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회 - 괴물
K-1의 월드그랑프리 16강 파이널은 도쿄가 아닌 요코하마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물론 요코하마 자체가 도쿄와 거리가 멀지 않은 곳인지라 현성의 숙소도 자연스럽게 도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상대인 글라우베 테세이라가 극진 가라데 챔피언 출신인지라 오전에는 미도리 겐지 사범을 비롯한 극진 소속 선수들과의 스파링을 이어갔고, 오후에는 킬러비 짐을 방문해 10월에 있을 석현재와의 타이틀 샷을 준비하는 등 바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잽을 뻗을 때 조금 더 회수하는 동작을 빠르게 해보자, 현성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수록 정신없이 바쁜 것은 해답이 되어줄 만 한 일이었다. 김관수 관장의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뻗는 속도 뿐 아니라, 주먹을 회수하는 속도까지 염두에 두고 펀치 스킬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입식과 종합 두 가지 종류의 시합, 그것도 몹시 중요한 시합이 연달아 2 가지나 있다보니 상당히 준비가 부담스러운 상황이기도 했지만 다행스러운 점은 두 경기 모두 기본적인 파이팅 스타일을 유사하게 가져갈 수 있단 것이었다.
물론 석현재에 비해서 휴식 시간이 짧은데다 K-1 시합이 먼저 공개가 되다 보니 그로 하여금 대비 할 수 있는 여지를 주게 될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 또한 지금의 상황에서는 현성이 감당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파방!
매섭게 샌드백을 흔드는 그의 잽은 확실히 이전과 다르게 속도가 더욱 향상되어 있었다. 현재 현성의 체중이 90킬로로 고정되어 있는 만큼 상대적으로 그의 몸 사이즈도 줄어들었으니 속도의 향상은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대단해. 정말 빨라.”
미도리 겐지 사범이 극진 선수 중에서는 저렇게 빠른 주먹을 구사 할 수 있는 선수가 없단 듯 고개를 흔들자 김관수 관장이 후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혼자서 격투기에 대해서 학문적인 접근도 하고 공부를 많이 하더니 동작에 군건더기가 많이 줄었더군요.”
“오! 이론적인 공부까지 함께 하고 있군요. 역시…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현성 군은.”
뿌듯한 김관수 관장의 말에 겐지 사범이 역시나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상대가 신극진회와 같은 맥락인 대도숙 출신이긴 하지만 현성 또한 그로부터 직접 도복과 띠를 사사 받지 않았던가? 물론 하얀 띠라는 것이 함정이긴 했다만.
“안 좋은 일이 있다고 들었는데… 전혀 티가 나질 않는군요.”
이미 현성의 결별 소식은 알만한 사람들에겐 알려진 소식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말에 김관수 관장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는군요. 역시 사람 사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보기 좋은 한 쌍이었는데.”
겐지 사범이 안타까워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이는 꽤 있었지만 현성은 어른스러웠고, 혜주는 다정하고 애교 많은 아가씨였으니까. 작년 그녀가 도쿄를 방문했을 당시 함께 식사하던 때를 떠올려 보면 그렇게 좋아보일 수가 없었다.
헤어짐이란 것은 언제든 참 슬프고 야속한 일이라 겐지 사범이 안타까워 하는 동안 현성은 훈련에 몰입한 것인지 무시무시한 속도로 샌드백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제는 혜주에 대한 생각을 모두 지워 버린 것일까? 아니면 이렇게라도 지우고 있는 것일까?
-파앙! 파앙! 파앙!
잽으로 자리를 때릴 때 마다 살짝 눌린 자리가 원대로 회복이 되기도 전 사정없이 현성의 잽이 그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무척이나 정확한 타격!
그리고 사이드 스탭으로 방향을 전환하면서도 하나의 타점만을 노려 치고 있었다. 그 자리에 무엇이 있는지는 몰라도 집중력 가득한 그의 눈빛은 빛을 번뜩이는 날카로운 단검과도 같았다.
출렁출렁 흔들리는 샌드백의 모습에 그게 조금 이상하다 싶었던지 겐지 사범이 흥미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힐끔 김관수 관장을 돌아보았다.
“마치 샌드백의 흔들림을 따라서 치고 있는 것 같군요…?”
“타격의 정교함을 향상 시키기 위해서 그리 하고 있습니다. 같은 잽이라도 정교함을 손에 넣는다면 피니쉬 기술이 될 수도 있지요.”
UFC 미들급의 전설적이 챔피언 앤더슨 실바나 K-1 역사상 최강의 선수였던 세미 슐츠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끊임없는 훈련으로 만든 체력과, 타고난 힘을 바탕으로 자리 잡은 압도적인 공격력에 정교함까지 더한다면 이것은 더 없이 강력한 ‘괴물’이 태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현성이 이론을 공부하기 시작했단 것은 ‘펀치를 어떻게 날리느냐?’가 아니라 ‘타격점을 어디로 삼을 것인가?’ 인지도 몰랐다. 효율성의 증대! 이전의 현성이 타고난 공격력과 에너지를 써버리는 데 사용했던 것에 비해서 효율성이 증대한 지금은 적은 힘으로 더 큰 데미지를 줄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스파링을 시작하게 되면서 그의 효율성이 증대함에 따라 스파링 파트너들이 버티는 시간이 짧아지기 시작했고, 점차 많은 스파링 상대가 필요하게 되었다.
