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180화 (180/281)

- 180 회 - 괴물

“후.”

컨벤션 홀 앞. 다가온 계체량은 현성에게도, 김관수 관장에게도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짝 마른 입술을 하고서 계체량을 조금이라도 빨리 마치고 싶어 하는 그의 모습에 김관수 관장이 장하단 듯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좀만 있으면… 민욱이랑도 정리가 되네.”

“예, 관장님. 진짜… 민욱이 때문에…”

이젠 여유를 회복한 듯 장난스러운 그의 말에 김관수 관장과 알렉세이 코치가 후후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이에 오랜만에 보는 오형석 대표가 팀 토네이도를 발견하고는 그들을 향해 들뜬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현성 씨! 관장님!”

로드원 FC가 본격적으로 강원랜드의 후원을 받아 정식 배팅 게임으로 자리 잡은데 이어 오늘은 현재 국내 최고라 할 수 있는 스타 선수들이 대거 출전하는 날이다. 그러다 보니 그 날을 놓칠 수가 없는지 오형석 대표가 사진기를 직접 들고 모습을 보이자 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지내셨슴까…?”

“아, 나야 잘 지냈지! 그런데 얼굴이… 많이 힘들었나 보네요. 이번 감량.”

그 말에 현성이 쓴웃음을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점차 몸이 커져갈수록 감량이 힘들어졌다만 이번이 정말 피크였다. 앞으로 한 번 더. 남아 있는 타이틀 샷이 벌써부터 걱정이 되긴 했다만 도리 없는 일이었다. 체급을 올리기 전 타이틀 샷을 가지고 미들급 왕좌에 오른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암튼 그래도 겨우 아슬하게 맞춰서 살았심다.”

“그러게 말이에요. 혹시 감량 때문에 경기력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 되는데요?”

“아… 그런 건 아니고요.”

“허허, 이 사람 참! 우리가 어디 살만 빼고 왔겠나?”

김관수 관장이 행여나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마라 이야기 하자 오형석 대표가 후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기대하면서 보고 있죠! 당연히 이번에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 시합은 사람들이 말이 많더라구요.”

의미심장한 그의 말에 현성이 다소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김관수 관장 역시 그 반응은 알만하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같이 인기 없는 시장서 1년이나 안 보였음… 뭐 다 글치.”

“그래도 두 사람 사이에는 무척이나 의미 있는 시합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지요.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들한테는 좀 미안하네예…”

“그 덕분에 석현재 선수는 꽤 고마워 할지 모르겠네요.”

“아…”

형석의 말에 현성이 어색한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민욱과 리매치를 치르지 않았다면 이번에 타이틀 샷을 부여 받고, 더 이상 살인적인 감량을 하지 않고 충분히 남은 계약을 이행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허나 그와의 약속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민욱이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은혜, 그리고 반드시 다시 한 번 싸우자 약속했던 것도.

“오대표. 그거는 우에 보노?”

아무래도 다음 시합이 그 시합의 승자이니 김관수 관장이 신경이 많이 쓰이는지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그의 물음에 오형석 대표가 힐끔 주변을 둘러보며 속삭였다.

“아무래도 석현재 선수가 이기는데 무게가 많이 실리고 있어요. 데니스가 최근 성적이 부진하고 특히나 스태미나가 많이 떨어졌거든요. 데니스도 원래 체격은 헤비급에 가까운 체격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

나이는 모든 스포츠 선수들의 적이다. 특히나 나이로 인해서 떨어지는 스태미나. 그리고 그게 감량과 함께 맞물리면 가히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파이터에겐 무대 위의 상대와 싸우는 것, 그리고 자신의 체중과 싸우는 두 가지 싸움이 있다 할 정도가 아니던가?

“다음에 현재면… 좀 골치 아프겠네.”

“아무래도 그렇죠. 현성 씨가 지금 최고의 스트라이커라면 한국 최고의 주지싯떼로는 석 선수니까.”

흥미로운 얼굴의 오대표! 그도 그런 것이 참 신기하게도 이번 경기에서 현성이 승리를 거두고 타이틀 샷에 들어가게 된다면 묘한 그림이 그려질 것 같았다. 격투기가 종합화 되면서 올라운드 파이터들이 대거 등장했지만 입식의 장현성과 그라운드의 석현재! 이렇게 선명하게 특성이 구분되는 시합은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올드하다…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사실상 사람들을 가장 기대하게 만드는 대목이기도 했다. 현성의 파괴력이 너무 막강하다 보니 기실 국내에선 대항마로 손꼽을 수 있는 사람이 데니스나 석현재 정도밖에 언급되지 않는 게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스탠딩으론 도무지 공략 할 수 있는 답이 없고, 그를 넘어뜨릴만한 레슬링 실력과 그라운드 능력을 동시에 가진 것은 두 사람밖에 없었으니까. 현성 자체가 상대했던 선수들이 거의 레슬러와 타격가 출신이란 것도 무게를 싣고 있었다. 그가 상대한 선수 중 진짜배기 주지싯떼로는 없다. 바로 그것!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국내 최강자라고 불리면서도 동시에 한 편으로는 검증이 덜 끝났단 논란을 잠식시켜 줄 경기가 될 것이다.

