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회 - 괴물
벌써 3전 째라고 하지만 대기실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특히나 모니터로 화면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차례가 될 때 까지 기다리는 심정은 어린 시절 숙제를 해오지 않은 날, 혹시나 자신을 시킬까 두려워했던 아이의 마음과도 닮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과 다른 것이 있다면 지금의 현성은 두려움에 가득 찬 아이가 아니라… 숙제를 충분히 해왔고, 내심 한 편으로는 자신을 시켜줬으면 하는 아이의 마음 또한 가지고 있단 것이다. 그 기분을 무어라고 설명을 해야 할 까…?
“혜주랑 예린이는 오늘은 대기실 안 오나보네?”
“알렉세이 코치 있어서 못 들어오겠대요. 둘 다 영어 울렁증 있어가…!”
“오우, 나도 영어 잘 못 합니다!”
혜주와 예린이 대기실이 아닌 관중석에 있기 때문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말이 없는 현성을 보며 김관수 관장이 그 긴장감을 풀어주려는 듯 후후 웃으며 대화를 잇는다.
“암튼 오늘은 현성이 보러 온 사람 쎄비맀다. 서울서 팬클럽도 왔제, 대구서 여자친구랑 고모랑 또 다 왔제…? 이거 오늘 못 이기면 클난다.”
그 말에 곧 현성이 푸훗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바라본다.
“그거 아이라 캐도 지면 클나는데… 더 안 되겠네요. 슬 몸 좀 풀어야 겠어요.”
이전과는 다르게 조금은 여유 묻어나는 음성에 기철이 ‘요 녀석!’ 하고 후후 웃으며 반사적으로 미트를 든다. 이제는 시합이 임박했고, 오로지 지금껏 준비를 해온 것만으로 결판이 난다. 더 이상 무엇인가를 더 한다고 해서 달라질 일은 없다.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최상의 상태로 케이지에 오를 수 있도록 몸을 푸는 일 밖에 없을 터.
“후우…”
가볍게 숨을 내뱉으며 현성이 평소보다 더 부드럽게 기철이 든 미트를 향해 주먹을 찔러 넣는다. 미트에 닿을 듯 닿지 않은 채 매끈하게 동작을 이어가는 그 모습은 단순히 몸을 풀기 위함이 아니라 야마다 류이치라는 일본의 강적을 상대로 오늘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가를 예행연습 삼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데뷔전이나, 그 격투 인생의 최고의 기회가 될 지도 몰랐던 지난 이재석 전보다도 오히려 더 심혈을 기울이는 듯 한 모습…!
물론 기회가 기회를 불러오기에, 재석을 상대로 그런 파이팅을 선보이고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다이너마이트라는 아시아에서 가장 거대한 격투 이벤트에 참석할 수 도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현성의 나이에 가져가기 힘든 재물 뿐 아니라 명예까지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터…! 그가 이렇게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는 말이다. 특히나 관중석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김관수 관장의 말대로 오늘따라 유난히 많단 것을 지나서 고모 가족과 혜주가 함께 있단 것일 것이다.
“후우…!”
점차 동작의 날카로움을 더해가는 현성의 움직임이 미트를 강타하기 시작한다. 닿을 듯 닿지 않던 주먹과 킥은 점차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미트를 받고 있는 기철이 점차 그 기분 좋은 울림이 커지며, 손바닥 너머로 충격이 커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오늘 현성이 컨디션 좋아 보이는데?”
점점 텐션을 올려가는 현성의 모습에 기철이 후후 웃으며 한 마디를 건넨다. 그 말에 그저 빙그레 웃음을 띤 채 현성이 조금 더 페이스를 끌어당긴다. 처음의 빠르지만 단순하던 타격 자세는 어느 샌가 물 흐르듯이 유연하고 부드러워 졌으며, 동시에 몸에 익은 콤비네이션은 한자 신동의 천자문 외우기처럼 막힘없이 흘러 나온다. 팡, 팡, 팡 하고 기분 좋은 두드림이 대기실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자 이내 김관수 관장과 알렉세이 코치가 미소 짓는다.
