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회 - 괴물
친구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번뜩이는 재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현성이 가지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몸뚱이 하나 뿐! 그게 먹힐 수 있는 것은 격투기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지만 박재운의 일을 다루는 것은 단순히 그것으론 불가능했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를 훨씬 더 웃도는 사회적인 뭔가가 필요했다. 사회성을 숫자로 따져 봤을 때 0에 한 없이 가까운 현성과는 다르게, 날 때부터 그게 100에 가까운 친구 말이다.
할 수 있는 뭐든 해보겠다. 그것은 현성에게 있어서는 단 한 번도 시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자신의 일을 남에게 기대어 처리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던 현성이었으니까. 그래서 그걸 망설이고 또 망설였지만 생각보다 민욱은 흔쾌히 그의 부탁을 승낙했다.
“뭐, 어떻게 할 건데? 깡패들이 여기서 난리 쳐서. 이 바닥 물 한 두 번 먹어본 거 아니잖아? 우리 쩨쩨하고 촌스럽게 그러지 맙시다. 뭔 놈의 에이전트 사업이야? 깡패 새끼들이. 이런 건 나 같이 머리 좋고, 친구 많고, 인맥 빵빵한 사람들이 젊었을 때 사업 하나 했다 경험 삼아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하는 분야니까 그냥 신경 끄시고 앞으로 자기 앞가림이나 하고 사세요. 남의 콩고물 털어 먹으려고, 안 준다고 빼앗으려고 그러고 유치하게 이게 뭐야? 여튼 대갈빡은 황소 대가리 만 한 데 뇌내 용량은 초딩들 보다 모자라다니까.”
빅 마우스답게 거침없이 털어 놓는 그의 말에 순간 재운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민욱은 도무지 겁이라곤 없는 남자였다. 실제로 현성의 부탁을 승낙한 이유도 재미있겠단 이유 하나만으로 승낙했으니까!
“왜? 억울해서 한 번 치시게? 그런데 이거 어떻게 하나? 내가 비록 저 못난이 때문에 은퇴 아닌 은퇴를 하긴 했지만 여전히 좀 칩니다. 한 번 해볼 거야?”
더불어 그는 힘의 논리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심리적으로 상대를 괴롭힐 줄도 알았고, 악동 같은 구석이 있어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구석도 적잖았다.
한 마디로 재운에는 극악의 상성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민욱이었다. 동등한 조건이라면 더 나쁜 놈이 이긴다. 허나 그런 부분에 있어서 타고나기를 월등히 뛰어난 조건에서 태어나, 재운 이상으로 나쁜 방식을 적당히 이용할 수 있는 남자!
“뭘로 해볼래? 아저씨. 돈? 권력? 아니면 맞짱? 어디든 다 덤벼봐. 모든 면에서 다 압도적으로 밟아 줄게.”
모든 면에서 우월함을 뽐내는 그의 말에 재운이 으드득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위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정말로 민욱의 아버지인 이정욱 의원이 대단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무려 3선 의원! 게다가 그 집안 내력 자체가 할아버지 대부터 쭉 의원을 해오던 정치 가문이다. 대구에서 가장 큰 조직이라 하더라도 감히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집안이었으니! 그게 있는 한 그는 민욱에게 손을 댈 수조차 없었다.
아마 재운이 보통 깡패였다면, 전국구 레벨이 아닌 일반 조폭이었다면 함부로 일을 저질러버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그가 여지껏 쌓아 올린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지방 검사로부터 연락이 와서, 진행 중인 사업에서 손을 떼라 위협을 받아 너무 화가 나 여기까지 찾아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일을 벌여선 곤란했다.
설마 현성의 등 뒤에 이런 녀석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상승세를 가지고 있는 그를 이용해 한 몫 벌어볼 생각이었다만, 그게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질 줄 누가 알았던가? 으드득 이를 갈면서도 처음보다는 다소 누그러진 그의 모습에 민욱이 개를 길들이는 사람처럼 오만한 눈으로 그를 내려 보았다.
