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 회 - 괴물
“참 나! 명색이 사장님인데 이게 뭐냐? 연봉 수억 받아먹는 놈이!”
다음 날 출국을 앞둔 민욱과의 시간은 상당히 조촐하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사온 캔 맥주와 간단히 입을 즐겁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마른안주! 그렇게 무리하게 달리지 않을 조촐한 술상은 민욱에겐 어울리지 않았다만 현재로썬 이것이 최선이었다.
왜냐하면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혼자서도 진이 빠지도록 즐겁게 놀았고, 그 다음날엔 그 여파가 밀려와서 그런지 하루 종일 골골 거리던 민욱이었으니!
“니가 너무 약해져가 비싼데 못 데리고 다니겠다.”
숙취가 있는 와중에도 현성의 훈련을 지켜보겠다 억지로 몸을 움직인 것이 화근이었다.
“약해지긴 뭐가 약해져! 어제 밤새도록 장난 없이 놀았는데! 임마, 그렇게 퍼다 마시고 스시녀들이랑 그렇게 하고 이 상태면 슈퍼맨인거야, 슈퍼맨!”
거의 밤새도록 술을 퍼다 마시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계속 깨어 있던 민욱이 웃음 섞인 현성의 말에 ‘쳇!’ 하고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기실 어제 밤 민욱이 오랜만에 온 일본인지라 과하게 논 것도 사실이라만 진짜 ‘슈퍼맨’을 앞에 두고 센 척 하기도 뭣했던지 투덜거리며 마른 육포를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튼 뭐 12월 11일은 걱정이 없겠구만.”
그리고 그가 오랜만에 마시는 맥주 향에 흠뻑 취한 듯 즐거워 보이는 현성을 보며 넌지시 말을 건네자 현성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냥 열심히 준비하는 거지. 어차피 결판은 그 위에서 다 난다 아이가. 지금 조바심내나, 안 내나.”
무척이나 차분해진 그의 말은 어느 샌가 프로의 관록이 묻어나고 있었다. 파이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나 승리겠지만, 승리에 너무 집착하다보면 오히려 눈이 어두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승리에 대한 집착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건 격투기라는 일의 본질은 아니었다. 승리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열심히 스스로를 단련해왔느냐 하는 것! 즉, 자신과의 싸움이었으니까. 많은 파이터들이 상대와 겨루지만 그 전에 스스로를 이겨내지 못한다면 그러한 승리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 보다 한 단계를 넘어선 듯 초탈한 현성의 모습에 민욱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캔 맥주를 들어 올렸다.
“하여튼 미친 놈! 정말 백인조수를 그딴 식으로 통과를 해버리냐?”
“왜? 부럽나?”
툴툴 거리는 민욱의 목소리에 현성이 다시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캔에 건배 했다. 다시 두 사람이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키며 ‘크!’ 하고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알싸하고 씁쓸한 맛이 목구멍을 톡톡 찌르다 식도를 타고 짜르륵 흘러 들어가는 것이 청량감마저 전해주고 있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술맛에 현성이 술이 많이 약해진 듯 ‘후!’ 하고 기분 좋은 숨을 내쉬며 등을 소파에 붙이자 민욱이 힐끔 그를 바라보며 물음을 던졌다.
“뭐, 아무튼… 월드 그랑프리는 걱정 없고.”
“응. 그거는 계속 준비 하는 거니까.”
“너 연애는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기실 에이전트 일을 하고 있다지만 전적으로 훈련은 김관수 관장과 현성의 몫이었다. 민욱이 관심이 있는 것은 그런 비즈니스 영역이 아니라 동갑내기 친구로써의 것이라는 듯 물음을 던지자 현성이 그 소리가 왜 안 나오나 싶었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일단은… 다시 도전해 볼라고.”
그 말에 민욱에 ‘흐음!’ 하고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현성을 바라보았다.
“한 번 깨진 그릇이 쉽게 붙을 거 같냐?”
자의든, 타의든 이미 한 번 깨진 연인이 재결합 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많은 연애 경험을 가지고 있는 민욱에겐 그것이 상당히 회의적으로 느껴졌던지 우려 섞인 그의 목소리에 현성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릇 아이다 아이가.”
