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54화 (54/281)

- 54 회 - 괴물

“후우…”

“…많이 긴장 돼요?”

함께 걸음을 옮기는 지선의 말에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흔든다. 이제는 봄기운이 완연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지만 아직도 해가 떨어지고 나서는 쌀쌀한 구석이 있었는데, 여전히 동장군의 심술이 극성인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심술도 더 이상은 차갑지 않다 느끼며 그가 걸음을 내딛곤 진희와 만나기로 한 카페 앞에 한 걸음 멈춰 선다. 후우 하고 다시 한 번 한숨 같은 숨을 내뱉으며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생각하던 그가 이내 힐끔 지선을 돌아본다.

그와 마찬가지로 거의 잠을 자지 못한 듯 피로해 보이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는 ‘이제는 모두 떨쳐 내고 나아가야 할 때다.’ 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그의 잘못이든 아니든, 그에게 씌워진 모든 허울들을 벗어내고 나아가야 할 때. 그 눈빛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카페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아직 퇴근 시간 전이라 카페 안은 상당히 한산한 구석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더욱 더 쉽게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창가에 조금 굳은 얼굴로 자리한 아이보리색 코트를 입은 자그마한 여자… 그 날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인 것만 같은…

“진희 씨!”

잠깐 멈춰 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지선이 그의 등을 다독이며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긴장한 듯 숨을 고르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진희가 그 목소리에 움찔하며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곧… 그와 그녀가 눈이 마주치자 무어라 이야기 할 지 몰라서 다시 겁을 먹은 얼굴로, 또 다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그녀가 꾸벅 인사를 한다. 그 인사를 받으며 현성이 정말로 이 사람과는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자 지선이 ‘가요…’ 하고 그의 등을 한 번 더 어루만진다. 그 손길에 용기를 낸 듯 현성이 무겁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다.

“…잠은 좀 잤어요…?”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지선이 밝은 목소리로 물음을 던지자 진희가 살짝 고개를 흔든다. 채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죄책감 가득한 얼굴.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현성이 한숨이 나오던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괜시리 담배 생각이 나는지 품을 뒤지다가도 아니라는 듯 멈칫하고는 그가 다시 힐끔 그녀를 바라본다.

“음… 그러니까…”

지선이 어색하게 두 사람 사이를 끼어 들어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그녀로써도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은 듯 번갈아 그들을 바라볼 뿐이다. 그 어색하고, 무거운 정적 속에서… 은인을 외면했던 소녀가 먼저 입을 연다.

“…죄송해요…”

고개를 푹 숙인 채 이야기를 꺼내는 그녀의 말에 현성이 정말 뭐라 이야길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든다. 용서… 할 일이 아니다란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런다 한들 또 뭐가 달라질까 싶기도 하지만 머리와 심장은 아무래도 같은 몸, 다른 곳인 모양이다.

“그래 미안했음 좀 일찍 얘기 해주지 그캤어요.”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는 달리 가시 돋힌 그 모습이 마치 처음에 만난 그 모습 같단 생각이 들었던지 지선이 움찔하며 그를 바라본다. 그 순해빠진 남자가 이렇게 날이 선 목소리로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단 생각과 동시에… 얼마나 그 일이 그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으면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지 그녀가 측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날이 바짝 선 감정만으론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눈물을 글썽이며 진희가 훌쩍이기 시작하자 지선이 ‘자, 잠깐… 진정 좀 해요…’ 하고 현성을 만류 한다. 그 말에 현성이 숨을 깊이 들이 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진희를 향해 이야기 한다.

“내 솔직히… 뭐라 얘길 해야 될 지 모르겠네예. 그 날 내가 왜 캤나 매일밤마다 후회 했심다. 못 참은 내가 빙시지, 내가 빙시지 하면서… 매일 후회 했심다. 그게 아무리 나쁜 인간이라 캐도 내 손에 사람이 죽었는데, 그걸… 그 더러운 기분이 매일 밤마다 손에 들러 붙어서 사라지지 않고… 정말로 그러려고 그랬던 게 아닌데 사람들은 저 나쁜 놈의 자슥이 거짓말 한다, 정말 못 된 놈이다… 그게 억울하고 분하고 무서웠심다.”

나아가야 한다. 미적미적 거릴 시간 없이 나아가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현성이 이야기를 꺼낸다. 무어라 이야기 해야 할 지 몰랐다. 정말로… 하지만 막상 입을 열고 나니… 1년 6개월이라는 긴긴 시간 동안 매일 밤마다 괴로워하고 고민하며 생각했던 것들이 마치 잘 정리된 스크립트 마냥 술술 흘러 나온다.

