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회 - 괴물
“후우.”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숨을 내뱉으면 온 몸 구석구석에서 세포 하나, 하나가 살아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곤 했다. 시합 전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는 것. 현성은 그 시간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눈을 감으면 시야는 사라지고, 온 몸 구석구석에 퍼져 있는 세포 하나, 하나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만큼 감각은 예민해져 귓가를 울리는 대기실의 소리와 모니터의 중계 소리가 유난스럽게도 크게 들렸다. 어디 멀리 가지 않아도 눈만 감으면 다른 세상에 도달을 한 것처럼 그 미묘한 기분에 조금 더 신경을 집중해 그의 몸, 감각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 순간인가부터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 순간 현성의 머리에서 그려지는 자말 로우지라는 상대. 그때엔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아도, 그리고 마주하지 않아도 이제 곧 그를 찾아올 싸움이 머리에서 먼저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차분하게 내뱉는 일정한 호흡 속에서 현성의 머릿속, 쿄타로를 쓰러뜨렸던 자말 로우지가 그를 향해 씩씩 거리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강한 인상을 남겼던 하카 동작을 하며 이번에는 현성을 짓밟아 주겠다 의지를 되새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현성 자신은 온 몸의 솜털 하나, 하나가 곤두서서는 신경이 무척이나 날카롭게 선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후우.”
이내 현성이 한 번 더 숨을 고르고 절대로 그런 감정에, 자말의 분위기에 휩쓸리면 되지 않는다 마음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집중력을 잃어선 안 된다. 집중력을 선보여야 했다. 쿄타로가 당한 것은 자말이라는 막강한 상대에게 어퍼를 적중 시키고 급해진 맘으로 집중력을 잃은 이후였다. 그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경기가 끝이 나는 순간까지 집중력을 잃어서는 곤란했다.
“후우.”
하나, 둘, 셋! 수를 세고 숨을 내뱉으면서 다시 그린 머릿 속의 자신은 아까와 다르게 여전히 자말의 도발에도 미동이 없다. 그리고 확연히 차분해진 맘으로 무뚝뚝하게 자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그가 감았던 눈을 떴다.
벌써 경기는 7경기, 류이치와 토니 모리스라는 흑인 복서의 수퍼 파이트가 진행중이었다. 복서 출신답게 상당한 펀치 스킬을 구사하며 류이치를 몰아붙이는 토니였다만 로 킥에는 익숙하지 않았던지 류이치의 로 킥에 의해서 스탭이 죽어버린 상황이었다. 반면 류이치는 현성을 제외하고는 KO패를 당해본 일이 없는지라 코에서 출혈이 나고 있음에도 즐거운 얼굴로 토니를 몰아 붙이고 있었다.
그 또한 이시이 관장이 눈여겨보았던 선수인 만큼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거의 KO의 분위기가 임박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현성 대신 보며 시간을 체크하고 있던 민욱이 말했다.
“시간 거의 다 됐어. 아마 이번 라운드 안에 류이치가 승부를 볼 거야. 1라운드 초반까진 제법 괜찮았는데 로 킥 때문에 다리가 죽었어. 토니라는 녀석.”
“맞나? 로 킥으로 잡았나…? 재미있네.”
과거 현성과 싸울 때 류이치는 확실히 킥보다 주먹이 앞서는 선수였다. 물론 극진 출신이다보니 킥 능력 또한 부족함은 없었다만 수퍼 파이트 상대인 토니 모리스가 만만친 않았던 모양이다. 주특기였던 펀치 대신 로 킥으로 향방을 가른 것을 보면.
“넌 지금까지 눈 감고 있다가 한단 소리가 그거냐? 자말 로우지는 어떻게 할 거야?!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할 거 아니야?”
“내 계속 생각했다. 우에 싸우면 될랑가.”
재촉하는 민욱의 목소리에 현성이 걱정은 하지 말라는 듯 후후 웃으며 대답했다. 김관수 관장처럼 자료와 객관적인 지표를 바탕으로 플랜을 짠 것은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자말 로우지와의 싸움을 그리고 있는 그였다.
“어떻게 되던데? 머리로 싸우니까 이기디?”
기실 그걸 지금에서야 준비한다고 될 일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현성이 지금껏 해왔던 훈련들과 경험들을 토대로 그를 잡아낼 수밖에.
“그까진 안 했다.”
“뭐?”
“근데 내 질 거 같진 않드라.”
항상 현성이 머리로 그려보는 것은 구체적인 장면까지는 아니었다. 다만 그와 싸워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느낌. 그 느낌이 있는 한 그는 절대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맨 처음 민욱과 싸울 때에도 마찬가지였지 않은가? 다들 그가 민욱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3개월 만에 치른 데뷔전 또한 마찬가지였고, 그 다음 재석과의 시합 또한 마찬가지였다. 최근에 치른 경기 중에는 밴너와의 싸움 또한!