그 모습은 홀로 도로가에 기대어 울고 있던 과거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심적인 부분에서 정리가 되었고 많이 강인해진 그의 모습에 민욱이 강해진 것 뿐 아니라 한 단계 성숙해져 격투기 뿐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한 단계 앞서간 듯 한 그의 모습에 조금의 질투심을 느끼며 말했다.
“그럼 뭔데?”
그의 물음에 현성이 쉽게 대답하진 못하고 다시 맥주를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 꿀꺽 하고 다시 맥주를 삼키고는 민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를 내가 뭐라 캐야 될 지는 모르겠다. 근데… 그냥 우리가 싫어서 헤어진 게 아이잖아. 그건 확신 할 수 있다.”
“그래, 확실히 옆에서 보기에도 그래! 그런데 다시 시작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잖아? 너희가 문제가 아니라 너희를 가십거리로 여기는 불특정 다수가 문제라고.”
그들의 이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불특정 다수였다. 더러는 현성을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더러는 그의 행보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도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날린 말은 비수가 되어 혜주의 마음 깊이 상처를 새겼고, 결국 그녀는 그것을 버티지 못하고 그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그캐서 내가 못 잡았잖아.”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려는 듯 현성이 오랜만에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묻어나는 회한의 미소는 불과 몇 달 전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생생한 듯 쓰디쓴 감정이 묻어나 있었다.
“그래. 뭐, 둘이 속 까지 모를 리야 없겠지만 넌 잡았을 거 아니야? 그걸 뿌리치고 간 사람이 혜주 누나고. 그렇게 헤어졌고, 끝이 난 건데 차라리 그냥 마음 편히 보내주고 넌 너대로, 그 누나는 그 누나대로 각 자 길을 가는 게 낫지 않겠냐?”
해결되지 않은 그 문제는 필시 두 사람이 다시 시작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그 누구도 트집 잡을 수 없는 그런 이와 함께 시작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애시당초 혜주는 처음부터 너무 일찍 사람들에게 노출이 된 존재였다. 물론 그 당시엔 그도, 그녀도, 그리고 현성조차도 이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리게 되고 그게 문제가 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헤어져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유명인사가 된 현성과 일반인, 아니! 일반인과는 다른 화류계 출신인 혜주! 누가 봐도 선명하게 대비가 되는 양지와 음지의 사람이었다.
“그런 식으로 다른 계통의 사람들이 만나면 전적으로 손해 보는 사람은 정해져 있어.”
민욱 또한 그랬으니까! 대대로 정치 가문을 이어온 3선 의원의 집안이 아니던가? 그러다 보니 민욱 또한 많은 여자들을 만나 왔고, 그들 가운데에서는 그도 정을 주기도 했고, 마음을 주기도 한 여자들이 꽤 있었다.
물론 머리 좋고 현실 감각 뛰어난 그가 그 차이를 받아들이는 데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그래서 강해지고 싶은 거다. 그런 게 날아와도 다 지켜줄 수 있을 만큼.”
그건 현성 역시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걸 그때에 혜주에게 해주지 못했던 것이 생각난 듯 다시 한 번 맥주를 들이켰다. 단숨에 캔 맥주 하나를 비운 현성이 빈 캔을 옆에 내려다 놓고 말을 이었다.
“첨부터 지금까지 계속 보호 받고 있던 건 내 쪽이었으니까. 카니까 이제는 내가 지켜 줘야 된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촉촉해진 친구의 모습에 민욱 역시 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맥주를 마저 들이켰다.
“후. 자신은 있냐?”
그의 물음에 현성이 두 다리를 팔로 끌어 안아 몸을 웅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싸우는 건 안 카는데 이건 별로 자신이 없다.”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그의 모습은 극진회관의 선수들 백인을 쓰러뜨린 괴물 파이터라기 보다는 민욱과 동갑인 평범한 남자와 다를 바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민욱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곤 현성을 향해 다시 캔맥주 하나를 던져 주었다.
-칙!
다시 캔을 따고 민욱이 현성에게 캔을 내밀자 현성 역시 캔을 따고 건배 하며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걱정마. 못 생긴 남자한테 빠지면 나오는 문도 없댄다.”
그 말에 순간 현성이 입에 담겨 있던 맥주를 뱉을 뻔 한 듯 손으로 입을 막고 민욱을 돌아 보았다. 간신히 입 안을 탈출하려는 맥주를 막아내고 삼킨 현성이 ‘야!’ 하고 소리치자 민욱이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소리쳤다.
