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회 - 괴물
-덜컥…
굳게 닫혀 있던 대기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짜잔!’ 하고 교복 위에 팀 토네이도 티셔츠를 입은 예린과 까만색 루즈한 핏의 티셔츠와 청바지를 걸친 혜주가 모습을 드러내자 대기실에서 몸을 풀고 있던 현성이 ‘누나…!’ 하고 기쁜 얼굴로 혜주를 돌아본다. 웃옷을 벗고 아래에 착 달라붙는 트렁크를 착용한 그 모습에 혜주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하루 만에 보는 그가 또 뭐가 그리도 좋은지 저도 모르게 방실방실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친다.
“야…! 니 사진을 와 그래 찍었노!”
예린과 함께 KTX를 타고, 또 다시 택시를 타고 장충 체육관 대기실까지 들어온 혜주가 오는 내내 계체량 사진들을 살펴보고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보자마자 잔소리를 먼저 꺼내든다. 그 말에 현성이 반가운 건 둘째 치고 사진 이야기가 나오자 괜시리 어색한 얼굴로 웃음을 터뜨리며 ‘그냥… 찍었는데…’ 하고 대답하자 혜주가 ‘다 니 겁 먹었다 그카잖아!’ 하고 그를 꼭 끌어안는다.
“아, 그래요?”
하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 얼굴이다. 그저 품에 안긴 혜주가 너무 좋아서 다른 건 생각도 할 필요가 없는지 그녀를 꼭 안은 모습에 예린이 ‘아유 진짜! 염장!’ 하고 질투 섞인 목소리로 소리치자 혜주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그의 곁에서 떨어져 나온다.
“다 니가 그 우락부락한 아한테 쫄아가 눈도 못 마주친다 카잖아, 바보야.”
“그 사람들은… 원래 그카는 사람들이잖아예. 괜찮아예. 한 두 번도 아니고…”
아무래도 계체량 사진이 올라오면서 눈을 마주치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 아래로 그 외모와 달리 겁을 먹은 듯 눈을 피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왈가왈부한 게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혜주가 툴툴 거리는 동안 현성은 사람들의 시선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 뿐이다.
“맞아요, 언니! 원래 뭣도 안 되는 것들이 인터넷만 드가면 다 효도르, 크로캅 하는 애들이에요. 괜히 허세만 들어가 인터넷 마초라 카잖아요. 실제로 현성이 오빠 얼굴 보고 얘기 해봐라 카면 찍소리도 못 할 걸요!”
그런 그의 모습에 예린이 원래 대인배는 다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듯 이야기 하자 혜주가 내내 이야길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래도…!’ 하고 입술을 삐죽 내민다.
“닌 참 속이 없는 건지… 아님 진짜 대범해서 그칸건지 모르겠다. 편의점 가도 그렇고…”
아직도 그게 내키지 않는지 혜주가 새초롬한 얼굴로 이야기 하자 예린이 다시 또 현성을 거든다.
“언니는…! 좋으면서! 그거 진짜 멋있지 않았어요? 같은 여자라가 그카는 게 아니라… 진짜 내 같아도 열 받긴 한데…! 나는 못 하겠으니까 그래서 멋있던데! 대박 대인배 포스! 그거 진짜 아무나 못하는 거잖아요! 피해의식 쩌들어가 된장이네, 보슬이네 뒤에서 씨불거리는 아들보단 훨씬 멋있지 않아요? 진짜 언니가 임자 아니었으면 내가 당장…!”
“야, 황예린! 내 꺼거든?”
그 가식 없는 성격 탓인지 함께 지내는 동안 혜주와 무척 가까워진 예린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 하자 혜주가 재빨리 현성의 팔을 감싸며 소리친다. 그 모습에 현성이 다시 웃음을 터뜨리는 동안 기철이 ‘하… 좋겠다, 현성이.’ 하고 스태프 복장을 하고서 그를 바라보자 예린이 이내 ‘언니, 은근히 미저리 스타일인데! 기철이 오빠 취향도 별나네!’ 하고 다시 혜주를 놀리자 혜주가 ‘흥!’ 하고 도도한 얼굴로 소리친다.
“니도 어리고 귀엽게 생겼으니까 방심하면 안 된다! 격투기 하는 아들이 그걸 모르네!”
그 말에 예린이 ‘언니가 진짜 파이터에요!’ 하고 깔깔 웃음과 함께 좋아한다. 그 모습에 싸움을 앞두고 한결 무거운 분위기의 대기실이 가벼워지자 김관수 관장이 너무 긴장이 풀리는 것은 좋지 않다 생각한 듯 ‘이 아가씨들아! 좀 집중 하게 이제 슬슬…!’ 하고 손가락으로 입을 가린다.