“…오늘 굉장히 맘이 설렙니다. 마치… 세르게이의 데뷔전을 지켜볼 때 같아요.”
“내도 글타. 요즘 현성이가… 뭔가가 확실히 달라진 거 같은데… 오늘 그게 터져 나올 거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카이.”
과거 프라이드를 호령했던 스페츠나츠 출신 동료를 떠올리는 알렉세이 코치의 말에 김관수 관장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무어라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매번 성장세를 보이던 현성이 이번 시합을 준비하면서는 유난히 능동적인 모습들을 많이 보였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시합은 플랜을 설명해준 것이 아니라 현성 스스로가 풀어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 것인지도 몰랐다.
“…어떻게 풀어갈란가 내도 기대가 된다.”
물론 방법은 현성도 알고 있을 것이다. 상대는 타격가이고, 압도적인 리치 사이로 상대를 농락하면 승리는 손쉽게 가져 갈 수 있다. 그러나 현성은 그 자신이 그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아마 정면으로 야마다 류이치와 싸워 승리를 쟁취하려 할 것이고.
-파앙!
이제는 미트를 찢어버릴 것 같은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며 텐션을 끌어 올리는 현성의 모습에 김관수 관장이 기대가 된다는 듯 미소 짓는다. 과연 그는 세계를 향한… 예비 발동작을 얼마나 훌륭히 보여줄 것인가?
로드원 FC와의 계약이 연장되고, K-1의 활동 까지 포함하게 된다면 당초의 계획보다는 미국 진출이 늦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가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기실 정문호 대표의 말대로 현성은 부족한 부분들이 많았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김관수 관장만으로는 역부족일 것이다. 아마… 정문호 대표 그 역시 현성의 미국 데뷔를 바라고 있는 인물 중 하나일 것이다.
아마… 이 좋은 최상의 재료를 그 누구도 대적 할 수 없는 최상의 요리로 만들고 나서.
“아야야! 현성이 이제 그만하면 되겠다, 자식아…!”
그 사이에 미트를 받아주던 기철이 더 이상은 손이 아파서 안 되겠다는 듯 뒤로 슬쩍 물러나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 목소리에 확실히 몸이 풀린 듯 이마에 땀까지 맺힌 현성이 ‘아…’ 하고 살짝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오늘 따라 기합이 팍 들어간 게… 류이치라고 했나? 그 자식 불쌍한데…?”
“자슥아, 그래 단정 짓는 기 아이다. 가도 어떻게 준비해왔느냐에 따라 다른 거 아이가?”
“에이, 관장님…! 오늘 현성이 야 장난 아니에요. 미리 의료진 대기 시켜 놔야겠는데…?”
미소와 함께 엄지를 치켜드는 선배의 모습에 현성이 그저 웃는다는 듯 머리를 긁적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김관수 관장이 오늘만큼은 따로 플랜을 제시하지 않겠다는 듯 후후 웃으며 말을 꺼낸다.
“자신 있나?”
상성 상 현성이 이기기 손 쉬운 상대다. 하지만 그 상성을 포기하고 인 파이팅으로… K-1의 이벤트로 정면 돌파를 하겠다는 제자를 보며 김관수 관장이 다시 물음을 던진다. 그 물음에 현성이 미소와 함께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저 비린 거 잘 못 먹으니까 손질 제대로 해주세요, 관장님.”
그 말에 기철이 ‘응?’ 하고 그를 바라보자 김관수 관장이 껄껄껄 웃음을 터뜨린다.
“자슥, 니가 아직 내 손맛을 못 봐가 그칸다! 매운탕 끝장 나제, 기철아?”
“…아… 예… 뭐… 나는 출근해야 되니까 둘이서만 가세요.”
뭔가 떨떠름한 얼굴로 기철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 현성이 왜 그러냐는 듯 기철을 바라본다.
“와 그래 바보 같은 짓을 했노, 현성아! 관장님 완전 낚시 중독자인거 몰랐나?”
한 번 불이 붙으면 끝이 없다는 듯 기철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 김관수 관장이 쯧쯧 하고 혀를 찬다.
“아직 아다, 아야. 기철이 빼놓고 우리끼리 챙겨먹자, 현성아.”
