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 회 - 괴물
7월 이후로 현성이 이토록 깊고, 포근하게 잠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이번 역시 매번 기절 하듯이 잠이 들었을 때와 다를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몸이 더 힘들고 버거워 정말 언제 잠이 든 지도 모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깊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매 번 새벽을 뒤척이며 깨어났던 것도 오늘 만큼은 사라지고 없을 것만 같았다. 가보라도 되는 마냥 챔피언 벨트를 꼭 끌어안고 자는 그의 모습은 마치 곰 인형을 꼭 안은 어린 아이와 다름 없었다.
사실 모습만 본다면 지금 그의 상태는 아이의 것과 거리가 멀었다. 얼굴엔 트라이앵글 초크를 당하면서 현재에게 많이 맞은 터라 흉이 지고 부어오른 상처들이 가득했고, 특히나 트라이앵글 초크로 졸렸던 목에는 연 보랏빛 멍 자국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티는 나지 않지만 감량 중 탈진해 무너져 내렸던 몸으로 현재에게 2번이나 슬램을 시도한 여파 때문인지 전신에 근육통을 호소했고, 미약하지만 열도 있었다. 그런 탓에 잠이 든 상황에서도 울긋불긋한 얼굴은 아이라기 보단 싸우다 지쳐 잠이 든 남자에 가까운 외형이었다.
그러나 그 표정만큼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평온해 보였다. 따스한 봄날, 불어오는 훈풍 속에서 어머니의 자장가를 듣고 잠이 든 아이처럼 말이다. 벨트를 꼭 안고서 쌔근쌔근 숨을 내쉬는 현성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입가에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도 알지 못할 테지만 현성이 혼자서도 웃음을 되찾은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노력의 결실을 드디어 얻었기 때문일까? 비록 얼마 가지지 못하고 반납을 해야 하는 벨트라고 하지만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최소한 현성에게는 그간의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 이야기 해주는 동시에 새롭게 시작 할 수 있는 ‘가능성’과 같은 것이었으니까.
물론 가능성은 언제나 불확실함을 내포한다. 그것은 잠이 든 현성도 충분히 알고 있는 일이었다. 단지 과거와 다른 게 있다면 불확실하다 하더라도 스스로에 대한 확신만 가질 수 있다면 도전해보려 한단 것일 것이다. 그게 지금의 그에겐 가장 큰 행복이었던 모양이다. 몸이 버티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라면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불면 증상을 보이던 현성이 미소까지 띤 채 잠들 수 있단 것은 말이다.
“…또 계속 잘라 카나…?”
이른 새벽이지만 알렉세이 코치와 함께 축하주를 마시고 잠깐 현성을 보러 들어온 김관수 관장이 그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밴너를 이기고 내내 잠이 들었던 그 날을 다시 보는 듯 그의 표정은 한 없이 평온했다. 혜주와의 이별 이후로 홀로 있는 현성은 대부분 무표정했다. 그리고 강도 높은 훈련으로 인해서 언제나 고통을 참아내며 인내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알고 있다만 무어라 위로를 해줄 수 있겠는가? 그저 곁에서 계속 신뢰와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함께 마음 아파하고, 함께 울며, 웃고. 그것이 그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게 현성에게 도움이 되었을 진 모르겠지만 그랬기 때문일까?
오랜만에 보는 제자의 평온한 얼굴에 김관수 관장이 후후 웃으며 그의 침대 옆 자리에 살며시 엉덩이를 붙였다. 잠이 들어 있는 현성의 얼굴을 보니 왠지 모르게 웃음과 자랑스러운 기분이 동시에 느껴졌다. 한 편으론 여전히 행복하지 못한 그의 모습에 맘이 미어지기도 하지만 그는 정말로 현성이 자랑스러웠다. 단순히 알렉세이 코치가 챙겨온 보드카를 마시고 알딸딸해진 기분이 들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김관수 관장이 부드러운 얼굴로 현성의 잠든 머리를 쓰다듬자 그 예민한 현성이 그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쌔근쌔근 숨만 내쉬었다.
“…진짜 수고 했다… 현성아.”
그리고 그가 천천히 현성의 상처 난 얼굴을 매만지며 ‘휴…’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어라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만 매번 시합 후에 상처가 가득한 것이 파이터의 얼굴이라고 하지만 현성을 볼 때면 매번 맘이 아파왔다. 마치 ‘아들’이 있었다면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내 아들…”
피가 섞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에겐 가장 사랑스러운 이가 현성 아니겠는가? 기철과는 달랐다. 알고 지내온 시간은 그가 더 길다 하더라도 기철은 친구 같은 제자였다. 하지만 현성은 달랐다. 요령도 없고, 어수룩하다. 항상 그의 말이 전부인 마냥 그의 말을 따를 뿐이었다.