“뭐? 내가 틀린 말 했냐?”
낄낄 웃음 짓는 사악한 모습에 현성이 이런 이야기 들어도 크게 기분 나쁘지 않은 건 민욱 밖에 없을 것이다 생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영이 말론 니가 더 못 생깄는데.”
그러다 현성이 혜주와 헤어진 이래로 연락을 하지 못한 아영이 생각난 듯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하자 민욱이 별 거 아니란 얼굴로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이 머저리가 왜 연락을 못 해? 번호 몰라? 얘 핸드폰 만들었잖아.”
“아, 맞나…? 그캐도 아영이… 괜히 불편 할 까봐…”
아영에게는 유독 조심스러운 현성인지라 그 모습에 민욱이 어느 정도는 이해한단 얼굴로 다시 육포를 물었다.
“까짓 거 사장님이 힘 좀 써준다.”
그리고 그가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 현성이 ‘응?’ 하고 웃음기 섞인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현재 시간은 저녁 9시!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닐 것이다.
“야…! 혜주 누나랑 같이 있을 낀데…!”
“아영이 무시하냐? 그 정도는 대처 할 줄 아는 애거든?”
아영의 전화친구답게 스스럼 없는 민욱의 말에 현성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그래도 걱정이 되는 듯 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민욱이 아영과 통화하는 모습만 봐도 가슴이 두근 거려왔다. 혹시라도 그 옆에 혜주가 있으면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하지만 한동안 통화음만 울리고 전화를 받지 않자 민욱이 ‘음…’ 하고 살며시 인상을 구겼다.
“참 내가 살면서 먼저 전화 걸고 이렇게 기다린 적도 처음이다.”
불평, 불만을 늘어 놓는 그의 모습에 현성이 다시 푸핫 웃음을 터뜨린 사이에 ‘여보세요!’ 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왜 전활 늦게 받아?!”
받자마자 짜증부터 부리는 민욱의 목소리에 생기 넘치는 아영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티비 보고 있으니까 그렇지! 바보 오빠야!”
새초롬하기 그지 없는 그녀의 음성에 민욱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입가에 미소를 가져갔다.
“너 내가 아이큐가 몇 인 줄 알고 바보란 소리 하는 거야?”
“몰라! 오빠야 바본데~ 메롱!”
민욱과 그 사이 전화 통화를 통해서 제법 친해진 모양인지 능청스럽게 장난도 칠 줄 아는 아영의 목소리에 현성이 반갑고, 신기한 듯 웃음을 터뜨리며 민욱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빛에 민욱이 ‘이 정도다.’ 하고 뿌듯한 빛을 띤 채 현성을 내리 깔아 보며 말했다.
“아무튼 아영이 너 이 기지배, 매일 새벽마다 자꾸 전화해서 봉구 얘기 할 거야?”
“아! 있잖아, 오빠야! 오늘은 봉구가 아영이랑 같이 산책도 했다!”
생각난 김에 또 신이 나서 봉구 이야기를 꺼내는 아영의 마이 페이스에 민욱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봤지? 이런 식이다. 이런 식으로 매일 새벽 마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민욱이라지만 한편으론 그 모습이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그 모습에 현성이 흐뭇한 미소를 띤 채 그를 유심히 바라보자 민욱이 재잘재잘 봉구와의 산책, 그리고 하루 일과를 이야기 하는 아영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잠깐! 그건 나중에 얘기 하기로 하고 아영이 너! 지금 어디야?”
“아영이 지금 방에 있는데! 언니랑 같이 티비 봐야 되는데…”
신나게 봉구 이야기를 하다가도 민욱의 물음에 또 금방 해야 할 일이 생각났는지 아쉬운 듯 한 음성으로 아영이 대답하자 민욱이 또 다시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가에 미소를 걸친 채 말했다.
“아무튼 잠깐 아영이 너랑 이야기 하고 싶어 하는 애 바꿔 줄 거니까 얘기 좀 해. 티비는 좀 있다 보구.”
“누구? 누군데? 아영이 다른 사람이랑 얘기 하기 싫은데!”
낯가림은 여전한 지 금방 아영이 싫단 소리를 내자 민욱이 씩 웃음을 짓곤 현성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 모습에 현성이 조금 당황한 듯 얼떨떨한 표정을 짓자 민욱이 말했다.
