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126화 (126/281)

- 126 회 - 괴물

12월 31일은 끝과 시작이 마주 닿아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 올 해가 끝이 나는 동시에 새 해를 맞이하는 최전방! 그 순간에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들은 어떠한 것들인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쉬움을 느낄 것이다. 연초에 했던 결심들은 인어 공주의 거품처럼 흩어져 버린지 오래이고, 별로 나아진 것 없는 자신의 모습에 체념과 비슷한 한숨을 내쉬며 그래도 내년은 다르기를 바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현성 역시도 이전에는 마찬가지였다. 한 해, 한 해 시간은 지나가지만 상황은 나아질 겨를이 없었다. 살아간다는 자체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고, 대부분 그가 느꼈던 감정은 고통과 괴로움이었으니까. 제발 더 나빠지지만 않기를 바라던 것이 불과 일 년 전!

“후우.”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정말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더 이상 나빠지지 않았으면 하던 마음은 이제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그 높은 곳은 좌절과 절망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던 그의 과거를 모두 지워주고 있었으니까.

-쿵!

3만 여명이 넘는 팬들이 들어 찬 도쿄돔은 말 그대로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이내 다이너마이트 축제를 알리는 북 소리와 함께 점점 더 고조되는 기대감이 웅성임을 만들어 냈다. 그 웅성임은 마치 벌떼들이 날개 짓을 하는 소리 같았다.

-쿵!

다시 한 번 더 대북 소리가 울렸다. 순간 웅성임도 잠깐 멈추고 도쿄돔 링 중앙에 비치된 대북 앞으로 정도관 도복을 입은 가라데 선수들이 줄을 지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다이너마이트 개막을 알리는 전통적인 개막 행사로써 정도관의 대련과 격파를 올해도 여지없이 보여줄 모양으로 말이다.

-쿵! 쿵! 쿵!

그리고 점차 북소리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와 함께 날개 짓 하는 새처럼 넓게 자리를 잡은 정도관의 선수들이 동시에 자세를 잡으며 ‘어이!’ 하고 기합을 내질렀다. 도쿄돔을 가득 채운 그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지 순간 관중석의 웅성임도 멈추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대북 소리가 빠르게 울리고, 그 속에서 정도관 선수들이 일사분란하게 동작을 잡고 정권을 내리 질렀다.

“어이!”

기백 넘치는 그 모습에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동안 백 스테이지 대기실에서 모니터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성 역시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무어라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3만여명이 넘게 들어온 저 자리에 선다는 자체가 대단하다고 밖엔 생각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해야 할 것, 보여줄 모습들은 다르다 하더라도 말이다.

“많이 긴장되나, 현성아?”

이제는 3전. 아직 그렇게 많은 전적은 아니라지만 초보 티를 벗기 시작한 현성이었기에 긴장하는 모습은 데뷔전 이후로 꽤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김관수 관장이 물음을 던지자 현성이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 거짓말은 못 하겠다 싶었던지 이내 다시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김관수 관장이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심장 터질 거 같아가 죽겠다!”

이 정도로 큰 무대에 선수를 내세운 것은 그로써도 처음이었다. 물론 코리안 탑 팀에 있을 때에 더러 이런 국제무대로 진출한 팀 동료들을 가지기도 했지만 K-1의 연말축제만큼 거대한 행사에 참가한 일은 거의 없다 해도 무방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제자가 아닌가? 기철과 예린 다음으로 김관수 관장이 자신의 품에 품은 제자! 애정이야 차등이 있는 게 아니지만 다른 누구보다도 마음이 더 가는 제자 말이다.

그래서일까? 자신도 긴장했다 말 하는 그의 모습에 오히려 현성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무어라 이야기를 해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김관수 관장도 그렇단 얘길 들으니 자기가 이상한 게 아니었단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와 이래 긴장 되는지 모르겠네예.”

“당연한 거지! 상대가 세계 탑 레벨 선수고, 여는 일본서 제일 큰 경기장인데!”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분한 자리. 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그렇기 때문에 현성의 인생 그 어느 순간보다도 큰 기회. 그게 바로 지금 이 자리였다. 오오츠카 사키의 인터뷰나 서포트 하고 싶은 선수로 그를 지목한 것 덕분에 인지도는 어느 정도 얻어낼 수 있었지만 그게 모든 상황을 뒤집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파이터는 스스로 해내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도와주고, 강해질 수 있도록 뒤를 받쳐 줄 수 있다 해도 결국 최후에는 그 자신이 모든 것을 해내야만 했다.

“이상할 거 없는 거 맞으면 됐심다.”

그랬기 때문일까? 지금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있는 것이 정말로 이상하지 않은 일이며, 또한 금방이라도 달려 나가 밴너와 붙고 싶단 생각을 하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라 생각하며 현성이 그 전율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쿵! 쿵! 쿵!

모니터 너머로 들려오는 대북 소리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며, 별 다른 몸 풀기를 하지 않아도 점차 몸이 예열되는 것만 같았다. 너무나도 큰 기회이고, 자리였다.

