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회 - 괴물
“후우…”
장소가 바뀐다 한들 일상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어디를 가던지 생업의 현장은 경기장이었고, 그 한 순간을 위해서 매 순간 스스로를 한계점까지 몰아붙이지 않으면 곤란한 것이 파이터의 삶이었다.
“후우…”
일본 도쿄. 12월 31일 도쿄돔에서 열릴 다이너마이트 축제를 대비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온 현성이 김관수 관장과 함께 극진회관에 신세를 지며 트레이닝을 시작한 것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예린과 기철, 알렉세이 코치, 혜주… 그리고 아영의 배웅까지 받으며 도착한 일본은 이번이 두 번째. 전에는 기철의 시합을 보고 응원을 더하기 위해서였다면 이번에는 무척이나 큰 시합을 앞두고 온 일인지라 긴장을 하기도 했지만, 장소만 바뀌었을 뿐 평소와 다를 바 없단 생각에 빠르게 적응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후…”
가볍게 숨을 내뱉으며 현성이 감량을 할 필요 없이 컨디션만 유지를 하면 된다는 다소 편안한 조건으로 도쿄 시내 한 복판을 달린다. 현재 92킬로의 체중에서 더 이상 증량을 해선 오히려 몸에 무리가 올 뿐 아니라 효율도 떨어질 것이란 김관수 관장의 생각에 체중을 유지하고 전반적으로 스파링 위주로 훈련을 진행하기 위해서 가벼운 러닝은 몸을 풀어주기론 필수 코스였다.
물론 운동복 차림을 한 거대한 덩치가 도쿄 시내 한 복판을 달리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충분했다. 과거처럼 사람들의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을 했다면 무척이나 힘이 들수도 있었겠지만 계약을 마치고 밴너에 대한 집중력을 끌어 올리고 있는 현성에게 그런 것들은 크게 신경이 쓰지 않는 모양이다.
왜냐하면 그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12월 31일 제롬 르 밴너라고 하는 K-1의 레전드를 상대로 시합을 가지는 일밖에 없었으니까.
“후우…!”
물론 객지에서의 훈련이 그렇게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한참을 달리던 현성이 잠깐 걸음을 멈추고 힐끔 주변을 돌아본다. 아무래도 길이 익숙하지 않다 보니 전처럼 생각 없이 달리다간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극진회관 건물과 반 정도 떨어진 길을 달려 왔다 다시 돌아가는 방법을 선택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열심히 달려오던 길을 다시 거꾸로 돌아가려니 조금은 우스웠던 모양이다.
그런 탓인지 반환점인 빠칭코 가게 앞에 멈춰선 현성이 조금 어색한 얼굴로 몸을 쭉 펴며 슬쩍 뒤돌아 선다. 일주일이나 이 근처를 달리다 보니 매번 이 시간이 되면 나타나는 그를 얼핏 알아보는 가게 주인들도 보이곤 했는데 그럴 때 마다 밀려오는 이 어색한 기분은 감출 수가 없었다.
물론 말이라도 통한다면 모를까… 이곳에서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김관수 관장이 유일하다. 물론 트레이닝에 전적으로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현성이다 보니 그렇게 대화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란 것이 그런 것일까? 조금은 그 사실이 갑갑하다 생각하며 몸을 풀던 현성이 힐끔 빠칭코 가게 안을 바라본다. 투명한 유리 사이로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빠칭코 기계들이 즐비하게 드러섰다.
“…이기 뭐 하는 거고.”
성인 오락실이란 걸 지나다니며 보긴 봤지만 어떻게 하는 것인지는 도통 알지도 못하고 흥미도 없는 현성에게 이런 가게들이 참으로 즐비한, 그리고 이런 이른 시간에도 가게 안에 더러 빠칭코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단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잠깐 운동을 멈추고 빠칭코 가게 안을 바라보던 그가 신기한 듯 기계를 쳐다보는 동안…
-드르륵…
자그마한 쇠구슬들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힐끔 현성이 가게 안을 들여다 보자 모자를 푹 눌러쓴 여리여리한 체구의 여자가 보인다. 손에 담배를 들고 멍하니 빠칭코 기계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는 왠지 모르게 과거 혜주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위태로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빠칭코 기계가 크게 터진 듯 쇠구슬이 한가득 쏟아지고 있지만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현성이 무슨 생각을 저리 깊이 하고 있나… 하고 묘한 호기심이 동한 듯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서 있는다. 왠지 모르게 과거의 혜주… 무척이나 성격 있어 보이는 그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위태로운 뒷모습에 금방 또 혜주가 보고 싶어진 자신을 느끼며 그가 피식 웃음 짓는다.
그 사이에 빠칭코 머신 앞에 앉아 있던 여자가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담배를 들고 있는 그대로 힐끔 고개를 돌리자 순간 현성이 여자와 눈이 마주치고 만다.
-움찔…!
