괜찮아. 괜찮다.”
그리고 현성이 너무 늦게 기억해낸 아버지의 말을 다시 한 번 꺼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제 내 더 이상 4살 먹은 아 아이잖아. 이제는 22살이나 먹었는데…… 이젠 진짜 괜찮다.”
더 이상 그 날의 시간에 갇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옛 시간을 그리고 있지만은 않는다. 이젠 정말로 괜찮아졌다. 거울을 보아도, 상처투성이 얼굴을 보아도 괴로워하거나 숨고 싶어 하지 않는다. 더 이상은 어린 시절에 사로 잡혀, 그 상처로 고통스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아들 마이 컸네.”
“아빠보다 이제 훨씬…….”
그건 그가 기억하고 있는 허상이자 추억일 뿐. 하지만 왜 이리도 서글픈지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흐느끼며 대답한 현성이 단단한 두 팔로 서러운 눈가를 훔쳤다.
“진짜 너무 보고 싶었다. 진짜 너무너무 보고 싶었데이, 아빠…….”
진짜가 아니더라도, 이렇게라도 볼 수 있다니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 말에 아버지가 후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니 정말 보고 싶었다, 현성아.”
그 말에 현성이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감정을 느끼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내가 왜 모르겠노……?”
이제는 알고 있다. 이제는……. 그 마음도 모른 채 평생을 바보처럼 살아온 멍청한 아들이니 더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한 원망 따위는 눈꼽만큼도 없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을 말이다. 그게 너무나도 감사하고 아려와 현성이 차마 눈을 뜰 수 없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부지한 목숨. 그것도 모르게 스스로를 몰아세우기만 했었다. 그리 아끼는 마음으로 살린 몸을 그리 험하게 다루었다. 그 자체가 또 다른 죄책감이 되었고, 고통이 되어 밀려 왔다만…….
“그래, 우리 아들. 괜찮아, 괜찮다.”
가야만 했다. 그걸 아는지 아버지가 현성을 꼭 끌어안으며 그의 등을 다독였다. 그 따스한 손길과 음성, 현성이 기억하는 모두 그대로였다. 그의 품에서 흐흑 하고 소리 내어 흐느끼며 현성이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심다…… 진짜 정말…… 너무…… 고맙심다…… 아부지…… 어무니…… 내 부모님이라서 정말 고맙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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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과의 완전한 이별. 목표 없는 안락에 대한 경계. 자신에 대한 직시.
그리고 생에 대한 의지.
최종장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