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263화 (263/281)

- 263 회 - 괴물

시합을 앞둔 긴긴 대기 시간.

기다림은 자못 지루하고, 버겁게 느껴졌지만 사실 그 시간은 현성이 아주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다소 길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것은 철저히 혼자임에도 외롭지 않았으며, 머리와 마음 모두를 복잡하게 만들던 것들을 모두 잊을 수 있는 시간들이었으니까.

“조니 헨드릭스! 폭발합니다! 조니 헨드릭스의 전매특허, 라이트 오버 핸드! 아, 경기 끝이 납니다! 조니 헨드릭스! 이제 G.S.P에 도전 할 수 있는 No.1 컨텐더 자격을 얻어냈어요!”

그건 어떤 의미론 그건 중독과도 같았다. 오감의 모든 신경이 살아나고, 머릿속은 어느 샌가 단 하나의 대상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건 사랑은 아니지만, 사랑만큼이나 뜨겁고 열렬했다. 아니, 어떤 의미론 그보다도 더 뜨거운 것 같았다.

“이제 남은 경기는 오늘의 메인이벤트! 장현성 선수의 데뷔전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잠시도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은 묘한 설렘 속에서 전율감이 싹트는 일이었으니까!

“네, 상대는 알리스타 오브레임! K-1 월드 그랑프리 챔피언과 스트라이크 포스 헤비급 챔피언을 역임한 바 있는 명실상부한 최강의 선수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렇게 애달파 할 필욘 없었다. 왜냐하면 매번 바뀌는 그 열망의 대상은 언제고 분명히 만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만남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허나 찰나의 순간으로도 그칠 수 있는 짧은 만남 속에서 그와 그가 나눌 수 있는 감정은 무수히 많다. 이뤄 말로 설명을 할 수도, 수로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역시나 애달파 할 필욘 없었다. 왜냐하면 그건 매번 몸으로 먼저 느끼는 것들이었으니까!

“이제 슬 준비 해야지!”

눈을 감고 있던 현성에게 나갈 시간이 되었다 김관수 관장이 이야기를 꺼냈다.

혹여나 그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음성과 손짓에 현성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에 밝은 대기실 불빛이 들어오자 눈이 조금 시린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휴식을 취하고 있던 감각이 더욱 더 예민하게 반응을 할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가볍게 목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됐나?”

“예, 관장님!”

언제나 같은 물음, 그리고 같은 대답!

그 말은 두 사람 사이에 묻어나는 신뢰인 동시에 하나의 약속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의 물음에 언제나 한결 같은 얼굴로 현성이 대답하자 김관수 관장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 순간, 순간 후회가 없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것!

그 쉽지 않은 일을 데뷔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해오고 있는 현성이기에 그 이상의 말은 필요가 없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그의 트레이너 인생에 있어서 현성과 같은 재능을 지닌 이를 만난 것은 세상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건 뜨거운 것이라 했지만 현성은 마치 불꽃같았다. 처음 보았던 작은 불씨는 이제 수천, 수만여명의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불꽃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이 거대한 불길이 미국 무대를 휩쓸 것이다.

“데뷔전 개안캤나?”

“문제 없심다.”

다시 한 번 더 물어본 물음! 그리고 확신에 찬 대답!

‘영웅도 비겁자도 두려움은 똑같이 느낀다. 다만 두려움 대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마이크 타이슨을 키워낸 명조련사 커스 다마토의 말대로 현성은 영웅에 가까운 이일 것이다. 이기려 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두려움을 받아들며 두려움을 친구로 만들기에! 그것을 조절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심지어 그건 반백에 가까운 김관수 관장마저도 힘든 것을! 어쩜 현성이 타고난 가장 큰 재능은 격투기에 최적화된 신체나 타고난 근력이 아니라 그런 마음가짐인지도 몰랐다.

그 거대한 불꽃이 미국을 시작으로 전세계를 뜨겁게 만들기를 바라며 김관수 관장이 소리쳤다.

“가자!”

그의 외침과 함께 현성과 민욱, 알렉세이 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욱과 예린은 함께 하지 못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응원 할 것이 믿어 의심치 않은 채 그들이 대기실을 나서자 UFC의 스태프가 ‘엑셀런트!’ 하고 소리쳤다. 일본보다 느긋해 보이는 그 모습에 절로 긴장이 풀린 듯 현성이 피식 웃음 지어 보였다.

“굿 럭!”

그리고 유쾌한 얼굴로 스태프가 응원을 보내자 현성이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밖에서는 현성과 오브레임이 사전에 UFC 측과 했던 인터뷰 영상이 흘러 나오고 있을 것이다.

“오브레임이 먼저야. 아무래도 데이나 화이트가 너한테 거는 기대가 꽤 큰가봐?”

