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회 - 괴물
K-1 월드 그랑프리 파이널 16! 이는 각 지역 챔피언과 준우승자들을 포함한 16명의 엄선된 선수들이 치르는 최종 예선과도 같은 시합이었다. 여름의 끝이 진행되는 이 이벤트가 중요한 것은 K-1 월드 그랑프리의 서막인 동시에 결승에서 맞붙을 상대에 대해서 가장 잘 알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상대는 남미 대회서 준우승한 테세이라. 극진 가라데 소속이데이.”
기본적인 대진표는 챔피언과 준우승자들 간의 교차 대결이었다. 왜냐하면 준우승자들 가운데에서도 자말 같이 막강한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고, 그들의 역량 또한 다시 한 번 빛을 볼 기회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물론 현성이 16강에서 다시 자말을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말 역시 승리를 하게 되고 8강 전 혹은 준결승, 아니면 결승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들의 리매치는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가지게 될 것이다.
“글라우베 테세이라. 극진 가라데 전세계 챔피언 2회. 신장 195센티. 체중 110킬로그램. K-1 전적은 7전 7승. 전승.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8월이 다가오며 현성의 상대 역시 확정이 되었다. 상대는 남미 지역 예선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테세이라! 내츄럴 헤비급의 신체에 상당한 커리어와 운동신경을 가지고 있는 막강한 선수 중 한 사람이었다. 거대한 덩치에 비해서 다양한 킥 기술의 구사가 가능하며 극진 출신답게 내구성 또한 출중한 선수였다.
“안면 타격으로 가닥을 잡아보자.”
주먹으로 안면 타격이 없는 풀 컨텍 가라데의 특성 상 필연적으로 극진 선수는 안면 가드가 약하다. 그 사실을 내세운 김관수 관장의 말에 현성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혜주와의 이별 이후 무척이나 말수가 줄어들었지만 최소한 경기에 대한 열의는 식지 않았다. 아니, 마음을 기울일 곳이 이것 밖에 없어져서 그런지 몰라도 오히려 그의 열정은 더욱 더 빛이 나고 있었다. 요령 없는 그이니만큼 방황하거나 삐뚤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싶다가도 서글퍼 지는 장면이었다.
“저도 그래 생각함다. 시합 하는 거 보니까 몸통 내구성은 좋은 거 같은데 주먹은 좀… 꺼리는 거 같더라구요.”
“음, 아무래도 그렇겠지. 근데 테세이라가 안면도 그리 만만치는 않을끼다. 이번에 준우승을 하긴 했다만 이것도 그 전 토너먼트서 부상이 있어가 1라운드만 하고 기권 해가 준우승 처리 된 거니까네. 그때부터 전략적으로 준비를 했겠지.”
기실 현성이나 자말 같이 치열하게 아시아 챔피언 자리를 노릴 필요는 없었다. 아시아 챔피언이라는 타이틀과 트로피, 그리고 부상이 수여되긴 했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월드 그랑프였으니까! 테세이라 역시 경험자 답게 지역 대회 우승보다는 월드 그랑프에 더욱 더 무게감을 두었던 모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 예선에서 무리는 하지 않은 것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팬들에게는 상당히 고깝게 느껴지는 일이었지만 엄연히 승리를 위한 관리라면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오늘부터 증량 하고 복싱 스킬 가다듬어야 되는데… 지금 체중이 얼마나 되노?”
“…체중이요…?”
우려와 달리 별 다른 문제없이, 아니 오히려 훨씬 더 집중력을 끌어 올려 훈련에 임하고 있다만 현성에게 생긴 가장 큰 문제라면 이번에는 증량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단 것이었다.
“91킬로…”
압도적인 훈련 탓인지 몰라도 평체가 회복이 되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말에 김관수 관장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현성아. 몸이 가벼우면 아무래도…”
“예, 관장님. 근데… 요즘 잘… 안 되네요.”