너무 긴장해서도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이렇게 너무 긴장이 풀려서도 곤란하다. 싸움을 업으로 삼은 사람은 결코 어느 한 구석에 치우침이 없이… 평정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당한 이완과 적당한 이완이 공존해야 하는 법이고…
어느 정도는 긴장함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 터라… 평소와 다른 김관수 관장의 진지한 얼굴에 예린이 ‘헙…’ 하고 입을 꾹 다문다. 그리고 그녀가 혜주에게 손짓하며 현성이 집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듯 귓속말을 속삭이자 혜주가 사뭇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관장님, 지금 상황은 어때요?”
서둘러 오긴 왔지만 경기가 시작하고 안으로 들어온 터라 예린이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듯 물음을 던지자 대기실 안의 티비 화면을 바라보던 김관수 관장이 ‘이제 막 1경기 끝나고 2경기 선수 소개 하고 있다.’ 하고 대답한다. 경기를 뛰는 선수만큼이나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선수의 트레이닝을 이끌어내고 함께 승리를 위해서 뛰어온 트레이너일 것이다.
김관수 관장 역시 베테랑이지만… 그 긴장감은 사라지지 않는 듯 진지한 얼굴에 예린이 ‘아…’ 하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김관수 관장 역시 그의 데뷔를 이렇게 일찍 가진 것에 대해서는… 부담이 없을 수가 없을 테니까.
그러다보니 혜주가 와서 들뜬 얼굴을 하던 현성도 덩달아 김관수 관장과 함께 긴장한 얼굴이다. 격투기 특성 상 매 경기가 어느 시점에서 끝이 날 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항상 평정심을 가지고 플랜을 되새겨야 한다는 그 말을 잠시 잊었던 것을 반성하는 듯 다시 현성이 숨을 고르고 평정을 되찾는다. 이내 혜주와 예린의 등장으로 들떴던 대기실이 한층 차분해지는 동안… 김관수 관장이 막 경기가 시작되자 마자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홱 뒤돌아서서 현성을 바라본다.
“게임 플랜 다 기억 하나?”
항상 다정하기만 하던 김관수 관장의 엄한 물음에 현성이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잠깐 들뜬 기분에 흔들리지 않았다는 듯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 모습에 이내 김관수 관장도 만족한다는 듯 씩 웃음을 터뜨린 채 ‘시작은 뭘로?’ 하고 물음을 던진다. 그 물음에 현성이 2달이 넘는 기간동안 함께 트레이닝 했던 방식을 떠올리며 ‘잽.’ 하고 대답하자 김관수 관장이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절대로 영찬이가 가까이 들어오지 않도록 해야 된다. 어제 계체량 때 몸 봐가 알겠지만… 가 몸은 보통 데미지로는 넘어지지 않을거라. 민욱이카면 목도 두껍고, 일단은 몸 자체가 갑옷 같은 몸이다.”
그 말에 계체량 사진을 본 혜주가 조금 불안한 듯 힐끔 현성을 바라본다. 확실히 그가 웨이터를 그만두고 마음먹고 운동하기 시작하면서 무척이나 빠른 시간동안 몸이 변화하긴 했지만 족히 수십년은 운동을 해온 것 같은 영찬에 비하면… 그렇게 우락부락 하지 않고 적당히 눈이 즐거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게 못내 걱정되는 듯 한 그녀의 모습에 현성이 괜찮다는 듯 차분한 얼굴로 웃음을 짓는다.
“갑옷도 두드리면 뿌사지잖아예.”
평소 보이는 얌전하고 조용한 모습과 달리 그 순간만큼은 그도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생각한 듯 과감한 발언을 던진다. 그 말에 김관수 관장이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니한테는 타고난 무기가 있다. 아마… 영찬이도 함 맞아보면 생각이 달라질끼라.”
그간 날려먹은 미트만 몇 개인지 모르겠다는 듯 김관수 관장히 후후 웃음을 터뜨리자 다시 대기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진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까처럼 그렇게 들뜨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다. 어딘가 진중한 가운에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그 모든 기대가 양 손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 현성이 잠깐 눈을 감는다.
말없이 그의 등을 다독이고 있는 혜주 뿐 아니라 기철이나 예린, 태수… 김관수 관장을 넘어서서 직접 오진 못해도 어제 전화 통화로 파이팅을 이야기 해주던 범수나 덕기. 그리고 아영까지.
“내 절대로 안 집니다. 관장님.”
이상하게 팔자가 사나워 그런지, 아니면 인상이 사나워 그런지 원치 않는 싸움들은 즐비했으나… 싸움을 단 한 번도 즐긴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싸움에서 단 한 번도 져본 일이 없다는 듯 현성이 준비가 되었는지 단호한 결의를 꺼내든다.