“내 앞에서 까불지 마. 나보다 잘난 구석 하나라도 있는 놈 아니면. 내 말 알아들어?”
완벽하게 재운을 아랫사람 취급 하는 그의 모습에 재운이 입술을 잘끈 깨물고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도진이 형님도 너 잡아 쳐 넣기 좋은 상황이라더라. 쓸 데 없는 욕심 부리지 말고 그냥 지금 현실에 안주 해.”
하지만 그런다 한들 정말로 민욱의 자신감처럼 그는 그에게 손 끝 하나조차 건드릴 수가 없었다. 김도진 검사는 익히 재운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실질적으로 그쪽과도 상당히 커넥션이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의 뒤를 봐주던 검사가 돌변하여 위협을 가해올 정도로… 눈 앞에 있는 20살 핏덩이가 막강한 권력자 집안의 사람이란 것이었다.
과거 현성에게 얘기 했던 것처럼 센 척 하는 녀석들을 밟아주는 게 가장 즐겁다 했었기 때문인지 민욱의 얼굴은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비웃는 듯 한 그 모양새가 재운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뒤집어 엎었지만 그렇다 한들 일을 크게 벌릴 수는 없었다.
과거 H 그룹 회장의 아들을 잘못 건드렸던 깡패들이 그 날로 대한민국에서 자취를 감춘 적이 있었는데, 일개 재벌가보다도 더 위험스러운 상대가 바로 정계 인사다. 모두가 평등한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가 아니던가? 그 보이지 않는 벽에 분노는 하나 더 이상 무어라 하지 못하고 재운이 고개를 숙이자 이제 적당히 마무리를 하자는 듯 민욱이 다시 말을 꺼냈다.
“알아 들었으면 꺼져.”
너무 궁지로 몰아세우면 쥐도 고양이를 깨무는 법이다. 그런 미스를 범하진 않겠다는 듯 민욱이 씩 웃으며 길을 열어 주었다. 물론 그 나름의 배려가 재운에게 전해진 것인지는 알 수가 없겠지만 말이다.
굳은 얼굴로 재운이 무리들을 이끌고 나가는 동안 민욱이 마찬가지로 굳어 있는 재운의 부하들 중 하나를 붙잡았다.
“행님, 똥 쌌으면 치우고 가야죠. 설마 자기가 싼 똥, 남이 치워주길 바라는 이기적인 지역사회는 아니겠지? 너 바닥에 구두 자국 닦아라.”
악동처럼 씩 웃음을 터뜨리며 말하는 그의 말에 순간 재운이 홱 하고 열불이 터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쥐가 고양이를 물어봐야 죽는 시간 단축 하는 효과 밖에 없단 얼굴로 민욱이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철저하게 악동 그 자체인 그의 모습은 정말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이내 재운이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치우고 와라!’ 하고 소리치곤 성큼성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건 박재운의 자존심 문제가 아니었다. 어쩜 이 바닥의 생존과 관련이 깊은 일인지도 몰랐으니까!
“저, 여기 밀대 어디 있습니까? 이 친구한테 밀대 양도 좀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민욱이 더럽혀진 체육관을 정리하는 게 먼저라 생각했던지 그리 이야길 꺼냈다. 말끔하게 조폭들을 정리해버린 그의 모습에 사람들이 묘한 희열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이곤 밀대를 들고 왔다.
“저 자슥 말은 진짜 잘 하네.”
김관수 관장도 이런 식으로 일이 흘러갈 줄은 몰랐다만, 확실히 민욱의 말빨 하나는 인정을 해줘야 겠다 싶었던지 감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벙찐 얼굴의 김관수 관장과 고맙게도 서울에서 여기까지 단 걸음에 와준 민욱의 모습에 감동이라도 받은 듯 현성이 제법 글썽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민욱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왜 그렇게 느끼하게 쳐다 보냐? 짜증나게.”