“됐다, 현성아. 휴식 끝났다.”
그리고 김관수 관장이 박수를 짝짝 치며 휴식의 끝을 알리자 휴식 시간조차 두지 않고 샌드백을 치던 현성이 수건으로 땀을 닦고는 그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하면서도 이상하게 날이 선 듯 한 그 모습에 겐지 사범이 흥미를 느낀 듯 현성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왠지 모르게 날이 서있어서, 무척이나 위험하단 느낌이 드네.”
오랜 시간 수련을 해온 무도인이기 때문일까? 그의 예리한 시선에 현성이 일어는 못 알아 듣지만 무엇인가 중요한 얘기 생각한 듯 김관수 관장을 바라보자 그가 후후 웃으며 대답했다.
“…니 너무 날이 서있는 것 같단다.”
그 말에 현성이 어색하게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 너무 쉼 없이 달려 왔으니까… 그래서 그카나봐요.”
일전에 일본으로 출국하는 비행기에서 현성이 김관수 관장에게 밝힌 바 있었다. 이제는 휴식이란 게 필요하다 느끼고 있었다. 물론 계약은 묶여 있고, 여전히 감량 문제 때문에 월드 그랑프리 파이널 16강이 끝나고 나서는 힘들겠지만, 최소한 로드원의 타이틀전을 끝내고 나선 휴식을 가지고 싶다고 말이다.
일년 사이에 급속도로 뛰어오른 그의 전적을 생각해보면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라는 듯 겐지 사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가 현성을 바라보며 깊은 눈으로 말했다.
“날카롭게 깍은 가지는 자칫 사람을 찔러 다치게 할 수도 있으나 그만큼 잘 부러집니다.”
아마도 지금 현성의 마음을 얼핏 읽은 모양이다. 티는 내지 않고 있지만… 그게 정말로 괜찮아서 그럴 리 없지 않겠는가?
반 백 살아온 이가 이제 겨우 20살을 넘긴 청년의 맘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것도 우스운 이야기일런지도 몰랐다. 참 좋은 말이라 생각한 듯 김관수 관장이 그대로 그의 이야기를 현성에게 전해주자 현성이 어색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고맙심다.”
그리고 그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여 인사 했다. 한숨이 섞여있긴 했지만 그 눈빛에는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기운내게.”
그 모습에 김관수 관장이 후후 웃음 짓는 동안 현성이 깊게 숨을 들이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이제 스파링을 시작해야겠지!”
잠깐이나마 숨을 돌리란 뜻이었을까? 현성이 그와의 대화로 1분 정도 되는 아주 짧은 휴식을 가지고 나서야 겐지 사범이 대기하고 있던 극진 소속 선수들을 불러 왔다.
어른의 배려라는 것은 이런 것일까? 그 마음에 현성이 저도 모르게 혜주도 아마… 그런 마음이 아니었던 걸까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잊어야 할지, 지워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아마 그의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는 한은 그것조차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은 더 이상 믿지 않지만, 영원히 가슴 속에 살아 있단 말은 알 것 같았다. 그게 설령 마음을 후벼 파는 날카로운 비수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오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극진회관의 선수들이 그에게 인사를 건네자 현성이 감았던 눈을 뜨고 꾸벅 인사 했다. 어쨌거나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더 이상 사랑 받기는 바라지 말자. 기대도 하지 말자. 시간에 맡겨두면 언젠가 해결이 될 것이다. 외로움이란 친구를 다시 만난 것 뿐이다.’
다시 한 번 흔들렸던 마음을 얼어 붙이며 현성이 글러브 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극진회관의 외국인 선수들도 그를 알아보고 스파링을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는 상황이었다.
“Well, Please. I am Jimmy.”
잘 부탁한단 미국 출신 극진회관 선수 지미의 말에 현성이 뜻은 몰라도 의미는 알아듣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다시 한 번 더 떠오른 생각을 지우고 스파링에 임하며 차갑게 식은 눈으로 지미를 바라보았다.
토너먼트이다 보니 시합을 길게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이론적으로는 한 방의 펀치라도 제대로 꽂아 들어간다면 충분히 상대를 항거 불능 상태로 만들 수 있단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일까? 과거와 달리 현성이 시작하자마자 지미의 주변을 맴돌자 지미가 경계 가득한 몸짓을 했다.
그리고 빠른 현성의 스탭에 그를 따라 붙으며 경계하던 지미가 쉽게 들어오지 않는 그의 모습에 공격을 결심한 듯 ‘타닥!’ 하고 전진형 스탭을 밟았다.
지미가 먼저 공격을 하러 들어오자 현성이 테세이라는 이것보다는 더 빠르고 공격적일 것이라 그의 모습을 머리로 그려 보았다. 이내 현성이 향상된 속도의 백 스탭으로 거리를 만들고는 그의 다리에 번개 같은 로 킥을 찔러 넣었다.
