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회 - 괴물
극진회관에서도 비슷한 체격의 스파링 파트너를 만난 적이 있지만 피터와 같이 K-1 경험이 있는 선수와의 훈련은 처음이었다. 물론 그도 나이 탓에 전성기 기량을 펼칠 순 없었지만 오세아니아 GP나 아시아 챔피언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한 때 K-1의 세대교체를 이끌어 낼 주역이라 주목을 받았던 선수였다.
“그럼 잘 부탁한다.”
비롯 K-1 무대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선수가 되었지만 여전히 피터는 이 일에 대한 자긍심과 애착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와 함께 동시대를 풍미했던 제롬 르 밴너란 상대를 이긴 현성을 향해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존경과 예우를 표하는 그의 모습에 현성이 기대감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와 스파링을 하기 전에 잠깐 링 위에 함께 있었던 민욱이 바디 샷으로 무너진 이후 조금 가라앉은 기분이 들어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토너먼트가 몇 일 남지 않으니 거기에 신경을 분산시킬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건 민욱이 감당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물론 과거 아마추어 전적과 선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더 그런 일인지도 몰랐다. 바디 샷 한 방으로 다리에 힘이 풀릴 줄은 민욱으로써도 예상치 못 했을 테니. 하지만 폼은 여전했다. 떨어진 체력이나 기타 여건들만 마련한다면 여전히 위협적인 상대란 것은 변함이 없었다.
두 사람의 리매치가 실현될지 안 될지는 모를 문제였다만 아마 리매치가 결정된다면 민욱을 당분간은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현성이 피터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렛츠 고!”
날이 촉박한 만큼 강도 높은 훈련을 위해서는 최상의 상대와 함께 실전과 같은 스파링을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피터는 제대로 된 스파링 파트너였다.
현성보다 조금 더 큰 키에 슈퍼 헤비급의 체격! 거의 밴너와 비슷한 체격의 소유자인 동시에 과거 그의 전적이 말해주다 시피 상당히 뛰어난 기량을 가진 베테랑이었으니…! 여기다 보호장비까지 착용을 한 피터라면 가히 현성이 진지하게 상대한다 하더라도 이기기 힘든 상대일지도 몰랐다.
곧 주먹을 마주함과 동시에 현성이 숨을 고르며 경쾌하게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민욱과의 스파링에서 보여줬던 묵직함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그리 했다간 피터의 일격에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당할 지도 몰랐으니까!
그랬기 때문일까? 한결 경쾌해진 그의 스탭에 키드가 흥미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레슬링이 베이스였지만 격투 무대에 데뷔한 이래로 키드는 77%라는 어마어마한 KO 승률을 자랑하고 있다. 뒤늦게 타격 훈련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K-1의 70킬로 이하 체급인 MAX 무대에서 7전 6승 1패란 전적을 자랑 할 정도로 타격 감각이 뛰어났다.
“발이 무거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최소한 타격에 있어서는 올라운더가 틀림없었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민욱에게는 압박을, 그리고 그보다 훨씬 거대한 피터에게는 아웃복싱 스타일을 구사할 모양이었다! 흥미로운 얼굴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키드와 광철이 이내 ‘오!’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순간 피터의 주변을 맴돌며 기회를 노리던 현성이 아까 민욱이 그랬던 것처럼 전진형 스탭을 밟으며 순간 날카로운 라이트 잽을 던진 것이다! 물론 그게 빠르긴 하지만 당황할 정도는 아니라는 듯 피터가 글러브로 펀치를 커트해냈다.
“하앗!”
그리고 그가 원래 가라데를 수련했던 사나이 답게 기합을 내뱉으며 미들킥으로 응수하자 현성이 일본으로 오기 전 김관수 관장이 지적했던대로 가드를 내리지 않고 굳건히 지키고 있다 그의 미들킥을 왼팔로 막아냈다.
-퍽!
가드해냈다고 하지만 120킬로가 넘는 피터의 미들킥은 그야말로 위력적이었다! 순간 몸이 휘청 거리는 듯 한 충격이 밀려왔지만 이를 악 문 현성이 튕겨내듯이 미들킥을 버텨내고는 로 킥으로 반격을 가했다.