“아영이 니가 제일 좋아하는 놈인데도 싫냐?”
“아!”
그 말에 아영이가 금방 핸드폰 너머로 뭔가를 알아 들은 듯 들뜬 목소리를 내자 현성이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받았다.
“내다, 아영아. 잘… 지냈나?”
3개월이 넘도록 이야기 한 번 하지 못한 아영과의 통화! 그 순간만큼은 부동심을 찾아냈고, 그것을 추구하기 시작한 현성이라지만 마음이 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떨리는 목소리에 아영이 참지 못하고 ‘오빠야!’ 하고 소리 치자 현성이 입가에 미소가 번지면서도 한 편으로는 혜주가 생각났는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아, 아영아… 소리 너무 크면…”
“아, 맞다!”
깜짝 놀란 아영이 금방 속삭이며 잠깐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
“아영아! 니 방에서 누구랑 전화 하는데?!”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현성의 가슴이 세차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그가 저도 모르게 파르르 입술을 떨며 미소를 짓자 민욱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캔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아니! 언니! 나 악마 오빠랑 통화 하는데! 오빠가 자꾸 전화 안 끊어서! 그래서 금방 끊으려고요! 빨리 가요! 나 티비 봐야 돼!”
당황한 아영의 임기응변에 순간 민욱이 맥주를 마시다 ‘푸웁!’ 하고 맥주를 발산해내자 그 모습에 현성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저게 진짜! 사람 억울하게!”
역시 민욱을 잡는 사람은 아영이 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현성이 정말로 행복한 미소를 짓자 입가에 묻은 맥주를 닦아내며 민욱이 그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히힛… 현성이 오빠!”
그리고 몰래 속삭이는 아영의 목소리에 현성이 너무 반가워 저도 모르게 울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응, 아영아. 잘 지냈나…?”
목 메이는 그 음성에 아영이 너무 신이 나서 어찌 할 바를 모르는 듯 히히히히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응!’ 하고 대답했다.
“어디 아픈데는 없고…?”
“응! 아영이 한 개도 안 아프다! 오빠야는…? 오빠야 전에 많이 아프던데! 못된 아저씨…!”
그리고 아영이 현재와의 시합을 보았는지 다시 또 흥분한 목소리로 속삭이자 현성이 푸핫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내는 괜찮다. 캐가 내… 챔피언 됐는데… 한 개도 안 아팠다, 아영아!”
걱정 말란 그의 말에 아영이 ‘우와!’ 하고 또 금방 좋아하며 웃음 짓자 그 행복한 기분에 현성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말로 보고 싶고,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다. 본의 아니게 오랜 시간 곁에 있음에도 만나지 못한 그녀였다. 정말 본의 아니게…
“응! 그거 혜주 언니랑 같이 봤어요…!”
이내 아영의 속삭임에 현성이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혜주 또한 그의 시합을 지켜보고 있었다. 먼 곳에서, 떨어져 이야기도 나눌 수 없게 되었지만 그녀 또한…
“근데 있잖아… 오빠야… 나… 얘기 많이 많이 하고 싶은데… 혜주 언니 밖에 있으니까… 응…”
무척이나 아쉬운 듯 했지만 그 순간에도 혜주를 걱정하는 아영의 목소리에 현성이 울컥 하고 목구멍을 찌르는 뭔가를 느끼며 대답했다.
“응… 괜찮다.”
목이 메인 듯 잠긴 그 소리에 괜히 현성이 헛기침을 하는 동안 아영이가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사 오빠, 보고 싶다…! 언니랑 다 같이…!”
그 목소리에 현성이 조용히 눈을 감고서 다시 한 번 감정들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민욱도 그렇게 마음이 편치만은 않은지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곧… 오빠가 글로 가께, 아영아.”
그리고 현성이 다시 한 번 월드 그랑프리에서의 성공을, 조금 더 강해진 어른의 모습을 그리며 이야기 하자 아영이 정말로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짜?! 응! 응!”
속삭이며 좋아하는 아영의 목소리에 현성이 ‘반드시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겠다’ 다짐 하며 한 번 더 숨을 가다듬었다.
“…근데… 혜주 누나는 잘… 지내나, 아영아…?”
