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257화 (257/281)

- 257 회 - 괴물

“정말 미안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많이 민감해져 있었나 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커투어 짐 안으로 돌아온 제시카가 무척 미안한 얼굴로 현성을 바라보며 이야기 했다. 그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 없는지라 현성이 대답하지 못하고 민욱을 바라보자 민욱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뭐가 됐든 그런 소리 듣고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야. 이게 또 이 녀석에게는 얼마나 민감한 일인지 모르진 않겠지?”

매번 티격태격 하는 사이라고 하지만 이 순간의 민욱은 정말로 화가 난 듯 보였다. 냉랭해진 그의 분위기에 제시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미안해…….”

그 말 말곤 할 말이 없는지 입술을 잘끈 깨물고 괴로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현성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크게 신경 쓰는 일 아이니까 괜찮심다.”

그리고 그가 민욱을 바라보자 민욱이 확 구겨진 얼굴로 소리쳤다.

“넌 무슨 세계 5대 성인 등극하려고 그러냐? 이런 소리 듣고도 그냥 괜찮다 그러면 밸도 없는 거야!”

“이 사람 잘못도 아인데 뭐라 캐가 뭐가 나오겠노.”

자못 느긋하게 들리는 음성은 역시나 보통 사람과는 다른 마음의 차이가 있었다. 그 모습에 민욱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는 동안 현성이 제시카를 바라보며 괜찮다는 듯 손과 고개를 흔들며 미소 지어 보였다.

“괜찮아예. 암 오케이.”

짧은 영어라지만 당사자인 현성이 그리 이야기 하자 제시카도 한결 마음의 짐을 덜어낸 듯 싶었다. 그런 현성의 말에 그녀가 그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정말 미안해요! 제이드는 절대로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 거에요……!”

“아…… 예…….”

무어라 말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격하게 감사를 표현하는 그녀의 스킨쉽에 현성이 바짝 굳어 있자 민욱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그 정도면 용서가 될 만도 하겠네.”

잘 생긴 얼굴도 아니고, 그렇다고 말을 잘 하는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이 그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유가 얼핏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걸 잘 응용해야겠다 민욱이 살피고 있는 동안 현성이 조심스럽게 제시카를 떼어 냈다.

“이제 괜찮은지……?”

그리고 그가 영어 대신 한국어로 물음을 던지자 제시카 어렴풋이 의미가 통했던지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파란 눈을 가진 라티노 미녀가 이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가 뭘까? 분명히 이 남매에겐 남들에겐 말 하지 못 한 사연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듯 현성이 민욱을 힐끔 바라보았다.

“좋아. 아무튼 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하자. 네 동생이 무슨 이유로 그런 말들을 했는지 말이야.”

여전히 딱딱한 태도였지만 그도 현성을 따라 가는지 다소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제시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 제이드에게 아주 안 좋은 사고가 있었어. 그래서 그 이후론 세상과 담을 쌓은 듯 홀로 지내기만 했었어. 그러던 제이드가 어느 날인가 장의 시합을 보고 있는 걸 발견했고……. 그걸 몇 번이나 보았기 때문에 난 제이드가 장의 팬이 된 거라고 생각했어.”

착잡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꺼내놓는 제시카는 무척이나 슬퍼 보였다. 아무래도 동생인 제이드를 무척이나 아끼고 있는 듯 했다.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만은 아니기에 나무랄 수만은 없는 상황인지라 민욱도 ‘흠!’ 하고 팔짱을 껴버리고 말았다.

“격투기 영상 한 두 번 본 거 가지고 예민하게 생각한 거 아니야? 걔가 그걸 보고 욕을 적었는지 뭘 했는지 알 수는 없는 일이었잖아.”

그 말에 제시카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고 있지만 제이드가 남긴 말들도 다 살펴봤어. 아무 것도 좋아하지 않았던 그 애가 처음으로 장을 ‘응원’하는 걸 보았단 말이야…….”

“그렇다면 확실히 팬이라고 이야기를 할 만 하긴 한데.”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랬던 것일까? 사실 그가 한 말은 현성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미국의 일반 팬이라면 절대로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생각이 닿자 민욱이 현성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정리해서 얘기 하자면 방금 그 싹퉁바가지가 니 시합을 꼬박꼬박 챙겨보고 응원의 메시지도 남겼대. 근데 막상 여기 와선 중2병이라도 생긴 건지…… 뭐, 아무튼 안 좋은 소리치고 도망쳐 버린 거고.”

명쾌하게 말을 요약한 민욱! 그 말에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음을 던졌다.

“예전에…… 무슨 일이 크게 있었나?”

어렴풋이 느껴지는 그 묘한 동질감! 그게 걸렸던지 현성이 조심스럽게 물음을 던졌다. 그의 말에 민욱이 잘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게 있다기엔 너무 어리잖아. 저 녀석은.”

이제 겨우 12살, 13살 정도밖에 되지 않아 보였기에 현성과 같은 일이 있진 않았을 것이다. 조심스러운 민욱의 목소리에 현성이 어쨌거나 물어봐 달라는 듯 눈빛을 보내자 민욱이 제시카를 보며 말했다.

“동생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대.”

이쯤하면 민욱도 일이 궁금해진 모양이다. 진지한 얼굴로 물음을 던지는 그의 모습에 제시카가 조금 망설이는 듯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 있었던 사고가…… 제이드를 많이 힘들게 만들었어.”