“내가 뭐.”
무뚝뚝하게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민욱을 향한 고마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눈빛에 민욱 역시 괜시리 머쓱해졌던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김관수 관장과 현성의 앞에 섰다.
“암튼 관장님. 우리 계약하러 왔어요.”
“아, 응? 잠깐만! 난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는데?”
“간단하죠! 여기 이 못난이가 깡패들한테 에이전트 계약 안 맺으면 주변 사람들 못 살게 군다 협박당해서 히어로 이민욱에게 도움을 요청한 거죠. 그래서 제가 말끔히 아주 그냥 깔끔하게 다 죽여 버렸고, 이제 못난이는 내 노예가 되겠단 노예 계약 문서에 도장만 찍으면 돼요.”
낄낄 웃으며 장난스럽게 이야기 하는 민욱의 모습에 김관수 관장과 예린, 알렉세이 코치가 동시에 현성을 바라보았다. 최근에 좋지 않았던 표정이… 어렴풋이 그런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랬단 것은 느낌이 달랐다. 혹시라도 그 이야기를 꺼내서 주변에 피해를 주게 되면 어떻게 하나 노심초사 혼자서 그걸 끙끙 앓았던 요령 없는 그의 모습에 김관수 관장이 ‘말을 하지!’ 하고 그의 등판을 짝 소리 나게 때렸다.
“그러게요! 왜 그런 걸!”
예린까지 덩달아 짝 하고 등판을 때리자 현성이 아야 하고 움츠러 들었다.
“그래, 자식아! 말을 해야지! 말을!”
그리고 민욱이 덩달아 웃으며 주먹을 날리자 현성이 그의 주먹을 덥석 잡아내며 말했다.
“닌 안 대준다.”
그 말에 민욱이 푸핫 웃음을 터뜨리며 순간 정색하는 눈빛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계약 조항에 한 달에 100대씩 장현성은 이민욱에게 맞아줄 필요가 있다 적시 해놔야겠다.”
이내 민욱이 뭔가를 핸드폰으로 적기 시작하자 대체 이게 무슨 난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황당한 얼굴로 현성이 그를 바라보았다.
“뭐… 하는 건데?”
“계약서.”
스마트 폰 메모지에 써놓은 그 계약 내역에 현성이 어이가 없었던지 피식 웃음을 터뜨리자 민욱이 터치 펜을 꺼내며 말했다.
“사인해.”
정말로 진지한 그의 얼굴에 현성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무어라 이야기를 해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고마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보았을 때 그 재수 없는 녀석이 지금은 이렇게 든든한 친구가 되어 그에게 도움을 주었을 줄은 정말로 몰랐으니까.
“고맙다.”
“됐어. 이제 난 니네 커플한테 빚 진 거 없다. 그 섹시한 누나 뺨 때린 거 이제 더 이상 없는 거야.”
단순히 그를 돕기 위함이 아니라 혜주에 대한 미안한 기억 때문에 그랬던 것이라 민욱이 이야기 하자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당사자인 혜주가 결정할 문제이겠지만 그녀로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민욱을 용서하지 않을까?
“사실상 그때 턱 부러지고 빚은 다 청산한 건데 말이다.”
밀대로 구두자국을 청소한 깡패가 투덜거리며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씩 웃음 짓던 민욱이 말했다. 그 말에 현성이 움찔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야, 막 말로 뺨 한 번 때린 거 가지고 선수 생활 그만두고 턱 나갔으면 할 말 다 한 거지.”
그 말에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현성이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김관수 관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면 참 복잡하다 할 수밖에 없다만 묘하게 우정이 싹 튼 모양이다. 조만간 해결이 될 것이란 현성의 말은 이런 의미였던 모양이다.
