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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258화 (258/281)

- 258 회 - 괴물

“후…….”

잠들지 못하고 밤을 뒤척이는 것! 그건 현성으로써도 꽤 오랜만에 겪는 일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나서 몸의 상태는 항상 피로가 극에 달했기 때문에 매번 기절하듯이 잠이 들곤 했지만 오늘만큼은 그러질 못했다. 낮에 커투어 짐에서 잠깐 만났던 제이드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일까?

‘그 날’의 악몽을 다시 떠올라서 이렇게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은 정말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실수.”

아무렴 지금까지는 목표를 가지고 정신없이 달려오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영을 돕는 일이 최우선이었고, 그 다음은 혜주를 찾는 일이 최우선이었다. 아직까지 혜주를 되찾는 일이 완성되진 않았지만 이젠 그것이 해결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만났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정리 정돈 되며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니 드디어 가장 밑바닥에 있던 그 일이 스멀스멀 고개를 든 것인지도 몰랐다.

“하아…….”

매 순간을 살아가면서 끝끝내 지우지 못했던 기억! 너무 어린 시절인지라 잊을 만도 하다만 매번 돌이켜 본다면 그 일은 언제고 잊혀 지지 않고서 생생한 기억을 동원해왔다.

지울래야 지울 수가 없었다. 단순한 과오라고 여기기엔 너무나도 큰 일이었으니까.

그건 그가 범했던 가장 거대한 과오인 동시에 가장 괴로운 형벌과도 같았다. 과거 지선 PD와 함께 이야기를 하며 아직까지도 스스로를 용서 할 수 없다, 때가 아니다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한 맘이 들고 있었다.

밤은 깊어가고, 몸은 피로감에 지쳐 축 늘어져 무기력한 기분까지 들게 만들고 있었지만 좀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 결국 침대에 걸터 앉아서 어둠 속, 뜬 눈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현성이 저도 모르게 얼굴에 난 화상으로 손을 가져갔다.

매끄러워야 할 피부는 화상을 입어 유난히 울퉁불퉁한 느낌이 강했고, 다른 사람들의 피부와 다르게 이질적인 느낌이 느껴져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그 날 이후로 단 한 순간도 그의 얼굴에서 사라진 적 없는 주홍글씨가 오늘따라 욱씬 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실수…….”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때때로 용서 받지 못 할 실수도 존재했다. 왜냐하면 용서를 구해야 할 상대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 그 대리인 같은 존재가 대신 용서를 해준다면 모를까, 그것조차도 힘이 든 상황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현성이 저지른 잘못을 용서해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밖에 없을 테니까. 그리고 여전히 현성은 자기 자신을 용서할 생각도, 맘도 없었고.

그건 참 애달픈 일이었다.

“후…….”

연달아 한숨을 내쉬며 현성이 다시 한 번 더 얼굴에 남아 있는 화상을 어루만졌다. 그의 얼굴에 상처가 남았던 날. 그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던 괴로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거대하게 새겨진 상처는 얼굴보다 오히려 마음에 더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들을 잠시나마 잊게 해준 고마운 이들이 있었건만 결국은 이것이 근본적으로 그가 해결할 일이었다.

“챔피언…….”

그가 UFC 타이틀을 획득하고 세계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려는 궁극적인 이유는 혜주와 다시 함께 잘 살기 위함보다도 어쩜 그가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방책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주 쉽게 간다면 정말로 쉽게 해결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가 용서하고, 이제는 쉴 수 있다 받아들이면 될 테니까. 하지만 그런 방식으론 마음에 새겨진 깊은 상처가 나아질 것이라곤 이야기 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상처 위를 덮어두고 더 이상 아픈 것은 없다 자위하는 것일 뿐!

그래서 그는 그 나름대로 수긍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를 택한 것인지도 몰랐다.

“후.”

문득 지금 누군가가 곁에 있으면 좋겠단 생각이 현성의 머리를 스쳤다. 옆방에서 곯아떨어진 민욱이 코를 골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친구보다 조금 더 가까운, 그래! 마치 가족 같은…….

그 순간 그의 머리를 스친 두 사람!

참 재미있는 일이었다.

“……왜 하필이면…….”

사키와는 그렇게 끝이 났고, 이젠 혜주에게로 돌아가기만 하면 될 텐데 왜 자꾸만 그녀가 생각이 나는 것인가?

복잡한 일이었다. 현성을 그렇게 생각해준 사람은 혜주가 처음이었건만, 사키 역시 모자람이 없었다. 어떤 의미로는 혜주가 없는 시간 동안 그를 지켜준 건 그녀인지도 몰랐으니까. 혜주가 떠나가고 다시 찾아왔던 추락의 순간, 사랑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맘을 희석시켜 준 게 바로 그녀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혜주의 곁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하고 말았다. 무어라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참 사람을 만나고 대하는 일에는 요령이 없단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현성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두 사람을 두고 망설이고 고민하는 자신이 참 우습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이미 그것으로 끝을 내버리고 나선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닌가? 그리 생각하니 다시 마음이 복잡해지는 밤이었다.

쉼 없이 잘 달려오던 마음이 어느 순간인가 약해져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초롱불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위태위태하게 흔들리던 끝에, 이대론 불꽃이 사라져 하얀 연기밖에 남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기분 말이다.

“하아…….”

그럴 때일수록 마음을 더 굳게 먹어야만 했다. 이젠 가진 것들이 많아졌으니, 어쩜 그걸 잃을까 두려워진 것인지도 몰랐다. 허나 그래선 안 된다. 그래선 안 돼.