그건 현성으로써도 고민인 모양이었다. 입 맛이란 게 없다 보니 훈련은 해도 먹질 못했다. 그러다 보니 점차 살이 빠지는 것일 것이고. 이것이 감량 시즌과 맞아떨어지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억지로 식사량을 늘인다면 이제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은 파이널 16강에서의 컨디션에 난조가 생길지도 몰랐다.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아예…”
그래도 현성은 별 다른 걱정이 없는 듯 했다. 어딘가 모르게 공허해 보이긴 했지만 분명히 승부에서 만큼은 욕심을 내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 그를 위로하는 것이 이것밖에 없는지도 몰랐다.
“그래 발은 빠른 선수 아니니까… 더 떨어지지만 않도록 유지하고 안면 타격으로 빠르게 승부 보면 될 것 같심다.”
이젠 자신의 생각을 밝힐 수 있는지 그의 말에 김관수 관장이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대회에서도 보니까 거리 싸움에 그렇게 능숙하진 않은 것 같더라구요. 아무래도 가라데는 스탭으로 하는기 아니니까.”
상대적으로 가라데가 약한 점이 있다면 안면 타격과 빠른 스탭이 부족하단 것이다. 홀로 많은 연구를 했는지 현성이 자신감을 내비추자 김관수 관장이… 그것조차도 이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방법 중 하나란 생각에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어쩜 이렇게 시간이 지나서 모든 것이 해결될런지도 몰랐다.
혜주와는 그 이후로 연락이 되지 않고 있었다. 간간히 정원장을 통해서 이야기만 전해들을 수 있을 뿐! 아영 또한 만나기가 불편한 상황이었다. 물론 두 사람이 헤어진다고 해서 혜주가 아영을 내치거나, 현성이 아영에 대한 후원을 중단하는 일은 없었다. 단지 아주 가끔 정원장이 아영을 방문할 때에만 간간히 통화를 하고 얼굴을 볼 수 있을 뿐. 일체 혜주와 겹치는 부분은 사라지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든 그들을 도우려 했지만 그것조차도 쉽지 않은 것은 결정 쉽지 않았던 만큼 보통의 마음으로 내린 결론이 아니었을 테니까. 그러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어떻게 해서든 현성이 이 상처를 극복해내고 나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카면 현성이 니가 생각하기엔…?”
“무리하게 증량 안해도 기동성만 살림 충분히 할 수 있을 거 같심다. 글고… 타이틀 샷 때 감량 생각하믄 이게 맞는 거 같아예.”
이제는 하나만을 생각 할 게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9월 파이널 16강에 이어 10월이 되면 석현재와의 시합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소 위험할 수 있지만 로드원 FC 미들급 타이틀 전을 생각하면 그게 맞는 선택인지도 몰랐다.
“근데 현성아. 잠깐 얘기 좀 하자.”
현성이 열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괜찮았다만 그래도 지금의 그는 상당히 오버 페이스로 스스로를 풀어가는 것 같았다. 현재 정신적 여유가 없는 가운데 현성을 너무 몰아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맘이 들었던지 걱정스러운 그의 눈빛에 현성이 고개를 흔들었다.
“사이즈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예. 괜찮심다. 지금 이 상태 유지하면서 이기고 바로 다시 감량 돌입하면 될 거 같심다.”
그 걱정조차도 지금은 이게 훨씬 더 낫다는 듯 한 현성의 마음을 돌릴 순 없었다.
“니 너무 무리 하믄…”
“관장님 결혼 선물 드릴겁니더. 두 개 다.”
그런 김관수 관장에게 현성이 오랜만에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마음을 무어라 해야 할지… 애정을 쏟아 붓던 대상을 잃어버리고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타이틀이란 목표와 김관수 관장 밖에 없는 것 같았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리고 안타깝기도 하고.
“그래, 그거는 고마운데…”
“관장님. 진짜 무리 하고 있는 거는 아닙니더. 90킬로그램으로도 이길 수 있을 거 같심다.”
여기서 1킬로를 더 빼겠단 현성의 결정에 김관수 관장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극진 선수가 파괴력이 있는데 버틸 수 있겠나?”
“예. 그런 건 괜찮아예. 걱정 하지 마세요.”
