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회 - 괴물
제롬 르 밴너! 한때 KO 승률이 80퍼센트를 넘었던 무관의 제왕! 그 정도의 네임벨류를 가진 상대를 대적한다는 자체가 점점 더 큰 부담이 되고 있었다. 특히나 기본적인 전략의 방식이 로 킥을 내세워 상대의 다리를 마비시키고 요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경기 장면을 보기만 해도 위협적인 상대와 맞불을 놓는 것으로 변한 것이 더욱 더 부담감을 크게 만들었다.
물론 그간의 전적을 살펴본다면 겐지 사범의 지적은 전혀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생각에 김관수 관장이 동의한 것 역시.
“후우…”
문제는 현성이 그 거대한 덩치를 가진 오리지날 헤비급을 침몰 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극진회관에 있는 많은 고중량 선수들과의 스파링에서 그들을 쓰러뜨릴 수 있는 파괴력을 선보이고 있었지만 상대는 제롬 르 밴너였다.
“…와 이래 쫄리노.”
평소 그렇게 걱정을 해본 일이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특별했다. 마치 민욱과 시합을 하기 직전 느꼈던 그 고민들과 두려움들이 스멀스멀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물론 패배한다 하더라도 현성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들이 생겨나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로 두려운 것이 있다면 맞불을 놓다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밴너의 펀치에 쓰러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지난 3전을 훌륭하게 마친 바… 뭔가를 무대 위에서 항상 보여줘야만 한다는 압박감 말이다. 이제 겨우 시작한지 일년이 다 되어 가는 주제에 너무 오버 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보기도 하지만 그게 그가 보여야 할 모습이었다. 아니, 본질적으론 승리…!
“후우…”
여지껏 현성은 살면서 남에게 그렇게 세게 맞아본 일이 없었다. 가장 많이 맞아본 때라면 민욱과의 싸움 정도가 아닐까? 이번 상대는 그 민욱보다도 더 타격 기술이 훌륭하고 어마어마한 커리어를 가진 상대였다. 결정적으로 현성보다도 더 덩치가 큰…
‘이길 수 있을까?’
저도 모르게 자꾸만 나약해지는 자신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제는 자리를 잡아가며 안정을 이뤄가기 시작한 것이 어쩜 그의 모티베이션을 빼앗아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상대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지레 겁을 먹은 것은 아닐까? 아니, 설령 진다고 하더라도 못난 모습은 보이지 말자.
“아이다. 절대 이긴다.”
지는 것을 벌써 생각하고 있나? 멍청하게? 그 생각을 다잡으며 현성이 다시 한 번 달리기 시작했다. 과거 증량을 하던 시절에는 딱히 런닝을 할 필요가 없었지만 계약체중인 86킬로를 넘기고 나서부터는 필수 코스가 되었다. 그리고 런닝을 하면서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현성에겐 가장 행복한 평소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도쿄라는 생소한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길. 제롬 르 밴너라는 상대의 매서운 주먹을 파고 들어 카운터를 먹이는 것…! 조금 두렵긴 하더라도 그것이 김관수 관장이 요구하는 승리의 플랜이라면 그것을 반드시 실행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은 것만은 아니다. 밴너가 그보다 20킬로 이상 무거운 중량을 보이겠지만 리치는 현성 쪽이 더 길다. 원래 전성기 때에도 턱이 약하단 평을 받았던 밴너이니 전성기가 한참 지난 지금에는 더 큰 데미지를 입을지 모른다. 그 매서운 펀치를 뚫고 들어갈 수만 있다면 말이다.
아마 한 대도 맞지 않고… 야마다 류이치나 영찬에게 그랬던 것 처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헤비급이란 체중 자체가 기본적으로 한방에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는 파괴력이 있는 체급!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 하더라도 밴너는 여전히 그 한방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른 누누구보다도 강력한…!
그걸 이겨내기 위해서는 더욱 더 열심히 해내야만 한다 생각하며 달리던 현성이 예의 그 빠칭코 가게 앞까지 당도하곤 다시 걸음을 멈춘다. 딱 중간의 반환지점인지라 매번 오고 있지만 그때마다 여전히 빠칭코 가게 안에 멍한 여자가 보였다. 물론 그 이후로 그가 빤히 가게 안을 들여다보거나 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다시 얼굴을 볼 일은 없었지만 가끔씩 이곳에서 멈춰 서서 잠깐 쉬고 있자면 가게 안으로 여자가 자신을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백순가…?”
현성도 그게 상당히 궁금했던 모양이다. 매번 같은 차림, 같은 모자를 입고 있는 여자는 담배를 들고 있었는데 담배를 피우기 보다는 그저 입에 물고 있거나 들고 있거나 하는 것 같았다. 멍하니 빠칭코 머신만을 바라볼 뿐.
과거 혜주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 모습에 혹시라도 그녀처럼 술집에서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그런 일을 한다면 이 시간에 매번 빠칭코 머신 앞에 앉아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잠을 자야만 할 테니까. 그 날 눈이 마주쳤던 이래로 시선이 가는 그 모습을 오늘도 어김없이 힐끔 바라보던 현성이 또 때마침 눈이 마주치자 다시 움찔한다.