별 생각 없이 유리창 너머 가게를 들여다 보던 현성이 그 순간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치자 순간 담배를 들고 멍하니 앉아 있던 여자가 그 모습이 재미있었던 모양인지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그 웃음에 현성이 혜주와 비슷한 듯 하면서도 또 그녀와는 다른…
하지만 분명히 말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런 도박장이나 게임장 같은 곳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예쁘장한 얼굴에 조금 놀란 듯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인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에 왠지 모르게 빤히 쳐다보고 있던 게 민망했던지 꾸벅 인사를 하곤 다시 극진회관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어린애 같이 빠칭코 가게 안을 들여다 보다 눈이 마주치니 저 큰 덩치로 그렇게 놀라더니 수줍게 인사를 하곤 사라져 버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자가 그게 참 웃기다 싶었던지 현성이 사라진 이후에도 좀처럼 창가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멍하니 웃음 짓는다.
“사키…! 또 빠칭코야? 이러다 기자들이라도 만나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러는 동안 그녀를 찾아온 젊은 여자가 한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 목소리는 분노라기보다는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는지 순간 사키라 불린 여자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본다.
“…괜찮아요. 이젠 나한테 아무 관심도 없을 거에요. 아니, 관심 있는 건 하나 정도 있겠죠.”
그리고 다시 빠칭코 머신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멍한… 마치 혼을 잃은 듯 한 눈빛을 하고서 말이다.
“…힘들 때 일수록 더 기운을 내야지, 사키… 네가 이렇게 방황하면…”
“나한테 남은 게 뭐가 있나요? 난 모두 다 잃어 버렸어요.”
세상과 마음을 닫아버린 듯 사키가 고개를 흔들며 재떨이 담뱃불을 끈다. 그리고 다시 멍하니 빠칭코 머신을 바라보던 그녀가 깊게 한숨을 내쉰다.
“게임 해야 하니까 비켜주세요. 스미레 상.”
더 이상은 그 누구와도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말이다. 그 모습에 스미레라 불린 젊은 여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빠칭코 머신 앞에 둔 담배갑을 낚아 챈다.
“…그래도 담배는 안 돼! 이미지에 치명적이란 거 몰라?”
“어덜트 비디오에 데뷔할지도 모른단 소문이 나는데 그런 게 무슨 소용이에요…?”
이젠 모든 게 덧 없다. 더 이상 이야기 하고 싶지도 않으니 귀찮은 소리 그만 하고 사라져 줬으면 좋겠어. 함께 일을 해온지도 벌써 6년이 넘었지만 처음 보는 사키의 가시돋힌 모습에 스미레가 조금 당황한 듯 그녀를 바라본다. 더 이상 아이돌 ‘사키’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잘 알고 있잖아?”
“그 이야긴 누드 화보 찍기 전에도 그랬어요.”
어쩌면 이것이 인기를 잃은 아이돌 스타의 말로인지도 모른다. 한 때 일본 전역을 휩쓸었던 아이돌은 여전히 사랑스러운 용모를 가지고 있지만 그 마음은 상처만이 가득 남은 모양이다.
화장조차 하지 않고 군인 모자 같은 까만색 모자를 눌러쓰고 아무런 옷이나 대강 걸쳐 입은 옷을 한 그녀가 과거 M.M의 에이스 ‘오오츠카 사키’라는 것을 누가 알아보기나 할까…? 아니, 설령 알아본다 하더라도 사키 자신이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이다. 이제는 아이돌 보다는… ‘불쌍한 여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을 테니까.
강도짓을 하다 수감된 망나니 동생과 자신이 선물한 집에서 자살해버린 어머니를 가진…
“…그건 어쩔 수 없었잖아. 사키… 테루를 위해선…”
“…알아요. 스미레 상 잘못이 아니란 것도 알아요. 그러니까 제발 날 혼자 있게 해주세요.”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극한 내몰린 듯 위태로운 얼굴을 하는 사키의 모습에 스미레가 이래선 그녀를 더 망칠 수밖에 없다 생각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래도 담배는 곤란하다. 물론 이제 아이돌이라 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고… 또 상관이 없을지 모르겠지만 언론이란 것은 누군가를 망침으로써 돈을 벌어가기도 한다. 최소한 그 희생자가 사키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매니저 스미레가 담배를 챙겨 걸음을 옮긴다.
멍하니 빠칭코 머신을 바라보던 사키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고 만다. 그리곤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그렁그렁한 눈으로 머신을 다시 바라보며 말 없이 게임을 다시 진행해나갈 뿐이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아까 창가에서 보았던… 요 일주일 동안 자주 보인 그 이상한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에 그나마 옅은 미소를 더한다.
그 사이에 이미 극진회관까지 도착한 현성은 그 묘한 분위기의 여자를 모두 잊어버린 것인지 극진회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김관수 관장과의 훈련에 여념이 없다.
-파밧!
번개 같은 원투…! 그리고
-퍼엉! 퍼엉!
