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 회 - 괴물
“이제 대강 견적이 나왔네. 아무래도 준결승에서 자말이랑 다시 붙을 확률이 더 높겠는데?”
자신의 손을 통해 추첨한 대진표! 그것을 탓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현성의 대진운은 나쁘다고 보는 게 옳았다.
“첫 번 째 상대가 바다하리고, 그걸 이기고 나면 자말 로우지가 또 다시 기다리고 있겠군. 결승은 다니엘 기타! 이러면 정말 최악의 시나리오인데 말이야.”
가장 휴식 시간이 짧은 제 4경기인 동시에 상대가 만만찮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약체라 할 수 있는 짐머맨이나, 페이토자, 카라예프가 아닌 우승권 전력이라 보이는 하리와의 승부는 그 자체로 부담스러울 법 했다.
“아무래도 자말이… 이기겠제…?”
최고 난제는 역시나 자말의 존재였다. 이러한 토너먼트에서 내구도가 뛰어난 상대를 만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자말의 내구도는 이미 현성이 직접 경험해본 바 있지 않은가? 승리를 하긴 했지만 그때와 또 같은 상황이 펼쳐진다면 우승은 물 건너 간 일이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뭐, 카라예프의 공격력도 나쁘진 않아! 하지만 그 친구는 너무 저돌적인 공격에 약하거든!”
“그래, 맞다. 아무래도 자말을 잡을라 카면 카라예프가 많이 힘들끼다.”
게다가 문제는 준결승 상대가 자말이 될 확률이 높단 것이었다. 민욱이나 김관수 관장 모두 상황을 그리 예측하고 있었다.
루슬란이 베테랑이긴 하지만 고질적인 내구성 문제를 가지고 있는 선수이기도 했고, 상대는 최고의 내구성을 가진 자말이었다. 게다가 자말은 내구성과 함께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루슬란에겐 치명적일 것이다. 아무래도 두 사람의 승부는 자말이 승리를 가져갈 확률이 높았고, 준결승에서 자말을 만난다면 현성이 결승에 진출한다 하더라도 막대한 체력 소모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토너먼트니까 우리만 이긴다 해서 이기 다 해결이 되는 게 아이다. 이게 골치가 아프네.”
확실히 토너먼트라는 승부 방식 자체가 격투기 세계에 그다지 흔한 경우가 아니었다. 다양한 소설이나 만화에서 다뤄진 바 있지만 실제로 이런 토너먼트 방식을 이용하는 곳은 K-1을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토너먼트 자체가 무척이나 큰 변수를 가지고 있는데다 선수가 최상의 상태로 경기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최상급 선수라 할 수 있는 바다 하리에 이어 다음 상대가 자말 로우지가 된다면 과연 결승은 어떠하겠는가? 물론 결승까지 진출한다는 보장이 없다만 그림을 그려본다면 상대적으로 1, 2회전의 시합을 거친 선수들이 유리할 수밖에 엇었다.
1회전인 기타와 사키의 승자는 상대적으로 약한 선수들이 포진해 있는 2시합의 우승자와 준결승을 치른다. 이변이 없다면 1 시합의 승자가 결승까지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무난한 전개가 예상되고 있으니 상대적으로 결승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캐도 일단은 준결승 진출을 먼저 목표로 삼아야 되지 않겠심까?”
우려를 표하는 민욱과 김관수 관장에게 현성이 별 다른 동요 없이 이야기를 꺼내자 두 사람이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묘하게 차분해진 듯, 흔들림이 없는 현성의 모습에 확실히 그건 그렇다는 듯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뭐. 토너먼트가 변수가 워낙에 많으니까. 루슬란이 자말을 잡을지 누가 알아? 그리고 사키랑 기타도 부상으로 아웃되고 짐머맨이나 페이토자 중 하나가 올라 올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래, 맞다! 일단은 오랜만에 봤는데 우리 같이 밥이나 거하게 챙기 먹자!”
현성이 미들급 타이틀을 반환하고 나서 생긴 가장 좋은 일이라면 바로 이런 것일 것이다. 이제는 증량을 해야 하기 때문에 체중에 구애받지 않다 보니 먹는 것이 비교적 자유로워 졌단 것!
“아, 안 그래도 배고픈데 잘 됐네요! 일단은 뭐 먹으면서 얘기나 좀 해봐요! UFC 건도 그렇고!”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내내 잠을 잤기 때문인지 피곤함 가득한 얼굴로 민욱이 이야길 꺼냈다. 그 말에 현성이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민욱이 니도 얘기 들었나?”
“당연하지, 새꺄! 내가 에이전튼데 모르면 어떻게 하냐?”
툴툴 거리는 그의 모습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김관수 관장이 껄껄 웃으며 두 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자자, 그만 싸우고 가자! 근데 너거 그래 입고 양 쪽에 있으이 꼭 내 뭐 된 기분이네.”
허허 웃음 짓는 김관수 관장의 말에 민욱이 ‘쳇!’ 하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현성이나 야쿠자 필이지 난 모델 필이거든요? 관장님!”
“약 한 모델이가? 다크 서클 턱 까지 내려와가.”
“…너 많이 세졌다?”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현성의 입담에 민욱이 팍 인상을 찌푸렸다.
“챔피언 해봤다 아이가.”
그 말에 김관수 관장이 껄껄 웃음 짓는 동안 어느 샌가 그들이 매번 찾아가는 단골 고기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고베산 와규 먹읍시다! 오늘 정말!”
그 모습에 민욱이 꿀꺽 침을 삼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랜 비행 탓에 많이 배가 고팠던지 기분 넘치는 그의 모습에 김관수 관장이 후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빨리 드가자!”
