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회 - 괴물
인생이 어려운 것은 더러 잘 되는 날이 있으면, 또 더러는 안 되는 날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이 예전에 비해서는 나아진 상황이었지만 때때로 아주 사소한 문제들은 과거의 우울했던 감정들을 불러와 지금을 괴롭게 만들곤 했다. 김관수 관장이나 기철의 위로로 마음의 부담은 한결 덜어냈지만 여전히 가족이라는 지울 수 없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자신을 괴롭게 한다는 생각을 더하며 현성이 천천히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오늘은 알렉세이 코치와 인사를 했고, 또 새로운 시합 상대인 야마다 류이치라는 일본인을 확인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길. 이제는 밤이 되면 제법 으슬으슬한 한기가 밀려와 마지막 발악을 하던 여름이 끝을 맺는단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피곤한 몸을 버스에 싣고서 그 앞까지 바로 향했겠지만 고모와 다시 만난 이후론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그런 것인지 그저 무작정 걷거나… 요 근래에 극히 사라져 버린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은 마음을 어느 정도는 누리고 싶던지 굳이 걸음으로 귀가를 선택한 현성이 문득 시간이 벌써 이만큼이나 흘려버렸단 생각이 들었던지 바람에 흔들리는 가로수를 힐끔 바라본다.
“후우…”
그 나무 만큼이나 불안하게 흔들리는 가슴은 좀처럼 위로를 받거나 하더라도 해결되지 않는 답답한 구석이 있었다. 그에겐 좀처럼 쉽게 지울 수 없는 응어리가 흡사 수조 안의 잉크처럼 그리 빠르지는 않지만 그 궤적을 보이며 마음 속으로 번져 가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 와중에 다른 부분의 일들을 무척이나 잘 풀려가고 있고, 이젠 다음 시합을 이기게 되면 k-1이라는 상상도 못했던 큰 무대에 서게 될 지도 모른다.
“출세 했네…”
막상 그리 생각해보면 작년 이맘때쯤엔 소년원 안에서 밖으로 나가기만을 그리고 있던 모습과는 천지 차이가 아니던가? 괜히 바보같이 별 일도 아닌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끙끙 앓는 자신이 멍청하다 싶었던지 현성이 피식 웃음 짓고 만다. 왜 자신은 이다지도 사람이 딱 부러진 데가 없어서 이런 일로 근심하고 마음 아파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품은 채 오램나에 맞이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슴 깊이 느끼며 현성이 천천히 걸음을 내딛는다.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한 단풍 잎이 완전히 메마르진 않지만 적당히 기분 좋은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울리니 그나마 복잡하던 맘도 한결 나아지는 것만 같았다. 어쩜 격투계로 뛰어들기 시작하면서 지나치게 열심히 달려 왔기 때문에 조금은 지쳐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고작 해봐야 이제 1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은 무엇인가를 이렇게 열심히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꿈도, 희망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걱정이었던 지난 날들. 그것들에 비하면 지금은 아주 많은 것들이 풍족해졌다. 덧 없이 흘러가던 사람들이 아니라 이제는 그 곁을 가족처럼 든든히 지켜주고 있는 사람들도 생겨났고, 하루하루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보고 그림을 그려갈 수도 있게 되었다. 그 와중에… 이렇게 자신을 자꾸만 붙잡는 과거와 그것들에 얽매여 있는 자신을 떠올리면 또 다시 한심하단 생각이 드는지 현성이 괜히 심통이 난 듯 혜주가 잘 짓는 그 표정을 떠올리며 발 끝에 걸린 낙엽을 가볍게 툭 차버린다.
어릴 때 친구 없이 집으로 돌아가던 때에 괜히 길바닥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공 삼아 굴리던 때를 떠올리며 낙엽을 발로 살살 건드리던 현성이 이내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쉰다. 이러니 저러니 하도라도 갈 곳 없는 그를 받아준 것이 고모였고… 친구 없이 외롭게 지내던 현성이 돌아갈 곳도 고모의 집밖엔 없었다. 물론 그 안에서 그렇게 다정하게 대해준 것들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단 한 번도 가족이라곤 생각해본 일은 없었지만…
아마도 먹고 살만해지니 이런 걱정이나 고민들이 드는 것일까? 살아남기 바빴던 그 시간들에는 도무지 생각도 하지 않았던 일들을 왜 지금에서야 고민하고 아파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 현성이 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다. 그리고 후우 하고 숨을 고르며 그가 어색한 웃음을 띤 채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바라본다. 웨이터로 일을 할 때… 잠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돈 많다고 걱정이 줄어드는 거는 아니다…”
그를 장골이라 부르며 좋아해줬던 김사장이 했던 말을 새삼스럽게 되새기며 현성이 그 심정을 이제야 이해하겠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왠지 모르게 오랜만에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은 기분이다. 그렇지만 이제 곧 2달 뒷면 또 다시 중요한 시합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그런 것들을 할 여력이 없다는 듯 현성이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들며 걸음을 내딛는다.