그 모습에 멍한 얼굴을 하던 여자 사키가 살짝 미소 띤 채 고개를 까닥이자 현성이 얼떨떨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꾸벅 숙인다. 그러다 그녀가 그의 얼굴에 난 화상을 보고는 손가락으로 눈가를 가리키자 현성이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꾸벅 인사 한다. 창을 사이에 두고 있는터라 무어라 이야길 하기도 그렇고, 설령 이야기를 한다 하더라도 일본인이니 알아들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 모습에 사키가 후후 웃음 짓다가 저 사람은 매번 저렇게 지치지도 않고 이 시간에 여길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니 운동선수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 듯 다시 그를 바라본다.
화장기 전혀 없는 수수한 얼굴에 여우처럼 가느다란 선이 무척이나 곱게 보였다. 얼마 전 수술을 마치고 조금 여윈 혜주의 모습을 보는 듯 앙상해 보이는 모습에 슬픔 가득한 눈망울은 알게 모르게… 묘하게 현성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이성적이라기보다는…
‘동류(同流)’라는 느낌 말이다.
잠깐 눈이 마주친 사키를 바라보며 현성이 왜 그렇게 슬픈 눈을 하고 있는지… 마치 소년원에 있을 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지 천천히 창가로 걸음을 옮긴다. 무척이나 큰 키에 제법 험상궂은 얼굴을 한 남자가 섰음에도 불구하고 유리창 너머의 사키는 별로 겁을 먹거나 물러서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하고 운동만 하는, 은근히 귀여워 보이는 덩치 큰 남자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일 뿐.
“기운내요.”
그리고 현성이 일어는 당최 할 수가 없지만 뭔가는 전하고 싶은 듯 그녀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꺼낸다. 그 입모양에 사키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는 동안 현성이 ‘음…’ 하고 생각하다 힘을 내라는 듯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다.
“아…”
그 모습에 사키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이내 현성이 조금 창피한 듯 미소와 함께 머리를 긁적인다. 12살에 데뷔를 했고, 그때부터 18살 때 까지 무려 6년이란 세월을 탑 아이돌로 살아온 사키가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무척이나 수수해 보이는 모습. 왠지 모르게 그게 그녀가 어릴 적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단 생각이 들자 사키가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바라본다.
“가, 갑자기 와 울라 카노…”
금방 또 당황한 듯 창 너머의 현성이 움찔하며 그녀를 바라본다. 안절부절 못하는 그 모습에 사키가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눈으론 눈물이 자꾸만 흐르는 모양인지 괜찮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눈가를 슥슥 닦는다.
그런 그녀를 보며 현성이 괜히 안절부절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하자 이내 사키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괜찮아요.”
창가로 이야기하는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그거 어찌 할 바를 모르자 이내 사키가 눈물을 훔치고는 하아 하고 창가에 입김을 분다.
-だいじょうぶ(다이죠우부)
뽀득뽀득 소리와 함께 그녀가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지만 여전히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보지 못한 현성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 글씨만 바라보자 사키가 같은 일본 사람이 아니라 외국인이란 생각이 들었던지 ‘아…’ 하고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른 곳에 하아 하고 입김을 불고는 마치 이것이 그녀에겐 12살 이후로 존재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을 돌이키는 것 같다 생각하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I am OK.
이게 맞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대도 알아듣지 않을까? 그 표현에 현성이 OK… 하고 중얼거리며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사키가 웃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그가 한결 밝아진 얼굴의 그녀를 보며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던지 이내 시계를 힐끔 보고는 꾸벅 인사를 한다.
이제 다시 극진회관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그 인사에 사키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인사하는 동안 현성이 살짝 미소와 함께 다시 한 번 더 힘내라는 듯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곤 다시 길을 되돌아 달리기 시작한다. 달려가는 그를 바라보며 또 다시 홀로 남은 사키가 아직도 입김과 그 자국이 남아 있는 창가를 힐끔 바라보곤 살짝 미소 띤 채로 빠칭코머신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 놀란 표정이 눈가에 선한데 비해서 아무런 말도, 표정도 짓지 못하는 빠칭코 머신. 또 다시 여기서 얼마나 시간을 보내면 좋을까…? 이젠 이것도 싫증이 난다는 듯 사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격투기 선수…?”
창 밖의 그 남자는 운동선수일 것이고 아마도… 복싱이나 격투기 선수가 아닐까? 그리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모양이다. 그렇게 큰 덩치를 하고도 몇 번이나 놀라는 모습이 귀엽지 않은가…?