그리고 그것과 또 별개로 혜주와 예린, 심지어 아영까지 오지 않았던가? 왜인지는 몰라도 그를 통해서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단 사키나 부상에도 불구하고 아낌없이 그를 도와주었던 류이치를 비롯한 극진회관 식구들까지.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은 자리였다.

“후우.”

바로 그 사실이 지금의 현성으로 하여금 자꾸만 초조하도록 만드는 것일 것이다.

“어이!”

그 사이에 정도관 선수들의 시연식이 끝이 나고 극진 고수의 배트 격파 식 까지도 끝이 났다. 곧 무대 중앙으로 나온 이시이 관장과 다이너마이트 걸로 해설과 진행을 서브 할 오오츠카 사키가 중앙 특설 링으로 올라오자 사람들의 환호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현성이 여지껏 들어왔던 어떤 함성보다 거대했는데, 실질적인 관중 수 차이가 20배가 넘게 차이가 날 정도였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K-1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마이크를 쥔 이시이 관장이 외침에 사람들이 ‘와아아아!’ 하고 도쿄돔이 떠내려 갈 것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최근 떨어져 가고 있던 K-1의 위상을 생각해 보았을 때 참으로 놀라운 반응이었다. 물론 이 시합이 피터 아츠를 필두로 K-1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레전드들이 대거 은퇴하는 시합이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일는지 몰랐다.

“결코 축제는 끝이 나지 않습니다!”

더 이상 K-1에 그들만큼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선수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무어라 해야 할까? 보내기 싫은 오래된 친구 같은 것. 다소 연락이 끊어져 관심 없이 지내다가도 막상 떠난다니 서운한 오래된 친구 같은 그런 기분이었던 모양이다. 도쿄돔을 찾은 수많은 팬들이 그 소리에 환호성을 보내는 동안 이시이 관장이 울컥하고 뭔가가 올라온 듯 사람들을 향해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그 모습에 감동한 사람들의 함성이 다시 한 번 더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키를 향해 마이크를 넘겨주자 사키가 단독 공연으로 몇 번이나 올라온 자리지만 역시나 이 정도 규모의 자리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지 한껏 상기된 얼굴을 하고 미소 지어 보였다.

베테랑 다운 여유 있는 미소가 대형 스크린에 비추자 아까와 다른 사람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사키! 사키! 하고 그녀의 이름을 외치는 도쿄돔 관중들의 함성은 이것이 K-1의 이벤트인지, 오오츠카 사키의 콘서트인지를 헷갈리게 만들 정도였다.

대기실에서 그 모습을 모니터로 바라보는 현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저렇게 유명한 사람과 그리 만났던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혜주가 알고 있을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유명했던 것일까?

아마 관중석에서 예린, 아영을 데리고 함께 기다리고 있을 혜주가 왕년에는 팬이었다고 했으니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가 웃음 지었다.

“힘들다고 계속 쓰러져 있으면 곤란해요! 다시 일어서는 것! 진심으로 응원 합니다!”

K-1도, 오오츠카 사키도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녀의 외침에 사람들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 환호 속에서 현성이 왠지 모를 공감! 동류라는 느낌을 가졌던 사키의 말을 김관수 관장을 통해서 전해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사키도, K-1도 다시 한 번 일어나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이시이 관장이 그에게 기회를 주었고, 사키 역시 응원을 해준 만큼 그 성원에 보답을 해야 한다 생각하며 현성이 천천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곧 사키가 이시이 관장에게 다시 마이크를 넘기자 마이크를 잡은 이시이 관장이 본격적인 축제의 시작을 알렸다.

“지금부터 K-1 다이너마이트, 축제를 시작하겠습니다!”

화려한 축제의 서막이 올랐다. 그 외침과 함께 사람들이 전보다 더 큰 환호를 내질렀다. 그 사람 많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현성의 모습을 볼 것이라 꾹 참고 있던 아영도 덩달아 와와 하고 소리를 지르자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던 혜주 역시 갑갑한 맘을 다 씻어버릴 것이라 함께 소리를 내질렀다.

이제 곧 본격적으로 게임이 시작되면 현성이 바로 그 가장 화려한 오프닝을 열게 될 테니까!

“제발 이겨라! 장현성!”

주변 사람들의 함성에 묻혀서, 그리고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그 외침을 온 힘을 다해서 내지르며 혜주가 현성의 승리를 기원했다. 그 동안 특설 링에서 중계석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사키 역시 백 스테이지가 있는 대형 스크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의 승리를 기원했다.

“꼭 이기기를.”

그는 이미 여자가 있고, 팬 이상은 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사람을 향한 맘만큼은 지고 싶지 않다 생각하며 사키가 미소 지었다. 곧 그녀가 중계석에 자리를 잡는 동안 무대로 올라간 진행자가 마이크를 꺼내 들었다.

“굿바이, 레전드.”