“그러니까 그 사고가 어떤 사고 였는데?”

한창 훈련을 진행해야 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제시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를 꺼내기가 그렇게 쉽지 않았던지 망설이던 그녀가 힐끔 현성을 바라보았다.

“장……의 얼굴에 화상이 난 이유.”

무겁게 꺼낸 그녀의 말에 순간 민욱이 움찔하며 현성을 바라보았다. 이 이야긴 지금 꺼내선 안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던지 그가 다소 놀란 얼굴을 해보이자 현성이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렴풋이 제이드에게서 느껴진 동질감은 사키에게서 느꼈던 것 이상으로 깊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그를 향해 살인자라 소리치며 도망쳤던 소년의 눈빛은 분노나 경멸보단 자기연민에 가까운 것이었으니까!

“그 이유와 비슷한…… 이야기야.”

아무리 솔직하고 밝은 성격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이야기를 온전히 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제시카의 무거운 목소리에 민욱이 말을 전달해야 하는데 뭐라 이야기 하지 못하자 그걸로도 충분히 알 수가 있다는 듯 현성이 말했다.

“……어떻게……?”

아마도 제이드는 그와 같은 ‘죄책감’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것.

그 조심스러운 물음에 제시카가 눈가를 훔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사고 였어……. 그 애가 뭘 알았겠어……? 장난감인 줄만 알았겠지…….”

“아…….”

그 순간 민욱이 이건 참 무어라 이야기하기 곤란한 이야기란 생각이 들었던지 한숨 섞인 탄성을 토해내고 말았다. 제시카가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진 않아도 어렴풋이 사건을 알 수 있었다. 맥락만으로도 말이다.

“그걸 거기다 두었던 사람들의 탓이지, 제이드의 탓이 아니야…….”

끔찍했던 그 당시의 기억은 제이드 뿐 아니라 제시카에게도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현성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건 어쩜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동생인 제이드가 좋아하는 선수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걸 어떻게 얘기 해야 하냐.”

중간에서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는 입장인지라 민욱이 쉽지가 않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현성이 그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기다리자 민욱이 툴툴 거리며 말했다.

“이런 걸 꼭 내가 전달해줘야 되냐? 너 영어랑 일어 공부 좀 해!”

그 말에 현성이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민욱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듯 말이다.

“뭐……. 총기 사고가 있었나 봐.”

“총기……?”

“여긴 한국처럼 총이 금지 품목이 아니잖아. 그리고 그걸…… 아마도 아까 그 녀석이 탕…….”

“아…….”

그 순간 현성이 무어라 할 말을 잃은 듯 무거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소리쳤던 제이드의 모습이 다시 한 번 떠올랐던지 그가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음.”

민욱도 이 순간만큼은 뭐라 할 수가 없었던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제시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쩜 너무 일을 쉽게 생각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누구나 상처는 입지만 더러는 평생을 안고 가야만 하는 상처가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 어떤 사람들도 쉽게 이해하거나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일 것이고.

“시간 있으면 좀 만나보고 싶은데…….”

그 와중에 현성이 입을 열었다.

그로써도 아직까진 완전히 떨쳐 내지 못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으니! 어쩜 여기서 제이드를 만나게 된 것은 운명적인 일인지도 몰랐다. 아영을 만나서 그 일을 떨쳐 낼 수 있었던 것처럼 여기서 만난 제이드가 그에게 또 다른 길을 열어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나서 뭘 하려고?”

“그냥…….”

민욱의 말에 현성이 무어라 이야기를 해야 할 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말을 할 수도, 심지어는 알아들을 수도 없었지만 무엇인가를 해야만 할 것 같단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래야 될 거 같다.”

어쩜 이건 그에게 주어진 기회일런지도 몰랐다. 똑같은 상처를 가진 이를 만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UFC 타이틀전을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이라면 더더욱 운명적인 일이란 생각이 현성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시간이 된다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대. 이런 식이 아니라, 정식으로.”

그 사이 민욱이 현성의 말을 제시카에게 전해주자 이내 현성이 미소 띤 얼굴로 제시카를 바라보았다. 민욱에게서 그의 말을 전해 듣고 감동한 듯 그를 바라보는 그녀를 보니 얼마나 동생인 제이드를 걱정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모 가족과 함께 살긴 했지만 그렇게 자신을 위해준 사람이 없었던 유년기. 그래도 그나마 제이드에겐 제시카가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현성이 말했다.

“그래도 이런 누나 있어가 다행입니더. 아무 것도 없던 내도 이만큼…… 사람 같이 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예.”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전하는 말. 그 말에 제시카가 위로가 된 듯 다시 한 번 그를 꼭 끌어안았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넓은 그의 품에 안겨 감사를 전하는 제시카! 그런 그녀의 등을 현성이 조심스럽게 다독이는 동안 민욱이 샘이 났던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무보수로 통역 해주는 나한테 제일 고마워해야 되는 거 아니야?”

============================ 작품 후기 ============================

감기인 줄 알았는데 알러지성 기침과 알러지성 비염, 그리고 가벼운 감기가 삼중주로 콜라보레이션에 성공한 바람에 몸 상태가 완전 다운 되었던 모양이에요. 병원 갔다와서 약 먹고 있는데 약이 좀 독하네요.

몽롱~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