몸이 아픈 것 따위는 이제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은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그 생각이 김관수 관장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무어라 하더라도 지금의 현성은 상대를 이기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카면 이제 일정을 다시 좀 수정을 해야 할 것 같심다. 어차피 석현재랑… 붙는 것도 복싱 위주로 풀어가는 게 좋을 것 같심다. 킥 캐치 할 줄 아니까 그거는 조심해야 할 거고… 우리는 스탠딩서 승부 내야 되잖아예.”
“그래. 그렇지.”
“테이크 다운 디펜스랑… 글고 이스케이프 연습 좀 해달라고 알렉 코치님한테 부탁해야 되겠네예.”
자신은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 웃음 짓는 현성의 모습에 김관수 관장이 대견하다고 밖에 얘기 할 수 없는지 말 대신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금은 근력과 타격 위주로 훈련을 진행하고 있지만 이제 슬 일본으로 넘어가 스파링 위주로 시합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테세이라와의 시합이 전부가 아닌 것과 같이 그라운드 게임도 함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래. 카면 민욱이는…”
“아마 이제 미국서 학교 다니야 되니까 이번에 보면 더는 못 볼 거 같심다.”
이제 민욱도 더 이상 학교를 미룰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말에 김관수 관장이 전적으로 현성을 책임져야 할 사람은 자신 뿐이란 생각이 들었던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현성이 그래도 혼자는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며 그나마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민욱이도 가뿌면 좀… 심심하긴 하겠네예.”
그렇게 자주 보는 사이는 아니라만 그 날 이후로 꾸준히 현성을 찾아온 민욱이었다. 또 자신의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 시간이 현성에겐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맘을 알기 때문인지 김관수 관장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동안 민욱이 체육관 문을 열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이 이른 시간에 왜 또 부른 거야! 붓기도 안 빠졌는데!”
툴툴 거리면서도 현성의 부탁을 들어주고 마는 그의 모습에 김관수 관장이 후후 웃으며 말했다.
“왔나, 민욱이!”
“안녕하세요! 이 쭈구리 좀 떼 줘요! 새벽부터 무슨 전화질을…!”
투덜거리는 그의 모습에 현성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인제 니 볼 날도 얼마 안 남았다 아이가.”
“지랄. 내가 죽으러 가냐? 너 죽냐? 언제고 볼 건데! 아 징글징글해! 내 얼굴 이렇게 만든 놈 꼴도 보기 싫다!”
그 말에 닭살이라는 듯 민욱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 현성이 옅은 웃음을 띠었다. 간간히 웃는 모습을 보여줘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이 드는 모습이었다.
“참, 대진표 나왔다면서요? 글라우베 테세이라?”
“그래. 캐가 민욱아. 타이틀 샷도 있고, 우리 일본 가믄 킬러비에 연락 좀 취해가…”
“아, 그건 걱정 마세요! 아무리 내가 학교 다닌다고 에이전트 일을 못해도 충분히 그런 건 케어 할 수 있으니까. 21세기 최첨단 정보화 사회입니다, 여러분들.”
그런 것은 전혀 걱정하지 말란 그의 모습에 김관수 관장이 후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그가 굳이 현성이 민욱을 부를 이유가 있었나 싶었던지 힐끔 현성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현성이 적은 체중으로도 20킬로 더 무거운 글라우베 테세이라를 잡기 위한 방법을 알 필요가 있다는 듯 민욱에게 물음을 던졌다.
“내 니한테 부탁 할 거 있다.”
좀처럼 부탁 따위는 하지 않는 현성인지라 민욱이 궁금증이 생긴 듯 한 얼굴을 했다.
“뭐? 보증이랑, 난 사실 게이인데 니가 좋다 사귀자 이거 두 개 말곤 한 번 고려 해볼게.”
그러나 이내 그가 장난스러운 빛을 띠자 현성이 그의 장난에도 별 다른 미동 없이 진지한 눈빛을 더하며 말했다.
“어데 치면 중심을 못 잡게 되는지 그거 좀 가르쳐 도.”
============================ 작품 후기 ============================
민욱이도 거절하는 보증. 보증은 거절 합시다, 여러분.
저는 재미와 질을 보증 해드리겠습니당.
근데 선삭 당하는 중이라는 게 함정 히히힝-
3시간 뒤에 업로드 합니다. 짜라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