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회 - 괴물
인생은 쓰다. 그리고 차갑다. 쓰고 차가운 맛을 모두 보아왔기에 달콤함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때의 감동은 무엇보다도 거대했다. 그리고 다시 그 달콤함을 잃어버리고 마주한 쓴 맛은… 오히려 달콤함을 모를 때와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더욱 더 쓰고, 고통스러운 것! 그 쓴 맛에 의식을 잃어버릴 정도로 입맛이 괴로웠다.
-퍼억!
실수. 외면. 누명. 오해. 세상에 있는 모든 안 좋은 것들은 경험해 보았다 생각했는데, 그래서 절대로 이 행복을 놓치지 않겠다 다짐 했지만 너무 자신했던 모양이다.
-퍼억!
하지만 여전히 살아가만 했다.
-퍼억!
육중한 샌드백에 맨 손이 닿는 느낌이 무척이나 좋았다. 누군가와 다투고 싸우고, 상처 주길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퍼억!
가슴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깊은 통증을 이겨내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다. 그랬기 때문일까?
“그만, 스톱!”
김관수 관장의 목소리에도 그의 몸은 쉽게 멈추질 않고 있었다. 매번 그의 오더를 거역한 바 없이, 모든 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그 몸이 말이다.
-퍼억! 퍼억! 퍼억!
마지막 분노까지, 마음 한 조각까지 모두 짜내려는 듯 세차게 샌드백을 두드렸을 때. 그제야 현성이 멈춰 섰다.
“…이 시간에…”
어제 민욱이 현성을 먼저 집으로 데려다 주었단 소식은 김관수 관장도 그에게 전해들은 바 있었다. 여전히 현성에겐 핸드폰이고 무엇도 없는 상황이다 보니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민욱의 말에 어느 정도는 안심을 했다만…
-뚝뚝…
언제 나왔는지 몰라도 맨 손이 찢어지도록 샌드백을 두드리고 있는 그의 모습은 결코 제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셨슴까…”
새벽 6시. 체육관을 오픈하기엔 무척이나 이른 시간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찍부터 문을 열고 현성을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현성은 그의 생각보다도 더 일찍 체육관에 와 있었다. 그리고 손등이 너덜너덜해져 있을 정도로 심하게 찢어진 손 등.
“손이 그게 뭐고!”
깜짝 놀란 그의 외침에 현성이 별 다른 고통도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 멍한 얼굴로 그를 돌아 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피투성이가 된 양 손이 눈에 들어왔던지 ‘아…’ 하고 멍한 얼굴을 하다 비틀 비틀 걸음을 옮겼다. 일찍 집에 도착했지만 잠을 거의 자질 못했던 모양이다.
“아… 죄송합니다, 관장님… 다 치울게요…”
“니! 정신 차리라!”
안타깝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모습에 김관수 관장이 화와 동시에 울컥하는 감정을 느끼며 소리치자 현성이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어제 혜주에게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으니… 상황이 어찌된 것인지 대강은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무어라 이야기 하면 좋단 말인가? 분명히 서로 싫어져 헤어진 게 아니란 것을 알고 있는데.
“…손을 그래 될 때 까지 카면 우야노! 현성아!”
너무 속상한 맘에 먼저 소리가 버럭 튀어나왔다. 그 목소리에 현성이 다시 꾸벅 고개를 숙이는 동안 김관수 관장이 마른 수건을 가져와 그의 손부터 먼저 감쌌다.
“…손 이거 이래…”
“…괜찮심다. 하나도 안 아파예.”
생기를 잃어버린 그의 모습에 김관수 관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간신히 열렸던 맘이 다시 문을 닫은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가 글썽글썽한 빛을 띠자 현성이 그제야 반응이 오는 듯 목구멍 너머로 뭔가를 꿀꺽 삼키곤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고… 이게…”
그 물음에 현성이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아직 그럴 때가 아니었나 봐요.”
아직은 행복해질 때가 아니었다. 그 말에 김관수 관장이 맘이 미어지는 것을 느끼며 한숨과 함께 현성을 끌어안았다.
“뭐가!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겠노…!”
“저는 아닌 거 같아예…”
민욱 앞에서 거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려 했던 현성이 김관수 관장의 앞에선 참을 수가 없는지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 되어 있었고, 눈가도 많이 부어 있었다.
“…저는 왜 이카죠…? 저는…?”
왜 난 모든 걸 다 망쳐버리고 마는 것일까? 행복 해질 권리 따윈 어디에도 없단 깊은 절망감에 휩싸인 듯 무너져 내린 제자의 울음에 김관수 관장이 함께 눈물 흘리며 소리쳤다.
“괜찮다, 자슥아! 살다보면…”
살다보면… 때때로 예상치 못한 이별에 직면하는 때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에게도 혜주에게도 너무나도 힘든 일일 것이다. 차마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한 동안 현성이 무릎을 꿇은 채 그를 끌어안고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관장님… 관장님…”
이제는 그밖에 없었다. 자신의 연약함을 보여줄 수 있는, 온기를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이젠 그밖에 없었다. 무너져 내린 그의 모습에 김관수 관장이 아들이 있었다면, 아마도 그의 첫 실연이란 걸 이렇게 위로해주지 않았을까 싶은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괜찮다, 현성아… 다 잘 될 끼다… 괜찮에…”
그 말에 현성이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는 누군가를 좋아하지도 않을 것이고, 다시는 더 기대도 하지 않겠다는 듯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여지껏 튼튼하게 쌓아올렸던 기반이 모두 말이다.
“저는 왜 이럴까요… 왜…!”
