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회 - 괴물
현성이 사키의 도시락을 모두 먹고 나서도 사키는 병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그 사이에 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 싶어 현성이 찬합 통을 말끔히 비우고 가지런히 정리를 해 병실 한 켠에 두고서 무얼 하면 좋을까 지루해 하며 핸드폰을 꺼냈다.
“…아직 도착 안 했나.”
비행기를 탔다 연락했던 혜주는 그 이후로 아직까지 소식이 없었다. 걱정이 되는지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성이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도쿄는 서울만큼이나 복잡한 곳이고, 차가 막힐지 모른다. 채근대지 말자 싶은 맘에 그가 핸드폰을 내려놓고는 따분하단 표정으로 피식 웃음 짓고 말았다.
민욱이라도 있으면 심심하진 않을 것을! 티비를 켜도 일본어만 가득하고, 연락 하는 사람이라곤 혜주밖에 없다보니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격투기를 시작한 이후로 거의 하루도 빠짐 없이 매번 몸을 움직여 왔기 때문에 3일간의 휴식이 적응이 되지 않는지 계속해서 몸을 뒤척이며 현성이 다시 헛웃음을 터뜨렸다.
“…운동하고 싶다.”
처음 시작을 할 땐 정말로 이 일을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될 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누구보다 이 일을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하루라도 그냥 넘기는 날엔 좀이 쑤시고 견디기가 힘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 생각에 현성이 정신이 번쩍 든 듯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그가 인터넷으로 K-1 아시아 챔피언 결정전을 검색해 보았다. 그가 치뤘던 경기를 다시 보는 일은 매번 김관수 관장과 함께 하던 일이었으나 두 사람 모두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보니 이번만큼은 함께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라도 미리 하고 있으면 심심함이 덜할까 현성이 자말 로우지와의 시합을 꾹 눌러 보았다.
소개와 승리 장면까지 도합 5분. 그리 길지 않은 경기 시간에 그가 괜시리 쑥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헛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시합이 끝난 이후 이렇게 경기 시합을 살펴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화면 속의 현성은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무어라 이야길 해야 할까? 자신이 이런 일을 해냈단 것이 믿겨지지 않는지 그가 어색한 얼굴을 하고서 자말과의 싸움을 다시 지켜 보았다.
“…좀 무작정 드가긴 했네.”
민욱이 그리 욕을 하던 대시 장면에선 현성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이걸 다시 살필 생각을 미처 못했던 것은 민욱이 심심찮게 옆을 지켜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와의 시합을 준비하러 갔고.
“…민욱이 였으면 확실히… 타이밍 빼앗고, 장기전으로 갔을라나.”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지 현성이 지루해 하던 것을 잊고는 빠져든 듯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조금 더 파이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커버해야 할 점들이 속속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많이 드는 생각은… 이 시합을 다시 보고 있자니 뿌듯하고 흐뭇한 맘이 절로 밀려온단 것이었다. 주먹은 다시 불끈 힘이 들어가고, 지금이라도 당장 병실을 뛰쳐 나가 훈련을 시작하고 싶었다. 어느 샌가 이 일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단 생각이 들었던지 그가 옅은 미소와 함께 자말과의 시합을 몰입해서 지켜 보았다.
“…이때 진짜 힘들었는데.”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지금 그가 며칠이나 입원을 해 있을 정도로 자말의 펀치는 강력했다. 안와골절이라는 심각한 부상을 입을 정도로 말이다. 그걸 참고 버티며, 난타전을 벌였으니… 새삼스럽게 무식하단 민욱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좀 더 정타를 잘 넣었으면 됐을 건데.”
