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6 회 - 괴물
“봉구야! 봉구! 오빠! 야가 봉구! 봉구! 인사해야지!”
아영이 현성에게 꼭 소개 시켜 주고 싶다던 새로운 친구 봉구는 무척이나 잘생긴 진돗개였다. 쌍커플 진 눈에 왠지 모를 깊이가 느껴지는 눈빛을 가진 하얀 개!
쉽게 짖지도 않는데다 그윽한 눈으로 아영을 바라보며 시크하게 꼬리를 두어번 흔드는 그 예사롭지 않은 모습에 현성에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릴 정도였다.
“……개가 내보다 잘 생깄네…….”
짐승도 잘 생긴 짐승이 있고, 못 생긴 짐승이 있다더니 애석하게도 그게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얼핏 봐도 잘 생긴 진돗개 봉구의 모습에 현성이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함께 밖으로 나선 혜주가 참지 못하고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큭…….”
눈물의 재회 이후 좀처럼 어색한 분위기를 감출 길이 없었다. 두 사람 모두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몰랐고, 머리에 가득 찬 생각들을 꺼내기도 쉽지 않았다. 그 가운데 아영이 봉구를 보여주고 싶다 나가자 이야기 하는 탓에 함께 나서긴 했다만 오는 내내 어색한 공기가 맴돈 게 사실이었다.
봉구를 꼭 안고서 꺄르르 웃음 짓는 아영과,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버린 혜주. 그 모습에 현성이 힐끔 혜주를 돌아보자 잔뜩 의식하고 있었던지 혜주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왜 웃어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현성이 예전처럼 말을 꺼냈다. 예전처럼 꺼낸다고 했다만 말이 붕 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한 마디를 던지는데 그렇게 가슴이 뛸 줄은 몰랐던지, 두근거리는 심장에 그가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냥 웃기니까.”
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마다 혜주 역시 마음이 떨려오는 모양이다. 눈도 잘 맞추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못한 사이에 너무나도 작아져 버린 것 같은 그녀의 어깨. 보지 못했던 만큼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야윈 뒷모습을 보자마자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현성의 마음에 가득 차올랐다. 예전과 같았다면 안아 주었을 텐 데.
하지만 쉽게 다가설 수 없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혜주가 이내 고개를 들어 보였다.
“봉구, 잘 지냈나? 아영아.”
“응! 언니야! 오빠 이거 봐라! 봉구랑 악마 오빠 닮았다!”
현성과 눈을 전혀 마주치지 못한 채 아영의 등 뒤에 숨어 버린 그녀. 그게 무척이나 안타깝기도 하고, 무척이나 귀엽단 생각을 하며 현성이 미소 지었다.
“악마 오빠랑 봉구랑 생긴 거 닮았다! 근데 봉구는 착해서 아무도 안 깨물고 칸다!”
“어, 진짜?”
그 사이에 아영이 봉구와 친해진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자 현성이 다시 한 번 미소 짓고 말았다.
“진짜 닮긴 닮았는데…… 개가 더 젊잖노.”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닮긴 닮았다. 하지만 느낌은 판이했다. 하얀 피부 하며 잘 생긴 얼굴까지……. 허나 까불이 민욱과 잘 짖지도 않는 봉구이다 보니 너무나도 이미지가 달랐다.
“……그래도 좋아는 하겠네.”
아마 은연중 아영도 민욱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그렇다곤 하지만 처음에 그 악당이 이젠 이렇게 친숙한 사람이 되어 회자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큭…… 진짜…….”
혜주 역시 아영의 말과 현성의 혼잣말에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던지 다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았다.
“아이고, 이게 누고? 아영이 왔나?”
때마침 봉구네 식당 주인아주머니가 밖으로 나오자 아영이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봉구 보러 왔어요!”
혜주와 함께 있는 동안 사회성을 무척이나 많이 회복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현성이 더 없이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복잡한 기분을 느끼며 혜주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부끄러워하는 것인지, 쑥스러워 하는 것인지 얼굴을 붉힌 혜주가 고개를 숙였다.
“그래, 아영이 봉구 보러 왔나?”
의젓하기 그지 없는 봉구가 꼬리를 흔들며 주인아주머니를 반기는 동안 아주머니가 혜주를 돌아보며 말했다.
“혜주도 왔나?”
“네, 이모.”
봉구 덕분에 식당을 자주 찾은 것인지 혜주 역시 친숙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다 주인아주머니가 오늘따라 유난히 잘 차려 입고, 화장까지 예쁘게 한 혜주와 말끔한 정장 차림의 현성을 발견하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둘이 데이트 하나?”
“예? 아, 아뇨……! 그런 거는 아이고……!”
아무래도 현성을 알진 못하는 모양이다. 아무리 동양인 최초로 K-1 챔피언이 되었고, 뉴스에도 나왔다 하더라도 생업을 살아가는 아주머니에겐 그저 덩치 크고 낯선 청년이었던 모양이다.
