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55화 (55/281)

- 55 회 - 괴물

밤새워 놀던 이들도 모두 잠이 들 법한 새벽은 언제나 현성과 혜주가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다른 사람들은 전혀 존재 하지 않는 둘 만의 시간. 그 고요한 적막감 속에서 평소보다도 더 조용한 그를 돌아보며 혜주가 알만하다는 듯 느긋한 웃음과 함께 치 하고 입술을 삐죽 내민다.

“니 또 무슨 일 있제?”

새침하게 그를 돌아보며 그녀가 옅은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넨다. 새벽의 쌀쌀함에 발그레하게 물든 뺨을 하고서 새침하게 물음을 던지는 혜주의 모습에 말없이 함께 걷던 현성이 ‘아…’ 하고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평소와 같이 말수 없는 그를 보기만 해도 혜주는 신기하게도 그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기분인지를 헤아리는 듯 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상태를 알 수 있는 사람… 그게 참 신기하단 생각에 그가 사나워 보이는 용모와 달리 순하디 순한 눈빛으로 웃음 짓자 혜주가 ‘또 뭔데!’ 하고 팔짱을 낀다.

“또 뭐가 그카는데? 내가 다 해결주께! 뭔데? 그 서울 여자가 뭐 혹시 성희롱이라도 하더나?”

택시에서 내려 이제 거의 그녀의 집 앞까지 다다랐을 때. 이제 곧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다보니 마음이 조급한 듯 그녀가 평소보다 말 수 없는 그 대신 평소보다 더 애교 섞인 모습으로 이야기를 재촉하자 현성은 그저 웃음만 나오는 모양이다.

“아니요… 그런 거 아니구요.”

지선이 성희롱이라니… 그건 내심 또 혜주가 질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가 옅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흔든다. 그리고 그녀의 오피스텔 앞. 그 앞에 멈춰선 채 그가 ‘음…’ 하고 생각하다 거짓말은 역시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그냥…’ 하고 이야기 한다.

“…가 만났어요. 편의점.”

“…가를 왜…?”

“방송에… 그때 일 이야기 해준다고… 근데 그 전에 미안하다… 얘기 하고 싶다 캐서…”

옅은 웃음 뒤에 또 다시 한 숨. 그 모습에 혜주가 우두커니 서서 그를 바라본다. 이제 곧 헤어져야 할 위치라고 하지만… 이런 얼굴을 보니 보내고 싶지 않다. 그리고 헤어지고 싶지도 않다.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걸음을 멈춘 채 ‘거서 또 뭐라 카던데?’ 하고 물음을 던진다.

“별 이야기는… 안 했어요. 그냥… 뭐 미안하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머리 끄댕이라도 확 잡아 당기지!”

그것도 마음에 안 드는 기집애라는 듯 혜주가 덩달아 벌컥 화를 내며 이야기 하자 현성이 푸훗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저 그카면 경찰서 끌려가요, 누나.”

“뭐… 아무튼! 뭐 우에 됐는데…?”

그리고 그녀가 그 말 없이 생각에 잠긴 얼굴이 그 일 때문에 그런가 하고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보자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흔든다.

“그냥… 미안하다 카니까… 다음부터는 그카지 말라고… 예. 그냥… 그래 됐어요.”

정말로… 별 일은 아니라는 듯 그가 대답하자 혜주가 ‘응?’ 하고 그를 바라본다.

“혹시 뭐… 가가 미안하다 캐가 그냥 덜컥 그래… 괜찮다 이칸거가?”

그 성격 상… 남에게 싫은 도리는 도통 할 줄을 모른다. 그리고 혜주가 기억하는 진희의 모습 역시 그렇게 못 된 얼굴은 아니었던지라… 아무래도 이 답답한 녀석이 울며 미안하다고 하니 또 그대로 받아들였을 것이라 보지 않아도 그림이 척 떠오른 모양이다. 그 모습에 현성이 쌀쌀한 새벽녘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정곡을 찔린 듯 웃음을 터뜨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혜주가 ‘니는 정말!’ 하고 그의 가슴팍을 찰싹 때린다.

“가 때문에 그래 고생 해놓고 우에 그래 하노…! 니는 속이 없나!”

너무나도 착해 빠진 그를 보니 답답한 기분까지 드는지 혜주가 금방 또 글썽하는 눈으로 그를 나무라자 현성이 그저 옅은 미소를 더한 채 고개를 흔든다.

“그냥… 지금도 그래요. 말이야 그래 하긴 했는데… 아직도 가… 밉고… 또… 억울하기도 하고… 그냥 답답하기도 해요.”