하지만 그때마다 현성은 자신이 진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체급의 차이로 인해서 무척이나 열세인 언더독이지만 절대로 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집중력만 있으면 이길 수 있다.”
그 굳은 신념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민욱이 무어라 할 말을 잃은 듯 그를 바라보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현성의 말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매번 결과는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던가? 물론 사회 속에서의 면면은 어수룩해 보이기도 했다만 그는 확고한 자아가 있는 남자였다. 그랬기 때문인지 그는 결코 허튼 소리를 하지 않았다. 특히나 아니다 싶은 생각을 혹시나 하고 꺼내지도 않았다.
“체중 차이는?”
“함 해봤잖아.”
어찌 보면 참 대책이 없어도 보인다만 왜 이렇게 든든해 보이는 걸까? 민욱이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니 일인데 어련히 잘 하겠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니터에서 ‘와아아아!’ 하는 환호가 들려왔다. 어느 샌가 다리가 풀린 토니 모리스를 류이치가 매섭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로 킥으로 다리가 마비된 복서는 그리 위협적일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류이치의 주 무기인 양 손 훅이 터져 나오며 스탠딩 그로기 상태로 접어든 모리스!
-뻑!
강력한 일격과 함께 아시아 챔피언 결정전 3번째 KO가 터져 나왔다!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토니 모리스와 승리의 포효를 내지르는 류이치!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현성이 이제 때가 왔다 싶었던지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풀어 보았다.
“자말도 복싱 위주야. 킥 기술을 쓰긴 하지만 그렇게 빠르진 않으니까 잡으려면 킥이 유효 할 거야. 그리고 넌 리치가 기니까 충분히 승산은 있어.”
툴툴 거리며 잔소리를 하는 듯 보였지만 그게 바로 민욱의 속내였다. 그를 향해 직접 대놓고 힘내라 응원하진 못해도 슬쩍 돌아 응원해주는 친구의 모습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장님이랑, 코치님. 그리고 니랑 사람들이 여지껏 가르쳐 준 거 다 함 쏟아 보면 될 거 같다. 뭔가 이제 알아갈 거 같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무얼 이제 알아갈 것 같다 이야기 하는지 모르겠지만 진정 무서운 속도로 발전을 거듭해서, 이제는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른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 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를 믿는단 눈빛을 보내자 알렉세이 코치가 후후 웃으며 글러브를 들고 왔다.
“세계로 가자.”
“예, 코치님.”
김관수 관장 대신 그가 한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그의 양 손으로 자리 잡는 까만 글러브. 이 글러브가 터질 때 까지, 자말 로우지와 승부를 내겠다 마음먹으며 현성이 글러브를 부딪쳐 보았다. 팡팡 하고 좋은 소리가 대기실을 울렸다.
“스탠바이 해주세요!”
K-1 측 스태프의 말에 현성이 천천히 뒤돌아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병실에서 시합을 지켜보고 있을 김관수 관장과 혜주, 그리고 관중석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키를 떠올리며 걸음을 내딛었다.
두 번째 입장이지만 이것이 이상하다거나 피로하단 기분은 들지 않았다. 기묘할 정도로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현성이 머리 속으로 그림을 그렸을 때, 두 번째로 자말을 마주 보았을 때와 같이 말이다. 그와 싸우고 싶어 몸이 달아오른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그 열망 가득했던 12월처럼 이제 그는 지나가야 할 길에 불과하단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KO만 답은 아니니까 영리 하게 잘 해라.”
진지한 얼굴로 민욱이 다시 현성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에 현성이 후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시합에는 오로지 KO만이 있는 게 아니다. 실제 싸움과 달리 경기는 경이니까. 충분히 판정으로 나간다면 자말 로우지를 이길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포인트 싸움은 현성이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가 수긍할 수 있는 방식이라곤 볼 수 없었다. 아마 그것은 자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하며 현성이 숨을 골랐다. 밴너보다 크고 빠른 상대와의 정면 승부에서 이겨 낼 수 있을까? 승리를 자신 할 순 없었지만 지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판정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절대로 안 질끼다. 나는 내 혼자 싸우는 게 아이다 아이가.”
그에게 믿음과 신뢰를 보여준 사키를 위해서도 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수렁에서 올라온 만큼 사키 또한 다시 올라와야 한다. 비록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싸우는 일밖에 없어 더 많은 것을 해주진 못한다. 허나 그렇기 때문에 이 일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이다. 강철 같은 마음이 현성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숨결과 매섭게 빛이 나는 눈빛. 벌써부터 온 몸이 후끈후끈 예열이 되는 기분이 들고 있었다. 길고 긴 복도를 함께 걸어 나가며 현성이 주먹을 꽉 움켜쥔 사이 그 뒤를 위풍당당하게 따라가는 킬러비들!
