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회 - 괴물
개인 촬영은 막힘없이 진행이 되었지만 이후 사키와의 커플 촬영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도 그런 것이 현성이 스킨쉽에 너무나도 약해 어색해 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특히나 컨셉이 미녀와 야수라는 커플의 컨셉인지라 헐벗은 상태로 사키와 무척 친밀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보통 남자라면 일본 최고의 미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사키와의 이러한 촬영을 즐길런지도 몰랐지만 그는 엄연히 입장이 달랐다.
“자, 여기서 현성 선수가 사키짱을 안으면 돼요!”
“…예?”
그에게는 연인 혜주가 있었고, 사키와는 스캔들이 있다 보니 조심하지 않으면 곤란하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느낌을 현성만 느낀다면 모르겠지만 웨딩 커플처럼 팔짱을 낀 사진, 그리고 손을 마주 잡고서 바라보는 씬 등 함께 촬영을 하는 순간마다 사키 역시도 수줍어 한다는 기색이 전해져 왔다. 그러다 보니 이것이 연애 감정과는 별개의 문제일런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현성에게 밀려왔다.
아무리 그가 성공한 파이터라고 하더라도 이제 겨우 21살에 불과했고, 아직까지 인간관계에는 서투른 편이 아니던가? 그러다 보니 마지막 촬영 샷에서 상의를 탈의한 채 얇은 드레스 하나를 걸치고 있는 사키를 안으란 사진작가의 주문에 현성이 다소 난처한 얼굴을 하고 말았다.
“일이니까 사심 넣지 말구요, 장선수!”
그런 그를 보며 사진 작가가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잠깐 촬영이 멈춘 사이 농담처럼 이야기를 던지자 현성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그런 거는 아닌데요!”
190센티 근육질 몸에 ‘괴물’이라는 별명이 그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그의 수줍어 하는 모습에 스태프들이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사키 역시 통역사의 말에 다음 씬이 어떤 것인지 전해 듣고는 난처해하는 그의 반응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꺄르르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모두의 웃음 속에서 현성이 이런 생각을 하거나 설레는 자신이 이상한 게 아닌가 생각을 하며 잠깐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마, 현성이 니! 그 카면 혜주한테 다 이른데이!”
“진짜 아닌데요! 관장님!”
그런 그를 보며 김관수 관장이 낄낄 웃음과 함께 소리치자 현성이 더 크게 놀라 고개를 흔들었다. 겉으로 보기엔 전혀 그리 보이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보그의 막내 스태프보다도 나이가 어린 것이 현성인지라, 무뚝뚝하고 어른스러워 보이는 모습 뒤에 또 이런 일면이 있다보니 절로 웃음이 튀어 나왔다.
그러는 동안 현성이 6시간째 이어져 오고 있는 강행군과 이런 스포트라이트에 조금 지친 듯 한숨을 내쉬자 사키가 힐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간바레, 현성.”
“아, 예…!”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 보니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관계로 촬영 하는 내내 이야기를 나누기 힘든 두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그가 지치거나 힘들어 할 때 마다 사키는 아낌 없이 말을 건네 주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차분하고 깊이 있는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이다.
그 말과 함께 현성이 내친 김에 끝을 봐야 한다 마음을 먹은 듯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사키가 저도 모르게 살짝 웃음을 머금자 다시 왠지 모를 설렘이 밀려왔다. 혜주를 두고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참 이상하다 생각을 하며 그가 고개를 흔들어 애써 담담한 척 사키를 향해 돌아서자 사진 작가가 마지막 장면 촬영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준비 됐어요? 현성 선수!”
그 말에 현성이 힐끔 그녀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지친 기색이 섞인 얼굴에 사진 작가가 ‘힘내요!’ 하고 위로의 목소리를 내고는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자, 다정스럽게 바라봐요! 이 씬은 현성 선수가 많이 리드를 해줘야 돼요! 사키짱이 아니라 앞에 여자친구분이 있다고 생각하고 바라봐요!”
사진 작가가 사키와는 제법 친해진 듯 이상한 호칭으로 그녀를 부르자 현성이 무대 위에서 싸우는 일보다 이것이 더 힘든 것 같다 생각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지척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사키의 눈빛을 바라보며 눈을 마주쳤다.