낚시의 참 맛을 모르는 이는 인생의 맛을 모른다는 그 지론에 기철이 ‘어휴!’ 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그리고 그가 은근슬쩍 현성의 곁으로 다가와선 ‘…관장님보다 큰 거는 절대로 잡지 마레이…’ 하고 정보를 남기자 현성이 왠지 모르게 그 장면이 떠올랐던지 푸힛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기철이, 이 자슥! 또 내 욕 했나!”
“욕은 무슨요! 관장님이 쓸 데 없이 낚시 같은 거에 너무 열 올리시니까 조심하라 캤죠!”
“크… 니는 다 문젠데 그게 제일 문제다, 기철아.”
또 다시 티격태격 하는 사제의 모습에 현성이 긴장감이 모두 다 풀려 버린 듯 큭큭 웃음을 터뜨리자 김관수 관장이 꽤 뻘줌했던 모양인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한다.
“너무 가벼우면 곤란해요.”
그 동안 알렉세이 코치가 무게 중심을 잡는다. 그 말에 현성이 ‘아…’ 하고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집중을 하는 동안 김관수 관장이 현성의 말 덕분인지 오랜만에 손 맛이 근질거린다는 듯 기철을 힐끔 바라본다.
“…니 진짜 안 갈래?”
“…에휴… 현성이 고생길 훤한데 우에 혼자 보내겠어요…?”
같이 가본 사람은 다 안다는 듯 기철이 이야길 꺼내자 김관수 관장이 아끼는 두 제자와의 낚시에 들뜬 듯 허허허 하고 웃음 짓는다. 평소 경기를 앞두곤 그렇게 냉정하던 그가 낚시 이야기에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단 생각에 기철도 조금 어이가 없던지 ‘참 나…’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현성 역시 아주 어릴 때 어렴풋이 기억나는 아버지의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 떠올리며 여전히 집중은 하고 있지만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낀다.
“제 4경기 끝이 났습니다!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여욱환 선수가 승리 했습니다…!”
그 사이에 연장까지 이어진 4경기가 끝이 났단 장내 아내운서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웃음 가득한 대기실도 이내 웃음이 사라진다. 곧 다시 가볍게 몸을 풀어보던 현성이 트리코스타의 괴물 티셔츠를 다시 한 번 바로 잡고서는 준비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도 가자! 한일전이데이! 오늘은!”
그리고 김관수 관장이 기합을 넣어 소리치자 기철과 알렉세이 코치, 토네이도 짐의 스태프들이 ‘가자!’ 하고 함께 소리친다. 그리고 대기실 밖… 지난 번 시합을 했던 장소에서 또 하는 시합이기 때문인지 왠지 모르게 그 날의 감정들이 살아나는 것 같단 생각에 현성이 두근두근 뛰어 오르기 시작한 박동을 느끼곤 미소 짓는다.
온 몸이 불이 붙은 듯 뜨겁다. 그러나 과거처럼 화상자국만 고통스러울 정도로 뜨겁고 따갑게 느껴지진 않는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요동치는 심장과 맥박이 살아있다는 그 생생한 기운을 전신으로 퍼뜨리고 있을 뿐.
무대를 나선다면 사람들의 환호가 들릴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사랑하는 혜주와 귀여운 예린이. 밉지만… 결코 외면 할 수는 없을 것 같은 고모 가족이 앉아 있다. 그들 뿐 아니라 그를 응원하러 서울에서 이곳까지 온 이종격투기 카페 회원들까지.
“여긴 우리 홈이다, 현성아. 절대로 홈에선 깨지면 안 된다.”
고라쿠엔에서 연승을 이어가던 선배의 목소리에 현성이 ‘예, 행님.’ 하고 묵직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인다. 일본에서 온, 이시이 관장의 카드는 생각처럼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반드시 이긴다는 것.
-두근… 두근…
터질 듯한 박동 끝에 드디어 기다림이 끝이 나고, 이제는 모든 것을 쏟아 부울 시간이 왔단 것을 느끼며 현성이 토네이도 짐의 식구들과 함께 백 스테이지에서 입장을 기다린다. 그 곁에 나란히 선 노란 머리의 류이치가 힐끔 그를 바라보며 금방이라도 싸우고 싶다는 듯 맹렬한 눈빛으로 러브 콜을 보낸다.