정말로 알고 싶었던 것! 그 시간 동안 강해지기 위해서 스스로를 몰아 붙이기도 하고, 여유를 가져보기도 했지만 정말로 알고 싶었고 궁금했던 것은 바로 그것 하나였다. 그의 물음에 아영이 다소 망설이는 듯 ‘음…’ 하고 생각을 하다 더욱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있잖아… 이거 혜주 언니가… 말하지 말라 캤는데… 언니 많이 아픈 거 같다… 오빠야 있으면 되는데 언니… 음… 많이 울고 그캐서… 그캐서 아영이가 옆에 있어야 돼요.”
자신에게 잘해준 혜주를 이제는 자신이 돕겠다는 결연함이 묻어나는 아영의 음성이었다. 혜주가 정말 많이 힘들어 하고 있단 사실도 슬펐다만, 아영이 이토록 그녀의 곁에서 노력해주고 있단 사실도 왠지 모르게 현성에겐 가슴이 먹먹한 일로 다가왔다.
“…응. 아영이가… 내 다시… 갈 때 까지 혜주 누나 잘… 챙겨 도.”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감정들을 추스르며 현성이 그 뜻을 전하자 아영이 신이 난 음성으로 대답했다.
“응! 근데 오빠야 언제 와? 우리 오빠야 크리스마스 생일 하나?”
크리스마스 이부! 현성의 생일이 무척이나 기억에 남았던지 아영의 물음에 현성이 12월 11일의 월드 그랑프리를 떠올리며 결국 눈가를 손으로 문지르고 말았다.
“응… 그 전까지는 가께. 아영아.”
혜주와 어떻게 결착이 나던지 아영이는 그 일로 인해 더 이상 고생을 해서는 안 된다. 이 가녀린 아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이렇게 고군분투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무척이나 아파왔다. 대견스럽게도 오히려 아영이 혜주를 달래고 있는 모습은… 무어라 이야기를 할 수 없을 만큼 현성에게 책임감을 안겨 주고 있었다.
“카면 아영이 그때까지 혜주 언니랑 잘 지내고 있으께요…! 이거 혜주 언니 한테 얘기 하면 안 돼…?”
그리고 아영이 혹시 모른다 물음을 던지자 현성이 목구멍을 콱 막은 뭔가를 다시 꿀꺽 삼키며 말했다.
“응… 아영이랑 내랑 비밀로 하자…”
“응! 오빠야…! 아영이가 언니 잘 챙기께!”
그 말과 함께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곤 민욱을 향해 핸드폰을 넘겨 주었다. 민욱이 핸드폰을 받자마자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키는 현성! 그 모습을 바라보며 민욱이 작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이 건방진 아영아!”
“…악마 오빠다… 카면 내 이제 전화 끊어야지!”
“야, 야!”
그리고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린 아영의 모습에 민욱이 ‘이런 씨!’ 하고 인상을 구기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현성이 우는지 웃는지 모를 얼굴을 하자 민욱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목소리만 듣고 찔찔 짜냐? 찌질아.”
“자꾸 전화 해가… 아영이 귀찮게 하지 마라.”
그 와중에도 현성이 그 생각을 하면 웃음이 먼저 나온다는 듯 울음과 웃음이 섞인 얼굴로 말하자 민욱이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뭐 정리 잘 해라! 혜주 누나가 됐든, 사키가 됐든… 아영이 자꾸 신경 쓰게 하지 말라고! 뭐, 내가 얘한테 맘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얘 불쌍한 애잖아. 이런 애가 그렇게까지 하는데 말이야!”
괜시리 변명 비슷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민욱의 모습에 현성이 눈을 감고 감정을 추스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어라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영과의 짧은 통화가 확실히 그에겐 힘이 된 게 틀림없었다.
“뭐… 니가 그렇게 결정을 했으면 그렇게 하겠다만 난 사키도 참 괜찮은 거 같은데! 일본에서 알아주는 미녀에다, 인기도 많고! 너 누드 화보 못 봤지? 사키가 은근 글래머야! 요 라인이…!”
그리고 빠르게 마음을 정돈해 다시 부동심을 찾은 현성이 ‘월드 그랑프리 우승’에 대한 무게감을 실으며 민욱을 바라보았다.
“그쪽도, 이쪽도 조만간 다 결판 낼 끼다.”
