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회 - 괴물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설마하니 사키가 극진회관까지 그를 찾아올 줄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극진회관의 거대한 건물 내부에 비치된 휴게실. 그 자리에 사키의 맞은 편에 나란히 앉은 현성이 그런 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아, 괜찮심다. 그냥.. 마이 놀래가.”
다소 어색한 웃음 섞인 그의 표정에 사키가 옅은 미소와 함께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한국어가 얼마나 능숙해졌는지 예전처럼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이 세우지 않아도 그의 사투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현성이 짧은 시간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처럼 사키는 언어적인 측면에서 압도적인 발전을 이뤄 냈다.
한국어를 접한 지 아직 채 1년이 되지 않은 짧은 시간. 그리고 아시아 챔피언 결정전 이후로 ‘승리의 여신’이란 이름을 얻게 되고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스케줄을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보다 더 능숙해진 한국어는 사키가 얼마나 열심히 말을 공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녀가 한국어를 공부한 이유. 그건 아무리 현성이 둔하다 해도 알아차리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새삼스럽게 그 사실에 마음 한 구석이 고맙기도 하면서, 동시에 무엇인가를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에 스스로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을 느낀 그가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땐…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했네예.”
“아…”
옅은 웃음 머금은 그의 말에 사키가 이내 그를 따라 미소 짓다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해보였다. 아마 그녀도 그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사실 그 날 당사자들 모두가 어렴풋이 눈치는 챘을 것이다. 현성이 로드원 FC의 공식 인터뷰를 빠지고, 이시이 관장이나 사키를 두고 먼저 가버렸단 것에서 말이다.
그를 걱정하는 사키의 투명한 눈빛에는 그 어떤 사심도 들어있지 않았다. 오직 그에게 대한 걱정만이 가득했다. 그런 눈빛을 받아 보는 것이… 아주 먼 일은 아니었지만 아주 멀어진 것 같은 기분. 그 오묘한 기분이 미친 듯 훈련에 몰입하며 잊고 있던 사실들을 떠올리게 하는 기분을 느낀 현성이 잠깐 숨을 멈추고 멍한 얼굴을 하다 이내 한숨을 토해냈다.
“괜찮아요…?”
그런 그를 보며 괜찮으냐 조심스럽게 물음을 던지는 그녀의 모습에 현성이 얼핏 혜주가 스치는 것을 느끼곤 다시 쓴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좀처럼 그 쓴 맛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걸 다시 떠오르게 한 것이 사키의 잘못은 아니겠지만, 그에게 있어 지금 당장은… 격투기 말고는 대안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것보다 어쩜 다시 돌아가 스파링을 하고 미친 듯 샌드백을 때리는 게 더 좋을 것 같단 생각이 스쳤다.
“다이죠브. 괜찮심다.”
하지만 그런 티를 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녀와의 이별은 자말과 싸웠을 때 느꼈던 후유증이 온 몸을 흘렀다. 그때 입었던 부상들은 빠르게 완치 되었지만, 이 일만큼은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저릿저릿하게 마음에 남아 있었다. 웃으며 괜찮다 이야기 하지만 그 말엔 진실성이 없었다. 사키가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인 듯 어떻게든 웃으려 할 뿐이었다.
“많이 힘들어 보여요.”
하지만 그는 참 재주 없는 사람이다. 입은 아니라 해도 그 얼굴이 그렇지 않은 걸 어찌 하겠는가? 그런 그를 보며 사키가 다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내 사키의 걱정에 현성이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안 힘들다카면 거짓말이겠지만… 괜찮아예. 생각 할 시간도 없으니까.”
그게 맞는 말일 것이다. 잠깐 숙인 고개. 지금도 여전히 그의 곁에 있는 듯 스치는 혜주의 생각. 그것만으로도 깊은 두 눈가엔 촉촉함이 머금어졌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될 일! 이제는 홀로 서야 할 시간이었다.
“카다보면… 괜찮아 지겠죠. 특별한 일은 아니잖아예. 그냥… 다른 사람들도 다 하는 거니까.”
첫 실연. 너무나도 힘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잘 참아내고 있는 듯싶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사키와도 거리를 두는 듯 한 그의 모습에 사키가 맘이 아팠던지 더욱 걱정 섞인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연애 같은 건 한 번도 해보지 못해서 뭐라 얘기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녀가 무척이나 창피한 듯 고개를 숙인 채 미안하다는 목소리로 이야기 하자 현성이 웃음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 굉장히 의외라는 듯 힐끔 사키를 바라보았다.
“연애를…?”
“난 언제나 바빴기 때문에 시간이 없었어요. 다른 사람 맘에 담을 여유도…”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단 사키의 고백에 현성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12살에 데뷔를 해 지금까지 거의 쉼 없이 달려온 게 사키였을 테니. 어린 나이에 데뷔를 했다보니 연애를 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연이은 불행은 그와 마찬가지로 주변에 누군가를 두고 싶게 하지 못했을 것이고.
참 신기한 일이었다. 사키와는 이상할 정도로 공감이 되는 부분들이 많았다. 완전히 반대의 삶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힘이 들 때엔… 일들을 하는 것도 괜찮아요.”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그를 어줍잖게 위로하려거나, 혹 비어 있는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듯 진심 가득한 목소리로. 그리고 그녀도 그와의 묘한 공감을 느끼고 있는 듯 그 무엇보다 애정이 넘치는 시선을 하고서 말이다.
그 말에 현성이 힐끔 그녀를 바라보자 사키가 아무런 사심 없는 얼굴로 현성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나도 그랬었으니까…”
“아…”
그 말에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그와 마찬가지였다. 최고의 자리에서 연이은 불행으로 추락했던, 절망의 나날을 보냈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다 보면 어디가 끝인지도 알 수 없게 되어 버려요.”
