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회 - 괴물
“옷까지 이래 다 입어야 되나?”
매번 입고 다니는 옷은 트레이닝 복이 전부인지라 오랜만에 갖춰 입은 정장 차림이 불편하고 어색했던지 현성이 어색한 얼굴로 민욱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민욱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비즈니스엔 비즈니스에 맞는 복장을 갖춰야 할 거 아니야? 그리고 설령 그게 아니라도 그렇지, 아무리 편하게 생각해도 그렇지 여자 만나는 자리에서 그 후줄근한 체육복 차림으로 나돌아 다닐래?”
그 말에 현성이 영 편치는 않아도 십분 이해는 한다 싶었던지 고개를 끄덕였다. 민욱의 말대로 이것은 사적인 감정이 개입하지 않은, 철저히 비즈니스적인 만남이어야 했다. 그 편이 그에게도, 사키에게도 이로울 테니까. 물론 그 이후로 시간이 상당히 지나갔으니 그녀의 감정이 식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기 혼자서만 지나치게 생각이 많아진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하며 현성이 다시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혜주나 사키를 생각하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일본에서 사귄 첫 친구가 바로 그녀인지라 기대가 되기도 하는 만남이었다. 화보 촬영을 마치고 사키가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 처음 만나는 자리이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불편하긴 하더라도 민욱이 가져다 준 정장을 잘 입었단 생각도 드는 모양이다.
민욱이 가져다 준 옷은 다소 죄는 감이 있긴 했지만 두 사람의 체형이 크게 차이가 나진 않는터라 불편함을 조금 감수한다면 멋 만큼은 확실한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들었던지 현성이 이걸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지 핸드폰을 꺼내어 찰칵 하고 셀카를 찍자 민욱이 떨떠름한 얼굴로 한 마디를 던졌다.
“근데 너 그렇게 있으니까 진짜 야쿠자 같다.”
혜주에게 보내줄 요량으로 민망함 불구 하고 촬영을 시도했던 터라 무척이나 ㅃ?ㄹ쭘했던지 현성이 얼굴을 붉힌 채 핸드폰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야쿠자 스타일로 맞아 볼래?”
“어쭈, 여기서 해보자 이거냐?”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실실 웃으며 민욱이 사키를 기다리며 주문했던 얼 그레이를 들어 올리자 현성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니. 그래도 명색이 사장님인데 이런 장소에선 좀.”
현성의 성격 자체가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데다 장난이나 애교완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이상하게 민욱의 앞에서는 그것조차도 자유로웠다. 그 말에 민욱이 얼 그레이를 마시려다 멈칫하며 찌릿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넌 진짜 내가 악덕 사장이었으면 영혼까지 탈탈 털렸어.”
“그때 털어서 미안.”
“아, 이걸 정말!”
욱 하는 민욱의 모습에 현성이 저도 모르게 푸핫 웃음을 터뜨리자 민욱이 분하긴 하다만 달리 부정은 할 수 없는지 인상을 팍 찡그리며 ‘쳇!’ 하고 입술을 내밀었다. 묘하게 자신에게는 장난을 아끼지 않는 현성이다만 그게 그렇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그건 민욱조차도 많이 경험해보지 못 한 일이었다.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그 주변에 있던 친구들 모두가 하나 같이 그의 눈치를 살살 보았고, 그에겐 장난을 치는 것조차도 꺼렸으니까. 그저 어울리며 같이 장난을 치거나 나쁜 짓을 하곤 했지만 그때마다 정말로 자신을 편하게 여기는 상대는 없단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현성의 장난은… 민욱으로써도 기분이 나쁘다기 보다는 왠지 모를 정감이 느껴지는 일이었다.
“아무튼 3억짜리 계약한 만큼 K-1 안 망하게 니가 잘 해야 하는 걸 잊지 마라!”
“그거는 안다. 그래도 이게 잘 될지 모르겠네.”
“니가 뭘 할 게 있겠어? 일단 같이 식사하면서 얘긴 내가 다 알아서 할 게. 어차피 말도 안 될 건데 그냥 너는 인사나 잘 해. 혹시라도 말실수 같은 거 하지 말고.”
“말실수?”
“왜 그런 거 있잖아. 밥 다 먹고 내 방에 같이 가자거나, 내 방은 508호실이다 라고 하면서 야릇한 눈빛을 보낸다거나.”