그리고 꺼내든 그 진중한 음성에 혜주가 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그를 바라본다. 새빨갛게 얼어 있는 얼굴이, 그 웃음 띤… 처음에는 그녀가 그렇게 싫어 했던 사나워 보이는 얼굴이 세상 천지에 이런 바보가 없단 생각이 들자 왠지 모르게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그 모습에 혜주가 ‘추우니까 들어가서 얘기해라!’ 하고 먼저 홱 돌아서서 걸음을 옮긴다.

그에게는 뭐 하나 평범한 일이 없었다. 심지어는 이런 일들 조차도… 왜 그런 이기적인 계집애 때문에 1년 6개월을 고생하고서 그렇게 쉽게 그녀를 용서하는 것인지… 그게 잘 이해가 되지 않을뿐더러, 괜시리 그 마음고생들이 자기 일처럼 떠올라 속이 상하던지 혜주가 오피스텔 입구의 비밀번호를 누르며 울먹울먹 한다. 그런 그녀를 알고 있는 것일까? 현성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천천히 그녀의 뒤에 다가서서 평소와 다르게 먼저 그녀의 등 뒤를 꼭 끌어 안자 혜주가 버튼을 누르던 손을 멈춘다.

“…진짜 니는… 바보가…? 그런 거 내 같으면…”

“나도 다른 사람이랑 똑같아요. 생긴 거는… 이캐도.”

이제는 제법 여유가 생겼는지 농담도 꺼낼 줄 아는 그 말에 혜주가 ‘니가 뭐!’ 하고 소리치며 그의 품에 몸을 기댄 채 그를 돌아본다. 그 화가 난 눈빛에 현성이 옅은 웃음을 띤 채 ‘그냥…’ 하고 이야기 한다.

“그냥… 가 때문에 그칸 게 아니고… 내 때문에 그 칸거에요.”

“…뭐를…”

“붙잡고 있어봐야 암 것도 안 되잖아요. 시간 지난거는 돌아오는 거도 아니고… 그걸 또 보상 해달라고 그칼 수도 없는 거고… 만약에 가가 그냥… 그캤으면 미안하다 카지도 않았을 거에요. 아니, 그냥… 그런 거 떠나가… 내가 힘든 만큼 니도 괴로워 해라 그래 살아선… 그런 맘 가지고 있는 내내 계속 그 생각이 날 거니까…”

그도 그냥 내린 결론은 아니라는 듯 수덕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그만큼이나 속 상해하고, 화를 내는 그녀를 위로하듯이 부드럽게 끌어안고서 속삭이자 그 말에 혜주가 ‘그래도… 억울하잖아.’ 하고 저도 모르게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야기 한다.

“그캐도 시간은 안 돌아오잖아예.”

그런 그녀에게 그가… 20살이라기엔 너무나도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 말에 혜주가 ‘니는… 진짜…’ 하고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몸을 돌려 그의 목을 꼭 끌어안는다.

“…니는 진짜… 바보 빙시다… 나는 진짜… 그런 거는 용서가 안 될 거 같은데…”

자신의 일이 아니라 그의 일이라고 해도… 같은 여자로써 왜 그랬는지 어렴풋이 이해 할 수 있어도 머리와 가슴은 다른 신체부위였다. 같은 몸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는 부분이기에, 그 가슴이 지금 이 앞에 있는 남자를 너무 사랑해… 그런 입장 따위는 고려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확신을 담아서 한 말. 그 말에 현성이 더욱 더 꼭 혜주를 끌어안고서 그 결정을 내리고도 계속해서 남아 있는 그 여운들을 이제야 떨쳐낼 수 있다는 듯 미소 짓는다.

“그냥… 가도… 내도 그 일 때문에… 너무 시달렸잖아요. 이제… 내 앞으로 가야 되니까… 더 이상 거기 붙잡히면 안 되니까. 모르겠어요. 그냥… 가도… 좀 딱하기도 하고… 내가 빙시 같아가 그카는지…”

“아이다! 니 그런 거 아이다! 빙시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리친 그녀의 목소리에 현성이 다시 푸훗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빙시… 아이라 카면서 빙시야 하면…”

“몰라! 진짜… 니는… 니 같은 순둥이는… 우에 살래, 앞으로! 바보야!”

톡톡 쏘는… 그러나 한 없이 사랑스럽고 다정한 그녀의 눈빛에 현성이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인다. 아직까지도 이 연애가… 이 첫사랑이 어색한 구석이 있는지 그가 그저 옅은 미소를 띤 채 ‘그건 잘 모르겠어요…’ 하고 대답하자 혜주가 치 하고 입술을 내민 채 다시 그를 꼭 안는다.