“일단 그거는… 민욱이 시합부터 끝내고 생각 해야죠.”

하지만 현성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다음 시합보다는 이 시합에 좀 더 포커스를 맞추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 시합은 사실 로드원이 아니라 K-1의 16강전이니까. 그 말에 여전하다 싶었던지 오대표가 후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일단은 안으로 들어가시죠? 시간 다 됐는데!”

“예! 근데 민욱이는…?”

“먼저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면 깜짝 놀랄 거에요.”

3달 사이에 하드 트레이닝으로 얼마나 몸을 만들어 온 걸까? 현성이 걱정보다는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계체가 진행될 컨벤션 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근데 참, 혜주씨는 같이 안 왔나요?”

“아… 일도 있고 피곤해서 방에서 쉬고 있겠다고…”

“…요즘 많이 힘들어 하나봐요?”

눈썹을 까딱하며 던진 오대표의 물음에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혜주 일이 자꾸 신경이 쓰이던지 그가 정말로 빨리 계체를 마쳐야겠다 싶었던지 힐끔 김관수 관장을 바라보았다.

“인터뷰는 걱정 마라. 그냥 가면 된다. 내 알아서 하께.”

후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대답에 현성이 고맙다는 듯 꾸벅 인사를 해보였다. 그리고 그가 컨벤션 홀 안에 모습을 보이자 마자…

“장 선수다!”

“장 현성 선수!”

여기저기서 찰칵찰칵 하고 플래쉬가 터져 왔다. 기자들이 여기저기에서 생각보다 많이 왔는데 그들 가운데선…

“잔 상!”

일본인 기자들도 상당수가 섞여 있었다. 그 모습에 현성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해보이자 곧 대답이 떨어졌다.

“현성 씨!”

귓가를 울리는 낭랑한 목소리에 현성이 설마 하고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이시이 관장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사키가 미소 짓고 서있었다. 공식 일정이 아닌지 수수해 보이는 그 모습에 현성이 무척이나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자 일본인 기자들이 찰칵찰칵 하고 다시 셔터를 눌러댔다.

아무래도 더러 보이는 일본인 기자들은 사키의 소식을 미리 전해 들은 연애부 기자인지도 몰랐다. 그 모습에 현성이 당황한 표정으로 멈춰서자 이시이 관장이 사키를 에스코트하며 그의 앞에 다가왔다.

“이런! 얼굴이 반쪽이 되었군요!”

우려 가득한 그의 얼굴에 현성이 꾸벅 인사 하자 오랜만에 보는 사키가 무척 걱정스러운 빛을 띠었다.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복잡한 가운데 현성이 그 모습을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짓자 사키가 그에게 물음을 던졌다.

“…많이 힘들어 했다 들었어요.”

“아, 예.”

이시이 관장과 달리 유창한 그녀의 한국어에 사람들이 웅성이며 시선을 집중하는 동안 현성이 얼떨떨한 얼굴로 김관수 관장을 돌아보았다.

“일단은 계체량이 끝나면 이야기 나누도록 하죠. 지금 이렇게 서포트라이트 받으면 현성이한테 안 좋으니까.”

트레이너는 선수를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한다. 당황한 현성을 대신해서 그가 분위기를 정리하자 사키와 이시이 관장이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이 계체량을 보러 온 사람들 속 가장 앞자리에 서자 현성과 김관수 관장이 힐끔 서로를 바라보았다.

“…현성이 니. 일본 가가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아, 아닌데요!”

황급히 고개 흔드는 그의 모습에 김관수 관장이 후후 웃으며 말했다.

“캐도 혜주 여 안 와가 다행이네. 왔으면 난리 날 뻔 했데이?”

그 말에 현성이 ‘아…’ 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여기까지 함께 왔던 혜주가 굳이 계체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가 자꾸만 맘에 걸리는 모양이다. 어색한 얼굴로 서 있던 현성이 그 생각에 빠져든 듯 멈칫해보였다.

“어이, 못난이!”

그 동안 들려온 얄미운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 현성이 고개를 돌리자 그의 눈 앞에는 어느 샌가 민욱이 씩 웃음 짓고 서있었다.

“어?!”

석달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된 듯 한 그의 모습에 현성이 또 다시 놀란 얼굴을 해보이자 민욱이 어깨를 으쓱했다.

“뭘 봐? 촌놈 같이 시꺼멓게 타선.”

“니가 더 심하게 탔다. 아프리카 갔다 왔나?”