“…내가 니 입 좀 관리하면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 같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또 다시 현성과 민욱이 티격태격 하는 동안 메르큐르 호텔 도쿄 긴자 레스토랑으로 또각이는 구두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엇박자로 또각또각하고 울리는 구두 소리는 레스토랑 안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충분했는데,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순간 여기저기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현성과 민욱이 동시에 움찔하고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을 발견한 사키가 싱긋 웃음 지어 보였다. 매니저인 스미레와 함께 방문한 그녀가 화보 촬영차 왔던 때보다 훨씬 더 좋아 보이는 얼굴로 웃으며 손을 흔들자 민욱이 ‘와…!’ 하고 감탄을 터뜨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실물이 더 죽여주는데?”
이야기를 듣긴 했다만 민욱이 실제로 사키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많은 영상 매체를 통해서 심심찮게 접하며 예쁘다 라고 생각은 했었다만 실물이 이 정도로 훌륭할 줄은 몰랐단 민욱의 말에 현성이 피식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사키가 3달 전보다 훨씬 더 능숙해진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자 현성이 많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반가워요. 현성 씨.”
럭셔리한 바이올렛 컬러의 미니 드레스를 입은 사키는 정말 CF나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특히나 그의 눈에 익어 있던 모습은 사키가 우울증에 시달리며 많이 여위었던 모습이었던 터라 여전히 마르긴 했지만 전보단 살집이 붙은 지금 모습이 훨씬 더 보기 좋아 보였다. 화장을 그리한 것인지 몰라도 발그레 해보이는 두 뺨이 무척 들떠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혜주 하나만을 품고 있는 현성조차도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승리, 축하해요.”
더 놀라운 것은 3개월 사이에 한국어가 많이 늘었던지 사키가 어렵지 않게 현성에게 말을 걸고 있단 사실이었다.
“아, 아… 고맙심다.”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던 현성이 자기보다 더 정신을 못 차리고 헤벌레 하고 있는 민욱을 보곤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그제야 민욱도 정신이 들었던지 자리에서 일어나 사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사키 상! 장현성 선수의 에이전트 이민욱이라고 합니다!”
멋들어지게 깔아 놓은 목소리를 보아하니 비즈니스는 물 건너 간지 오래고 사키에게 잘 보일 일념 밖에 남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현성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함께 동행한 스미레에게 꾸벅 인사하자 그녀가 그리 탐탁찮은 표정으로 그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아무래도 소속사 입장에서도 이 만남이 어떤 만남인지 낌새를 눈치 챈 모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성이 더 불편한 기분이 들었던지 무척이나 미안한 듯 한 얼굴로 스미레를 바라보자 스미레가 그의 심정이 어떤 건지는 알겠다는 듯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연예계에 잔뼈 굵은 사람으로써 아마 이것은 현성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진행이 되었을 것이란 사실을 단번에 파악 할 수 있었다.
한국보다 오히려 일본에서 인기가 더 많은 현성이다 보니 그의 K-1 계약 소식은 국내보다도 더 크게 다뤄진 바 있었다. 흔히 말하는 사무라이 정신과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있는 현성이다 보니 파이팅 스타일 자체로도 인기를 끌고 있었고, 특히나 사키의 남자란 타이틀은 대중의 관심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 고로 그가 K-1과 계약을 했다면 당연히 이시이 관장이 그를 내세워 사키에게 접근해오리라 예측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반갑습니다! 스미레 상!”
사키와 악수를 하고 나서 정신을 차린 듯 민욱이 스미레에게도 손을 내밀자 스미레가 그의 손을 힐끔 바라 보더니 악수 대신 고개를 까닥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악수를 거부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욱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그의 성격상 무어라 한 소리를 하지 않을까 순간 걱정이 드는 현성이었다만 생각과 달리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스미레 상도 만만찮은 미인이시로군요! 이거 참 오늘은 행복한 저녁 식사가 되겠습니다!”
오히려 더 뻔뻔한 얼굴로 스미레를 칭찬하자 스미레가 립서비스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은지 ‘감사합니다.’ 하고 도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 모습에 사키가 후후 웃음 짓는 동안 민욱이 마주 앉았던 자리에서 현성의 옆 자리로 이동을 하며 앉으라 손 짓 하자 사키와 스미레가 맞은 편에 자리를 잡았다.