-쩌억!
보호대 위로 떨어진 매서운 로 킥에 피터가 ‘휘유!’ 하고 감탄을 터뜨리는 사이 또 다시 무서게 치고 들어가는 현성의 라이트 훅!
-후웅!
“와우! 멋진데!”
스파링임에도 불구하고 난타전 조짐을 보이는 양상에 키드가 흥분한 듯 박수를 짝짝 치자 광철이 마찬가지로 흥분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하고 내성적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현성의 시합은 항상 뜨거웠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인 피터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쿨!”
아슬하게 피터가 피해낸 라이트 훅에 그가 감탄하며 칭찬을 하자 현성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조금 더 타이트하게, 레프트 바디 샷을 찔러 넣기 시작했다.
-퍽!
몸에 찬 보호 장비에 맞아 떨어진 주먹임에도 불구하고 위력은 전혀 반감되지 않는 것 같았다! 민욱이 어째서 펀치를 맞고 주저앉아 버렸는지 십분 이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맹렬한 바디 샷에 피터가 순간 움찔하자 그 순간 현성이 김관수 관장과 함께 앤드류 나카하라를 몰아세우려 연습했던 펀치 콤비네이션을 폭발시키기 시작했다.
-퍽!
레프트 바디 샷에 이어 연이어 라이트 바디 샷! 보호 장비 탓에 그리 큰 데미지는 없지만 긴 리치를 활용하는 대신 근접전으로 치고 들어오는 저돌적인 그의 파이팅에 피터가 거리를 벌여야겠다 생각한 듯 니 킥으로 반격을 가했다. 그러나 그의 니킥을 왼 손으로 쳐내며 가드를 하곤 현성이 연이어 라이트 훅으로 피터의 안면을 노렸다.
-후웅!
헤드기어를 쓴 피터가 아직 죽지 않은 반사 신경으로 펀치를 피해내자 순간 현성의 주먹이 포물선을 그렸다.
“러시안 훅!”
“그래, 저거야! 저 장면에서 내가 소름이 돋았지!”
이제는 아예 의자를 가져와 관람하고 있는 키드와 광철의 외침에 순간 피터가 움찔하며 오른쪽 가드를 올렸다. 라이트 훅 이후에 날아올 공격은 바로…!
-뻑!
“와우!”
조금만 늦었어도 그대로 안면에 들어갔을 지도 모르는 어마어마한 펀치에 120킬로가 넘는 피터가 뒤로 휘청했다. 황급히 가드를 들어 막었던 피터임에도 불구하고 그 여파가 상당했던지 바로 그 사이에 다시 한 번 더 현성의 라이드 잽이 피터의 안면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파방!
현재 현성의 체중은 96킬로! 거의 100킬로에 육박하는 거대한 몸에서 나오는 스피드라곤 믿을 수 없는 빠른 공격에 피터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를 거세게 밀어 붙이며 현성이 계속해서 라이트 잽으로 피터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오, K-1 시합이 다 이렇다면 대박이 날거야!”
에이치를 시켜 이른 아침부터 맥주를 가져온 키드가 신이 나 소리쳤다. 그 정도로 현성과 피터의 스파링은 열렬했다!
보는 사람이야 즐거울지 몰라도 정작 스파링 파트너인 피터의 심정은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현성이 너무 거리를 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펀치 스킬로 공방전을 주고받아야 했다만 그의 펀치가 무척이나 빨라 가드와 커트에 급급했다. 게다가 그 압도적인 리치 탓에 뒤로 빠져도 금방 따라오고야 마는, 끈덕진 압박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경험이 없다면 이 공세에 휘말려 당황하다 결국은 당할지 모르겠지만… 허나 피터는 그리 녹록치 않았다.
-파앙!
뱀처럼 경로가 구불한 플리커 스타일 잽인지라 피하기도 어려웠다만 이건 복싱이 아니다! 다시 한 번 더 글러브로 현성의 잽을 커트해낸 피터가 순간 몸을 돌리자 계속해서 전진해오던 현성이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후웅!
