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274화 (274/281)

- 274 회 - 괴물

“미안! 많이 늦었지?”

미국은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게 오히려 더 어려운 감이 있는 곳이었다. 땅이 워낙 넓기도 했고, 기름 값도 싸다 보니 자동차가 보편화 되어 잘 이용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만 시간이나 노선을 미리 체크하는 것도 일이었으니까.

그런 탓에 현성과 제이드 모두 제시카가 돌아올 때 까지 커투어 짐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이드를 데려다 주고 바로 라스베가스 중심가에 있는 스튜디오로 촬영을 위해서 떠났던 그녀인지라 예정보다도 촬영이 딜레이 되었던 모양이다.

조금은 피곤한 기색이 섞여 있는 얼굴로 제시카가 현성과 제이드를 보며 그리 이야기 하자 두 사람이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듯 함께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 같이 욕하고 있었으니까.”

비교적 온순해진 제이드가 입을 삐죽이며 그리 이야기 하자 제시카가 ‘너무해!’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와 달리 오늘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제이드와 현성이 힐끔 제시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낯빛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어……?”

아무리 무관심한 척 해도 그녀는 제이드의 유일한 가족이 아니던가? 그걸 모를 리 없는 제이드가 물음을 던지자 제시카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피곤해서 그래! ㅃㆍㄹ리 들어가서 푹 쉬자!”

그 말에 제이드가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웬만해선 밖에서 있었던 힘든 일은 절대로 이야기 하지 않는 제시카였다. 그렇기에 촬영 때 무슨 일이 있었다 해도 자신에겐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지 이내 그가 뚱한 표정으로 ‘쳇!’ 하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자기만 피곤한가!”

투덜거리는 제이드의 모습에 현성이 본심은 그게 아닐 텐데 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제시카가 그래도 귀여운 투정이라 생각한 듯 후후 웃음 지었다.

“……무슨 일 있었심까?”

그리고 그런 그녀를 향해 현성이 물음을 던졌다. 그 말에 제시카가 ‘음…….’하고 생각하다 고개를 흔들며 팔짱을 꼈다.

“피곤해서 그래요.”

이내 현성에게 기대어 온 그녀. 그 말에 현성이 묘하게…… 예전 혜주가 떠올랐던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제시카의 어깨를 다독였다.

“기운내요.”

그 말에 제시카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텐 두 사람을 무사히 집으로 데려다 줘야 한단 의무가 있으니까요!”

그는 무슨 일이 있었나 쉽게 묻지도 않는다. 그리고 쉽게 판단하지도 않는다. 있는 그대로 제시카의 모습을 보고, 속 깊은 목소리로 위로를 해주었다. 그게 너무나도 좋았던지 제시카가 다시 한 번 더 현성의 팔을 꼭 끌어안아 보였다.

“오른팔이 약해질 거 같은데…….”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뭉클하고 포근한 느낌에 현성이 장난처럼 이야길 꺼내자 제시카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앞으론 왼 팔에 할게요!”

안 할 생각은 곧 죽어도 없단 그녀의 말에 현성도 덩달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두 사람이 마치 연인처럼 다정하게 웃고 있는 동안…….

“피곤하다면서!”

기다리고 있던 제이드가 후드를 눌러 쓴 채 툴툴 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제시카가 ‘윽!’ 하고 아쉬운 표정과 함께 미소 지었다. 언제나 밝고 건강하다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말로 얼굴에 피로가 쌓여 지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녀도 어디선가에 기대어 쉬고 싶은 듯 한 모습.

“가요! 제이드가 더 화내기 전에!”

아무리 당차고 적극적인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연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엔 결코 익숙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따랐다. 알렉세이 코치와 용훈은 먼저 숙소로 돌아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터라 현성으로써도 더 늦어선 걱정을 끼칠 수 있을 테니.

“아…….”

제시카의 낡은 폭스바겐 안에 들어가자 마자 제이드가 뒷좌석에 뻗어 버렸다. 칠 때는 재미있다 계속 미트를 두드렸지만 이제야 피로가 몰려오는 모양이다.

“힘들다.”