“식사는 미리 주문을 해놓았습니다. 아무래도 현성이가 신세진 것도 많고 해서 대접하고자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민욱이 능숙한 일어로 이야기를 꺼내자 현성이 잘 적응이 안 되는지 저도 모르게 웃음 띤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걱정했던 것과 달리 민욱의 일처리를 깔끔했다. 박재운이라는 깡패에서 소리 칠 때와 달리 다소 무례 할 수 있는 스미레의 모습에 화도 내지 않았고 영어 뿐 아니라 일어까지 이 정도로 능통할 줄이야.
“…뭘 그렇게 쳐다 보냐? 콱.”
“아니, 너무 생소해가.”
얼떨떨한 얼굴로 현성이 고개를 흔들자 그 모습을 지켜보며 경청하던 사키가 후훗 웃음을 터뜨렸다.
“아… 저…”
현성이 조금 당황한 듯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사키와 스미레의 눈치를 살피자 스미레가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전트라 밝힌 민욱이야 이시이 관장과 같은 과 사람이라는 것을 어렵잖게 알 수 있지만 이 순박한 격투기 선수는 정말로 요령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사키의 최측근인 만큼 현재 사키를 지탱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잘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친구라고 들었어요. 친해 보여요.”
화보 촬영을 가서도 더 이상 다가설 수 없단 사실을 직접 확인을 했음에도 한국어 공부를 포기 하지 않았던 사키가 한국어로 말을 꺼내자 현성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하진 않심다. 그냥… 어쩔 수 없이.”
엄밀히 말해서 둘은 곧 리매치를 벌일지도 모르는 사이가 아니던가? 어느 샌가 친구처럼 가까워지긴 했지만 그건 아니라는 그의 무뚝뚝한 말에 사키가 다시 후훗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하지만 무척 정겨워 보여요.”
“그런 소리를 하다니 사키, 무례하군요.”
현성과 달리 일어로 민욱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흔들자 사키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 지었다. 스미레 조차도 그 말은 의외였는지 힐끔 두 사람을 바라보자 민욱이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신체 구조야 비슷하다만 얼굴은 판이하게 다른 두 사람이 아니던가? 성격 또한 판이하게 다르다 보니 묘하게 웃음이 나왔던지 스미레도 결국에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무튼 오늘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마음껏 식사를 합시다! 계산은 이 친구가 할 테니까 모에 샹동 돔 페리뇽이나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마음껏 시켜도 됩니다. 가능하다면 샤넬 신상 가방도 가능하구요. 혹시 사키, 새로운 차가 필요 한가요? 그럼 지금 말해요. 얘가 다 살 거니까.”
현성이 일어를 알아먹지 못하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한 듯 민욱이 그를 향해 사악한 미소를 선보이며 일어로 이야기 하자 현성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질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거짓 없는 그 표정에 사키와 스미레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리자 현성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라꼬 캤어요…?”
머리를 긁적이며 사키에게 물음을 던지는 그의 모습에 이번엔 사키보다 스미레가 더 크게 웃음이 터진 듯 그들을 향해 말했다.
“당신 에이전트는 이쪽이잖아요!”
민욱을 가리키는 그녀의 손짓에 현성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진 못해도 대강 뉘앙스는 알겠다는 듯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말이 안 통하니 일어로 차마 얘긴 못하고 한숨과 함께 손사레 치는 그의 모습에 냉정하던 스미레가 무너지고 말았다. 손으로 이마를 가린 채 웃음을 참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사키가 환하게 웃음 짓자 민욱이 다시 한 번 씩 웃음을 지었다.
사키 자체가 문제가 되진 않을 게 분명했다. 문제는 에이벡스 사의 직원! 엄밀히 말해서 요청을 하는데에 현성이 크게 필요하진 않았다. 에이전트 입장에서 민욱이 직접 찾아가 담판을 지어도 되니까.
하지만 현성에게는 여자들에게 무척이나 잘 먹히는 무기가 있었는데, 그의 외모 자체는 어필을 할 가능성이 0에 수렴하고 있었다만… 그런 외모와 덩치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순수하고 순박해 보이는 모습은 보호 본능을 자극한단 사실이었다.
그래서 현성이 동행한다면 사키의 매니저로 알려진 스미레가 아무리 냉정한 여자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먹힐 게 틀림 없다 생각을 했었던 것이 생각 이상으로 잘 먹혀 들어가고 있었다.