현재로썬 현성도 다른 사람을 밀어 내고, 거리를 두는 게 익숙했다. 지금의 그는 여전히 깊은 자기 혐오감과 불신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걸 떨쳐내고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 그건 혜주가 만들었던 기적이었다.
병적일 정도로 심했던 콤플렉스 덩어리인 얼굴을, 가진 것 하나 없는 외롭고 비참한 몸뚱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던 사람이었으니… 아마 그때 현성이 느꼈던 기쁨은 그 어떤 일과 비교해도 이뤄 말로 설명 할 수 없을 것이다.
챔피언 벨트를 가지게 된다 하더라도 그때보단 기쁘지 않을 것이다. 매일매일 죄책감과 불안 속에서, 희망도 미래도 없는 내일을 버티며 살아갔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간 것이 아니라 사니까 살아가는 일상이었을 뿐. 그 삶에 따뜻함을 내려주었고, 그 삶에 한 가닥 꿈을 가지게 만들어 주었으며, 그가 세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그 누구보다 든든하게 지탱해주던 이. 그건 절망과 좌절밖에 없었던 삶에 내린 한 줄기 서광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단 것이, 심장보다도 더 아끼던 사람을 떠나가게 만들었단 것이 미어지는 죄책감으로 또 다른 상처를 만들었다.
“…그래도 돼요.”
목이 메여왔는지 그의 잠긴 목소리는 사키만큼이나 진심이 묻어났다. 험상궂은 얼굴에, 따뜻한 눈매를 가지고 있던 그 모습엔 슬픔이 가득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눈빛 속에서 사키는 또 다른 걱정을 보았다.
어쩜 사키도 불행해질지 모른다. 자신의 곁에 다가오는 모든 것들은 그렇듯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 그 생각 때문인지 현성이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말없이 캔 커피를 꼭 쥐어보자 사키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였다 살며시 내리 깐 눈으로 말했다.
“가끔 돌아보면 여전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보이지 않아요.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면요.”
그녀는 그를 만나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과거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불행의 상징이라는 수치스러운 이름을 떨쳐 내고 새롭게 일어서고 있었다. 아주 우연하게 스쳐 지나갔던 이방인의 물음 하나.
‘괜찮아요?’
아주 흔해빠진 말 하나. 하지만 그게 그녀를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건 현성 씨 잘못이 아니에요. 그런 건 옳지 않아요.”
한 없이 어려 보이는 사키가 이 순간만큼은 무척이나 강인해 보였다. 단호하게 이야기 하는 그녀는 자신의 말에 확신이 있었다.
“잘 하려고 했던 것뿐이잖아. 너무 좋아해서 잘 하고 싶었던 것뿐이니까.”
이야기를 하며 사키가 그 힘들었던 기억들이 떠올랐던지 어느 샌가 촉촉해진 눈을 해보였다. 어머니의 자살과 동생의 방황. 그리고 그로 인해 남겨진 빚들과 추락! 회색빛 도쿄에 홀로 남겨진 그녀 또한 현성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말에 이유 없이 왈칵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울컥울컥하는 기분을 끝까지 참아내며 현성이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숙이자 사키가 말했다.
“그건 잘못이 아니에요…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야.”
그건 사키가 현성을 좋아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에게도, 자신에게.
비슷한 상처를 공유한 사람만이 해줄 수 있는 위로에 현성이 옅은 미소를 띤 채 고맙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금방 수줍은 기색을 띤 채 사키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 없이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 어울리지 않을지 모른다. 그 모습을 볼 때 마다 스치는 혜주 생각에 그가 고개를 흔들자 사키가 다시 한 번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운 내줘요. 내가 뭔가…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응원하고 있어요. 진심으로.”
그 이상 다가오지 못한 채 먼 발치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무척이나 차분했다. 재촉하지도 채근대지도 않았다. 그저 이렇게 볼 수 있단 것만으로도 좋은 듯, 그의 아픔을 더 가까이에서 보듬어 주지 못해 아쉬워 할 뿐.
“혼자가 아니에요. 절대로…”
그 순간 정말로 사키에게 기댄다면 이 고통들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현성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건 진심이 아닐 것이다. 단지 혜주가 여전히 맘에 남아서 괴로운 걸 잊어보려 하는 간사한 맘일 뿐일 것이다.
몇 번을 생각해도 자신은 영리하지 못한 사람이란 생각에 저도 모르게 현성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사키. 아마 그가 이대로 그녀에게 와준다면 그녀도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만큼은…
“열심히 해볼게예. 계속…”
하지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렇게는 하지 못 했다. 결국 요령 없는 현성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노력, 정진. 그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말에 사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민도, 동정도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는 걱정. 그 마음을 그가 알아준다면 좋으련만… 아니, 알아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쩜 그만큼이나 서글픈 맘이 그녀인지도 몰랐다.
“응! 힘내요. 정말… 응원 할 게요.”
“매번… 고맙네예. 참… 왜 나 같은 걸…”
그 마음을 느끼기 때문에 더욱 더 미안한 듯 현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여전히 그는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존재 아니던가? 비록 격투기 선수로 유명세를 가지고 있다지만… 그런 건 사키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그녀는 그 자체가 높디 높은 명성과 유명세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만나고자 한다면 민욱이처럼 잘 생기고 능력 있는 녀석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스키 다카라네.”
“예?”
한국어로 잘 얘기하던 사키가 일어로 이야기를 하자 현성이 조금 당황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을 크게 뜬 그를 보며 사키가 이유 따위는 없다는 듯 수줍은 미소를 띤 채 고개 숙였다. 차마 부끄러워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말론 얘기 하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혼토니… 스키다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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