넓은 뒷좌석을 침대 삼아 벌렁 드러 누운 그 모습에 제시카가 ‘제이드!’ 하고 잔소리를 하려 했지만 현성이 먼저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 많이 운동해가.”

“아, 정말로……?”

그의 말에 제시카가 후후 웃으며 다시 동생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빛도 모른 채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는 제이드.

“대체 그런 걸 하루 종일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

현성의 훈련 량은 정말 말이 되질 않는다는 듯 툴툴 거리며 등을 돌리고 누운 소년의 모습에 현성과 제시카 모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로제스타와의 타이틀 샷을 준비하고 있는 터라 평소보다 훨씬 더 레슬링과 파워 증강 훈련에 몰두하다 보니 현성 또한 피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만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풀리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화상 입은 험상궂은 얼굴이라지만 그 위에 그려진 인자한 웃음은 그 어떤 명화가의 그림보다도 따스해 보였다. 그 모습을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듯 바라보며 제시카가 말했다.

“벨트 매요.”

“아…….”

그리고 현성이 벨트를 잡기도 전에 그녀가 살짝 입술을 깨물고 장난스런 미소를 띤 채 먼저 안전 벨트를 잡았다. 남다른 발육의 주인공인지라 자연스럽게 그의 몸에 닿은 제시카. 그 모습에 현성이 순간 저도 모르게 ‘두근!’ 하고 가슴이 크게 움직이는 것을 느끼곤 어색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크르르…….”

어느 샌가 등을 돌리고 누운 제이드가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묘한 분위기는 와장창 깨지고 말았고, 제시카가 푸훗 웃음을 터뜨렸다.

“큭…….”

현성 역시 웃음이 터진 건 마찬가지! 제시카가가 귀여운 동생의 모습에 정말로 기분이 좋은 듯 환한 웃음을 머금은 채 잡고 있던 벨트를 놓고 현성의 품에 안겨 왔다.

“……아, 제시카…….”

“……사실 오늘 너무 힘들었어요. 야단을 많이 맞았어요. 잘 하려고 했는데…….”

현성의 품에 얼굴을 긴 채 속상함을 토로하는 그 모습은 여느 20살 아가씨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나 때문에 촬영도 늦어지고 다들 많이 힘들어 하는 것 같아서…….”

책임감이 강한 그녀는 그것이 아무래도 가장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 말에 현성이 아무 말 없이 제시카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정말……?”

단지 따스한 얼굴로 물음 한 마디를 던져 줄 뿐. 그 말에 제시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으로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품이 너무나도 좋다는 듯 후후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향이 나요.”

“……음, 땀 냄새……인데.”

로맨틱한 분위기를 깨뜨리고 싶진 않았지만 가서 씻는 게 먼저였던지라 현성의 그 말에 제시카가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곤 얼굴을 마주 했다.

“노력의 냄새.”

파란 눈의 라티노 미녀가 활짝 웃으며 그런 게 아니라 대답했다. 그 말에 현성이 땀 냄새 보단 그게 훨씬 더 좋은 어감이라 생각했던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다시 한 번 더 묘한 분위기가 맴돌기 시작했다.

“하아…….”

가슴이 벅차 오르는지 제시카가 먼저 뜨거운 숨결을 토해냈다. 그 모습에 현성이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그 순간만큼은 몸이 이성의 지배를 잃어버린 듯 한 묘한 느낌을 받으며 멈춰서고 말았다.

-두근두근두근…….

요동치는 심장에 저도 모르게 목이 타올라 꿀꺽 침을 삼켰다.

“으음…….”

그리고 두 사람을 방해하는 제이드의 뒤척임.

“아!”

그 소리에 제시카가 동생을 뒤에 두고 이러는 것이 무척이나 민망해졌던지 혀를 살짝 내밀고 부끄러운 웃음을 지었다.

“빨리 들어가요!”

수줍은 듯 발그레 해진 얼굴로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현성이 머리가 무척이나 복잡해진 것인지 잠깐 눈을 감고 말았다.

아무래도 혼자인 기간이 너무 길었던 걸까?