“아주 겁 많고 약한 선수일 거야…”
그녀를 바라보는 무척이나 따뜻하고 다정했던 눈빛. 그것을 떠올려 보면 격투기 선수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일런지도 몰랐다. 왠지 모를 호기심이 자꾸만 생겨나는 것을 느끼며 사키가 평소보다 훨씬 더 일찍 빠칭코 가게를 나서는 동안…
잠깐 사키와 창을 사이에 두고 대화 아닌 대화를 나눴던 현성 역시 오늘의 경험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대화 상대나 친구가 없던 터라 이 신기한 인연이 그로써도 꽤 즐거웠던 모양이다. 물론 갑자기 사키가 울음을 터뜨린 것은 조금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괜찮다 대답도 했으니… 나중에는 웃기까지 했으니 잘한 일은 아닐까?
“…이거는 바람 같은 거 아이지.”
그리고 그가 혹시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물론 혜주가 본다면 쉽게 넘어가진 않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질투심 많은 여자친구를 생각하며 현성이 미소와 함께 극진회관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여자만큼이나 자신도 기운을 내야만 했다.
오늘부터는 극진 가라데 소속 선수들 가운데 100킬로가 넘는 헤비급 선수들과 함께 지독스러운 스파링을 이어갈 예정이니 말이다.
사실 극진에서 내놓으라 하는 강자들을 모두 쓰러뜨린 밴너이다 보니 극진에서 훈련을 하는 게 어쩜 안 좋을 수 있지 않겠냐는 지적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안면 타격에는 취약한 것이 극진이었으니… 아무래도 프로 복싱 경력까지 가진 밴너 전을 대비하기엔 어려운 장소인지도 몰랐다. 그만큼 상대에 맞춰서 트레이닝을 하지 못하고 있다 보니 불안한 감이 있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불안한 만큼의 스릴감이 현성의 가슴을 더욱 더 세차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나 역경에 강했고, 무서울 정도로 휘몰아치는 역경 속에서 더욱 더 굳건하게, 강하게 뿌리를 내렸던 사람이었으니까. 이번에 불어올 서풍은 어떤 때보다 매섭겠지만 그 바람을 가르고 반드시 밴너를 쓰러뜨리겠다 다짐하며 현성이 극진회관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정말 의외의 상대였다.
“곤니찌와!”
시원스러운 목소리가 인사를 건네자 현성이 순간 눈을 크고 상대를 바라본다.
“야마다 류이치…?”
============================ 작품 후기 ============================
걱정 마세요 여러분.
출판으로 인한 잠수는 그리 길지 않을 거에요.
일요일 하루 동안 4만자를 썼습니다. (약 70키바-7연참 분량-15만자가 1권 분량) 이번주가 면접도 있고 소개팅도 있고 일정이 바쁘다 보니 미리미리 해두는 셈인지라 막 그렇게 엄청 어렵거나 힘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노블보다 출간은 날짜와 분량이 걸려 있고, 계약금을 받았으니 우선시 하는 것도 있고
(사실 노블은 만년대리, 착하게 살자 2작품만 계약 했는데 일단 두 작품이 완결 상태입니다. 실질적으로 계약으로 묶인 작품은 이 두 편 말곤 더 없습니다. )
전반적으로 연재에선 현재형 서술을 사용하지만 출판본은 현재형보다 과거형으로 서술하려고 하다 보니 좀 버벅 거리는 부분도 적잖습니다.
물론 퀄리티 측면에서 다른 것들과 차별화를 두면서도 재미를 주려고 하다보니 좀 힘이 많이 들어간 감도 있는 것 같아요. 가벼운 일상물이자 대리만족물인 동시에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같은 메세지도 넣고 싶어서 많이 집중 했습니다.잘 될지 모르겠지만 좀 다듬어 봐야 할 것 같아요.
맘에 드는 소재 찾는다고 며칠 동안 생각만 하다 막 시작했는데 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많이 나쁜 것 같진 않아요. 조금 더 확실히 사로잡을 수 있는 요소들이 필요하겠지만 아직까지 11만자가 남아 있으니까 그 분량으로 충당할 수 있다면요.
혹시나 빠꾸 먹고 수정하거나 새로운 스토리를 써야 된다면 시간이 좀 걸리기야 하겠지만-
너무 시간에 쪼들리거나 하지 않는다면 노블도 최소한 하루 한편씩은 올라가지 않겠나 싶습니다. 보고 싶다, 기다리고 있다 티 좀 내주시면요ㅋㅋ
보다 보니까 얼척 없는 이야기를 들어서 ㅋㅋ 물론 너무 얼척이 없어서 삭제를 하긴 했습니당. 대답할 가치도 없으니까.
근데 아예 접겠다, 삭제하겠단 것도 아니고 잠깐 잠수 탈 수도 있다 이야기 한 걸 가지고 독자를 우롱했네, 무시했네, 우습게 보네- 사과 하라 이야기 하는 사람은… 와… 제 상식으론 커버가 안 되네요. ㅋㅋ
양해 구하고자 미리 이야기 하는 걸 이렇게 받아들이다니 다른 분들이 왜 말 없이 잠수 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ㅋ
상식적으로 계약금 받았고, 날짜와 분량 까지 정해져 있으면 따로 계약으로 묶이지 않은 일보다 우선 순위로 처리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ㅋㅋ
진짜 세상 넓고 사람 참 다양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별로 가까이 지내고 싶진 않네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