확실히 낯가림은 있지만 실전에 강한 편이었던지 그렇게 난처해 하다가도 막상 마음을 먹으니 현성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심호흡을 하고 숨을 정리하며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무척이나 깊이가 있었다. 그러다 문득 현성이 처음으로 만났던 빠칭코 가게가 떠올랐던지 ‘빠칭코.’ 하고 이야기 하자 사키가 입가에 함박 웃음을 지었다.
“느낌 좋아요! 사키짱 계속 스마일!”
사진 작가가 뭔가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 필이 온 것인지 그리 소리치자 사키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그 감정에 취한 듯 미소 띤 얼굴로 현성을 바라보았다. 마치 사랑에 빠진 여자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는 듯 한 그녀의 모습은 순간 스태프들이 감탄을 터뜨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자, 이제 천천히 안아봐요! 현성 선수…! 부드럽게…!”
사진 작가의 지시 아래 현성이 조금 멈칫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이죠우부.”
그리고 그 날 그랬던 것처럼 그녀가 미소와 함께 속삭이자 현성 역시 웃음을 터뜨리며 천천히 손을 가져간다. 포옹이라기 보다는 사진 작가가 사전에 설명했던 것처럼… 그가 부드럽게 사키의 허리를 안자 사키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가느다란 허리에 닿은 단단한 두 팔은 익히 그녀가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도 보기가 힘든 모습이었다.
그 강인함이, 그리고 그 강인함 안 속에 있는 다정함이 필시 무너져 내려가던 그녀를 일으켜 세운 원동력이라 생각하며 사키가 터질 듯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현성을 바라보았다.
“다이죠우부.”
한 번 더 그 목소리가 들려오자 현성이 ‘좀 더! 좀 더!’ 하는 사진 작가의 흥분된 목소리를 따라 조금 더 가까이 사키를 안았다. 연기가 아니라 정말로 붉어진 얼굴을 하고서 그녀가 지금 이 순간… 이 짧은 찰나의 순간만큼은 그의 연인이 자신이기를 바라듯이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와…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았는데…”
많은 스타들이 화보를 촬영했고, 또한 이런 컨셉트를 가져갔지만 그야말로 완벽했다. 흡사 씬시티의 마초 캐릭터를 옮겨놓은 듯 강렬한 용모의 현성과 손만 대도 부서질 듯 가녀린 사키의 조합은 극과 극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잘 어울리는 듯 한 묘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지켜보는 사람들 만큼이나 당사자인 두 사람 역시 지금의 이 순간에 드는 느낌이 강렬했던 모양이다. 어느 샌가 마주친 두 눈은 더 이상 어색해 하거나, 수줍어 하지 않았다.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 있어도 더 가까이 닿길 원하는 서로를 갈구하는 연인과 같은 눈빛을 하고 있을 뿐!
“수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몇 차례의 플래시가 더 터지고 촬영이 끝이 났다. 거의 반나절에 걸쳐 진행된 보그 잡지의 미녀와 야수 촬영이 마무리 되자마자 현성이 지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훈련보다도 오히려 이런 촬영이 더 힘이 들었던지, 벗고 있는 상의를 걸칠 겨를도 없이 현성이 지친 얼굴을 하자 보그의 스태프 모두가 그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장현성 선수도 수고 하셨어요!”
“아, 예. 수고 하셨심다.”
촬영 전과는 다르게 호의 가득한 여자 스태프들의 인사에 현성이 어색한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 했다. 그 모습에 꺄르르 웃으며 여자 스태프들이 그에 대한 호의와 관심을 보였는데 어쩜 그것도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의 용모가 무척이나 험상궂고, 보통 사람과는 달라 보이긴 했지만 몸만큼은 눈 둘 데 없을 정도로 훌륭했으니까!