뽀얀 피부가 검게 그을려 구리빛으로 물들었고, 얼핏 봐도 상당히 몸이 벌크업 되어 있었다. 석달 동안 미친 듯이 준비를 해온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그는 현성보다 감량 폭이 좁았다. 거의 계약 체중인 86킬로인 상태였고, 거기서 지방과 수분을 걷어내고 그만큼 근육량을 늘인 게 눈에 보였다. 눈에 보일 정도의 노력은 내 나름 하는 노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과거 운동을 했던 전력이 있다 하더라도 이 정도로 준비를 해왔을 줄이야…?

과연 될까 싶었던 것이… 현성 못지 않게 단단히 준비를 해온 듯 한 그의 모습에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을 풀지 못하자 민욱이 입술을 이죽거리며 말했다.

“아프리카는 무슨! 너 죽이려고 지옥 갔다 왔다, 새꺄!”

몸은 달라져도 그 얄미움이 어딜 가겠는가? 그 말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또 보내주까?”

내일 시합을 앞 둔 상대라기보다는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나 반가운 기분마저 느끼며 말을 던지자 민욱 역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너 감량 안 돼서 죽다 살아났다면서? 그러기에 누가 두 단체 동시에 계약하래?”

“악덕 에이전트가 시켜가.”

그 말에 민욱이 사악한 웃음을 띤 채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알고 있다. 현성이 K-1과 로드원을 오가며 시합을 병행하고 감량을 진행 할 때 마다 얼마나 고생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 시합이 자신만 아니었다면 그의 마지막 감량 시합이 될 수도 있었단 것도.

“입은 살아 있는 거 보니 아직 여유 있네. 너 좀 맞아야 겠다. 내일 좀 맞자, 나 한테.”

괜히 어색한 만큼 더 투덜거리는 그의 말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는 동안 사회를 맡은 MC 용준이 마이크를 들고 와 공식적으로 계체량을 시작한다 선언했다.

“지금부터 로드원 FC! 7월의 이벤트 계체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제 와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타이틀 샷까지 미루고 그와의 시합을 받아들여 준 것. 그러니 그만큼 열심히 해야만 했다. 아마 다른 사람이라면 민욱의 리매치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등 해야 할 이유가 없을 테니!

“고맙다.”

시합을 하루 앞 둔 순간. 민욱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말했다. 그 말에 현성이 움찔하며 고개 돌리자 민욱이 뭘 보냐는 듯 시큰둥한 얼굴을 했다.

“뭐? 지금 붙으까? 죽을래?”

“…빙시가?”

그 과장된 모습에 현성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자 민욱이 요 근래 자꾸 말만 하면 자기가 밀리는 것 같단 느낌에 ‘참 내!’ 하고 이마를 꾹 눌렀다.

“김상옥 선수! 65킬로그램! 계체 통과!”

MC 용준의 사회가 진행되는 동안 민욱이 피식 웃으며 다시 물음을 던졌다.

“야, 근데 니 나이 많은 여친은 어디 갔냐? 왜 안 보여?”

역시나 대화는 몰래하는 게 재미있다고 계체량 중에 질문을 던지는 그의 모습에 현성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바빠서 좀 쉰다 카던데… 요즘 좀 몸이 안 좋은 거 같다.”

그리고 그가 걱정된단 얼굴로 한숨을 내쉬자 민욱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몸인지, 맘인지 잘 알아보고 얘기해라, 짜샤. 그러다 도망간다.”

그 말에 현성이 그럴 일은 없을 거라 믿음을 가지고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지 굳은 얼굴을 하고서 사람들 사이를 둘러보았다. 왜 오지 않은 것일까…?

그러다 그가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아주 먼 곳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떠보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홀로 따로 모습을 보인 것인지 기자들이 밀집해 있는 곳보다도 더 먼 곳, 사람들 속에서 몰래 그를 바라보는 혜주. 이내 그녀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현성이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손을 흔들려 하자 민욱이 덥석 그의 손을 잡았다.

“…와…?”

“하지마. 너 도와준 거야, 새꺄.”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 현성이 고개를 갸웃하는 동안 빠른 속도로 진행이 되던 계체량은 어느 샌가 그들의 차례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자, 다음 계체량은 현재 대한민국을 넘어서 세계적인 스트라이커로 거듭나고 있는 장현성 선수입니다!”

그 말에 대한 대답을 들을 사이도 없이 현성이 용준의 목소리에 상의와 하의를 탈의하며 공식 체중계 위에 올라섰다.

“85.9킬로그램! 장현성 선수 계체 통과 했습니다!”

그 목소리에 기자들이 사진을 찍자 현성이 멍하니 혜주만을 바라보다 포즈 요청이 떨어지자 가볍게 주먹을 들어 보였다. 왠지 모르게 이 시합 이후에 무엇인가가 필연적으로 꼭 찾아올 것 같은 불안감이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 리 없을 것이다. 절대로 그녀가 그럴 리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현성이 들어 올린 주먹에 힘을 주었다.

“…절대로.”

============================ 작품 후기 ============================

녹정기 시리즈 오랜만에 봤더니 재미있네요.

대리만족의 표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다음엔 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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