“애시당초 생긴 게 이캐가 좋은 대접 못 받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나오고 나서는 이제 어떻게 될까? 그냥 내 같은 죽어 뿌는 게 다른 사람들한테 도움 되지 않나? 누가 내 죽으면 슬퍼해주기라도 할까? 그 사람이 얼마나 못된 사람이건 아니건… 그걸 떠나가 손가락질 받는 그 하루, 하루가 너무너무 힘들었단 말입니다. 근데… 근데 이제 와서…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그게 받아지겠십니까…?”

아무리 덩치가 크고, 아무리 강해 보여도… 기본적으로 여리고 순수한 사람. 그 응어리 진 마음이 새어 나오자 진희가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린다. 죄책감과 두려움.

“저는… 저는… 너무 무서워서…”

바들바들 떨며 이야기 하는 그 말. 계속해서 되뇌이는 무섭다는 말.

“내만큼 무서워 봤십니까…?”

화가 난 듯 하면서도 결국 화는 내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고 던진 그 물음은 정말로 의외였다. 무서울 것 하나 없어 보이는 그가… 그 안에서 얼마나 두려워했었는지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 막막했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는 그 감정의 잔향이 고스란히 전해져 와… 그건 감출 수 없는 죄책감으로 다시 진희의 마음을 옭아 메기 시작한다. 소리 죽여 흐느끼는 그 모습에 현성이 속에서 불이 나는지 냉수를 벌컥 들이키고는 테이블에 팔을 기댄 채 이마를 꾹 누른다.

“뭐라도 좀 얘기 해보이소. 자꾸 그카지만 말고.”

그 답답함 섞인 목소리에 지선이 자리를 옮겨 진희의 등을 다독인다. 그의 분노와 답답함을 몰느느 바는 아니지만… 이래선 미안하다 제대로 이야기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진희 씨… 진희 씨를 나무라는 게 아니니까…”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 아이처럼 울며 고개를 흔들자 다시 또 맘에 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현성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정말로 무어라 이야기 해야 할 지 모를… 얼굴이었다. 원망하고, 화를 내고, 따지고 싶지만… 가슴에 답답하게 쌓여 있는 이 응어리들을 시원하게 풀어내고 싶지만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 애’는… 그만큼이나 답답한 구석이 있었으니까.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미안해요 하고 그 말만 되풀이하며 바라보는 진희의 눈빛에 현성이 두 눈을 질끈 감는다. 미안하다는 말만밖에는 할 말이 없는지 계속해서 그 말만… 다른 말이 뭐가 필요하겠는가? 그저 그 말만 더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감았던 눈을 다시 뜨고 한숨을 푹 내쉰다. 분명히 그녀도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누가 누굴 나무란다 해서 나아지는 것은 없다. 그 마음도 편치 않았던지 현성이 참 무르기 그지 없는 자신을 향해 쓴웃음을 띤 채 이야기 한다.

“…하나만 압시다. 왜 캤는지… 왜 얘길 안 했는지…”

진희에게 자신은 그 이야기를 들을 권리가 있고, 그녀 또한 그 이야기를 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는 듯 그가 이야기 한다. 2년 전 여름. 그 날 멈췄던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리 해야만 한다는 듯 한 그의 목소리에 진희가 눈물을 닦으며 그를 바라본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나무라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막막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왜 그랬는지 이야기 해달라 요청하고 있었다. 그게 너무 막막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차마 그 눈을 계속 볼 수 없어 다시 고개 숙인 채… 그녀가 힘겹게 말을 꺼낸다.

“…아무한테도… 얘기를 못 했어요…”

비단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경찰 뿐 아니라 그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날의 기억이 그에게는 끔찍스러운 살인의 감각으로 남아있다면 그녀에게는…

“우리 집… 엄마랑 둘이 살고 있어서… 그래서… 아무 한테도…”

훌쩍이며 고개를 흔드는 그녀가 그를 바라본다. 자신의 사정을 조금만 헤아려 준다면, 그래서 조금이라도 덜 화를 내준다면 좋겠단 그 눈빛에 현성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담배 필터를 씹어 먹은 마냥 씁쓸한 입맛이 가득 차고 있었다. 편모 가정.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연약한 여고생.

“…잘 해주시던 분이었는데… 그래서… 미안해요… 나는 진짜 어떻게 못 하겠어서… 너무 겁이나서…”

다시 한 번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녀가 고개를 흔든다. 지선으로부터 그녀가 그보다 1살 많다 이야기를 전해 듣긴 했다. 하지만 그때의 그나… 그때의 그녀나. 여전히 교복을 입은 어린 나이였을 뿐이다.