“총각이 훤칠하게 잘 생깄네!”
화상 입은 험상궂은 얼굴이 걸리긴 했다만 그래도 그가 가지고 있는 맑은 눈빛이 마음에 들었던지 주인아주머니가 칭찬을 꺼내자 현성이 ‘아……!’ 하고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아입니더……. 개가 더 잘 생겼는데예.”
보기와 다르게 수덕한 그 모습에 주인아주머니가 깔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가 인물 좋아가 어디 쓰노? 인물 좋아봐야 바람만 피지! 안 그렇나? 혜주야! 남자는 몸만 튼실하면 최고다!”
남자는 몸이 최고다 말하는 아주머니의 연륜에 혜주가 조금 당황한 듯 어찌 할 바를 모르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에 아주머니가 숨 넘어가듯이 깔깔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어머! 혜주 맞나! 우리 똑순이가 오늘 와 이카노!”
“아, 아! 이모!”
똑 부러지는 혜주가 유난히 창피해 하고 어색해 하는 모습을 보고서 아주머니가 놀리기에 여념이 없자 아영이 히히 웃으며 아주머니의 옆에 섰다.
“언니! 내 봉구랑 같이 놀아도 되나?”
“으, 응?”
귓불까지 붉어진 혜주가 당황한 듯 아영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멈춰, 마음은 여전히 아이라고 하지만 그런 것 따지 모를 이윤 없었던 모양이다. 봉구를 꼭 끌어안고서, 도저히 ‘그래’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은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귀여운 소녀!
“그래! 둘이 좀 한 바꾸 돌고 온나! 아영이는 내랑 봉구랑 같이 안에서 놀제이!”
아영의 서브에 아주머니의 날카로운 스매쉬까지! 연이은 지원사격에 혜주가 어쩔 줄 몰라하고 서있자 현성이 대답 했다.
“카면…… 잠깐만.”
그리고 그가 용기를 내어 혜주의 곁에 서자 혜주가 움찔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이고, 혜주 이래 부끄러워 하면 우야노?”
깔깔 웃으며 혜주를 놀리는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혜주가 그러지 말라는 듯 원망의 눈빛을 보냈다. 그 나무람에도 불구하고 철벽의 방어력을 갖춘 아주머니가 아영의 손을 잡고, 잘생긴 봉구와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혜주가 바짝 움츠러든 채 괜히 헛기침을 해보였다.
“흠, 흠!”
“감기 기운…… 있어예?”
그 모습에 현성이 조심스럽게 물음을 던지자 화들짝 놀라며 혜주가 고개를 돌렸다.
“아, 아니…….”
금방 또 눈이 마주치자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며 혜주가 눈을 피했다. 어색한 분위기가 맴도는 가운데 현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좀 걸을래예……?”
그의 물음에 혜주가 그게 낫겠다 생각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심장이 두근거리는지 걷는 것조차 어색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12월 중순의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추위를 느낄 틈도 없었다. 현실감 없게 느껴지는 이 순간이 꿈만 같았다.
“……꿈 같네예.”
그건 현성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계속해서 그녀에게 말을 걸어 보려 노력하는 그의 모습에 혜주가 조심스럽게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눈이라도 마주칠까 홱 하고 고개 돌려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하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그리고 로봇처럼 어색한 걸음만 옮기며 또 다시 찾아온 정적.
“……그 챔피언 된 거는…… 축하해.”
한 때는 정말로 사랑했던 사람. 아니, 지금도 마찬가지!
그렇기 때문에 이 정적이 너무나도 싫었던지 혜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를 차마 바라볼 용기가 없어 고개 돌리진 못했지만 진심이 담긴 음성이었다. 가장 먼저 해주고 싶었던 말은 역시나 그것이었다.
그가 가는 길에 절대로 어둠이 드리지 않게! 너무 밝게 빛이 나는 그의 곁을 지키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과 같은 어둠으로 다시 돌아오길 바랬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고마워요.”
그녀의 말에 현성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의 웃음은 어쩐지 서글퍼 보였다. 사실은 혜주도 알고 있었다. 그가 원했던 건 챔피언의 자리나 명예, 돈 같은 게 아니었다는 걸!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왔다. 금방이라도 또 다시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미안함. 그리고 감사함. 그 감정이 동시에 혜주의 마음을 채웠다. 왜냐하면 여전히 그는 그 모든 것들보다 보잘 것 없는 자신 하나만을 생각해주고 있었으니까.
그건 정말로 사랑받는단 기분이었다. 그녀의 가족도 해주지 못했던 것. 그것을 전혀 타인이었던, 상처 많은 남자가 대신 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건 정말 기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랑한다 말 하지 않고도, 안거나 쓰다듬지 않아도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난생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었으니까.
“누나.”
그 감정의 깊이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이대로 쉽게 외면하고, 넘어 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지만 쉽게 건드릴 수 없는 것. 어색하고, 두려운 게 사실이었다. 한 번 금이 가버린 것 관계처럼 불안한 것은 없었으니.