이제는 22살, 어른의 나이가 되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어설프기 짝이 없는 자신의 모습밖엔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게 어딜 봐서 K-1 월드 그랑프리 챔피언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자 다시 쓴 웃음이 현성의 입가에 맴돌았다.

정말로 강한 사람이 되어 혜주를 지켜주겠다 이야기 한 것도, 사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던 것도. 그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여전히 흔들리는 것을 어찌 하겠는가? 어쩜 민욱이 했던 말대로 그것들 모두를 두고 여기서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게 나을런지도 모르겠다 싶은 맘이 들었다.

그러나 그래선 남는 게 없을 것이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선은…… 만나자.”

제이드를 만나서, 그와 이야기를 나눠보아야 했다. 현성이 그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은 크게 없겠지만 만일 그로 인해서 제이드가 달라질 수 있다면 그도 작은 구원을 얻지 않을까? 과거 진희를 도와주고 살인자가 되었을 때. 도움을 준 자신을 외면하고 도망쳤던 비겁한 그녀를 용서했던 것처럼, 그 순간이 되면 자기 자신을 용서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현성이 다시 침대에 머리를 붙였다. 밤은 깊어가고, 몸은 피로한 가운데 이상하게 정신만 맑아져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일찌감치 깨달았던 부동심이 사라지고 온갖 번뇌가 차들어가 번잡한 맘을 다스려 보려 했지만 그게 그리 녹록찮았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단 생각만 간절한 가운데…….

-부르르…….

침대 머리맡에 둔 핸드폰이 진동하자 움찔하고 현성이 핸드폰을 낚아챘다.

“아…….”

‘자고 있겠지……?’ 라고 보낸 문자 메시지. 그걸 보자마자 현성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자리 잡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그와 어울리는 사람은 그녀 하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아뇨, 아직…….

월드 그랑프리 우승 이후 다시 만난 혜주. 그 후로는 이렇게 곧 잘 연락도 주고 받곤 했다. 물론 완전히 이전처럼 연인 사이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부르르…!

이내 전화가 걸려왔다. 아무래도 현성이 잠을 자고 있지 않다보니 전화를 건 모양이다.

“여보세요……? 흠, 흠!”

잔뜩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현성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핸드폰 너머의 혜주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냈다.

-아직 안자고 뭐 하는데……? 거기는 새벽 시간이잖아…….

다정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현성이 안도하며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냥…… 잠이 좀 안 와가지고예.”

그리고 문득 그녀가 보고 싶단 생각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보고 싶네예.”

함께 있는다면, 그녀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의지한다면 이 시간도 사라지진 않을까? 마음 편하게 잠들지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지 현성의 그 한 마디에 핸드폰 너머 혜주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연락도 잘 안 하면서. 치…….

투정을 부리는 듯 한 그 목소리에 현성이 다시 미소 지었다. 함께 있으면 다툴 일도, 싸울 일도 없었다. 어쩜 너무 익숙해져 그 사람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잃어버리고 나서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을 때 느꼈던 감정을 다시 한 번 잊어버린 건지도 몰랐다.

“시간이 안 맞을 까봐……. 그래가 못 했어요. 앞으로 자주 할게예.”

그 말에 혜주가 조금은 섭섭하다는 듯 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정말…… 예전 같지 않네! 예전엔…… 안 그랬었는데!

심통이 난 그 목소리에 현성이 다시 한 번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있잖아예……. 오늘 좀…… 놀란 일이 있어가…….”

그리고 현성이 그 언젠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 뭔데……?

별로 특별할 것 없었던 하루 일과를 주고받으며, 그것만으로도 행복했었던 그 때를 떠올리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오늘 내랑 비슷한 아를 봤어요……. 그래가 오늘은 밤이 좀 뒤숭숭하게…….”

-진짜……?

“응……. 비슷하더라고요……. 내랑은 많은 부분이. 내처럼 감당 못 할 큰…… 실수를 했더라구요.”

그 말에 혜주가 ‘아…….’ 하고 잠깐 말을 멈췄다. 그녀 또한 알고 있다. 현성이 짊어진 짐은 이제 많이 가벼워졌지만, 아직까지 내려 놓지 못한 가장 큰 짐이 있단 것을.

아마도 그것이라 직감적으로 느낀 모양이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조심스러운 그녀의 물음에 현성이 말 하지 않아도 알아줄 수 있다는 것. 그런 사람을 한 사람이 아닌 여럿을 만나 정말로 다행이라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냥……. 아직은 아무 것도 안 하고요. 근데 앞으로 이야기를 한 번 해보고 싶단 생각은 하고 있어예. 그냥…… 내가 뭐라 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 이야기를 꼭 해주고 싶었어요.”

그녀가 먼저 전화를 걸어준 게 이렇게 행복할 줄은 몰랐다. 갈피를 잃고 발황하던 맘이 어느 샌가 잠이 솔솔 밀려오는 묘한 안정감을 느끼며 현성이 눈을 감았다.

-무슨 이야기……?

그리고 핸드폰 너머. 마치 곁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혜주가 그에게 물음을 던졌다. 다정하고 따스한 그녀의 물음에 현성이 다시 한 번 입가에 미소를 가져갔다. 그래, 잊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가 그녀를 선택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각인’효과처럼 처음으로 온기를 내어 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니까.

그리고 현성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이야기를 하듯이 속삭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구든 살아갈 가치는 있다고요…….”

============================ 작품 후기 ============================

완결 이후 휴식, 그것만 보고 달려갑니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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