아니, 20년을 홀로 지내왔으니 기껏해야 1년도 채 되지 않는 이 시간이 그렇게 길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따뜻함과 애정이란 것을 맛보았기 때문인지 이젠 홀로 버티는 지금이 참 외롭고 쓸쓸하단 생각도 들어왔다. 누구든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직까진…….”

그리고 현성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아직까진 아닐 것이다. 그게 누가 됐던지 말이다.

“네?”

운전 하고 있던 제시카가 미처 듣지 못한 듯 현성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현성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5월 12일이 지나면 난 내가 있을 곳으로 돌아갈 거에요.”

그때 까진 이 기다림에 지친 맘도 계속 안고 가리라. 그 마음의 결정에 제시카가 그의 선택을 존중한다 미소 지어 보였다.

“내 옆은 어때요?”

그가 어떤 선택을 하던지 존중은 하겠지만 아쉽긴 할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지금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두려움 없이 마음을 꺼내리라. 그 말에 현성이 자꾸 유혹 하지 말라는 듯 난처한 눈빛을 해보였다.

“이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넘어 올 것 같은데!”

“5월 12일까진 절대로.”

보통은 반대가 되지 않을까? 이런 대단한 미녀가 계속해서 유혹을 해준다는 것도 고마운 게 사실인지라 현성이 옅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 말에 제시카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그 다음에 내가 UFC 헤비급 챔피언을 쓰러뜨리겠군요!”

묘하게 섹시한 그녀의 음성에 현성이 흠흠 하고 기침을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몸이 가까우면 마음도 가까워진단 것이 사실일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향했지만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울고 있던 혜주와 사키의 모습들이었다. 그 장면들을 잊을 수도, 지을 수도 없었다.

“……근데 나는 빙시 같은 놈이라가…….”

그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 지는 현성도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말에 제시카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믿음직한 사람!”

그리고 그 어느 샌가 다운타운 동부 스트리트에 도착한 그녀의 차. 주차장이 따로 없는지라 그 앞의 갓길에 차를 세워둔 제시카가 ‘다 왔다!’ 하고 해방감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

“제…….”

“쉿. 내가 데리고 가께예.”

아주 곤히 잠이 든 제이드를 굳이 깨울 필요는 없다 싶었던지 현성이 그러지 말라 이야기 하자 제시카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에서 내린 현성이 조심스럽게 제이드를 안아 올렸다. 이제 12살이라지만 또래보다 작은 체구인지라 그의 품에 안겨 잠이 들어 있는 제이드는 훨씬 더 어리게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아버지와 아들 같다 생각하며 제시카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로 와요.”

그리고 그녀가 자신은 계속해서 그를 유혹할 것이라 장난스런 미소를 머금고 말하자 현성이 난처한 웃음을 터뜨렸다.

“가요!”

하지만 계속해서 그를 난처하게 하진 않을 생각이다. 할 수 있는 데 까지 노력은 해보겠지만 그게 정말 안 된다면 포기 할 줄도 알아야 할 테니까. 단지 그 정도로 놓치기 싫은 사람이란 걸 현성이 알아 주면 좋겠다 생각하곤 제시카가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음?”

시간이 조금 늦었다지만 유난히 어두운 건물은 불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에 현성이 조금 놀란 듯 ‘어?’ 하고 물음을 던지자 제시카가 익숙한 일이라는 듯 핸드폰으로 불을 밝히며 말했다.

“건물이 오래돼서 가끔씩 이렇게 정전이 될 때가 있어요.”

그리고 그녀가 익숙한 듯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또각또각 하는 소리와 함께 혹시라도 제이드를 안고 있는 현성이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 되었는지 연신 뒤를 돌아보며 길을 비춰 주는 제시카!

“정전이……?”

가난한 동네라고 하더니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원래 비상용 발전기를 돌리기도 하는데 오늘은 그것도 퍼진 모양이네요. 이래서 내가 여길 빨리 떠나고 싶어 하는 거에요.”

높은 굽으로 4층까지 올라가는 게 힘이 들었던지 제시카가 숨을 후후 내쉬며 말했다.