그리고 그가 힐끔 현성을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그 가게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마치 추억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만 했다. 아마도 그게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혜주와 함께 왔을 때가… 말이다.
“현성아.”
“예, 관장님! 들어가지요!”
이내 그가 괜찮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추억이 맴돈 곳. 하지만 더 이상 거기에 사로잡혀 과거를 맴돌진 않을 것이다.
담담하게 걸음을 옮기는 현성은 정말로 짧은 시간동안 무척이나 강인해져 있었다. 민욱 역시 어렴풋이 그의 분위기에 그런 낌새를 느꼈다만 한 소리 해줄 필요도 없어진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이네! 아직 찔찔 짤 줄 알았더니!”
그 말에 현성이 그럴 일은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여전히 생각을 하면 서럽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멈춰 살아가는 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이젠 앞으로 나가야만 한다.
“그캐봐야 내한테 뭐가 남겠노.”
냉정한 듯, 강인한 그의 대답에 민욱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 그냥 아주 죽여주게 놀자! 도쿄 핫 어떠냐?”
민욱 역시 뉴욕에서는 공부만 하느라 제대로 놀아본 지가 오래됐다는 듯 현성을 향해 씩 웃음 지어 보였다. 그 말에 현성이 피식 웃음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대진표 나왔는데 그래 놀 수 있겠나. 만만찮잖아.”
“바뀐 줄 알았더니 아직도 모범생이네. 그래, 그래라! 날 버리고 혼자 떵떵 거리며 잘 살아라!”
“고맙데이.”
과거와 달리 민욱의 말에 휘말리지 않고 다시 느긋한 웃음 짓는 현성의 모습에 민욱이 정말 못 본 사이에 많은 면이 달라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는지 왠지 모를 뿌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 사이에 가게 주인이 그들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얼굴로 소리쳤다.
“오, 왔구만!”
현성과 김관수 관장, 민욱을 반기는 사장님의 모습에 현성이 당시 기억이 다시 난 듯 조금은 쓴맛을 느끼며 미소로 인사 했다.
“잘 지내셨어예?”
하지만 그것에 더 이상 휘둘릴 일은 없다. 감정은 자신의 것이고, 그걸 휘둘러야 할 사람은 자기 자신이니까. 아직까지도 완전하진 않다. 그게 완벽해졌을 때 그는 더 강인해질 수 있고, 또한… 다시 한 번 혜주에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나야 잘 지냈지! 이제 본선 시작을 하려나 보군?”
사장님 역시 일본에서 생활을 오래 해왔고, K-1 이벤트에 대해서 문외한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그리 이야기 하자 현성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성적 내라고 확실히 대접을 해야 겠어! 이쪽으로!”
들뜬 얼굴의 사장님이 방으로 현성과 민욱, 김관수 관장을 이끌었다. 타지에서 만난 동향 사람만큼 반가운 사람은 없다고 사장님의 환대에 세 사람이 훈훈한 기분을 느끼며 자리 잡았다.
“음, 내는 화장실 좀 잠깐 갔다 와야겠다!”
그 사이 김관수 관장이 둘이서 이야기를 더 하고 있으라 이야기 하며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도 역시나 사장님 독자적인 고베산 와규가 주문이 들어간 가운데 민욱이 분위기를 바꾸어 현성에게 물음을 던졌다.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데?”
그의 물음에 현성이 크게 특별할 것은 없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우선은 전반적으로 스파링 위주로 돌릴라고. 캐가 극진회관에서 트레이닝 계속 할라 생각하고 있다.”
“스파링 위주라. 아시아 챔피언 결정전 때랑 비슷하네?”
“음. 일단 체중도 98킬로까지는 늘여보고, 체력이랑 속도 위주로 풀어갈라고.”
“그럼 만만치 않겠네. 하필이면 첫 상대가 하리라…”
하리라면 K-1에서 최고의 속도와 공격력을 지닌 상대였다. 물론 공백이 있긴 하지만 지역 예선에선 건재한 모습을 보인 바 있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더 문제라는 듯 민욱이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해보였다. 누가 상대가 되든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입식에선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들이 현성과 함께 경합을 벌여야 할 테니까.
“괜찮다.”
하지만 당사자인 현성은 그리 크게 불안해하지도, 걱정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담담한 얼굴로 당찬 자신감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김관수 관장이 사고를 당해서 그들 스스로 준비를 해야 했던 아시아 챔피언 결정전과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 때 현성은 스스로 답을 찾아냈다. 스매쉬라는 강력한 무기를 장착했다.
“…뭐 뭔가 믿고 있는 구석이 있나보네.”
아마 이번에도 역시 그에 준하는 무엇인가를 찾지 않았을까? 그를 알고 있다, 모른다를 떠나서 민욱으로는 기대가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격투계를 떠났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는 격투기 팬이었으니까.
“응. 마음도 몸도 준비 되어 간다.”
현성의 음성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고, 흔들림이 없었다.
그 순간 대책이 없다기 보단 뭔가 또 믿음직스러운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순간 민욱의 머리를 스쳤다.
왠지 모르게 이 녀석이 12월 11일, 대망의 월드 그랑프리에서 또 다시 놀라운 모습을 보여줄 것이란 묘한 기대감을 가지고 민욱이 그를 바라보는 동안 현성이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말했다.
“닌 가서 내 미국 안내 해줄 준비나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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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본이랑 병행하려고 했는데 설전까진 그냥 괴물에 집중해야 겠습니다. 둘 다 집중해서 하려니까 정신 사납네요. 빠릿빠릿 뽀잇뽀잇 하게 나갑시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