그 사이에 민욱이 혹시라도 순서가 꼬이지 말라는 듯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대기실에서 내내 현성이 집중을 잃지 않도록 그 말하기 좋아하던 성격에도 불구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더니 해야 할 말은 꼭 해야겠다 싶었던 모양이다.

“쫌 부담스럽네.”

“부담스러울 게 뭐 있노? 타이틀 샷 노리고 있는데!”

“그래, 임마! 이건 기회라고! 기회!”

현성의 목소리에 김관수 관장이 그러면 안 된다는 듯 그의 등을 찰싹 두드리며 말했다. 연이어 민욱이 그런 마음가짐은 미국에선 별로 환영 받지 못하는 일이라 단호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미국 사람들은 겸손, 겸양보단 자기 실력에 대한 자신감을 더 좋아해! 괜히 그런 척 할 필요 없이 그냥 내가 이 정도다! 그렇게 얘기 하고, 기회가 오면 그걸 쟁취하라고! 괜히 미국이 기회의 땅이 불렸겠냐?”

그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현성이 미소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의 말 그대로였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걸 꿈 꿔 온 세대는 아니지만 이 무대를 말미암아, 현성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선다면…….

그건 그 자체로 충분히 ‘아메리카 드림’이 될지 모를 일이었다.

“무대에선 절대로 실망 안 시킨다. 걱정 하지 마라.”

그걸 다시 한 번 되새기며 현성이 민욱의 말대로 ‘자신’을 드러냈다. 필승의 각오보단 매 순간 그러했다. 그를 믿어준 그 누구도 실망하지 않게.

“오늘은 오브레임 말고 아무도 없다.”

현성에게 있어서 오늘 이 무대에 실망을 할 수 있는 건 오직 상대 오브레임 밖에 없었다. 그건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매 순간 두근거리는 맘으로 걸어나간 이 길을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오고 싶단 열망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든 현성을 바닥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는 존재였으니까.

그리 마음을 먹는다면 그렇게 쉽게 지거나, 물러설 수가 없었다. 분명 다시 일어날 수 있고, 이젠 그리 되지 않을 것을 알아도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물론 그것도 데뷔 초의 이야기들일 뿐!

지금은 확실히 그것과 달랐다. 과거로 밀려나가지 않기 위함이 아니라,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임하는 시합이었으니까.

“꼭 눈높이 맞춘다…….”

그리고 그때엔 그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눈높이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닥까지 내려 앉아, 바짝 엎드린 시선이 아니라 당당히 어깨를 펴고서 말이다!

그 열망이 담긴 목소리에 김관수 관장과 민욱, 알렉세이 코치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세 사람이 현성의 등에 손을 올렸을 때 현성이 무엇인가 따스한 기운이 밀려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이미 밖에는 현성의 인터뷰와 소개를 위한 K-1의 시합 장면들이 스크린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자막이 별도로 필요했던 터라 사람들이 더욱 더 스크린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이길 수 있을까……?”

제시카의 링걸 대기석 바로 옆자리에 자리를 얻은 제이드가 멍하니 그 화면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시합의 라운드 걸을 맡아야 하는 터라 제시카가 긴장한 듯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몸을 풀며 동생 제이드의 곁으로 살짝 걸음을 옮겼다.

“잘 해낼 거야, 현성은!”

들뜨고 상기된 그녀의 모습에 제이드가 묘한 기분을 느끼며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는 같은 기억을 가진 묘한 느낌의 동양인! 매번 제이드가 심술을 부려도 웃는 얼굴로 받아주기만 하는 그가 과연 저 괴물 같은 오브레임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물론 그의 지독스러운 훈련 장면을 커투어 짐에 올 때 마다 보아왔고, 그 결과는 만달레이 베이 이벤트 홀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많이 보았던 제이드였지만 여전히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그건 현성의 실력에 대한 의심이라기보단 묘한 구석이 있었다.

“……잘 할 수 있겠지?”

떨리는 음성으로 제시카가 제이드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보는 순간 그가 현성에게 가졌던 묘한 불안과 같단 것을 느끼곤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 그래도 다행이야. 네가 옆에 있어서.”

제이드에게 보이긴 조금 민망한 유니폼이었던지라 어색한 웃음을 짓는 제시카였다. 그녀의 웃음에 제이드가 묘한 기분을 느끼며 괜히 어색한 듯 ‘으,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현성을 만나고 나서 그가 달라진 게 있다면 아마도 제시카를 대하는 태도였을 것이다.

자신을 나무라며, 그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안하무인 격이었던 제이드가 점차 제시카를 생각하게 된 것 말이다. 싸우면 변한다. 많은 것들이. 아직…… 싸움은 시작되지도 않았지만, 만나고 싶지 않았던 현성을 매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잉…….

그리고 때마침 인터뷰가 끝이 나고 드디어 오브레임의 등장 음악이 먼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갔다올게, 제이드!”