“조금만 더 돈을 번다면 여기가 아니라 플로리다로 갈 거에요. 탁 트인 바다가 보이는 곳에 2층 집을 사서, 제이드와 함께 둘이서 지내는 게 꿈이에요.”

“나도 비슷한 집에서 살고 싶은데…….”

“그럼 같이 살래요?”

때를 놓치지 않고 유혹하는 제시카의 모습에 현성이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두고 봐요. 내가 포기 하는지!”

아마 제시카와 함께 있는다면 모든 순간이 참 즐거울 것만 같았다. 그 생각과 함께 현성이 4층 계단을 모두 다 올랐을 때.

“제시카, 늦었구나.”

그녀의 집 바로 옆에 살고 있는 할머니가 촛불을 비춰 보였다.

“안녕하세요.”

익숙한 듯 인사를 건네는 제시카의 모습에 그녀가 홀홀 웃음 짓자 묘하게 그게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단 생각이 들었던지 현성이 움찔하고 말았다. 보기와 다르게 그런 것에 놀라는 현성을 보며 제시카가 다시 후후 웃음 지었다.

“제이드는 자고 있니?”

“네, 일어나면 아침일 테니 괜찮을 거에요.”

인자한 할머니의 목소리에 제시카가 후후 웃으며 대답해 보였다. 그 목소리에 할머니가 인자한 웃음과 함께 잠이 든 제이드의 등을 쓰다듬었다.

“이 애도 잊으면 좋으련만.”

친 할머니는 아니지만 그들의 사연을 알고 있는지 걱정 섞인 그녀의 목소리에 현성이 다시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돌이켜 보면 제이드도 참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단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초는 가지고 있니?”

“집 안에 있을 거에요. 그리고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바로 기절 할 것 같아요! 걱정 마세요!”

제시카의 밝은 목소리에 할머니가 홀 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촛대를 들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자 제시카가 미소와 함께 말했다.

“방금 놀랐죠?”

“……아. 갑자기 초 들고 할머니가 나오니까…….”

그 모습에 제시카가 다시 함박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열쇠로 문을 열고는 대답했다.

“자주 불이 나가고 하니까 초를 모두들 하나씩 비치해두고 있어요. 제이드가 어릴 땐 어두운 걸 너무 무서워해서……. 지금도 마찬가지일 거에요. 겁이 많거든요. 이쪽으로…….”

그 말에 현성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둠 속 제시카를 따라서 현성이 제이드를 그의 방으로 데려다 놓자 세상천지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르고 잠든 제이드가 입을 떡 하니 벌리고 쌔근쌔근 숨을 내쉬었다.

눈을 뜨고 있을 땐 더 없이 까칠한 꼬맹이지만 지금 이 모습은 천사와 다를 바 없었다. 그 모습에 현성이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를 짓자 제시카가 후후 웃으며 발꿈치를 들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고생했어요.”

쪽 소리와 함께 그녀가 그를 향해 고마움을 표현하자 현성이 계속 이런 유혹이 있는다면 정말 버티지 못 하겠다 싶었던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만 이것 좀 들어 줄래요?”

그리고 제시카가 현성에게 핸드폰을 내밀고는 거실 중앙에 비치해둔 촛대의 초에 불을 붙였다.

“꽤 로맨틱하죠……? 차라도 한 잔 하고 갈래요?”

제이드가 깨지 않게 방문도 닫고서 제시카가 이제 급한 것들은 모두 끝이 났다는 듯 그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환한 불빛이 어둠을 몰아냈고, 그 빛에 빛나는 제시카의 얼굴은 영화 속 여주인공들과 비교해도 모자랄 것 없이 아름다웠다.

아마 이대로 여기에서 그녀와 함께 밤을 지새울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녀의 눈빛이 그리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코치님이 가디리고 있으셔가.”

하지만 그는 여전한 사람이었다. 혜주 말대로 줘도 못 먹는 녀석. 새삼스럽게 그 말을 떠올리며 현성이 미소 지었다. 그 모습에 오히려 제시카가 아쉬운 듯 그를 바라보다 조금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여잔지 몰라도 부러워요.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조금은 시무룩한 얼굴로 입술을 내민 제시카의 모습에 현성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나이 많고, 몸도 안 좋고, 잘 울기도 하고…… 예쁜 여자요.”