게다가 보이는 것과 달리 촬영 하는 내내 현성이 보여준 어수룩해 보이는 매력은 반전을 이끌어 내면서 남자의 가치는 단순히 외모로 평가를 내릴 수 없다는 것에 무게를 더했다. 거칠고 터프한 남자일 것 같단 생각과 달리 유난히 수줍음이 많아 보이는 모습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링 위에선 말 그대로 괴물 같이 강력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그 아래에 내려와서는 또 이렇게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여주니 보호받을 수 있다는 듬직함과 더불어 지켜주고 싶다는 모성 본능을 동시에 자극했다. 그 모습은 분명히 이성적으로 상대를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촬영 전만 하더라도 왜 오오츠카 사키와의 스캔들이 터졌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도 스캔들이 괜히 터진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분위기로 뒤바뀌고 있었다. 함께 촬영을 무사히 마친 사키가 그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별 것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관심이 한 몸에 쏠릴 지경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현성이 무어라 말을 하긴 해야 할 것 같지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힐끔 사키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사키가 고개를 돌리자 현성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수고하셨심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나도 많지만 그녀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 마음은 사키 역시 마찬가지였을까? 무엇인가 많이 아쉬운 듯 한 얼굴로 사키가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 하셨심다…?”
그리고 그녀가 그를 따라서 어눌한 발음으로 그리 이야기를 하자 순간 현성이 귀엽단 생각이 들었던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같이 촬영을 하면서 연인과 같은 모습을 연출해야 했기 때문에 스킨쉽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마지막 씬 같은 경우에는 혜주 이외엔 아영을 제외하고 그리 사람을 안아본 일이 없는 현성이 온 힘을 다해서 사키를 끌어안아야 했으니까.
그 여운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기분이 묘한 것을 느끼며 현성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그를 보며 사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저 그를 바라만 보아도 기분이 좋은 듯 한 그녀의 눈빛은 정말로 오묘했다. 왠지 모르게 그 눈빛에서 혜주가 자신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감정들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현성이 잠깐 머뭇거리며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토데 즛또 미루요.”
그의 상황을 알기 때문일까? 한국까지 촬영차 왔지만… 결코 그 이상으로 다가서지 못하는 사키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말에 현성이 무슨 말인지 도통 알지 못하겠다는 듯 움찔하며 김관수 관장을 돌아보았다. 내내 촬영 현장에서 함께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감시역을 자청했던 그가 어느 샌가 현성의 곁에 서서 사키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또 보잔다.”
“아! 예!”
그 말에 현성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사키가 후후 웃으며 아쉬운 얼굴로 뒤돌아 섰다. 가족들을 위해서 여지껏 희생해온 만큼 그녀는 참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정말로 참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분명히 여자가 있고,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생각 같아선 정말로 이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떠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리 하는 수밖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있고, 그 시선들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면 정말로 힘들어 지는 것은 자신보다도 오히려 현성과 그가 사랑하는 혜주란 여자일 것이란 것을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보장되지도 않는 행복을 위해서 두 사람까지 힘들게 할 필요는 없었다. 결국 스미레의 말대로 이건 그래선 안 되는 마음일 테지만… 결국 또 그러고 마는 여자가 바로 자신이었다. 그 생각에 사키가 무어라 말 하기 힘든, 아름답지만 결코 환하지만 않은 다크 초콜릿 같은 웃음을 남긴 채 통역사들과 에이벡스 스태프들을 대동하여 먼저 자리를 떠났다.
왠지 모르게 마음에 찡 하고 울림 같은 여운이 남는 것을 느끼던 현성도 그 말끔한 뒷모습에 왠지 모르게 서글픈 맘을 느끼며 웃음 짓고 말았다.
“닌 여복 많은 거 같데이, 현성아.”
김관수 관장이 사키 또한 혜주 못지 않게 좋은 여자란 생각이 들었던지 웃음과 함께 그리 이야기 하자 현성이 잘 모르겠다는 듯 대답 대신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진짜 좋은 사람인 거 같긴 하네예. 잘 됐으면 좋겠심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그리고 다시 재기에 성공했으면 하는 맘 그대로 현성이 이야기 하자 김관수 관장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될 끼다. 저런 눈 한 아들은 꼭 잘 된다. 걱정 말그라. 참, 우리도 그 사이에 또 연락 왔데이. 로드원 시합 말이다. 다음 상대!”
============================ 작품 후기 ============================
이제 또 슬슬 다시 3권 분량 시작해야 할 것 같네요. 예전과 같은 열의를 되찾고 싶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