-쩌억!
그가 전반적으로 속도를 향상 시킨 것은 주먹 뿐만이 아니었다. 석현재를 대비 해서 그가 킥을 캐치 할 수 없도록 로 킥의 속도를 향상 시키는 것 또한 일이었다. 물론 중요한 것은 회수의 속도였다. 캐치 할 여력을 주어선 안 되니까!
마치 잽처럼 날아든 그의 로 킥에 지미가 속도도 속도지만 체중이 실린 킥이 한 순간에 들어와 전진하는 다리를 흐트러뜨리자 다리가 휘청했다. 바로 그 순가 현성이 샌드백에 쉴 새 없이 날리던 매서운 플리커를 지미의 턱에 강타했다.
-파앙!
닿기도 전에 회수가 된 듯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속도!
“빨라!”
얼핏 맞지 않은 듯 보였으나 그 효과는 분명 대단했다. 순간 지미의 고개가 그게 흔들리자 그가 아주 짧은 순간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현성이 계속해서 플리커로 지미의 얼굴을 몰아 세우기 시작했다.
-파방!
헤드기어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흔들리는 안면에 그가 어지러움을 느낀 듯 재빨리 가드를 올렸지만 그와 동시에 현성이 미들 킥으로 지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퍼억!
“컥!”
“굉장한 킥이야!”
보호대를 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둔탁한 소리와 충격에 순간 지미가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몸통의 내구도는 단련이 되어 있는 극진회관이라고 하지만 그건 도저히 감당을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바디 샷보다 몇 배는 강력한 미들 킥이 들어갔으니…!
바로 그의 가드가 다시 취약해진 순간 현성의 플리커가 한 번 더 지미의 헤드기어를 흔들었다.
‘먹힌다…!’
계속되는 턱의 공략에 지미가 순간 어지럼증이 온 듯 비틀 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바로 그 순간 현성이 사뿐하게 뛰어들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오버 핸드 라이트를 지미의 얼굴에 작렬했다.
-퍼억!
“스매쉬…!”
“오오오!”
스파링을 구경하던 극진회관 관원들이 그 기술에 웅성이는 동안 스매쉬에 가격당한 지미가 허물어지듯이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맙소사…!”
세계 대회에서 16강까지 올랐던 실력자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일방적일 정도로 쉽게 무너져 버린 그의 모습에 모두가 얼어붙자 현성이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지미, 아 유 오케이…?”
스파링을 할 때엔 그 무엇과도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냉정한 얼굴이었지만 막상 스파링이 끝이 나고 나니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의 말에 지미가 주변이 빙글빙글 돌아 정신이 없는지 고개를 흔들며 헤드기어를 벗었다.
“아, 암 오케이.”
괜찮다 이야기 하는 그의 모습에 현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대회에서 보여줄 것들이 완전히 몸에 익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해. 방금 그 펀치는 머리가 핑핑 도는 느낌이었어! 궤도가 예측되질 않아!”
그리고 지미가 정신을 회복한 건지 영어로 무어라 이야기를 꺼내자 현성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이 캔트 스피크 잉글리쉬.”
아무리 그라 하더라도 영어 앞에선 울렁증이 있는지 당황한 그 말에 지미가 하핫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현성이 덩달아 옅은 웃음을 띤 채 힐끔 김관수 관장을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나도 일어말곤 모른다. 보지 말그라.”
그 말에 겐지 사범이 후후 웃으며 말했다.
“방금 그 펀치를 맞으니 머리가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는군요.”
“아, 그렇습니까?”
영어, 일어를 거쳐서 김관수 관장이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성공이다, 현성아.”
그 말에 현성이 지미를 바라보며 미소 짓자 지미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런데 대체 그게 뭐야? 왜 그런 거지? 분명히 잽이었단 말이야. 하지만 충격이…”
그 물음에 다시 당황한 현성이 움찔하며 김관수 관장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내 다시 겐지 사범을 바라보자 겐지 사범이 이대론 답이 없겠다 싶었던지 후후 웃으며 지미에게 그만하라는 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현성이 구사하고 있는 플리커 스타일의 잽은 주먹 기술이 약한 가라데에서는 극히 찾아보기 힘든 기술이었다. 더불어 현성이 지미의 턱을 가격해 머리 속을 흔들기 시작했단 것도 쉽게 파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마주선 상태에선 주먹을 날리는 것으로만 보일 테니까.
특히나 풀 컨텍 가라데 출신인 지미에겐 더더욱 익숙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오 마이 갓!”
그 사이에 지미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치자 이번엔 또 뭔가 하고 현성이 그를 바라보았다. 놀란 표정의 그가 손가락질을 하고 현성을 바라보자 현성이 그 손가락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가락 끝에 서 있는 사람.
“안녕하세요. 현성 씨.”
============================ 작품 후기 ============================
지미는 사키 팬
추가로 설명 첨부하고, 문장 및 흐름 가다듬었습니다.
집중이 안 돼서 괴발새발 한 부분이 많았네요. 오늘은 좀 쉬어야겠습니다!
일찍 잡니다! 안심하고 주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