바람결에 흔들리는 갈잎처럼 마음이 나폴나폴 흔들린다 한 듯 뿌리는 여전했다. 그리고 그는 그 믿음을 배반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사키나 제시카가 그에게 해준 것들이 너무나도 많고, 따스하며, 좋단 것을 알아도 말이다.

환하게 빛나는 불꽃 속에서 그가 혜주를 향한 마음을 드러냈을 때 제시카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내가…… 이기기 힘들 거 같네요.”

처음으로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인 그녀. 그리고 제시카가 그를 향해 다가와 말 없이 현성의 품에 얼굴을 기대었다.

“하지만 포기 하진 않을래요. 심판이 경기 끝났다 하기 전까진.”

그리고 그녀가 다시 한 번 더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 자체로 기댈 수 있는 그가 너무나도 좋다는 듯 말이다.

“잘 자요.”

그런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포옹 밖에 없었다. 제시카를 꼭 끌어 안고서 현성이 인사를 건네자 제시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몸을 마주 안았다. 가지 말라 붙잡는 그녀의 손길에 그가 조금 난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그녀가 무척이나 수줍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날 그렇게 쓰다듬어 준 사람은…… 아버지 말곤 처음인 거 알아요……?”

“아…….”

“난 당신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애틋한 그녀의 눈빛에 현성이 잠깐 멈춰 섰다. 그리고 제시카가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내일 봐요!”

톡 쏘는 듯 하면서도 너무나도 적극적인 그녀! 그 진솔한 모습에 현성도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응. 내일 봐요.”

그그리고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제시카와 제이드의 집을 나섰다. 바로 옆 블록인지라 크게 멀진 않았다. 곧 어둠을 지나서 현성이 홀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불이 꺼져 있는 건물 안에서 초를 밝힌 것인지 몇몇 창가에 어두운 불빛이 빛나고 있었다.

“5월 12일…….”

그 날에 이제 모든 것들이 결정이 날 것이다. 챔피언의 자리에 올라서, 그가 정말로 자기 자신을 제대로 된 사람으로 볼 수 있다면 그가 필요한 자리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그 날은 처음으로 패배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그로 인해서 준비하고 있던 것들이 모두 무너진다면 그땐 또 어떻게 해야 할지도 사실은 모를 일이었다. 혹여나 그런 일이 있다면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패배는 단 한 번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만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승리보다도 얼마나 수긍을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느냐가 더 중요하단 사실이 문득 현성의 가슴을 스쳤다. 승자로 자리매김해서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것보다 설령 패자가 된다 하더라도 모두가 박수를 보낼 수 있는.

“노력의 냄새…….”

제시카가 해준 그 말을 떠올리며 그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설령 패배 한다 하더라도 그 날 여지껏 준비 해왔던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이젠 내가 나를…….”

용서 해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 생각과 함께 현성이 한 블록 너머의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늦었어, 현성! 혹시?”

기다리고 있던 알렉세이 코치가 후후 웃으며 말하자 현성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여도 전기가 나갔나봐예?”

“여긴 흔한 일이라더군. 씻고 쉬어야지? 불은 내가 밝혀 줄게.”

문을 열어 놓고 빛을 밝혀 주겠단 알렉세이 코치의 농담에 현성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관장님도 내일 오고 하면…… 진짜 이번엔 목숨 걸고 열심히 할게예. 코치님.”

“여기서 더 하다간 죽을 지도 몰라. 휴식도 필요하다구!”

타고난 재능에 지독한 노력이 더해지니 이 정도로 빠른 성장이 있었을 것이다. 알렉세이 코치가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현성이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 날은 기왕이면 꼭 이길 수 있게…….”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린 현성이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자기가 수긍 할 수 있는 노력과 결과만 있으면 돼. 가끔은 그게 부족하다 싶더라도 다음이 있으니까. 현성은 아직 젊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어. 포기만 하지 않으면 돼. 시간은 우리의 편이니까.”