그 목소리가 도쿄돔을 울리자 ‘아…!’ 하고 순간 안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신조류!”

그리고 그가 상당히 임팩트 있는 목소리로 다시 소리쳤다. 그 탄성을 끊어버린 진행자의 외침에 사람들이 다시 기대를 걸어보겠다는 듯 ‘와아!’ 하고 작은 함성을 터뜨렸다. 아직까지도 K-1에 거는 기대는 새로운 선수들이 아닌 기존의 레전드에게 있는 것이란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게 지금까지 K-1을 존재하게 한 힘이자 원동력이겠지만 더 이상 그것에 머물러서는 곤란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토록 자극적인 타이틀을 걸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이대로 망하나, 뭔가 시도 하다 망하다 망하는 것은 매 한가지가 아니던가?

결국 세대교체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더욱 더 비장한 음성으로 진행자가 소리쳤다.

“새로운 물길이 K-1에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레전드들을 마중하기 위한 신예들이 그 자리를 대신 하고자, 사나이들이 마지막 인사를 나눕니다!”

아츠와 밴너의 은퇴는 사실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미 두 사람의 나이가 40 중반을 넘긴지 오래였고, 더 이상은 현역 선수로 활동하는 일이 버거운 상황이었으니까. 그것은 아마 당사자들과 관계자들 뿐 아니라 팬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몇 해 전부터 제롬 르 밴너가 입식 룰이 아닌 프로레슬링 룰로 시합을 가지기도 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는 것은 그들 뿐 아니라 팬들에게도 가슴 아픈 일이 되었을 테니까. 보내는 자리이니만큼 그 마지막은 더욱 빛이 나길 바라듯이, 새로운 것을 환영하기 보다는 바꾸기 위한 선택! 그리고 기꺼이 그것을 위해서 자리를 빛내준 선수들을 향한 환호가 울려 퍼졌다.

길게 울리는 그 환호 속에서 진행자가 마이크를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제 1 시합! 축제의 서막을 열 가장 뜨거운 시합입니다! KO 밖에 모르는 신구 선수의 격돌! 하이퍼 배틀 사이보그 제롬 르 밴너 대 한국의 괴물 장현성!”

가장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점화(點火) 할 필요가 있었다. 이 축제의 시작을 열, 가장 강렬한 매치를 열기 위해서! 진행자의 외침과 동시에 사람들이 오오츠카 사키와의 스캔들로 반짝 유명세를 얻은 현성과, K-1 팬들이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는 밴너의 등장에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거의 일방적으로 밴너의 이름을 외치는 모습이 마치 적지로 원정을 온 어웨이 팀 같은 느낌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겸허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지금껏 쌓아올린 커리어의 차이가 아니던가? 어느 샌가 대기실에서 무대 뒤로 나와 대기하고 있던 현성이 그 환호 속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너무 신경 쓰지 마레이!”

“잘 할 수 있다, 현성아!”

김관수 관장과 기철의 목소리에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거니까. 안 흔들립니다.”

이내 그가 고개를 돌리며 씩 웃음 지었다. 여전히 얼굴에는 긴장과 흥분이 가득했다. 하지만 묘하게 안정되어 보이는 그 모습에 김관수 관장과 기철, 알렉세이 코치, 그리고 류이치까지 현성의 등에 손을 올리고 한 마음으로 그가 앞으로 나아가길 소리쳤다.

“가자! 밴너한테 작별 인사 해주러!”

물이 끓는점 100도에 도달한 것처럼 점차 주변이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마치 영화 속 다른 세계가 문이 열릴 때처럼 주변이 울렁거리는 듯 한 기분을 느끼며 현성이 깊이 숨을 들이켰다.

이제 곧 시작이었다. 지난해와 다르게 이번 해에는 더 높은 곳, 더 먼 곳으로 날아가는 꿈을 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더 나빠지길 두려워 하는 기색조차 없이, 더 나빠진다 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현성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장내가 팔팔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사회자가 박력 있게 소리쳤다!

“먼저 입장합니다! 오오츠카 사키의 남자! 동방의 최종병기! 괴물 장현성!”

============================ 작품 후기 ============================

어제 환영 회식이 급 열려서 월요일 부터 달렸네요 ㅋ 집에 들어오니 12시 넘었고- 어떻게든 써야지 했는데 다음 날 아침 7시까진 일어나야 해서 뻗어버렸습니다 ㅋ

거의 소주 3병 넘게 마신 것 같습니다. ㅋ 다 마시고 나서 내가 왜 이렇게 달렸지? 미쳤나봐 했어요 ㅋㅋ

몇 가지 소식을 전하자면 네, 여러분. 여러분들의 성원대로 소개팅 나가리… 회식 아니고 주선자가 바빠서… 그래도 반응은 긍정적이었어요. 헤헤헤헤헤 크리스마스 전에는 만날 예정입니다.

근데 한꺼번에 여러가지를 하고 있으니까 정말 정신도 없고, 시간적으로 벅차단 기분이 많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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