“자랑스럽다, 내 아들.”
그게 트레이너로써는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 말로는 이뤄 설명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트레이너이기 이전에… 정말로 이런 아들이 있다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며 김관수 관장이 미소 지었다.
“이제는… 맘 아프지 말그라.”
몸이 아프면 연고라도 발라주고,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조금 더 신경 써서 훈련을 진행할 텐 데… 언제나 그는 몸 보다 마음이 아픈 사람이었다. 그 안타까운 마음을 담은 한숨 소리에 현성이 ‘으음…’ 하고 몸을 뒤척였다. 혹시 깨운 게 아닌가 싶었던지 김관수 관장이 움찔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잠은 깨지 않은 듯 현성이 더욱 더 벨트를 꼭 끌어안고서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자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소 지었다.
“…누가 훔쳐 가나…?”
잘 생긴 얼굴도, 예쁜 용모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서워 보일 정도로 험상궂은 용모였지만 그의 눈에는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정원장이 질투하겠데이.”
그리고 김관수 관장이 뒤척이는 동안 내려온 이불을 조심스럽게 다시 덮어주자 현성이 이불 속에서 더욱 더 몸을 웅크렸다. 뜨거운 걸 싫어해도 따뜻한 것은 좋은 모양이다. 그 모습에 김관수 관장이 흐뭇한 미소와 함께 다시 뒤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잠이 들어 있는 현성의 방문을 닫고서 밖으로 나온 그가 이제 자신도 잠을 좀 자야겠다 싶었던지 자신의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시합이 끝남과 동시에 현성이 기절하듯이 잠이 들어 버렸기 때문에 아직까지 그를 비롯한 토네이도 짐의 식구들과 키드와 광철은 컨벤션 호텔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었다. 컨벤션 호텔에서 가장 큰 방을 제공 받은 터라 침실과 거실이 따로 비치되어 있었다.
이 방을 현성과 김관수 관장, 알렉세이 코치, 기철 네 사람이 함께 사용했다만 아직까지 나머지 두 사람은 키드와 광철의 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아니, 김관수 관장이 빠져 나올 때쯤엔 사실 거의 대부분이 얼큰하게 취해 있었으니 그 방도 지금쯤 잠이 들었을지도 몰랐다.
“내일은… 전신에 다 팅팅 불어가 나오겠데이.”
현성은 너무 자서 부어 있을 것이고, 나머지는 술 마시고 제대로 잠을 못 자 부어 있을 것이고. 그 모습을 보면 현성이 웃지 않겠나 싶었던지 그가 후후 웃음을 띤 채 현성의 방과 반대쪽에 비치된 침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김관수 관장이 ‘부르르…’ 하고 떨리는 진동을 느끼곤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한창 술을 마실 땐 몰랐다만 아무래도 메시지가 들어왔던 모양이다. 그가 조용한 침실로 들어가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방에 환한 핸드폰 액정이 빛을 발하며 순간 굳어버린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리고 김관수 관장이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혹시나 싶은 맘에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아무런 컬러링을 걸지 않은 신호음이 어둠 속에서 그의 귓가를 울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무래도 지금은 너무 늦은 시간이었나 보다 생각하고 김관수 관장이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딸칵…
신호음이 통화로 전환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조심스러운 목소리.
“안녕하세요… 관장님…”
많이 울었던지 가늘게 떨리는 그 목소리에 김관수 관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오랜만이네, 혜주야. 잘 지냈나…?”
목소리를 듣자마자 한숨이 먼저 나왔다. 그리고 취기 덕분인지 울렁울렁하는 기분이 가슴에서부터 느껴졌다.
“…네… 관장님…. 관장님도 잘… 지내셨죠…?”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혜주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눈에 선했다. 현성만큼이나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고, 특히나 그들이 헤어지기 직전에는 현성보다도 그와 더 오랜 시간을 보냈으니까.
“그래, 내야 뭐… 잘 지내지. 그래…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고…? 아, 아이다. 내가 너무 늦게 연락했나…?”
이야기를 꺼내던 김관수 관장이 메시지는 이 시간보다 일찍 왔다만 자신이 술에 취해 깜빡했단 것을 다시 상기해내며 물음을 던졌다. 그 물음에 핸드폰 너머의 혜주가 울어 잠긴 듯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항상 생기발랄하고 똑 부러지던 그녀가 이렇게 의기소침한 목소리를 낼 줄이야…! 그 생각에 김관수 관장이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이 시간까지 잠을 자지 못하고, 울었던지 잠긴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유는 누가 봐도 자명했다.
