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 회 - 괴물
“UFC요…?”
이시이 관장과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온 김관수 관장의 말은 그야말로 놀라운 내용이었다.
“그래. 거서… 그랑프리 결과 보고 조만간 오퍼가 들어올 수도 있단다. 그거 때문에 이시이 관장도 고민이라 카긴 하는데… 어느 정도는 마음이 기울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당초 김관수 관장이 가닥을 잡았던 방향은 사실 K-1이 아니라 UFC였다. 실제 UFC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참여할 계획까지 가지고 있었지만 오퍼가 들어오지 않는 한 UFC는 접근이 힘든 곳이었다.
최소한 로드원 FC 챔피언을 달고 많은 경기에서 두각을 나타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선택했던 K-1 행이 그의 목표를 훨씬 더 빨리 앞당겨 주게 된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카면 이건 어떻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안 잡혀 있다만 아무래도 K-1 대표 신분으로 UFC 챔피언 로제스타랑 시합을 가지게 되는 거 아인가 싶다.”
“아… 그래도 관장님. K-1 선수가 종합 선수랑은…”
현성의 말대로 입식 선수가 종합 선수를 상대로 시합을 벌이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에 가까운 일이었다. 물론 강력한 스탠딩 능력을 통해서 상대를 단숨에 제압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상대에 의해서 ‘넘겨질 확률’이 더 높았으니까!
상대를 KO 시키는 일 보다는 테이크 다운을 성공 시키는 일이 훨씬 더 쉬운 일이었고, 문제는 바로 그 이후였다. 대부분의 입식 선수들은 그라운드 개념에 생소하고, 그라운드에서 상황에서 종합 선수를 이길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그 대단한 세미 슐츠도 입식에선 절대강자로 군림했지만 종합에서는 최고의 기량을 뽐내진 못했다.
“그래. 그래가 아마… 이시이 관장이나 거서도 우리를 주목하고 있는기라. 우리는 다른 선수들이랑 다르게 그라운드 대비가 되니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현성은 입식 전승, 종합 전승이라는 굉장한 퀄리티의 전적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파급 효과는 단순 전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경기 장면에서 가장 크게 발휘되는 상황이었다.
아마 UFC에서도 이런 제의를 굳이 꺼내든 것이 분명히 현성에 대한 기대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카면 어쨌거나 중요한 거는… 그랑프리에서 최소한… 준결승 정도는 드가야 된단 거네요…?”
어제 하루의 공백이 꽤나 괴로웠던지 이른 아침부터 땀을 한껏 빼낸 현성이 새로운 목표가 다가오자 다소 들뜬 얼굴로 물음을 던졌다.
“그래, 그렇지. 일단은… 이번 로드원 타이틀 샷부터, 연말 그랑프리까지… 중요한 일정이 많이 생긴기다. 정확한 오퍼가 들어오면 그때 생각해볼 일이겠지만 니도 미리 알고 생각을 해보라 얘기하는 거다, 현성아.”
김관수 관장이 그리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현성이 데뷔한 이래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해본 적이 없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1년 반 동안 9전을 치룰 정도로 일정은 촘촘한 편이었고, 현재의 현성은 몸보단 심적으로 지쳐 있는 상태였다.
바로 또 다시 새로운 도전이 주어진다면 아무래도 그에겐 그리 쉽지 않은 일이 될 수 있었다. 숨조차 고를 시간 없이 무작정 또 앞으로 달려가야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현성이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이야기를 하고 있겠지만 사람은 기계가 아니었다. 쉼 없이 달려온 만큼 성과는 생기겠지만 오히려 선수 수명은 짧아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카면 미국… 갈 수도 있겠네요.”
물론 그도 휴식이 필요하단 것을 알고는 있지만 한국도, 일본도 아닌 새로운 장소란 것이 현성을 들뜨게 만들었다. 은근한 기대감이 맴도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그 누구의 흔적도 없는 곳이었으니까.
물론 현성도 그리로 또 다시 쉼 없이 가게 된다면 몸이 버티지 못 할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아예 들지 않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아무런 흔적도 없는 땅. 그게 현성의 마음을 이끌게 만들고 있었다.
내심 그 제의에 솔깃한 현성의 모습을 보니 김관수 관장이 마음이 아픈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지. 근데 그거는… 그때 되믄 함 생각해보자. 지금은 그거보다 타이틀 샷 준비하는 게 더 급하니까.”