그러나 그 시선마저 외면한 채 고개를 숙인 현성이 ‘아직은 아니야…’ 하고 스스로를 꾹 누른다. 그 모습에 그저 류이치가 어깨를 으쓱하며 요란하게 몸을 푸는 동안 먼저 장내 아나운서가 야마다 류이치란 이름을 호명한다. 환호 사이에 군데군데 야유가 섞인 사람들의 반응 속에서 류이치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듯 진한 눈빛을 남긴 채 케이지를 향해 나아간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현성이 이제 모든 것이 준비가 끝이 났다는 듯 잠깐 눈을 감는다.
“뭐가 보이나…?”
그런 그를 향해 김관수 관장이 옅은 웃음과 함께 물음을 던진다. 이내 그 물음에 현성이 천천히 눈을 뜨며 입가에 미소를 가져 간다.
“매운탕요.”
그 대답에 김관수 관장이 웃음을 터뜨리는 동안…
“로드원 FC를 집어 삼키고 있는 괴물입니다…! 체중 85.9Kg! 2전 전승, 2KO승…! 앞을 가로 막는 것은 모두 파괴 해버린다…! 괴물 장현성 선수입니다!”
오늘따라 더욱 더 요란한 장내 아나운서의 외침과 함께 정적이 찾아든다. 그리고 모든 조명이 꺼진 사이에 Lux Aeterna(By Clint Mansell)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낮게 깔리는 그 장엄한 곡분위기가 순간 압도적으로 컨벤션 호텔 이벤트 홀을 채우자 묘한 고조감이 더 큰 정적을 가져 온다.
데뷔전의 신나는 선곡, 그리고 2전 째. 자신을 무시하지 말라던 에미넴의 갱스터 랩에 이어 세 번째 등장 씬은 에밀리아넨코 효도르를 연상케 하는 장엄한 오케스트라였다. 낮게 깔린 웅장한 사운드 속에서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는 바이올린 선율이 저도 모르게 온 오싹한 전율을 불러 오는 동안…
어둠 속 불이 하나, 하나 밝아 오기 시작한다. 점점 더 격하게 흘러가는 사운드와 함께 드디어 현성이 모습을 드러내며 케이지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그 모습에 순간 사람들이 와아아아아아 하고 터질 듯 한 환호를 내지른다!
-장현성! 장현성! 장현성!
이벤트 홀을 찾은 천여명이 조금 넘는 관중들이 모두 한결 같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현성에게도 전율이었다. 그 온 몸이 찌릿찌릿한 기분을 느끼며 현성이 케이지 안으로 입장한다. 이미 그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일본의 ‘금강야차’를 바라보며 그가 천천히 티셔츠를 벗는다.
꺼졌던 불 모두가 켜지고 장엄한 Lux Aeterna가 그친 순간 웅성임이 커져간다. 여지껏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승리를 이어가고 있는 신인 선수에 대한 열광…! 그 열광을 온 몸으로 느끼며 현성이 주먹을 움켜쥐고 류이치의 앞에 선다.
터질 듯 뛰는 심장. 불에 타는 듯 뜨거운 몸. 그리고 새벽의 고요보다도 차가운 머리. 그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 항상 눈을 피하던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류이치를 바라본다.
마치 아직도 Lux Aeterna가 흘러 나오고 있는 듯 한 착각마저 느끼며 현성이 주먹을 움켜쥔 바로 그 순간 심판 배훈이 소리친다.
“파이트!”
============================ 작품 후기 ============================
업로드 하다가 또 짤렸네요. 수정했습니다.
Lux Aeterna(By Clint Mansell)
레퀴엠과 이퀼리브리엄의 OST로 사용된 바 있는 럭스 아테나 입니다. 현성이 등장 테마로 확정이구욥 설정상 알렉세이 코치가 선곡한 겁니다. 설정란에 링크 해놓을 테니 확인 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