물론 그러기엔 자말 자체가 사기 캐릭터 같았다. 때려도, 때려도 쓰러지기는커녕 반응이 없다 보니 현성 역시 말렸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집중력을 발휘하고, 조금 더 냉정하게 상황을 보았다면 이것보다는 쉽게 이겼을지 모른다. 그 아쉬움이 맴도는지 현성이 한숨을 내쉬며 빠져든 듯 화면을 보는 동안…
드디어 자말이 주춤하고 물러서던 그 장면이 보였다. 승부를 갈랐던 바로 그 순간! 그 순간의 현성은 무척이나 지치고 힘들어 보였지만 눈빛만큼은 죽지 않았다. 반면에 자말의 눈에는 처음의 기세가 사라져 있었다. 전의(戰意)가 사라진 전사의 눈빛!
“…기세.”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기세를 불러오느냐 하는 것이었다. 싸움과 격투기의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자말 같이 기세가 좋은 선수를 이기는 방법은 그 기세를 어떤 방식으로든 꺾어내는 것.
거기서 뭔가 영감을 얻은 듯 현성이 곰곰이 생각하며 나머지 장면을 바라보았다. 본능적으로 거리를 확보하자마자 치켜 올랐던 하이킥!
“…허리가 좀 빠졌네…”
힘이 빠져서 그런지 엉성한 자세에 완성되지 못한 타격점인지라 위력은 반감 되었다. 그 모습에 아쉬워 하는 동안 자말의 반격이 날아왔고, 그것을 놓치지 않고 피해내며 숄더 차징으로 자말을 밀어내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곧…!
“…이건 진짜 잘 했다!”
토너먼트를 빠르게 통과 하기 위해서 그가 직접 생각하고 만들어 냈던 스매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누가 이렇게 해라 가르쳐 주거나 전해준 것 없이, 스핀 킥을 연습했을 때처럼 그가 ㅉㆍ내서 만든 기술이기 때문에 더욱 더 애착이 갔다. 그 장면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지 현성이 씩 웃으며 경기 시합을 이어보지 않고 슬쩍 앞으로 영상을 돌렸다. 다시 한 번 스매쉬가 들어가는 장면에서 그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거 사진도 찍히나…”
남들에겐 잘 이야기 하지 않지만 아무렴 어떤가? 혼자 있는데! 그 장면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지 사진까지 뽑아낼 생각을 하며 현성이 싱글벙글 미소 지었다.
“…그래도 진짜 대단하다. 주먹이 확실히 걸렸는데…”
그러다가도 쓰러지지 않는 자말의 모습에 그가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감탄을 터뜨렸다. 정말로 대단한 맷집이었다. 물론… 이후에 어떻게든 그를 쓰러뜨리고자 사력을 다해 날린 러시안 훅이 자말의 의식을 순간적으로 흔들었고, 이후 마지막 후속타로 날린 레프트 훅이 결판을 냈다.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는 그의 모습에 흐뭇함과 동시에… 미안한 맘을 느끼며 현성이 미소 짓는 동안…
“헬로?”
“우, 우와아!”
언제 들어온 지 몰라도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화들짝 놀란 현성이 핸드폰을 들고 움찔움찔 하는 동안 코에 붕대를 한 자말이 그를 보며 씩 웃음 지었다.
“어, 어?!”
놀란 현성이 그를 보며 어색한 얼굴을 하다 ‘승자! 장현성!’ 하는 MC 용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핸드폰을 급히 꺼버렸다. 너무 놀란 나머지 당황을 했던지 배터리를 빼내 분리 시켜버린 그의 모습에 자말이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를 데리고 온 알렉세이 코치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꼭 만나고 싶다고 해서 같이 왔어.”
“아, 아! 예…! 코치님!”
언제부터 와있었는지 몰라도 혹시 스매쉬를 보고 소장하고 싶어 했던 걸 보았을까? 그 생각을 하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던지 현성이 어색한 미소를 띤 채 머리를 긁적이자 자말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경기 후엔 내가 이긴 거야.”