아직 유니폼이 익숙치 않은지 제시카가 입고 있던 긴 재킷을 벗고 육감적인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유니폼을 보였다. 그 모습에 제이드가 괜히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스크린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동안 제시카가 라운드 1이 적혀 있는 피켓을 챙겼다.

이제 오브레임과 현성의 입장이 완료 되면 브루스 버퍼와 함께 그녀가 먼저 대망의 메인 이벤트의 포문을 열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

“우우우우우!”

그 사이 야유와 환호가 섞여 울리는 사람들의 함성에 아랑곳 하지 않고 느긋한 모습의 오브레임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몸에 어플릭션의 회색빛 티셔츠를 걸친 그가 리듬을 타며 걸음을 옮기자 사람들의 함성이 더 커졌다. 얼핏 산이 움직인다 생각이 들 정도로 거대한 그의 몸짓에 빅맨을 좋아하는 관중들이 열화와 같은 환호를 터뜨렸다.

“오베림! 오베림!”

약물로 인해 논란은 많아도 파괴적이고 강력한 캐릭터인 그를 좋아하는 팬들이 여전히 많단 사실에 제이드가 왠지 모르게 초조하고 불안한 기분을 느꼈다. 제시카도 걱정이지만 현성이 과연 저 괴물을 이길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자꾸만 들었던 모양이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냅니다! 현 헤비급 랭킹 2위! 미구엘 로제스타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선수도 이기지 못했던 육식 두더쥐, 알리스타 오브레임!”

“와, 몸 상태를 보아 하니 오브레임 리바운딩도 성공적으로 마친 것 같은데요?”

그건 중계석의 MC 용준과 김대환 해설 위원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오브레임의 포스 있는 등장에 두 사람이 조금 긴장한 듯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이야기를 꺼내는 동안 오브레임이 네바다 주 체육위원회와 심판진에게 체크를 받고, 얼굴에 바세린까지 바르고 나서 먼저 옥타곤 안에 들어 섰다.

“와아아아아아!”

그리고 그가 팔을 들어 자신을 어필해보이자 사람들이 더욱 더 큰 환호를 내질렀다. 어느 샌가 야유는 사라지고 거의 함성만 가득 찬 순간!

음악이 끊어지고 잠깐의 정적이 찾아 왔다.

그리고 곧 만달레이 베이 이벤트 홀을 가득 채운 낮고, 비장한 선율! 그 소리에 일부 격투기 팬들은 그것이 현성의 테마 ‘Lux Aeterna’라는 것을 알았던지 ‘와아아아아!’ 하고 열렬한 환호를 내보이기 시작했다.

“카이부쯔! 카이부쯔!”

그리고 K-1 무대의 열광을 기억하는 이들이 그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편곡을 한 럭스 아테나의 거친 선율이 예정보다 먼저 터져 나오자 화려하게 빛나는 만달레이 베이 이벤트 홀 조명 사이로 드디어 현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트리코스타의 부동명왕 버전 괴물 티셔츠를 입고서 모습을 드러낸 그의 모습은 계체량의 다소 의기소침 해보이던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네, 말씀 드리는 순간 장현성 나왔습니다!”

“부동명왕! 장현성! 객석에서 K-1 당시의 링네임이던 카이부쯔를 연호하는 소리가 들리네요!”

“상상 이상으로 인기가 많습니다! 역시 장현성 선수, 미국 시장에도 충분히 먹히는 스타일이에요!”

오브레임의 강력한 모습에 다소 주춤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현성에겐 그런 불안의 불식 시키는 깊은 신뢰감이 있었다. 김관수 관장의 생각대로 그는 차분하지만 쉽게 꺼지지 않는 거대한 불꽃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 모습에 취해 동양인이라 야유 하던 이들도 수그러 들고, 점차 환호가 커지는 가운데 제이드가 그의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느꼈다.

“카이부쯔…… 카이부…… 으!”

저도 모르게 중얼중얼 사람들의 함성을 따라하던 그가 고개를 흔든 바로 그 순간. 압도적인 분위기로 사람들을 묘하게 흥분시키던 그가 등 뒤에 닿은 김관수 관장과 민욱, 알렉세이 코치의 손길을 느끼며 말했다.

“갑시다.”

그리고……!

“장현성! 옥타곤을 향해 당당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마치 징기즈칸처럼 거침 없습니다! 오리엔탈 몬스터, 장현성!”

드디어 괴물이 옥타곤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원래는 공언한대로 엄청 퍼부으려고 했는데…

2000년부터 지금까지 13년간 동고동락하던 강아지 송이가 오늘 아침에 죽었습니다… 3살 때 저희 집 와서… 사람으로 따지면 거의 100살 가까이 산거라 호상이라고 하지만 맘이 참…

에고, 뭐라 말 하기 뭣 하네요..

그래도 나이 들어 많이 아파하다 이제 편안해졌으니 부디 좋은 곳으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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