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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247화 (247/281)

- 247 회 - 괴물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애틋한 감정이 터져 나와 견디지 못하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가도, 또 시간이 지나고 나선 금방 어색해져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타인이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어색하고 불편했겠지만…….

참 신기하게도 그 어색함마저 사랑스럽고 달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 커피 마실래예?”

“으, 응……. 그래…….”

두 사람 사이엔 남고, 여고를 졸업한 20살 풋내기들의 첫 만남처럼 풋풋한 감정이 있었다. 무척이나 오랜 시간 살아오며 세상의 단 맛보단 쓴 맛을, 빛보단 어둠을 보고 살아온 사람들이었기에 더욱 더 생소한 애틋함.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던 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사러 걸음을 옮기자 벤치에 홀로 남은 혜주가 그 뒷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후.”

절대로 안 그래야지 마음먹었던 것이 보자마자 무너져 버렸다. 그리고 또 다신 그래선 안 돼 마음먹은 게 채 한 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또 다시 무너져 버렸고.

그건 참 애달픈 일이었다.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그의 곁에 있을 사람은 자신 같은 사람이 아니라 사키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 그게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위해서 떠났다고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정말 진심으로 말이다.

그래서 가슴에 사무치는 이별의 통증이 따끔따끔 아파올 때 마다,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이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절절함에 온 몸이 무너져 내릴 때에도 참아낼 수가 있었다.

단지 그를 곁에 두고 싶은 건 욕심일 뿐이라고 항상 되뇌여 왔지만 그건 혜주의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너무…… 멀리 가지 말지…….”

좋아하니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 한다는 것. 지고지순한 마음을 그에게 배운 건지, 아니면 원래 그랬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분명한 건 참 서글픈 일이란 것이었다.

어쨌거나 서글프고, 애달픈 만큼 지금 이 순간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다. 오랜 시간 악몽을 꾸다 잠깐 찾아온 달콤한 꿈과 같았다.

하지만 깨고 나면 악몽보다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없단 걸 알게 될 테니까.

“하아…….”

홀로 벤치에 남아 기다리는 동안 바람이 불어왔다. 혜주의 머리카락을 흔드는 차가운 바람이 닿자 저도 모르게 아까 전이 기억났다. 차가운 바람들 모두 가려주던 넓고 우직한 등. 그리고 그녀를 무엇보다도 따스하게 품고, 무엇보다도 견고하게 지켜주던 그의 품.

“……치.”

오늘로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자 다시 한 번 울먹울먹하고 혜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서운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헤어지자 말 한 건 자신이었고, 잘못을 한 것도 자신이었으니까.

내 일이라 내가 처리 하고,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더니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아무 것도 해결된 게 없었다. 그저 해결된 척, 안 그런 척 좋은 허물에 가리며 살아왔던 것뿐이었다.

“다시 시작…….”

그 말 한 마디만으로도 가슴은 두근두근 요동을 쳐왔다. 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자신이 꺼내겠는가? 결국 혜주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생각했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마음에 품어 두고 있으니까. 무척 이기적으로 보이더라도 그게 정말 행복했으니까. 시간 지나서 잊혀 지면 서운해지겠지만 그래도 말이다.

“누나.”

그 사이에 현성이 따끈한 캔 커피를 들고 왔다. 달려 왔는지 하얀 입김을 머금고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은 정말 그녀가 기억 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했어요?”

캔 커피를 내밀며 현성이 물음을 던졌다. 그 물음에 혜주가 다시 또 말문이 막혀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캔 커피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아…….”

그러다 닿은 손 끝이 또 왜 이리 설레는지!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혜주가 조심스럽게 캔 커피를 빼냈다. 그리고 그녀가 ‘고맙데이…….’ 하고 우물쭈물 하는 동안 현성이 그녀의 옆 자리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또 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따뜻한 캔 커피가 있어 손이 시린 건 사라졌지만 그래도 바깥 날씨가 추웠던지 혜주가 으스스 몸을 떨자 현성이 입고 있던 정장 재킷을 벗었다.

“추위 잘 타니까…….”

둔감한 자신과 달리 그녀는 무척이나 예민한 편이었다. 추위를 잘 타기도 했었고. 그 말과 함께 그가 혜주의 어깨에 큼직한 재킷을 걸쳐 주자 혜주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니 춥잖아……. 안 캐도 되는데…….”

“나는 안 추워요.”

한결 여유를 찾은 듯 현성이 후후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에 혜주가 힐끔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무어라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제 애가 아니라고 이야기 한 말이 왠지 모르게 와 닿았다.

재촉하지도 않았고, 무척이나 담담했다. 예전에도 그러했지만 지금은…….

“내 있잖아요.”

“으, 으응.”

조금 더 자란 것만 같았다. 목소리, 몸짓, 표정 그 어느 하나 여유가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미국 갈라고요.”

담담하게 이야기를 전하는 그의 말에 혜주가 순간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무어라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

만나지 못하는 것이야 맞는 말이겠지만 그래도 같은 공간, 같은 고향인 이곳에서 계속 살아갈 줄만 알았다. 그런데 미국이라니? 그 먼 곳으로 떠나갈 생각이라니?

“……카, 카면 아영이는……?”

가질 수 없는 걸 뻔히 알면서도 왜 이러는 걸까? 자신에게 의문을 던져 보지만 이미 그렁그렁해진 눈은 말을 듣질 않았다. 머리가 복잡하게 꼬이고 숨도 거칠어 지고 있었다. 너무 놀란 듯 허둥지둥 하는 그녀를 보며 현성이 걱정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갔다 올 거라예.”