최근과 예전을 비교한다면 분명히 지금은 예전에 비해서 무척이나 상황이 좋아졌다. 여전히 앞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그림을 그려 나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니까. 비단 가족 문제가 발목을 잡는다 하더라도 넘어질 정도로, 앞으로 나갈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발목을 움켜쥔 것은 아니다.
“…목표.”
아마도 그것은 기철이 이야기 해줬던 그대로 목표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김관수 관장도, 기철도 얼핏 비슷한 이야기를 해줬던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며 현성이 물끄러미 자신의 주먹을 바라본다. 싸움을 그리 좋아하진 않았지만 싸울 때 마다 단 한 번도 져본 일이 없게 만들어준 것. 그리고 결국은 지금 그를 먹여 살리고, 또 미래도 그릴 수 있게 해준 고마운 것.
한 시합, 한 시합을 준비하며 해나가다 보면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싸우는 것과 시합을 가지는 것은 차원이 다르단 것이었다.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단순히 더러운 감정들이 대립의 극단을 이뤄서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할 수 있을 만큼 훈련하고 상대를 분석하면서 이기기 위해서 준비하는… 노력과 노력의 경쟁 같은 것. 그 준비들을 시험하는 날이 시합일이고, 그 날에 승리를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 현성이 하는 일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다시 현성이 기분이 묘해진 듯 살짝 입가에 웃음을 짓는다.
여전히 고모 내외의 일은 해결이 되지 않을 것 같고,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당장에 드는 느낌은… 무엇인지는 몰라도 야마다 류이치라는 다음 시합 상대든… 아니면 누가 됐던지 절대로 지고 싶단 생각만큼은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지 않는다는 것. 지고 싶지 않고, 우습게 보이고 싶지 않단 것은… 곧…
“계속 이기고 싶다…”
그 말을 돌려 하는 말 아니던가? 혼자 있고 싶단 생각이 자연스럽게 고모 내외와의 고민으로 흘러갔다가 결국은 다시 또 격투기다. 그 생각에 현성이 아마도 자신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이 일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생각하며 살짝 미소 짓는다. 큰 목표는 아직까지 정하지 못했지만… 가장 작은 목표는 역시 다음 싸움도 이기는 것이다. ‘그게 중요한 거야…!’ 하고 그가 스스로의 뺨을 짝짝 두드리는 동안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부르르…
그 진동에 현성이 누군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자 역시나 혜주가 전화를 걸어온 모양이다.
“여보세요?”
-오늘 어디고…? 왜 이렇게 늦어…?
그 말에 현성이 ‘아…’ 하고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본다. 버스를 탔다면 도착했을 시간보다 5분 정도 늦은 시간. 그 생각이 들자 그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왠지 모르게 생각이 조금 안정이 된 것 같고, 걱정하는 혜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간질간질한 기분을 느끼며 대답한다.
“생각 할 게 좀 있어서 걸어가고 있어요. 금방 들어가요!”
-치…! 또 그 나쁜 친척들 때문에 그러나…?
척 하면 딱이라고 채 이야기도 꺼내기 전에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혜주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현성이 옅은 미소를 띤 채 대답한다.
“보고 싶어요, 누나.”
애교와는 거리가 먼 현성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혜주가 정말로 보고 싶었던지 사랑스러운 느낌이 가득하다. 살살 불러오는 초가을 바람에 답답하던 맘도 조금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그가 이야기를 꺼내자 금방 또 핸드폰 너머로 ‘갑자기 뜬금 없이…!’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혜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럼 빨리 들어와…! 바보야…! 빨리!
그 기분 좋은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다른 위로를 듣지 않아도 현성의 마음엔 위로가 되는 모양이다. 그 소리에 현성이 홀로 걷는 시간도 그렇게 나쁘진 않았지만 혜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문득 그녀가 너무 보고 싶단 생각이 물 밀 듯이 밀려오던지 ‘금방 가께요!’ 하고 대답한다.
-알았어. 너무 서두른다고 막 그카지 말고… 조심! 빨리!
두 가지 상반된 요구를 꺼내며 그녀가 소리치자 현성이 미소와 함께 ‘예써!’ 하고 힘차게 대답한다. 그리고 혜주가 후후 웃으며 ‘좀 있다 봐!’ 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끊자 현성이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가볍게 달리기 시작한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보니 그렇게 많이 온 건 아니지만 반절 정도는 온 것 같다. 하루 종일 훈련을 거듭하다 보니 다리가 후덜덜 떨릴 정도로 힘이 들었지만 이상하게 기분은 한결 가벼워진 듯 현성이 밤 거리를 기분 좋게 내달린다.
“엄마야…!”
밤 늦게 야간 운동을 나온 아주머니 하나가 그를 보고 흡사 곰이 달려오는 모습을 본 듯 놀라 비명을 지르자 이내 현성이 조금 웃겼던지 픽 새어 나오는 웃음을 눌러 담은 채 ‘죄송합니다!’ 하고 소리 높여 인사하곤 더욱 더 속도를 붙인다.