아영이 열어준 길. 그리고 스스로 진희를 떨쳐내고 달려온 이 자리. 그 등 뒤를 든든하게 지탱해준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가 고개를 준비가 되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모니터에서 ‘와!’ 하는 함성이 터져 나온다. 그 순간 약속이나 한 듯 대기실의 모두가 모니터를 바라본다.
라이트급의 제 2 경기에서 터져 나온 호쾌한 KO승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다. 그 모습에 기철이 ‘저 체급선 KO 나오기 힘든데…’ 하고 생각보다 경기가 빠르게 시작될지도 모르겠다는 듯 힐끔 현성을 바라본다.
“자, 워밍업 좀 하고 있으라. 몸에 열이 식으면 안 된다. 적당히 열을 받아 놔야 된다. 기철아!”
예정된 수순처럼… 김관수 관장이 기철에게 미트를 던져 준다. 기철이 후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채 현성을 바라본다.
“테이크 다운만 조심하면 된다, 현성아.”
“예, 행님.”
그리고 기철이 미트를 내밀며 ‘자, 차근차근… 해보자!’ 하고 그의 기억을 되새겨 주려는 듯 자세를 취한다. 재미있고 즐겁지만… 또 너무나도 믿음직한 김관수 관장과 기철의 모습에 현성이 옅은 미소를 짓다가도 후우 하고 숨을 내뱉으며 집중을 하곤 천천히 미트를 때리기 시작한다.
-팡, 팡…!
긴장을 해서 그런지 몸이 조금 무거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새삼스럽게 어깨도 뻣뻣해진 것 같고… 이 상태로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동시에 그를 미워하는 듯 한 영찬의 얼굴이 떠오르자 순간 현성이 내딛던 주먹을 멈칫한다.
“자, 좀 더 슬로우하게 힘 빼고!”
그런 그에게 그래선 안 된다는 듯 김관수 관장의 엄하지만 자상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그 소리에 현성이 이래선 안 된다는 듯 다시 한 번 마음을 굳게 먹는다. 인간이란 이렇듯 약해져서… 혼자였다면 아마도 마음을 먹었다가도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를 잡아주기 시작하는,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내 현성이 김관수 관장의 말을 따라서 다시 한 번 더 경쾌하게 스탭을 밟으며 몸의 리듬을 살린 채 조금 슬로우하게… 서두르지 않고 미트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팡…! 팡…!
최대한 힘을 빼고서… 경직되어 있는 몸을 풀고자 그가 집중을 하는 동안 혜주가 예린과 함께 그 듬직한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기겠제…?”
하지만 그 어떤 상대가 되든 그가 싸우는 것을 보는 게 마음이 편치 않겠다 싶었던지 혜주가 걱정스럽게 예린에게 물음을 던진다. 겉으로 보기엔 무척이나 까칠해 보이지만 사실은 속이 너무 여려서 일부러 더 그런 척 하는 언니란 걸 아는 예린이 걱정 말라는 듯 혜주의 손을 꼭 잡는다.
“당빠 현성이 오빠가 이겨요! 언니, 내기 할래요?”
입버릇처럼 하던 그 말을 예린에게 듣자 혜주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당연히 우리 현성이가 이기지, 바보야. 그냥…”
그리고 우물쭈물하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녀가 잠깐 멈칫한다. 이내 점차 미트를 두드리는 속도를 높여가는 그를 바라보며 속삭인다.
“…한 대도 안 맞았으면 좋겠다.”
승패를 떠나서 그가 더 이상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그녀의 간절한 마음에 예린이 말없이 혜주의 어깨를 다독인다. 그리고 그렇게 대기실의 토네이도 짐 식구들이 제 4경기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현성의 움직임이 다시 가벼워지고 천천히 몸에 열기가 퍼지기 시작할 무렵.
“장현성 선수! 어서 입장 준비 해주세요! 금방 경기 끝나자마자 케이지 안 정리 되는대로 입장 하셔야 하거든요!”
3경기가 채 끝이 나기도 전에 스태프가 숨을 몰아쉬며 달려와 현성을 부른다. 그 모습에 김관수 관장이 모니터를 꺼버리고는 현성과 기철, 태수, 예린, 혜주를 바라보며 잠깐 숨을 들이쉬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 한다.
“준비 됐나?”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그의 음성. 현성이 김관수 관장을 바라보며 적당히 열기가 오른 몸을 느끼며 숨을 고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이제 잘 될 일 밖에 없심다.”
그 결연한 음성에 김관수 관장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곤 현성의 등 뒤에 손을 올린다. 그리고 그가 현성이 가는 길… 이겨낼 수 있도록 뒤에서 계속 지탱하고 밀어주겠다는 듯 두 손에 힘을 가득 실어 그 어깨를 움켜쥔 채 소리친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