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회 - 괴물
“근데 도대체 와 내한테 그런 거를…”
“당연히 오오츠카 사키가 니 팬이라고 당당히 밝힌 데다 한국에 와서 같이 화보 촬영도 했잖냐? 참 요즘 여자들 이상하다. 너한테 꽂혀서. 못생긴 남자한테 빠지면 문도 없다더만.”
함께 하네다 공항을 나서며 투덜거리는 민욱의 모습에 현성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말이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현성의 모습에 민욱이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한창 대회 준비로 시급한 현성에게 이런 일을 부과한 것은 사실 상 민욱의 책임도 없다곤 할 수 없었다. 물론 K-1 측에서도 오오츠카 사키가 다시 참여한다고 한다면 얼마 돈을 들이지 않고서도 다방면으로 홍보가 가능할 테니 전략적으로 해온 요청일 터. 그것을 수용한 것 역시 민욱이었다.
“그래도 이런 거는 내 일 아니다 아이가…?”
사키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현성도 익히 잘 알고 있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에게 많은 것을 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거리를 두어야만 할 것 같은 사람이 그녀이기에 조심스러운 현성이었다. 그의 물음에 민욱이 그런 걸 다 떠나서 비즈니스는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판단을 해야 한다는 듯 말했다.
“3년 계약에 3억. 신인 선수한테 주긴 과분한 액수지. 니가 엘리트 체육인 출신도 아니고, 국내에서 엄청난 인기 몰이를 하고 있던 것도 아니니까. 이 액수에 포함된 건 너의 경기력 뿐 아니라 오오츠카 사키도 포함이 된 거라고 봐야 돼. 냉정하게 생각 해. 넌 지금 K-1이랑 계약 맺은 소속 선수라고. K-1이 커야지 너도 커진다. 그러니까 그런 부분에 있어서 일조 할 수 있는 건 일조 해주고 공동 성장하면서 좋은 관계를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고.”
엄밀히 선수는 경기만 잘 하면 된다는 것도 지난 말이었다. 점차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싸움이 아니라 프로 파이터의 대전이라는 엔터테이너였다. 그러다 보니 홍보와 관련될 수 있는, 경기 외적인 요소도 충분히 사람들에게 즐거움이나 기대치를 가져갈 수 있는 부분이었다.
“뭐, 사키 정도면 최상급이지! 솔직히 나도 그 정도 급 되는 여잔 아직 못 만나 봤다! 얜 일본 뿐 아니라 아시아 쪽에선 정말 한 때 탑 찍었던 애야. 이 정도면 그냥 현지 처로 두고두고 만나! 어차피 너 한국이랑 일본 왔다갔다 해야 하고 그러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아니야? 내가 여잘 많이 만나봐서 잘 아는데 이런 스타일은 하자는 대로 다 하는 스타일이다. 배신을 못 하는 스타일 말이야.”
해달라는 건 정말 어떻게 해서든 다 해줄지 모른단 민욱의 말에 현성이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서 그런지 몰라도 지금 민욱이 하는 말이 영 와닿지도 않고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다.
“치아라. 그런 거.”
그 모습에 민욱이 스타일이 달라도 자신과는 정말로 다르단 생각에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넌 한 번 뿐인 인생 즐기면서 살아야 겠단 생각은 안 드냐? 이제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에선 제일 잘 나가는 격투기 선수 중 하나인데.”
“한 번 뿐인 인생인데 제대로 살아야 겠다 싶단 생각은 안 드나?”
그 진지한 목소리에 민욱이 쳇 하고 고개를 다시 흔들었다. 어쩜 그의 말보단 현성의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몇 년 전부터 자극만 찾아오던 민욱이 요 근래처럼 즐겁게 살아가고 있었던 적은 없었으니까.
“그래도 너 너무 그렇게 살면 나이 들어서 후회한다. 아, 그때 할 걸! 하고.”
“다른 걸 다 떠나가 그런 거는 내 좋아해주는 사람한테 예의가 아이다 아이가.”
“대신 즐거움을 주면 되는 거 아니야? 하긴, 시합 하는 거 보니까 그것도 1라운드 안에 끝나는 거 아니냐?”
“1라운드 안에 깨지나, 이기나 이 차이가 클 낀데.”