“이길 수 있어! 피터도 보내버린 주먹이라고!”
“그래! 아무리 자말이 맷집이 좋다고 해도 그 주먹을 맞고 버틸 순 없을 거야! 스매쉬!”
키드와 광철의 응원에 힘 입어 현성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정말 고맙심다. 훈련도 도와주고, 응원도 해주시고.”
그 사이 현성이 그들을 돌아보며 꾸벅 인사하자 수줍은 낯을 한 광철과 달리 키드가 씩 웃음과 함께 소리쳤다.
“그러면 이기라고! 박살을 내버려!”
과격함의 선두주자 답게 거친 목소리로 그가 대답하자 현성이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대강은 알아듣겠다는 듯 큭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그의 선배이자, 함께 스파링 파트너 역할을 해주었던 피터 역시 해낼 수 있다는 듯 엄지 손을 치켜 들어 현성을 응원했다.
“땡 큐, 피터.”
그가 할 수 있는 짧은 영어에 피터가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난 단 한 번도 월드 그랑프리의 왕좌에 오르지 못했지만, 네가 챔피언이 된다면 그 기분을 나도 대신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내 꿈을 이뤄다오!”
믿음이 담긴 그의 긴 말에 현성이 힐끔 민욱을 바라보자 민욱이 다소 떨떠름한 얼굴을 한 가운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랑프리 정상에 한 번도 못 올라가봤으니 그걸 니가 대신 이뤄달래.”
그 말에 현성이 ‘아…’ 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장을 앞 둔 복도의 끝. 그 자리에 서서 그가 사람들의 웅성임과 환호를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돈 워리.”
그리고 짧은 영어 한 마디로 현성이 피터를 향해 이야기 하자 피터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K-1 아시아 챔피언 결정전! 토너먼트 결승전! 이제 시작 합니다! 먼저 청 코너! 마우리 전사! 불도저 자말 로우지!”
그리고 그의 외침이 먼저 자말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래도 일본 내에서의 인지도와 인기는 현성 쪽이 자말보다는 크다보니 조금 더 메인으로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그 목소리와 함께 다시 뉴질랜드의 전통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이지 않지만 아마 반대쪽에서 자말이 하카를 선보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듯 현성이 빙그레 웃음 지었다.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기다리며, 눈을 감고 얼마나 떠올렸던가? 그 흉흉한 기세 넘치는 마우리 전사를 말이다.
“하아! 캬악!”
과연 그의 생각대로 자말이 월드 그랑프리를 향한 열망을 가득 담아 이전보다 더 힘이 넘치는 모습으로 하카를 보이자 사람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처음엔 그렇게 인지도가 많지 않았지만 쿄타로를 쓰러뜨린 강력한 모습이 사람들의 맘을 흔들었던 모양이다. 그 어마어마한 환호 소리에 민욱과 알렉세이 코치가 현성의 등에 손을 올리자 현성이 미소와 함께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천 여명이 넘는 무대에서도 긴장을 했었다만, 이젠 수 만이 있는 무대에서도 긴장을 하지 않게 되었다. 문득 그 생각이 들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는 듯 현성이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사이에 자말이 링 위로 올라간 듯 음악이 끊어지고 웅성임이 전해졌다.
“우리 차례다. 준비 됐냐?”
현성보다 오히려 더 긴장한 듯 한 민욱의 목소리에 현성이 살짝 고개 돌려 그의 눈을 바라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말의 뉴질랜드 전통 음악만큼이나 강렬하고, 그의 하카 만큼이나 숭고한 럭스 아테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홍 코너! 승리의 여신을 위해 싸우는 남자! 동방의 최종병기! 괴물 장 현성!”
장내 아나운서의 혼신의 힘을 짜낸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소리와 함께 현성이 걸음을 내딛었다.
“가자.”
============================ 작품 후기 ============================
회사 그만 뒀습니다. 처음부터 취업했던 게 안정직이 있으면 글쓰기도 더 원활 할 것이고, 경험이 필요하다 싶었는데… 너무 잦은 회식과 연재 말고도 해야 할 다른 일이 너무 많다 보니… 도저히 같이는 못하겠더라구요. 일주일에 3-4일 씩 회식은 좀… 그래도 경험치는 얻었네요! 이제 2월 작가 연봉제 신청을 해보구요. 앞으로의 진로를 이쪽으로 굳힐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적금 만기 되는대로 미래도 정리 하고 생각도 정리해볼 겸 정말 멀리 멀리 먼 곳으로 잠깐 여행을 훌쩍 다녀오고 싶네요! 행선지는 태국으로 생각하고 있슴돠. 코끼리 타러 갈 거거든요 ㅋㅋ 물론 그 전에 괴물은 끝을 내 놓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