시합은 현성이 승리했지만 상태로 보아선 자신이 이겼다 장난스럽게 이야길 하는 모양이다. 그 말에 알렉세이 코치가 웃음을 터뜨리자 현성이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경기 끝나고 나서 얼굴 보니까 자기가 이긴 것 같대.”
“아…!”
그 말에 현성이 십분 공감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런 것이 그의 레프트 훅으로 부러진 코를 제외하고는 자말의 얼굴은 벌써 상처가 거의 다 사라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가공할만한 회복력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무척이나 인상 깊은 싸움이었고, 내 몫까지 월드 그랑프리에서 잘 해주길 바래.”
그리고 그가 쿨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자 현성이 무슨 말인가 하고 알렉세이 코치를 힐끔 바라보며 자말의 손을 잡았다.
“월드 그랑프리에서 잘 해달라는 거야. 인상 깊었대.”
“아, 저도! 정말 인상 깊었고… 다시 한 번 더 싸워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현성이 긴장한 듯 굳은 얼굴에 미소를 걸고 이야기 하자 알렉세이 코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자말에게 전했다.
“물론이지! 난 반드시 복수하겠어.”
그 말이 전해지기 무섭게 자말이 시원스러운 웃음, 그리고 아직 사그라 들지 않은 기세의 눈빛으로 현성을 바라보았다.
“이제 시작이야. 우리들의 전쟁은.”
그건 굳이 알렉세이 코치가 전달해주지 않아도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말에 현성이 가슴이 두근두근 요동치는 기분 좋은 설렘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겠심다.”
그리고 그가 악수한 손에 힘을 주자 자말 역시 후후 웃으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치열했던 만큼 많은 교감이 있었던 링이었다. 언어도, 사는 곳도 달랐지만 그들의 교감은 다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성역과도 같았으니까.
“다음에 또 보자.”
그리고 자말이 훈련을 하러 갈 생각인지 가슴을 퉁퉁 두드리며 이야기 하자 현성이 부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자말이 병실을 나서자 알렉세이 코치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자말이 한국말을 알았으면 어떻게 할 뻔 했어? 현성! 사진이라니!”
“…다 들으셨어예…?”
“간호사도.”
그의 간호를 맡은 재일 교포 간호사가 병실 문앞에서 슬쩍 얼굴을 내밀자 현성이 화끈거리는 얼굴을 양 손으로 덮어 버렸다.
“…아무 한테도 얘기 하지 말아 주십쇼, 코치님.”
“…방송국에 전화해서 뽑아달라고 하면 좋은 화질의 사진으로 구할 수 있을 거야! 걱정 마, 현성!”
“…아… 코치님… 제발…”
장난스러운 러시안 코치의 말에 현성이 창피해 죽겠단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웃음 짓는 동안…
“장현성!”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들떠 있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혜주! 거의 한 달 만에 보는 그녀의 모습에 현성이 창피함도 잊고 신이나 소리치자 알렉세이 코치가 후후 웃으며 손을 흔들여 보였다. 그리고 그녀를 따라서 사키가 무척이나 조용한 얼굴로 모습을 보이자 현성이 급격히 당황한 얼굴을 해보였다.
“얼굴이 이게 뭐꼬! 바보야!”
그러거나 말거나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혜주가 먼저 많이 다친 얼굴에 속상한 잔소리를 하자 현성이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전화도 안 받고!”
“아, 그게…”
“사실은 현성이…”
“코치님!”
화들짝 놀라 고개 흔드는 그의 모습에 알렉세이 코치가 다시 한 번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니 혼자 쭈구리 같이 혼자 시합 보면서 사진으로 소장하고 싶다 했다매?”
그 모습을 살피던 혜주가 짓궂은 웃음을 머금은 채 그리 이야기 하자 현성이 무척이나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등 뒤에 있던 사키도 그 이야길 ‘간호사’에게 전해 들었던지 후후 웃으며 말했다.
“간호사가 귀엽다고 모두에게 이야기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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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구리 장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