“예, 관장님. 그거는 나중에 생각을 좀 해볼게예. 참… 그래가지고 말인데… 이번에 시합 끝내고 나면 저 한… 일주일이나 이주일 정도 휴가 좀 갔다 왔으면 하는데…”
UFC의 제의 이전에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듯 현성이 그리 이야기를 하자 김관수 관장이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 시합을 마치고 나면 또 다시 2달 후의 월드 그랑프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시합의 결과에 따라서 현성은 그랑프리 챔피언이 되어 UFC의 타이틀에 도전을 할 수도 있게 된다.
그게 무척이나 중요한 일정인지라 얼핏 휴식은 사치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만 현성에게도 분명 휴식은 필요했다. 더 이상 훈련이 도피처가 되어선 곤란한 일이었다. 그 마음을 다스리고 정리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 현성아. 어디 생각 해 놓은 데는 있나?”
“그냥… 되게 조용한… 시골 같은데서 좀 지내고 왔으면 좋겠심다. 혼자…”
머리를 긁적이며 소박한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모습에 김관수 관장이 다소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현성을 바라보았다.
“티비도 안 나오고… 컴퓨터도 안 되고… 진짜 깊은 산골 같은데… 그런 데 있다 오고 싶어예.”
어느 정도로 이 세상과 거리를 두고 싶은지 너무나도 여실히 드러나는 대답인지라 김관수 관장이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별의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승리했고, 빛이 나는 듯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현성이라지만 그걸 불편해 하고 있었다.
자꾸만 혜주의 생각이 나도록 하는, 그리고 그를 괴롭게 만드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로 끊어버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모습에 김관수 관장이 깊이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내 예전에 살던 집이… 현성이 니 말한 대로 진짜 깊은 시골에 있다. 근처에 절 하나 밖에 없는데 거 가가 있다 오면 어떻겠노?”
“아… 관장님 어릴 때…?”
그 말에 김관수 관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현성이 나쁘지 않다는 듯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가믄 아무 것도 없을 낀데… 거의 흉가, 폐가… 이런거라가 귀신 나올지도 모른데이.”
“절 바로 옆에 있으니까 괜찮을 거 같은데예.”
벌써부터 휴가 생각에 들떠있는지 현성이 후후 웃음 짓자 김관수 관장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카면 거게 스님한테 미리 내 연락 해놓고 미리 좀 정리도 해놓고 하께. 근데 휴가를 그런데 보내도 괜찮겠나?”
보통 현성 또래의 젊은 남자들이 가지는 휴가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현성 자체가 또래들보단 한참이나 어른스럽기도 했고, 결코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몰랐지만 그는 그게 좋았던 모양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현성의 모습에 김관수 관장이 말 없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체중은 이제 얼마나 남았노?”
“2.5킬로 정도 남았심다. 저번보단 좀 쉬울 거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알렉 코치님한테 크림… 부탁해 놨어예.”
역시나 감량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땀을 뺀 현성이었지만 노력에 비해서 성과는 미미했다. 또 다시 엑셀레이트 크림의 피부가 녹는 듯 한 고통을 맛보아야 한다는 생각에 말을 하면서도 현성이 한숨을 푹 내쉬자 김관수 관장이 안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이번에는 카면… 그런 거 쓸 필요 없도록 제대로 함 땀 뽑아내보자.”
그를 생각해서라도 고통은 최대한 줄이고 싶은 것이 트레이너의 마음 아니던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킬러비에서 석현재와의 타이틀 전을 준비하기로 한 듯 김관수 관장이 다시 의지를 불태우자 현성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중요한 거는 카면… 스탠딩으로 게임을 우리가 들고 가서 압도하는 거 뿐이다. 사실 그라운드 게임으로 들어가면 아주 위험할 수가 있으니까.”
지금 현재 현성이 보여주고 있는 공격력은 최상이라 할 수 있었다. 이 공격력을 유지만 한다면 석현재가 아무리 한국 최고의 주지싯떼로라 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기본적인 접근 자체가 어려울 테니까!
“예. 쇼트 복싱 위주로 찔러 넣고 요리 하면 될 거 같심다.”