“으, 응…….”
돌이킬 수도 없고, 너무나도 아플 것이란 걸 알면서도 그어 버린 금.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쉽지 않은 혜주였다.
“내 있잖아요. 참 오기 전에 생각 많이 했는데 지금은 한 개도 기억이 안 나요.”
그리고 그런 그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현성 또한.
“……응.”
하지만 가야만 한다. 그걸 알기에 현성이 한 번 숨을 고르며 혜주를 바라보았다.
기억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였지만 수줍게 내리 깐 눈은 죄인처럼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그게 그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래선 안 되는 사람인데, 왜 그 사람이 내 앞에서 이런 눈을 하고 있는 것인가?
“누나.”
다시 한 번 현성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흔드는 차가운 바람을 넓은 등으로 가린 채, 그녀의 앞에 마주섰다.
“내 이제 애 아니에요.”
그가 꺼낸 말. 그 한 마디에 고개 숙이고 있던 혜주가 ‘아…….’ 하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
그리고 그녀가 탄성을 터뜨렸다. 그건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바람이 멈춘 것 같았다. 불어오던 차가운 겨울바람이 하나도 닿지 않았다.
듬직한 그 몸에 가려져 바람은 빗겨갔고, 그가 가진 따스한 온기와 비누향이 코끝에서 느껴졌다. 너무나도 포근한 그 자리.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요……?”
두근거리는 소리가 금방 터질 듯 위태롭게 들려왔다. 거짓말관 인연이 영 없는 요령 없는 남자!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세차게 뛰는 가슴은 느끼는 것만으로도 그 어떤 사랑 고백보다도 진솔하게 느껴졌다.
그 느낌 속에서 혜주가 저도 모르게 그의 품에 기댄 채 입술을 꼭 깨물었다.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꼭 끌어안은 그의 품속에서, 틈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의 심술만큼이나 얄밉게도 말이다.
“……응.”
눈물을 꾹 참고, 흐느끼듯 한 대답. 사실은 ‘나도 정말 보고 싶었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저 으스러지듯 자신을 안아주고 있는 그의 품속에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하는 이기적인 바람만 가졌을 뿐.
“여기까지 오는데…… 많이 힘들었어요.”
그런 그녀의 이기심만큼이나 절절한 그의 마음이 전해져 왔다.
“진짜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혜주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뚝 떨어져 버렸다.
그러고 싶었던 건 절대로 아니었는데! 정말로 그런 게 아니었는데!
“흑…….”
참지 못하고 새어나온 얄미운 울음!
바보 같이 자꾸만 울고, 자꾸만 모자란 모습만 보이는 게 싫어 헤어지자 말했음에도 변한 게 없었다. 그게 서러워 흐느끼는 혜주를 품에 안고서 현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 많고, 몸 안 좋고, 눈물 많은 여자…….”
조금은 장난스럽게, 따뜻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그의 말에 혜주가 서러운 듯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으……!”
아무 말도 못 하고 울고만 있는 바보 같은 모습 그대로.
“진짜 내 이상형인데…….”
변하지 않은 그 모습이 더 좋다 그는 그녀를 안았다. 진하게 느껴지는 애정 속에서 혜주가 삶의 목표조차 잃고 표류하던 삶에서 구원을 만난 듯 한 묘한 기분을 느낀 채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진짜…… 자꾸 울리고…….”
원망 섞인 목소리로 토로 한다지만 그보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투정은 없었다. 그게 얼마나 그리웠는지 그녀는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를 것이다. 그 마음 모두를 담아 현성이 부서질 듯 가녀린 그녀를 품고서 부드럽게 혜주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미안해요.”
잘못한 건 오히려 자신인데 그조차도 먼저 미안하다 이야기 해주는 바보 같은 남자. 그 손길, 그 목소리, 그 말 하나가 그녀의 마음을 모두 녹여 버렸다.
“흑……!”
결국 그의 넓은 몸을 꼭 끌어 안아버린 그녀! 더 이상은 이성으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고, 그 마음이 얼마나 커질 수 있을까? 감정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며, 사랑 따윈 없다고 믿어온 그녀였건만 이 마음의 크기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때보다 오히려 더 커져 버린 마음은 대체 무엇으로 설명 할 수 있단 말인가?
말 한 마디 하지 못한 채 그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름드리나무만큼 넓은 그의 품을 꼭 끌어안고서 말이다.
그렇게 눈물만 흘리고 있는 연인(戀人)의 애틋함을 바라보며 현성이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듯 큰 손으로 그녀의 등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벨트나 트로피보다 이기 더 좋네예…….”
============================ 작품 후기 ============================
견빈 봉구
사인본 이벤트, 15분 모두 마감 되었습니다. 참여 해주신 모두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제게 주어진 게 20권인지라 보내드릴 수 없는 분들껜 죄송하단 말 전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