“아…….”

영영 떠나는 게 아니란 그의 말에 안도한 듯 혜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그게 또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그랬단 생각에 움찔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현성이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혜주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말했다.

“아, 아니……. 그…… 계약 같은 거도…… 있을 거고 해서…… 그냥 좀…… 놀라서…….”

그 말에 현성이 후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별의 시간 동안 자란 남자는 어느 샌가 굳건한 나무로 자란 것만 같았다. 그녀의 모든 허물조차도 완벽하게 품어줄 수 있는 그의 품을 느끼며 혜주가 순간 숨이 멎는 듯 한 기분을 느꼈다.

“아…….”

만남, 그리고 이별. 그 사이에 놓인 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 그가 먼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춘 것이다.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치고 손에 쥔 캔 커피가 순간 미끄러지듯 흘러내릴 정도로 전신의 힘이 쭉 빠졌다.

현성도 이런 건 많이 쑥스러웠던지 금새 그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힐끔 혜주의 눈치를 살폈다.

“……미국에 UFC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 전 싸인 했거든예.”

조심스럽게 꺼낸 이야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죽어 살던 시간에 온기가 불어 들어온 듯 조마조마한 심장만 느껴질 뿐이었다.

“거서 이기면…… 진짜 세계 챔피언 될 수 있는데…….”

“으, 으응……!”

간신히 그가 하는 이야기가 얼핏 귀로 스치며, 넋을 잃고 있던 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은 현성이 여지껏 보아왔던 그 어떤 모습보다도 사랑에 빠져 있는 여자의 모습에 가까웠다.

그를 그토록 아끼고 애정을 베풀었던 사키의 모습보다도 말이다.

미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지만 마음은 향방은 이곳이 옳은 곳이라 말하고 있었다. 선택에 대한 신념! 확신이 있기에 물러서지 않는단 맘으로 현성이 숨을 골랐다. 타이틀 전이나 토너먼트보다 어려운 한 마디.

그건 어른스러워진 현성도 조금은 쑥스러웠던 모양이다. 흠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가 토끼눈을 하고서 그를 바라보는 혜주에게 말했다.

“내 세계 챔피언 하면…… 우리 다시 시작해요.”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가 더 커졌다. 떨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현성이 의향을 묻는 게 아니라는 듯 캔 커피를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잊을라고도 해봤는데 그게 안 되더라고요. 알잖아예. 내…… 그런 재주 눈꼽만치도 없는 거.”

전하려 했던 말. 새하얗게 변해버린 머리에 무어라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하지 못했던 말을 그제야 전하고 있었다. 조금 늦다 하더라도 그 마음만큼은 온전히 전하는 게 가장 좋은 것이 아니던가?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후회는 없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현성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말 하러 온 거라예……. 내가 싫은 게 아니면…… 아직 조금 모자라지만…… 조금 더 인정 받아가, 진짜 아무도 함부로 말 못 하도록 세상에서 제일 센 사람 되면……”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숨을 고르는 현성.

“……다시 시작해요.”

그게 그가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가장 절실한 말이었다. 그 언젠가 그에게 리매치 이야기를 꺼내던 민욱의 심정이 이랬을까? 미국으로 떠나 이제 격투기가 아닌 학업의 길을 가면서까지 버리지 못했던 그 마음 말이다.

“아…….”

아니, 그 마음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절실할 것이다!

“이제 내가 지켜 줄게예. 아무도 손도 못 대도록, 아무도 함부로 얘기도 못하도록 내가 지켜 줄게예.”

믿는 만큼 강해지는 것. 그게 그의 손에서 그녀의 손으로 전해져 오고 있었다.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 그대로.

“아…… 나는…….”

이렇게 깊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물음을 던져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나는 정말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밖엔.

“나는…….”

내가 감히 어떻게 그리 할까? 망설임과 갈등이 멈추질 않았다. 한참을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떨구고 있는 혜주에게 현성이 뭐가 됐든 사실 결론은 하나라는 듯 말했다.

“난 그래 할 겁니더. 죽을 때 까지…….”

그도 조금은 애가 타는 듯 했다. 그녀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한 채 애달파 하는 그 모습에 혜주가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말하고 말았다.

“응……. 그래 해줘……. 꼭……!”

망설임과 갈등의 이유 역시 매 한 가지였으니까.

그리고 혜주가 그의 품에 안겨 들었다. 그립고, 그리웠던 자리.

처음 만나 가졌던 편견과 선입견들. 그리고 그것들이 진실이 아니라, 진짜 이 순박한 남자의 가치를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기쁨과 행복이 다시 살아나는 듯 했다. 그 시간 함께 하며 그를 지키려 부단히 노력하고, 응원해왔지만 사실은 그가 그녀를 지탱해왔던 것이다.

“내가 계속 옆에 있을 수 있게 해줘……. 꼭…….”

만남도, 이별도 뭐가 됐든 결론은 하나였다. 너무나도 좋아한단 것. 복잡한 생각들에 가려진 본질은 그것이었다.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음에도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안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현성이 드디어 다시 한 번 느껴진 마음을 온 몸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새기는 듯 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죽어도 꼭 그랄게예.”

============================ 작품 후기 ============================

이제 마지막 미국행…!

계속 물어보는 분이 계셔서;; 책 제목은 ‘현자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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