“니는 너무 착해 빠져서… 내 같이 좀 못된 아가 옆에 있어야 된다.”

추운지 코를 훌쩍 하며 이야기 하는 그 모습에 현성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는다.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그녀만 같이 있으면 자꾸만 말이다. 그 기분 좋은 웃음에 혜주가 얼굴을 붉힌 채 ‘뭐… 왜…’ 하고 부끄러운 듯 그를 바라본다.

“…누나도 하나도 안 못 됐는데. 아니,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착한데.”

그리고 그가 혜주가 다시 뭐라기 전에 그녀를 안고서 머리를 쓰다듬자 순간 뭐라 이야기 할 타이밍을 잃은 듯 혜주가 멈칫한다. 그리고 그녀가 그 기분 좋은 손길이 ‘왜, 왜 카는데…’ 하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속삭이곤 이내 추운 날씨에 발그레해진 얼굴보다도 붉어진 얼굴로 홱 돌아선다.

“춥다… 드가서 얘기하자…”

그 말에 현성이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아… 예…’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내 혜주가 다시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자 지잉 하고 자동문이 열린다.

“…빨리 온나.”

그리고 혜주가 다시 코를 훌쩍이며 안으로 걸어가 손을 내민다. 그 손을 꼭 붙잡고서 함께 걸음을 옮기며 현성이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응…”

“내 있잖아요.”

그리고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바깥의 차가운 바람이 막히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한 기운이 맴도는 것 같았다. 그 온기를 느끼며 혜주와 함께 계단을 올라가며… 현성이 내내 생각하고 있던 이야기들을 꺼내 놓는다.

“가… 실수로 그칸거니까… 무서워서 못 한 거니까…”

“…진짜 순해 빠져가…”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이내 그가 걸음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 한숨에 혜주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본다. 어느 샌가 그 눈가에 글썽한 빛이 보인다.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나는 착한 눈빛이 왜 금방 울 것 같은지… 그 생각이 들자 혜주가 가슴이 두근두근두근 거리는 것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왜…?; 하고 물음을 던지며 그를 바라본다.

“나도… 실수 했잖아요.”

“그, 그거는… 가 도와줄…”

그 순간 혜주가 다시 말을 하려다 멈칫하고 그를 바라본다. 센서가 불을 켜놓은 것이 시간이 지나 꺼져버렸지만 그의 얼굴에 나 있는 화상 자국은 그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그녀의 눈에 들어온다. 그 얼굴을 바라보던 혜주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대답한다.

“그거는… 니 진짜 어렸을 때 잖아…”

그 떨리는 목소리에 현성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든다. 아무리 어렸을 때라 하더라도 그 날에 새겨진 기억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죄책감 역시. 그걸 무어라 이야기 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그에겐 그 용서가 어쩜 첫 걸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일을 스스로의 잘못이라 여기고… 평생의 업으로 여기고 있는 그에겐 말이다.

그 순간 혜주가 ‘그게 왜… 니 잘못인데!’ 하고 결국은 왈칵 눈물을 쏟으며 계단에서 그를 끌어 안는다. 품에 안긴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현성이 그 하루 내내…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았으면 하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기분을 목구멍 너머로 꿀꺽 삼키며 이야기 한다.

“내 이제는 진짜 잘 되고 싶어요…”

이제는 혼자가 아니니까. 아직까지… 스스로 용납할 수 있을 만큼 시달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영이나, 혜주… 그리고 주변에 생겨나기 시작한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리 되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가 위해서 그칸 게 아니에요. 이거도 해봐야… 할 수 있잖아요.”

그 서글픈 목소리에 혜주가 ‘응…’ 하고 흐느끼며 그를 꼭 안는다. 남들보다 몇 배는 크고, 또 강하고 억세 보이지만 이다지도 슬프고 여리다.

“잘 될 거다… 꼭… 진짜로…”

눈물을 훔치며 온 힘으로 그를 위로해주는 혜주의 모습에 현성이 옅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야만 할 때다. 더 이상 사로잡혀 있지 말자… 그렇게 마음의 결론을 내리며, 그 용서는 스스로를 용서하기 위한 첫 걸음임을 되새기며 그가 다시 그녀를 온 힘으로 끌어안는다.

“예. 내 빙시 아니잖아요.”

이전과는 다르게 걱정 말라는 듯 한결 힘이 실린 목소리로 대답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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