그리고 120킬로의 체구에서 나온 것이라곤 믿을 수 없는, 과거 K-1 최강자였던 하리의 턱을 부서 버렸던 피터의 롤링 썬더가 나오자 ‘와우!’ 하고 키드와 광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간 이런 반격을 가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던 터라 현성이 매서운 기세로 날아드는 킥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생각하다 거리를 떠올리고는 날아드는 피터의 킥 안으로 오히려 더 빠르게 대시해들어갔다!
“오오!”
스파링에서조차 몸을 사라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 그의 모습에 키드와 광철을 비롯해 킬러비 짐의 선수들이 열광하는 동안…!
-퍽!
“큭!”
피터의 롤링 썬더가 채 모든 체중을 싣기도 전에 현성의 몸을 때렸다! 적중하긴 했으나 그의 롤링 썬더는 오히려 현성이 거리를 좁히고 들어온 탓에 데미지가 반감되고 말았다!
물론 반감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에 치인 것처럼 큰 충격을 느끼고 휘청할 정도였으니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허나 본능적으로 킥을 피하기 위해서 뒤로 빠졌다간 꼼짝 없이 KO가 터졌을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헤비급은 리치와 피니쉬가 갖춰진 무대였으니까.
하지만 현성은 과감하게 뛰어 들었고 롤링 썬더의 위력을 반감 시켰다! 대가가 크면 클수록 위험한 도박이라는 것은 격투기나 도박판이나 큰 차이가 없는 진리였다. 이내 현성이 도박에 실패한 피터를 향해 말끔한 스트레이트를 찔러 넣었다!
“우왓!”
그와 동시에 균형을 잃고 피터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자 현성이 실전과 거의 다를 바 없었던 스파링에 찌릿찌릿한 기분을 느끼며 피터를 바라보았다.
“이 친구 정말 대단해! 설마 거기서 치고 들어올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어!”
피터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자 현성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진 못해도 그와 마찬가지로 이 전율감과 스릴감이 무척이나 즐거웠던지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이건 정말 대단하군! 정말! 네놈이야 말로 진정 남자다!”
남 칭찬은 잘 해본 적 없는 키드가 감탄을 터뜨릴 정도였다. 키드가 과거 프라이드에서 유행했던 대사를 흥분한 얼굴로 내던지자 킬러비 짐의 소속 선수들이 키드를 보며 놀란 얼굴을 했다. 그 모습에 키드가 다소 멋쩍은 듯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하는 그의 모습에 광철을 비롯한 소속 선수들이 웃음 짓자 현성이 역시나 말은 못 알아들어도 알 것 같단 생각에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문득 그가 이쯤해서 한 마디 거들어야 할 민욱이 보이지 않는단 생각에 순간 움찔하며 짐을 돌아보았다. 바디 샷으로 무너진 것이 상심이 컸던가 싶은 맘에 현성이 짐을 둘러보자 광철이 그를 향해 말했다.
“전화가 와서 통화 하러 나갔어. 이 안이 워낙 시끄러워서!”
현성과 피터의 스파링에 환호하던 광철이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얼굴로 그리 이야길 하자 현성이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미안해 할 일은 아니었다만 그래도 걱정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무슨 전화 통화인가 하고 현성이 링에서 다시 몸을 푸는 동안 밖으로 나갔던 민욱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전환데?”
현성의 물음이 떨어지기 무섭게 민욱이 그를 돌아보며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야, 잠깐 내려와 봐.”
“왜?”
이제 막 열을 올리기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내려오란 민욱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지 현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링 아래로 내려갔다. 유쾌한 피터가 걱정 말고 다녀오라는 듯 미소와 함께 ‘씨유~’ 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 사이에 민욱의 곁으로 온 현성이 아까 스파링 때문에 그런 것인가 하고 어두운 얼굴의 민욱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폼은 그대로니까 체력…”
“지금 그 이야기 할 때 아니야.”
항상 제일 중요한 일은 그와의 리매치라 주장했던 민욱이 고개를 흔들며 그리 말하자 현성이 뭔가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현성을 보며 정말로 난감한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김관수 관장님 교통사고 나서 입원하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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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또 출판에 집중을 해야 할 것 같네요. 하루에 1편 정도씩 업로드 되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