묵직한 로 킥의 연타…! 야마다 류이치라는 상대를 쓰러뜨린 바 있는 로킥의 집중포화는 아무래도 펀치를 주로 사용하는 밴너 전에서 주요 기술이 되어줄 것이 틀림없었다. 특히나 다리 하나만을 안과 밖으로 모두 망가뜨릴 기세로 차는 현성의 킥은 지난 여름 방문했을 때보다 훨씬 더 날이 서있었다.
“…대단하군. 정말로…”
그런 그들을 보며 흔쾌히 그들의 트레이닝을 돕겠다 이야기 한 겐지 사범이 정말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타고난 신체의 조건 자체가 압도적이었지만 보통 동양권 선수들은 이러한 좋은 조건과 감각이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현성은 달랐다. 타고난 신체 이상의 감각을 타고 났다. 그리고 그 감각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란 이름으로 빛이 나고 있었고, 그보다도 더한 것은 지독스러울 정도로 노력을 한단 것이었다.
물론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그러한 것도 있겠지만… 어쩜 정말로 현성이 제롬 르 밴너라는 레전드를 쓰러뜨리는 게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생각하며 겐지 사범이 후후 웃음 짓는다.
기실 제롬 르 밴너라는 이름이 극진회관에는 그리 썩 유쾌한 이름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프란시스코 필리오나 니콜라스 페타스 같은 극진 출신의 파이터들이 그 맹렬한 프랑스의 하드 펀쳐에게 일찍이 당한 바 있기 때문에. 당시 프란시스코 필리오는 백인조수를 두 번이나 느긋하게 마칠 정도 굉장한 실력자로 정평이 나있었지만 밴너에 의해서 1라운드가 채 2분이 되기 전… 로프에 걸린 채 KO패를 당하고 말았다. 페타스 역시 마찬가지…!
물론 현성이 극진회관의 소속은 아니지만 어쩜 이것은 극진회관 나름의 복수전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킥보단 펀치의 비중을 조금 더 높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참이나 미트를 치며 타격기를 갈고 닦던 그들을 지켜 보며 겐지 사범이 이야기를 건넨다. 막 미트 치기를 마치고 지친 숨을 몰아쉬는 현성과 만만찮은 운동량을 보이며 땀을 닦고 있던 김관수 관장이 동시에 그를 돌아보자 겐지 사범이 후후 웃으며 이야길 꺼낸다.
“킥도 능숙한 선수지만 밴너 선수의 주 무기는 강력한 주먹입니다. 아마 상대가 나이가 있다보니 순간을 노릴 겁니다. 킥이 나가는 시점은 치고 들어갈 수 있는 주요한 타이밍이 될 것이구요. 아마 킥으로 밴너의 다리를 잡고 요리를 한다고 생각 할 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 현성 선수의 리치라면 충분히 킥이 아니라 펀치 교환에서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 합니다.”
아마 그간의 연습을 지켜보며 내린 판단인 모양이다. 그 말에 김관수 관장이 ‘오…’ 하고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복싱이라면 김관수 관장의 전공 분야다. 하지만 킥의 비중을 줄이라는 것은…
“저도 현성이 리치가 있으니 그것도 충분히 승산이 있지만 아무래도 킥 위주로 다리를 잡으면 이후의 진행이 더 용이할 것이라 보입니다만…?”
“나이가 들어 스피드나 체력은 떨어질 수 있어도 파워는 크게 많이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밴너 선수는 경기를 그렇게 오래 하려 하지 않을 겁니다.”
그 말에 김관수 관장이 확실히 일리가 있다는 듯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니콜라스 페타스가 그러했다. 다양한 킥을 구사했던 그 강력한 선수도 밴너의 다리를 효과적으로 막지 못했고 저돌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위력적인 펀치 러쉬에 밀려 결국은 패배하고 말았다.
“…하지만 맞불을 놓기엔 체급의 차이가…”
“밴너 선수도 그렇게 안면의 맷집은 좋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밴너 선수에게 패배하는 경우는 그 압도적인 공격력에 겁을 먹고 물러섰을 때였습니다. 승리한 경우는 우직하게 맞붙었을 경우더군요.”
아마 겐지 사범 역시 비디오를 보며 분석을 했던 모양이다. 그 말에 김관수 관장이 흐음…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과거 밴너가 KO 패를 당했던 것은 대부분 안면 타격에 의한 패배였다. 턱이 그렇게 강한 선수가 아니라는 것. 전반적으로 체급 때문에 킥과 아웃 복싱을 생각했지만…
“…관장님, 뭐라고 얘기 하시는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의 현성을 바라보며 김관수 관장이 흐음… 하고 생각에 잠긴 얼굴로 그를 돌아본다. 그리고 확실히 겐지 그가 현성에게 반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타고난 펀치력도 펀치력이지만…
“…카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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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츠카 사키(이름을 보고 웃었다면… 후후후 전 연상 취향이라서… 데헷)
조만간 출판용 쓴다고 잠수 탈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아무래도 계약된 일이 우선이다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