고모와의 사이가 마음을 흔들어 놓았지만 그런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더욱 더 하면서… 고모도, 자신도 조금은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시합에만 포커스를 맞추자 싶었던 현성이 문득… 이번 시합은 자기 스스로가 답을 찾아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던지 ‘아…’ 하고 걸음을 멈춘다.
재석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뒀을 때 정말로 기뻤던 것은 다른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재석의 약점을 생각했고, 그것을 공략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희열이자 즐거움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떠올린 현성이 한참 달려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미소 짓는다.
세상만사 마음대로 잘 풀려본 일이 없단 건 다른 사람들보다도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더 이상은 그 일에 감정을 과하게 쏟아 붓지도 말고, 더 이상은 흔들리지도 말자. 다시 한 번 더 마음을 다잡으며 그가 야마다 류이치라는 상대의 이름을 머리에 가득 채운 채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내 방식대로…”
너무 건방진 요구가 되진 않을까? 하지만 이번 일을 풀어 가는데 있어서… 조금 더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싶단 생각을 더하며 현성이 어느 샌가 오피스텔 앞에 당도하자 언제부터 나와 기다리고 있던지 가디건을 입은 혜주가 오피스텔 입구를 서성이는 모습이 보인다.
“누나…? 왜 나와 있어요…?”
그리고 그가 숨을 몰아쉬며 놀란 얼굴로 물음을 던지자 혜주가 대답 대신 ‘뛰어 왔나! 바보야!’ 하고 그를 나무라는 듯 바라본다. 그 모습에 현성이 조금 민망한 듯 수덕한 웃음을 짓자 그 얼굴에 또 혜주가 화를 내야 하는데 보기만 해도 웃음이 피식 나오는지 ‘으유 진짜!’ 하고 그를 향해서 걸음을 옮긴다. 곧 마주한 모습으로 현성이 그녀를 보며 뭐가 그리 좋은지 자꾸만 웃음 짓자 혜주가 ‘왜…!’ 하고 얼굴을 붉히며 물음을 던진다.
“보고 싶어서요.”
그 말과 함께 현성이 부드럽게 혜주를 끌어안는다. 다른 말은 크게 필요 없다는 듯 무뚝뚝한 듯 한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 하나 걸치고 그녀를 꼭 안는 크고 너른 몸! 그 포옹에 혜주가 후후 웃음 띤 채 달려와서 그런지 후끈한 몸의 열기를 느끼며 ‘갑자기 왜 걸어 왔노…!’ 하고 그를 마주 안는다.
그녀 역시 미뤄놓았던 쇼핑몰의 오픈을 준비하고 있어서 그런지 많이 바쁘고 피로한 모습이지만 그저 그게 좋은 듯 호나하게 웃으며 좋은 티 감추려고 입술을 앙 다물고 그를 올려다 볼 뿐이다.
“…고모가 많이 속상하게 하드나? 내가 가서 확 엎어뿌고 오까? 내 그런 거 잘 하는데!”
그 위로 아닌 위로에 현성이 푸훗 웃음을 터뜨리며 천천히 고개를 흔든다.
“그냥요… 그냥 시간 지나면 해결 되는 거니까.”
그리고 그가 그렇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듯, 이제는 괜찮다는 듯 담담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혜주가 살짝 미소 짓는다.
“우리 현성이, 이제 어른 돼가네!”
장난스럽게 그녀가 현성의 까까머리를 쓰다듬자 현성이 그저 좋은 듯 미소와 함께 한 번 더 그녀를 끌어안는다. ‘히힛…!’ 하고 좋아하는 혜주의 모습에 그가 목표라는 것. 정말로 하고 싶은 일들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미소 짓는다.
“그래도 다음부터 그런 거 필요하면 미리 얘기는 좀 해라, 바보야. 늦으면 걱정 되니까…”
그건 아마도 눈 앞에 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주고, 사랑해주며, 걱정해주는 사람과 평생 함께 하는 것. 혜주의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그 목소리에 현성이 다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잠깐 사소한 감정에 맘이 흔들리고 비틀거리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바로 잡았을 때 느끼는 안정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의 곁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앞으론 절대로 걱정 안 시킬게요.”
그리고 그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자 혜주가 히히 하고 또 기분 좋은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본다. 뭐가 그리도 좋은 것인지 미소 가득한 얼굴로 마주한 두 사람. 그 모습을 보며 혜주가 살짝 돌아서선 꾹꾹 하고 오피스텔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른다. 그러면서 동시에 등 뒤에선 현성에게 살며시 기댄 채 그녀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나 오랜만에… 되게 하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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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 총각의 평범한 날
졸업 미루고 나서 플랜이 다 꼬여서 그런지 영 집중이 안 되네요 큰일 났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