============================ 작품 후기 ============================
구걸이라기보단 일종의 이벤트죠~
이제 이 글도 거의 마무리도 임박 해 있고, 해야 하는 압박감 있는 일이 두 가지다 보니 조금 더 즐겁게 할 수 있는 쪽에 무게를 두는 거구요. 모티베이션을 끌어낼 필요가 있는거죠. 재미있게 본 사람들이 보내주는 것도 좋지만 사람들이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잖아요?
솔직히 말하면 추천수에 대해선 좀 자격지심도 있어요 ㅋㅋ 사람이니까 어떻게 초연하기만 하겠어요?
‘암만 해도 다른 사람들만큼은 나오질 못 하는 구나. 비인기작의 숙명인가? 안 좋은 평 듣는 글보다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걸까? 최소한 퀄이라도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도 아닌가…? 와 어떻게 하루만에 저만큼이나 나오지? 난 하루에 3편씩 올려도 안 되는데…’
그간의 평은 나쁘진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성적이 많이 빈약한 건 사실이거든요.
사실 좋은 소리 들어도 결국 성적표는 숫자로 나오잖아요?
우리 애 머리 좋단 소리 백날 들어도 성적표가 초라하면 그 날 밤은 맘이 뒤숭숭한 것과 같은 이치죠. 그 애가 참 애지중지하고 열심히 가르치던 애면 더더욱.ㅋㅋ
아무튼! 여지껏 800만자 이상 써오면서 단 한 번도 선추코 해달라, 쿠폰 달라 찡찡 거린 적은 없습니다만 최근 들어선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것도 독자분들에게 재미를 주는 하나의 방식이 될 것 같더군요. 참여 해주시는 분들도 단순히 글만 올리는 것보단 이쪽이 더 즐거워 보이네요. 특히나 이 글은 다른 글들과 달리 대리만족성이 떨어지는 부분들이 많고, 참여 할 수 있는 부분이 한정 되어 있으니까요. 과거엔 후기를 통해서 소통 하기도 했지만 이 글은 그런 분위기가 어울리지 않는지라 그런 부분이 사라진 것도 사실이구요ㅋ
물론 그게 지나치면 욕을 먹게 되겠죠.
하지만 지금은 괜찮다 봅니다.
이것도 설 특수에요.ㅋㅋ 그 이후론 다른 일에 몰입해야 하니까. 예정 보다 마무리 시기가 늦어질 수 있단 생각도 있구요. 그래서 좀 더 모티베이션을 끌어 올릴 필요가 있었던거죠.
전 작품 선정이나 이런 일에 참여하는 건 전적으로 독자는 자결권이 있고, 의사가 있다고 믿고 있어요. 아니면 아니다 거부 할 수 있는 선택권과 권리가 있죠. 그래서 안 맞는 작품은 억지로 꾸역꾸역 보지 말라 얘기 하는 거구요. 그게 당연한거잖아요?
어쨌든 유료 연재 시장서 근 2년간 머물러 오면서 느낀 건요. 독자와 구매자의 이중적 위치는 다소 유사하기 때문에 위화감이 없지만 글을 쓰는 사람과 판매자의 이중적 위치는 굉장히 위화감이 크단 겁니다.
작품성VS대중성의 전통적인 구도를 양 쪽에서 잡아 당기는 거에요.
그걸 조율하는 게 일이라고 하지만 온라인에서의 높아진 접근성과 참여율은 이 갈등 구조를 좀 더 가속화 시켰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글을 쓰는 사람의 모습만으론 힘든 게 사실이네요.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격투기란 것과 비슷하죠. 격투기 선수이되 동시에 쇼 엔터테이너란 이중적 영역처럼, 글을 쓰는 것도 특히나 연재에선 글 외적인 부분의 재미도 포함 할 수 있어야 하는거죠.
작중 주인공인 현성이처럼 타고난 재능이 있어서 그 자체 만으로 사람들을 열광 시킬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제가 그 정도는 안 되는지라.
솔직히 이런 부분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하고 싶지만 누가 이런 이야길 듣고 싶겠습니까. 생각도 많고, 훨씬 더 깊게 가지고 가고 있죠. 그래서 가끔씩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면 그때 마다 기회를 빌어 얘길 합니다.
아마 그런 부분을 헤아려 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일이 덜 외로울 거에요.
아무튼 그런 고로 좀 있다 한 편 더 올라갑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