“근데 문제는 우리 시합이 이미 노출이 됐으니까 그걸 보고 분명히 대처는 해올끼라. 어떻게든 접근을 불사 할 건데…”
스트라이커와 주지싯떼로의 싸움! 이것은 곧 상대를 넘기느냐, 못 넘기느냐에 따라 결착이 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석현재가 명실공히 국내 최강이었던 데니스를 타격에서도 압도하며 이제는 올 라운드 파이터의 면모를 갖췄다 하더라도 그의 피니쉬는 분명히 그라운드에 있었다.
“시작하자마자 아마 어떻게든 넘기려고 할 끼다.”
“그럴라면 레슬링 밖엔… 없을 거 같은데예.”
넘기느냐, 넘기지 못하느냐! 아무래도 석현재가 레슬링 능력을 상당히 키워 올 것이라 생각한 듯 김관수 관장이 디펜스에 중점을 두고 훈련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광철아! 좀 더 하드하게 들어가줘도 된다!”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 현성이 제대로 된 그라운드 경험이 없으니, 그 자체를 경계하는 일이었다. 민욱과의 시합에서 분명 그라운드 압박과 제대로 된 레슬링이 무엇인지 보여주었지만 상대인 민욱이 그라운드엔 별 다른 대처가 되지 않으니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현성을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더 훈련의 강도는 높아야 한다 싶었던지 김관수 관장의 외침에 광철이 이마에 퍼런 힘줄을 보이며 소리쳤다.
“알고 있습니다! 근데 이놈의 힘이 너무 세요!”
그 말에 김관수 관장과 알렉세이 코치가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레슬러가 타격가한테 힘으로 밀림 어떡하노!”
“아유, 무슨 힘이! 아유 정말!”
투덜투덜하고 있긴 하지만 광철의 체중이 85킬로 정도로 지금 당장은 현성보다 가볍단 것을 생각한다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힘이나 테크닉 면에서 현성을 밀어 붙이고 있단 것에 놀랄 필요가 있었다.
김관수 관장이 킬러비 짐을 훈련 장소로 삼은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아시아권 팀 중 가장 레슬링 능력이 강한 곳이 킬러비이다. 그러다 보니 다른 능력은 둘째치더라도 레슬링 능력 하나만을 따져 보았을 땐 가히 세계적인 레벨이라 할 수 있었다.
“조금 더 유연하게! 압박해서 눌러! 절대로 다리를 잡히면 안 된다!”
작은 덩치만큼 낮은 자세로 다리를 가져가려는 광철의 몸놀림에 김관수 관장이 오더를 내리자 현성이 바로 광철의 몸을 누르며 강인한 허리힘으로 버티고 서 저항해 보이곤, 이내 그를 뿌리치고 백 스탭으로 거리를 만들었다.
“한 번 테이크 다운 실패 할 때 마다 현재 발목이 0.1킬로씩 모래 주머니를 다는거다, 현성아! 알겠나!”
테이크 다운의 체력 소모는 상당히 심했다. 레슬링 상황이 필연적으로 연출이 되며 힘으로 대결을 해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테이크 다운을 실패 할 때 마다 체력의 소모 또한 심각해졌다.
“그때를 노려야 된다! 실패하고 계속해서 데미지를 꽂아 넣고! 집중력이 풀리면 그때를 노리고 몰아 쳐야 되는 거다!”
킥은 캐치 당할 위험이 있다 보니 지양한다 하더라도 현성의 위력적인 잽은 정확도를 가미해 그것만으로도 견제는 충분할 것이다. 그 말에 현성이 어렵잖게 다가오는 광철의 얼굴을 잽으로 가볍게 뒤흔들고는 빨라진 발로 스탭을 밟자 광철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유, 정말! 이거! 이 발 정말! 이 손! 아유!”
진심으로 짜증 섞인 그 목소리에 현성이 저도 모르게 푸핫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순간만큼은 그래도 웃을 수가 있었다. 이것이 이렇게 좋아질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만, 이제는 단순히 돈이 아니라 그 자체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 그리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 이젠 그를 웃게 만드는 유일한 때가 되었다니… 설령 벌이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가능하다면 이 일을 계속 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건 미처 현성이 의식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 생각에 그가 불현듯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는 익숙해져 가겠지…?”
============================ 작품 후기 ============================
오랜만에 찍어보는 숫자네요. 200회!
이제 슬슬 괴물도 후반기로 접어들어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