“아, 진짜 내가 뭐 단체를 하나 만들던가 해야지! 내가 니 전적의 10배 경력자라니까!”
입장 차이가 서로 확연히 다른 두 사람이기에 매번 티격태격 하고 있지만 그래도 서로의 뜻을 상대에게 결코 강요하진 않는다. 차이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인지 알고 지낸지 그리 오래 되진 않았지만 두 사람은 오래 된 친구 같은 느낌이 있었다.
티격태격 하며 두 사람이 함께 택시를 잡아 타고 숙소인 도쿄 메르큐르 호텔로 향하는 동안 현성이 사키 일은 이제 어쩔 수 없다 포기를 한 듯 체념한 얼굴로 다시 물음을 던졌다.
“카면 스케줄은 우에 되는 건데?”
“일단 오늘 저녁에 당장 사키 만나기로 에이벡스에 요청 했지. 아마 이쪽으로 올 거야.”
“…오늘?”
“쇳뿔도 단김에 빼라 그랬잖아. 내일부터 넌 딴 짓 할 시간도 없어.”
확실히 민욱의 일처리는 화끈한 구석이 있었다. 그 성향 덕분인지 몰라도 그가 에이전트를 맡고 나서는 거침 없이 진행되는 일에 현성이 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 가지지마, 쨔샤. 비즈니스로 만나는 건데 부담 가지는 건 너도 마음이 있단 소리잖아.”
장난스럽고, 껄렁한 가운데 의표를 정확히 찔러 오는 민욱의 말! 그 말에 현성이 그러면 안되겠다 싶었던지 아차 하고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재미있는 점이라면 이 정도로티격태격 하는 사이인지라 자존심 때문이라도 쉽게 조언을 받아들이기가 힘들텐데 현성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 그런 탓에 민욱이 괜히 더 한 마디를 보탰다.
“물론 난 너 사장님 입장으로써 사키와의 스캔들을 매우 환영하고 있지만, 경기 자체에 영향 줄 수 있으니까 그냥 만나서 밥이나 한 끼 대접한다고 생각해. 비즈니스 이야긴 내가 할 테니까 넌 그냥 입 다물고 있어. 어차피 일어도 못하겠지만.”
그 말에 현성이 잠자고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단 듯 민욱을 바라보았다.
“내 캐릭터가 이딴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내가 언제 이런 자선 사업가가 된 거야?”
“노블리스 오블리제 한다매.”
“…이 자식 은근히 말 좀 한다…?”
한 마디도 못하게 생겨선 경기 때처럼 묵직한 한방을 날리는 현성인지라 민욱이 다시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에 현성이 사키와의 일은 민욱 말대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자 마음을 먹고는 핸드폰을 꺼냈다.
김관수 관장이 민욱과의 시합을 위해 한 번 더 정문호 대표를 설득하러 갔고, 그 사이에 두 사람이 먼저 일본으로 출발한 상황이었다. 이야기를 한다 정신이 없었던 터라 뒤늦게 확인을 하니 도착했느냔 김관수 관장의 문자가 와 있었다.
“참 징하다, 징해. 어련히 잘 도착 했으려고.”
“걱정 되니까 카시는 거 아이가?”
“야쿠자도 겁 먹어, 니 얼굴은.”
그 말에 현성이 푸핫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라면 이런 놀림은 참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심각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말이다.
“아무튼 훈련은 극진회관 말고 킬러비에서 할 거야. 그렇게 알아둬.”
“킬러비?”
“그래. 극진회관도 나쁘진 않지만 가라데 파이터 밖에 없잖아. 니 대전 상대는 가라데 선수 하나도 없는데 거기서 해봤자지.”
냉정한 민욱의 말에 현성이 그래도 일본을 왔을 땐 매번 극진회관에서 신세를 졌던 것이 생각났던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래도 쿄타로 카는 선수는 정도회관 출신이라는데…?”
“쿄타로가 자말 못 이겨. 상성이 너무 안 좋아.”
확신을 하는 민욱의 목소리에 현성이 흠칫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못 이긴다고?”