“아무튼 계약서 읽어 보면 알겠지만 제일 중요한 사안 하나 있는데 그건 관장님이랑 같이 상의해 봐. 진짜는 이따 팩스로 보낼 거야.”
핸드폰으로 장난을 친 것이라 생각했지만 민욱의 얼굴은 제법 진지했다. 그 말에 현성이 핸드폰을 받아들고 얼떨떨한 얼굴을 하다 메모장에 적혀 있는 내용을 보고는 순간 ‘아…’ 하고 탄성을 내며 민욱을 돌아보았다.
“다음 시합 이후에… 로드원에서 넌 상대로 날 지목해야 하는 거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냐?”
정장 차림이지만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그가 체육관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낄낄 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 말에 현성이 3월, 그를 찾아왔던 민욱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예의 그 장난스러운 눈빛이 아니었다. 그때 한 번만 더 싸워보자 이야기를 했었던 진지한 눈빛이었다.
“민욱아, 이거는 우리가 결정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지금 현성이 그냥 신인 떨거지 아니잖아요? 이 못난이, 나 없는 사이에 세계 레벨로 올라섰고, 사회에서야 나 같은 놈이 왕이지 거기선 이런 놈이 왕이잖아요. 그러니까 안 되도 되게 해줘요. 그리고 나도 그때 아니면 시간 없어요.”
그 말에 현성과 김관수 관장이 무슨 일이 있나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걱정스러운 눈빛에 민욱이 괜히 또 어색하던지 ‘왜 이래요?’ 하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9월 달에 미국 가야돼요. 뉴욕 대학교에 합격했거든! 사실 프린스턴도 붙었는데 거긴 촌동네라서 가기 싫거든. 뉴욕이 좋잖아요? 아무튼 가면 뭐, 파티하고 공부 하고 그래야 할 테니까 이제 더 이상 이 짓도 할 여력이 없어서. 그러니까 진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붙어 보자… 이 말이죠.”
그건 파이터로써의 집념이었다. 현성에게 패배한 이후 잠정적으로 은퇴를 가졌던 민욱이 마지막으로 리매치를 신청한 것. 아마 말은 재미 삼아서 도움을 주었다 했겠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 진지한 눈빛에 현성이 김관수 관장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리 하고 싶다는 눈빛에 김관수 관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 대표랑 얘기는 해보께.”
“예, 바쁘신데 죄송해요. 그런데 진짜 존심은 지키고 가야죠. 갈 때 가더라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의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김관수 관장 역시 그 날 해설 위원으로 그들의 시합을 지켜보지 않았던가? 민욱이 그리 나온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본디 파이터는 결과로 수긍을 해야 한다만, 당시 민욱에겐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 더 잘 해낼 수 있었던 것을… 조금 더 오래 싸울 수 있었던 것을 그렇게 놓쳐버릴 줄은 몰랐을 테니까. 상대를 너무 쉽게 보았던 그 마음이, 진지하지 못했던 스스로에게 수긍 할 수 없다는 기분 말이다!
“관장님, 저도 꼭.”
그 진지한 모습에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의 싸움을 자신도 다시 해보고 싶다 마음먹는 동안 민욱이 이런 진지한 분위기가 싫었던지 기지개를 쭉 펴며 말했다.
“야, 밥이나 먹자! 칼 같이 온다고 배고파 죽겠는데. 계산은 돈 잘 버는 니가 해라!”
이제 진지할 시간은 모두 끝이 났다는 듯 그가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이야기 하자 현성이 피식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내 감량 중인데.”
그 말에 민욱이 쿨하게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니가 사. 쫄쫄 굶으면서 니 돈으로 내가 먹는 모습이나 지켜보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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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가이의 전유물 “어쩌라고?”
케인이 이겼네요.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일방적이라 재미는 좀 덜했지만 우왕 굳- 그래도 그만큼이나 맞고도 5라운드 내내 버틴 산토스 맷집도 ㅎㄷㄷ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