알렉세이 코치의 목소리에 힘입어 현성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카면 좀 씻고 잘 준비 할 게예. 초는 그냥 요 앞에 놔 두셔도 되는데…….”

“음, 그러도록 하지!”

현성의 말에 알렉세이 코치가 촛대를 화장실 앞에 두자 현성이 그 안으로 걸음을 옮겨 보였다. 밖에서 빛나는 빛이 새어 들어와 화장실의 거울 안에 비친 그의 얼굴이 보였다. 어둠에 가려진 화상 자국과 빛을 받아 거울에 비치고 있는 화상 없는 얼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이제야 받아들이게 되었다 생각하며 그가 옷을 벗었다. 그리고 노력의 흔적들을 씻어 내고 한결 개운해진 기분으로 밖으로 나왔을 때.

-퍼엉!

순간 어디선가 큰 폭발 소리가 들려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 폭발 소리에 순간 현성이 크게 움찔하며 초를 들고 걸음을 옮겼다. 혹시라도 총격이 있었나? 이 곳은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는 곳이란 이야기를 전해들은 바 있었다.

그러나 그건 총소리완 조금 달랐다. 총소리라기엔 너무나도 거대했다.

“무슨 일이야?!”

잠깐 잠이 들었던 알렉세이 코치도 그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듯 보였다. 그 물음에 대답할 시간도 없이 현성이 창가에 섰을 때.

창가 너머 멀지 않은 블록 너머에서 환한 빛이 보였다.

“어……?”

그의 곁에 선 알렉세이 코치가 놀란 목소리로 물음을 던지며 저도 모르게 현성을 돌아보았다.

“저기 혹시……?”

그의 물음이 떨어지기 무섭게 순간 불안감이 현성의 가슴을 스쳤다. 그리고 그가 들고 있던 촛대를 바닥에 내려두고 다시 옷을 걸치고는 밖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현성!”

“코치님! 전화! 소방서에 신고 해주세요!”

설마…… 그곳이 제시카와 제이드가 있는 곳은 아니겠지? 불안감이 심장이 미친 듯 뛰어 오르기 시작했다. 터질 듯 요동치는 심장 소리 속에서 촛불을 들고 있던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제발 그러지 마……! 제발!’

그리고 현성이 ‘안 돼! 위험해!’ 하고 말리는 알렉세이 코치를 뿌리치고 밖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두근두근두근 하고 불안감이 심장을 사정 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매번 틀린 적 없었던 불안감이 이번만은 빗겨 나가길!

이내 현성이 순식간에 그 자리에 도달 했을 때 이미 그 소리를 듣고 놀라서 나온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다.

“불이야! 어서 신고해!”

매캐한 연기가 건물의 깨진 창 사이로 스며 나오고 있었고,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화마가 새빨간 혓바닥을 사악하게 낼름거리고 있었다.

안에 있던 사람들도 일부는 밖으로 나와 ‘오 마이 갓!’ 하고 비명을 내지르며 웅성이고 있었다.

“아…….”

그 건물은 다음이 아닌 낡은 폭스바겐이 바로 앞에 세워져 있는 그들의 건물. 그것을 본 순간 현성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왜 불안한 예감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 걸까?

“안에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어! 어서!”

그리고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현성이 건물 안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 안에서 나온 사람인지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그를 붙잡았다.

“이 봐! 위험해! 안으로 들어가면 안 돼! 또 폭발이 있을지도 몰라!”

수염이 덥수룩한 그 남자 역시 절박한 얼굴이었다. 이 낡은 동네에서 그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런 영웅심으로 무모한 짓은 하지 말라 현성을 나무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영웅심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끔찍한 과거를 떠오르게 하는 묘한 그림이 현성의 머리를 스쳤다. 울렁거림이 점점 커져 불편해진 속을 게워내고 싶단 충동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 순 없다. 여기에서……!

“놓으소!”

그리고 현성이 힘으로 그를 뿌리치고 화마가 거칠게 번지기 시작한 건물 안으로 뛰어 들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끝을 보겠슴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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