“정도회관은 풀 컨텍 스타일이야. 안면 타격이 약하잖아? 근데 자말은 안면은 물론 맷집이 차준혁이랑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력해. 노가드로 도발을 할 정도야. 이게 피하는 것도 아니고 정타를 맞고도 더 때려보라, 이런 식이거든! 거기다 복서 출신이다 보니 완전 불도저 스타일의 공격력도 갖추고 있거지. 호주에서 시합하는 거 봤는데 자말, 이거 완전 물건이야. 이시이 관장도 제 2의 마크 헌트 생각하고 데려온 모양이던데.”
“마크 헌트면…?”
선수 치고 이 정도로 레전드 선수에 대한 정보가 없는 선수도 드물 것이다. 잠깐 생각에 잠긴 현성의 모습에 민욱이 쯧 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맷집 좋은 사모안 하드 펀쳐. 아무래도 쿄타로 같은 스타일이 이기긴 힘들지. 판정으로 승리를 한다면 모를까 그건 이시이 관장이 원하는 그림이 아닐거야. 물론 변수까지 예측하긴 힘들겠다만 요즘 이 선수 상승세가 상당해. 반면에 쿄타로는 부상 재발 덕분에 골골 앓고 있고. 아무래도 쿄타로가 승을 잡긴 힘들 거야.”
사모안! 현성으로써는 처음 마주하는 단어였다. 그 말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선수 프로필을 핸드폰으로 찾아보았다. 둥그런 얼굴에 몸도 푸짐하다. 허나 다른 게 있다면 그게 그냥 살이 아니라 굉장히 단단하고 굵직한 체형이란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현성이 조금 긴장된 듯 얼굴을 굳히자 민욱이 이래저래 싸울 일이 많아서 좋겠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최강의 인종이지. 데이빗 투아도 그렇고, 마크 헌트도 그렇고 이쪽은 정말 징글징글할 정도로 KO를 안 당한다니까. 두개골 자체가 다른 종족에 비해서 1-2센티 정도 더 두껍다고 하던가? 게다가 재미있는 거 자말 로우지, 이거 아직 서른도 안 됐어. 보통 이 계통으로 들어오는 선수들은 한창 NFL이나 럭비 쪽으로 재미 좀 보다 전성기 보내고 오는 경우가 많은데… 신체적으로 최상이라 이거지.”
설명을 곁들인 민욱의 얼굴에는 역시나 흥미가 가득했다. 물론 승부의 세계는 쉽게 예측을 할 수 없다. 과거에도 마이티 모라고 불리는 선수가 태국의 카오클라이에게 낙승을 거둘 것이란 예상과 달리 패배를 맞이하지 않았던가?
“음…”
그 말에 현성이 짐짓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밴너를 쓰러뜨리긴 했지만 그는 노쇄했다. 그것만큼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아시아 챔피언 전에서 마주할 자말 로우지라는 사모안 선수는 밴너만한 경력은 없지만 그보다 빠르고 강할 것이 확실했다.
“참 재미있는 구도야. 이시이 관장이 역시 감이 있어. 밴너랑 헌트가 예전에 라이벌 전 펼쳤던 것처럼… 느낌이 비슷하지?”
흥미로워 하는 민욱과 달리 현성은 어느 샌가 사키를 만날 일도 잊어버리고 자말에 집중한 듯 한 모습이었다. 물론 그와 만나기 위해서는 현성 또한 기존의 상대인 나카하라를 먼저 제압해야 한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현성이 벌써부터 몸이 근질거리는지 빛이 나는 눈동자로 대답했다.
“그냥 모르겠다. 근데 좀 더 연습을 확실하게 해야 될 거 같은데…”
그 모습은 그들이 처음으로 주먹을 섞었을 때, 현성이 민욱에게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오르게 하는 모습이었다. 머리 쓰는 사람과 몸을 쓰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
인정하긴 싫지만 어쩜 정말로… 그 생각이 들자 민욱이 고개를 흔들어 애써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싸우기도 전에 벌써 기선을 다시 제압 당하는 기분이라니! 아직 확정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절대로 그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그의 자존심을 무참하게도 짓밟았던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기색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결과는 자명해질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진심 전력으로 붙어 보았을 때, 확실히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단지 정문호 대표가 하루라도 빨리 승낙하기를 간절한 맘으로 바랄 뿐이었다.
“난 그 사이에 일본 여자들이나 왕창 만나야겠다. 순국선열들의 원한을 갚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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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