“현성이… 개안타. 크게 이상은 없다.”
눈치 없이 계속 물음을 던진다면 그것 또한 혜주에겐 고통일 것이다. 그녀 역시 그의 시합을 지켜보았을 것이고, 그 장면들을 모두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현성이 얼마나 버겁게 현재를 쓰러뜨렸는지도…! 아마 그걸 보고 지금까지 잠 못 이루고 울었던 모양이다. 그걸 참지 못하고 김관수 관장에게 문자 메시지라도 보냈던 것이고…
“아…”
목이 다시 메여왔던지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자 김관수 관장이 더 없이 안타까운 마음을 느끼며 말했다.
“좀 준비 하는 도중에 많이 힘들긴 해가… 그래서 시합도 어려워 보였는데… 그래도 잘 이기고, 또 지금 잘 자고 있으니까네 너무 걱정은 말그라. 혜주야.”
왜 두 사람이 헤어져야만 했던가? 그건 아직까지 그로써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물론 혜주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짐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두 사람 모두 힘들어 하고 있는데…
“네… 관장님…”
다시 훌쩍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김관수 관장이 다시 물음을 던졌다.
“니는 진짜 잘 지내고 있는기가…?”
“저는… 괜찮아요…”
끅 하고 막힌 목소리. 그리고 잠깐의 정적 끝에 힘겹게 꺼낸 그 한 마디에 김관수 관장이 이건 정말 아니라는 듯 혜주에게 말했다.
“혜주야…! 대체 와 그래 힘들게 사노…! 쉽게 가면 안 되겠나…? 현성이도 니 없어가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모르겠나…? 지금이라도…”
“흑… 흐흑…”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핸드폰 너머로 그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울음소리에 김관수 관장이 무척이나 무거운 마음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저도 보고… 싶어요…”
하지만 그럴 수가 없지 않은가? 결국은 버티지 못하고 그의 곁을 떠나버렸기에…! 그리고 그의 곁에서 그를 더 빛내줄 수 없단 그 사실이, 그의 발목을 붙잡게 될 것이란 사실이 그녀에겐 괴로움이었으니까.
“…카면 혜주야…! 보고 싶으면 보고… 같이 있으면 되는 거 아이가…?”
간절한 목소리로 그가 설득하려 했지만 혜주는 울음만 터뜨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 흐느끼는 음성 속에서 현성보다 오히려 더 힘들어 하고 있는 건 혜주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김관수 관장의 두 눈에도 뜨뜻한 뭔가가 차올랐다.
보고 싶고, 만나고 싶다. 그리고 걱정하고 있다. 그걸 그를 위해서 꾹 참고 있는 그녀를 어떻게 나무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뭐라 카는 게 그리 중요하나…? 아이다, 혜주야! 정말로 중요한 거는 둘이 어떻게 사느냐지 그런 게 아이다…!”
“흐… 흐흑… 관장님… 내… 흑… 바보 아니고… 흐끅… 닳을 대로… 닳은… 하아… 여자잖아요… 흑… 다… 안 그라는 척 해도… 뒤에서 다… 그럴 건데… 으흐흑… 난 몰라도… 현성이는 안 돼요… 흐흑… 그카면…”
그러나 그의 말은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흐느낌 속에서 끅끅 거리며 힘들게 꺼낸 그녀의 그 말은 왜 그녀가 그의 곁을 떠나서, 이토록 아파하면서도 다시 돌아올 수 없는지를 너무나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혜주가 살아온 세상은 그렇게 따스하고 다정한 세상이 아니었으니까. 결국은 그녀 자신이 그에겐 멍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생각을 도무지 떨쳐내지 못하고 겁을 먹고 움츠러든 혜주의 모습에 김관수 관장이 안타깝고 갑갑한 마음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남녀 사이의 일은 당사자인 두 사람이 해결을 해야만 할 것이다.
“…현성이… 얘기는 들었나…?”
그리고 그가 ‘이제 시작이다…’라고 이야기 했던 현성의 말을 떠올리며 다시 물음을 던졌다. 그 말에 혜주가 이젠 말도 잇지 못하고 엉엉 울음을 터뜨리자 김관수 관장이 어떻게든 두 사람의 사이를 다시 이어주고 싶은 안타까운 맘을 느끼며 말했다.
“현성이는 포기 안 할 거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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