냉정하던 스미레가 갑자기 웃음이 터진 게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던 현성이 민욱을 툭 치며 ‘왜 카는데…?’ 하고 속삭이듯이 물음을 던지자 사키가 후후 웃으며 민욱 대신 대답했다.
“오늘 뭐든 다 사준다고…”
“아, 아! 예! 많이 다 드셔도 됩니다!”
“차도 괜찮다고 얘길 하셔서…”
“예, 차도 다 괜찮죠!”
한국어론 ‘차’와 ‘차’가 동일하단 생각을 못했던 사키가 황급히 손과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 그녀도 다시 웃음이 터진 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 짓자 현성이 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듯 다시 민욱을 바라보았다.
“보셨죠? 우리 한다면 하는 남잡니다. 한국 남자가 이렇게 화끈 합니다.”
그 와중에 뻔뻔하게도 웃음기 하나 없이 엄지를 치켜드는 그의 모습에 스미레가 웃음을 참기 힘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어깨를 들썩이자 현성이 ‘야! 얘길 좀 해라!’ 하고 속상이며 민욱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아, 좀!”
금방 또 185센티가 넘는 거대한 두 남자가 말끔한 차림으로 티격태격 하기 시작하자 사키가 아예 소리를 내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지금 이게 헌팅이었으면 대박인데. 진짜 애석하게도 너랑은 손 발이 좀 맞는 것 같다. 후.”
“이게 뭔 개소리고…?”
아쉬움 가득 담긴 민욱의 속삭임에 현성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동안 미리 주문했던 코스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본의 아닌 현성의 활약 덕분일까? 처음의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가 상당히 풀렸고, 이후 메인 디시가 나오기까지 분위기는 무척이나 화기애애했다.
“그래도 전보다 살도 많이 붙고 건강해진 거 같아가 다행이네예.”
비즈니스 자리라고 했지만 실질적으로 그 이야기들이 하나도 오가지 않은데다, 처음의 웃음 때문인지 현성도 한결 편안해진 모습으로 말을 걸고 있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받은 도움들이 알게 모르게 많다보니 감사를 표하는 자리란 생각에 더욱 더 맘이 편해졌던 모양이다. 그의 말에 사키가 후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열심히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건강해져야 한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도복도 사서 열심히 수행 중입니다.”
“아… 진짜요?”
현성이 다소 놀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자 스미레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묘하게 섹시하고 이지적인 얼굴을 드러냈다.
“이래봬도 사키는 파란띠였어요.”
“정말요? 그럴 시간이 있었나요?”
스미레는 한국어가 되지 않으니 주로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것은 민욱이었다. 처음의 경계하던 모습과 달리 민욱에게도 제법 호감이 느껴지던지 스미레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자 사키가 말을 알아듣지 못 할 현성을 위해서 친절히 한국어로 이야길 꺼냈다.
“어릴 때 가라데 도장을 다녔어요. 어릴 때도 몸이 작고 말랐기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셨었어요.”
“아…”
그녀의 사연은 현성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어릴 때.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말. 좋지 않은 기억만 남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그가 무어라 말 하지 못 할 안타까운 얼굴을 하자 사키가 후후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는 무척 좋은 시절이라 지금은 그 생각도 나고 좋아요.”
그 말에 현성이 옅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기는 다르지만 두 사람은 돌이키고 싶은… 아주 좋았던 기억이 있다. 물론 현성에겐 기억을 꺼내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먼 과거였지만 사키는 그렇지 않은 듯 했다. 아버지가 있었고, 어머니가 있었던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 그녀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무어라 말로 설명 할 순 없어도 묘하게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현성 씨는 어땠나요?”
그리고 그녀가 그에게 물음을 던졌다. 방송으로 그의 사연을 접하긴 했지만 정확한 것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얼핏 그런 일이 있단 것 정도. 그 말에 현성이 잠깐 멈칫 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민욱조차도 그 순간에는 더 이상 장난을 치지 않았다.
“난 지금이 젤 좋은 거 같심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로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어린 시절을 제외하곤 좋았던 적이 없었다. 아니, 심지어 그 어렴풋한 어린 시절도 그의 과오를 떠오르게 하는 비수 같은 좋은 시절이었다. 그 생각에 현성이 조금은 쓴 미소로 고개를 흔들자 사키가 아까 현성이 그랬던 것처럼 그게 말로는 설명을 할 수 없지만 묘하게 이해가 되는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 여기서 현성 선수 인기는 대단해요. 한국 선수가 이렇게 인기를 끈 적은 최홍만 선수 이후로 처음일 거에요.”