결국은 서러운 눈물을 토해내고야 말았다. 아픔이 성장을 불러 올 것인지, 그게 아니면 다시 그를 움츠러들게 할 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순수했고, 선했던 제자가 어째서 이런 고통들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생각하며 김관수 관장이 ‘괜찮다’라는 말 밖엔 해주지 못한 채 현성을 다독였다.
차마 말로는 전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 부둥켜안고 있는 현성의 몸을 온 힘을 다해서 안주었다만… 그게 그의 가슴까지 전달이 되었는진 알 수 없었다. 그게 그의 맘을 무척이나 아프게 만들었다.
혜주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고작 해야 긴긴 새벽 동안 몇 번이고 찾아가서 제발 다시 생각해보라 붙잡고 애원하는 대신 샌드백을 두드리는 일이었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도저히. 이 요령 없는 남자는 그 모든 게 다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고, 뼈 저리게 후회하고 있을 테니! 그게 얼마나 서러운 마음인지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관수 관장이 아니던가?
현성과 마찬가지로 손에 잔뜩 흉터를 안고 있는 김관수 관장이 무서운 한숨을 내쉬며 그의 등을 다독였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으나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란 여느 부모 못지 않은 마음으로.
“괜찮다… 다 잘 될 끼다… 현성아.”
“저는 왜… 도대체…”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을 울던 현성이 눈물을 그치고, 김관수 관장이 관장실에서 꺼내온 붕대로 현성의 다친 손을 감는 동안 현성이 멍한 얼굴로 말했다.
“관장님.”
제대로 자지 못하고, 많이 울어 그런지 잠긴 그의 목소리에 김관수 관장이 목소리 듣는 것조차 안타까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와…?”
“아무 생각 안 나게 훈련만 시켜주세요. 아무 것도 생각 못 하게…”
그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생각을 하면 무엇에 쓸까?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체념한 듯 한 그 목소리에 김관수 관장이 어떻게든 혜주의 마음을 다시 돌이키고 싶다 생각하면서도… 그녀가 여지껏 홀로 감당해온 괴로움을 어떻게 설득해낼 자신은 없었던지 안쓰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현성의 그 말이 답인지도 몰랐다. 미친 듯이 뭔가에 매진해서 빠져들면 그조차도 잊혀질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현성이 의지를 모두 놓아버린 대신 일에 미치기로 결단을 내렸단 것일까? 아니, 그것도 지금 당장은 잊게 해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선 결코 슬기로운 선택이라 볼 수 없을지 몰랐다.
마음에 깊은 상처가 새겨졌고, 그 여파는… 언제고 다시 고개를 들게 될 것이다.
“하이고…첫사랑은 다 안 된다 카드만…”
그 고통을 이미 김관수 관장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절절하게 현성의 맘을 이해한 듯 그가 현성의 지친 어깨를 두드렸다.
“…낼부터 진짜 빡시게 준비 해보자.”
그 말에 현성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당장 시작을 하고 싶었다.
“…예, 관장님.”
하지만 지금 당장은 김관수 관장이 시작해 주지 않을 것이다. 붕대가 감긴 양 손을 바라보다 현성이 눈을 감았다.
마음으로 품어 조금 더 고통스러워하면 언젠가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 아직까지 용서 받기 너무 일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른 행복을 누린 대가일 것이다. 조금 더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하면 그땐 용서해줄까?
“잘 해주지 말지…”
그러면 남겨진 사람은 이토록 괴롭지 않을 텐 데. 그 생각과 함께 현성이 다시 한 번 마음을 얼려가기 시작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는… 단지 조금 더 높은 곳으로, 가던 대로 나아가는 수밖에.
“일단은… 오늘은 드가서 푹 쉬어라, 현성아.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알겠제…?”
그 말에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심다. 관장님. 저는… 가서 쉬께요.”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다. 어차피 안 될 일이었을 게 틀림없다. 어차피 안 되었을 거야. 더 크게 망가뜨리고 상처주기 전에 끝나서 다행인지도 모른다. 씻겨 지지 않은 죄책감이 더욱 더 크게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혹시라도 현성이 나쁜 생각을 하진 않을까 걱정 가득한 김관수 관장의 눈빛에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짓은 안 할라고요…”
“그래, 현성아! 걱정 돼서 그러니까… 가서 일단 도착하면 연락은 해라.”
걱정 가득한 김관수 관장의 목소리에 현성이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짓은 할 수가 없다. 그런 식으로 빠져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죄 값을 더 치러야만 한다. 거의 병적인 생각에 가까울 정도로 그의 마음은 확고했다.
현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무척이나 많이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현성이 뒤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하아… 우째 이런 일이…”
그 뒷모습을 보며 김관수 관장이 한숨을 토해냈다. 아무래도 진행이 무리가 있다 생각되면… 월드 그랑프리를 과감히 포기해야 하진 않을까… 생각하며 말이다.
============================ 작품 후기 ============================
워크 홀릭
여담~ 현성에게 뎀프시롤을 장착해달란 이야기가 있었는데 사실 그렇지 못한 것은 뎀프시롤은 단신용 기술입니당. 잭 뎀프시가 단신을 극복하기 위해서 만든 기술이죠. 간단하게 마이크 타이슨 스타일의 짧고, 굵고, 폭발력 있는 체형이 유리하지 현성과 같이 긴 리치와 신장을 가지고 있는 이에겐 그리 유용한 기술은 아닙니다.
그래서 뎀프시롤은 장착 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 업로드는 약 3시간 뒤에 또 있죵. 짜라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