곧 스미레가 능숙하게 분위기를 바꾸었다. 현성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한국어를 알아듣거나 구사하진 못했다만 오랜 비즈니스 경력이 있어 분위기를 읽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말에 민욱이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제 시작입니다. 아시아 챔피언 결정전이 시작되면 지금보다 수십배는 더 뜨거워 질 거에요.”
자신감 가득한 민욱의 대답에 이제 드디어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올 차례가 되었다는 듯 안경을 벗고 있던 스미레가 다시 안경을 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죠. 지금 여기 온 것… 감사를 표하기 위한 자리라는 건 충분히 느꼈어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겠죠?”
냉정하게 빛을 발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순간 사키가 너무 차가운 목소리가 아닌가 싶었던지 힐끔 그녀와 현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현성 역시 분위기가 급변한 것을 느끼며 조금 어색한 얼굴을 하고서 사키에게 미안하단 표정을 짓자 사키가 다시 후후 웃음 지어 보였다.
“맞습니다. 하지만 이게 우리 측 요구는 아니에요. K-1 이시이 관장님이 아시아 챔피언 결정전에도 사키 양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이야기를 하신 거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K-1 측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사키가 계약을 한 건 연말 이벤트와 K-1 그랑프리뿐이에요. 지역 예선까지는 참여 할 필요가 없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요? 사키는 그 정도로 우스운 레벨이 아니에요.”
“스미레…!”
역시나 스미레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똑 부러지게 핵심을 짚은 그녀의 말에도 불구하고 민욱은 여유가 있었다. 현성이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고 걱정하는 가운데 그가 걱정 하지 말라는 듯 여유로운 얼굴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물론이죠! 그거야 사키 상과 스미레 상이 생각하고 판단할 일이니까! 단지 우리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오오츠카 사키의 이미지를 바꿔 줄 수 있는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말에 스미레가 ‘음?’ 하고 그를 돌아보았다. 확실히 계약은 민욱이 아니라 이시이 관장과 할 일이다. 허나 K-1의 부흥은 현성에게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고 그를 위해서 에이전트인 민욱이 사키를 직접 설득하러 나온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시아 챔피언 결정전에 사키가 모습을 보이는 것에 그리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사키의 이미지라뇨?”
“사키 상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것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일본 뿐 아니라 국제적인 인기를 누렸죠. 정말 굉장했습니다. 물론… 폄하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일련의 안 좋은 사건들이 여럿 있었죠?”
“그건 좀 무례하군요!”
“아니, 그런 이야기를 하잔 게 아닙니다! 절대로!”
절대로 그것은 사키를 공격하고자 함이 아니라는 듯 민욱이 이야기를 꺼내자 스미레가 조금 인상을 굳혔다.
“괜찮아요, 스미레.”
그러나 그녀와 달리 사키는 화를 내거나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당사자의 입장으로썬 그 이야기를 꺼낸다는 자체가 불쾌 할 수 있다만 사키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간간히 현성에게 걱정하지 말란 눈빛으로 웃음 까지 지어줄 뿐이었다.
“그걸 플러스로 바꿔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민욱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내자 사키와 스미레가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그녀의 인지도는 유효했다만… 민욱의 말대로 안 좋은 방면으로 흘러간 게 사실이었다. ‘저주받은 여자’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간단하죠. 여기 있는 이 사키의 남자가… 사키가 함께 하는 시합에서는 모조리 승리를 거둔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돌 출신의 아름다운 연예인임에도 불구하고 슬픔과, 비극의 상징이 되어 버린 것이 오오츠카 사키가 아니던가? 물론 다이너마이트 걸로써 재기를 선언했지만 아직까지 그러한 인식 자체를 뒤바꿀만한 계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말에 스미레가 다소 흥미롭단 얼굴로 민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민욱이 자신은 주목을 받을 때 더 강해진다는 듯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현성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기 이 괴물이 오오츠카 사키를 ‘승리의 여신’으로 바꾸어 놓을 겁니다. 약속 드리죠!”
============================ 작품 후기 ============================
약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