“그래서… 말 못 했어요… 그래서… 너무 미안해요…”

다시 온 얼굴을 눈물투성이로 물들이며, 한산한 카페의 종업원과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그녀의 모습에 현성이 갑갑한 듯 눈을 감고 만다. 그리고 아무런 말 없이 그가 창가로 고개를 돌린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가득한 거리에 이제 하나, 둘 네온사인들이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을 때 진희는 계속해서 고개를 숙인 채 ‘미안해요, 미안해요…’ 하고 그가 그만큼이나 2년에 가까운 시간을 괴로워한 듯 끝도 없이 그 말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흘러가버린 시간은 돌아오질 않았다. 원망도, 억울한 마음도 모두 가시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괴롭게 한들… 무엇이 나아질까? 그 생각으로 착잡한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는지 쓰디 쓴 그 얼굴에 지선이 두 사람 모두 안타깝다는 듯 한숨과 함께 그들을 바라본다. 현성의 억울함도… 그리고 믿고 따르던 목사님에게 그 일을 당하고 아무에게도 얘기 하지 못한 진희도… 두 사람의 심정 모두를 모를 바는 아니었다. 분명히 그건 그녀의 실수이자 잘못이었지만…

결국은 그도, 그녀도 그날의 희생자였을 뿐이다. 그걸 위해서는 현성이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고 또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하겠지만… 그 수밖에 없었다. 그 인생이 너무나도 고달프단 생각에 지선이 한숨을 푹 내쉬며 그를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지 입을 꾹 다문 채 한참이나 창가를 바라보던 그가 이내 눈을 감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담부터는…”

울컥하고 목이 메인 듯 쉽지 않게 이야기를 꺼내는 그 모습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진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본다. 그녀 자신도 매일 밤마다 악몽을 꿀 만큼 괴로움이 시달려 왔다. 그녀를 도와주었던 그가 살인자로 몰리고, 손가락질 받으며 괴로워하는 동안 그녀도 단 한 번도 편안한 맘으로 잠들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이 사라지질 않는다. 미안하다 이야길 해도… 자기 자신이 생각해도 그 덕분에 인생이 망가졌고, 2년이라는 긴 시간을 잃게 되었는데 그걸 용서 할 수 있을까…? 아니, 못 할 것이다.

“…그캐도 안 되겠지만… 그러지 마이소.”

하지만 그는 결국 한숨과 함께 용서의 한 마디를 내뱉는다. 후우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현성이 그녀를 바라보곤 ‘이젠 다 잊어 버립시더.’ 하고 고개를 흔든다. 더 이상 붙잡고 있어 봐야 그에게나, 그녀에게나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과거가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붙잡고 늘어져선 곤란하다. 그게 그의 결론이었다. 아직까지 감정적으로 그것들을 모두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 지금도 눈 앞에 있는 여자 때문에 인생이 망가졌다… 원망은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그걸 안고 있다 해서 더 나아질 길은 없었다.

“다… 그냥… 예.”

무어라 이야기 할 수 없는 그 멍한 기분에… 그저 한 걸음 내딛는 것만을 생각하며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말에 진희가 소리내어 울며 ‘미안해서… 너무 미안해서…’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동안 지선이 글썽글썽한 눈에 입술을 꼭 깨물고 그녀의 등을 다독인다.

“…내 먼저 가께예.”

그리고 현성이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말없이 돌아서서 그가 걸음을 옮긴다. 이것으로 끝난걸까…? 모두 해결된 걸까?

“고마워요… 고마워… 흐흐흑…”

어깨를 들썩이며 그의 용서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는 그 모습을 한 번 돌아보곤 현성이 다시 카페 밖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이제 남아 있는 건… 지선의 몫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에게 이 이상을 바란다면 그건 너무 그를 과대평가 했거나… 아니면 너무한 처사일 것이다.

“하아…”

카페로 나오자마자 현성이 따뜻한 카페 안과 달리 쌀쌀한 바람이 불어온다. 하지만 시리다는 생각보단 오히려 기분 좋을 정도로 차갑단 생각에 그가 이 이상한 기분을 무어라 설명할 방법이 없는지 그저 쓴웃음을 띤 채 고개를 흔든다.

한 켠으론 손해만 보고 사는 멍청한 놈이란 생각이 들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마음이 개운한 구석도 있었다. 용서란 걸… 그 부질 없는 원망 담고 계속해서 살아가봐야 더 이상 도움이 되는 건 없을 테니까. 어려운 걸음을 내딛었다… 그 어려운 말을 내뱉고 나서 찾아온 왠지 모를 안도감. 그 순간만큼은 이상하게도 아영의 얼굴이 떠올랐던지 그가 조만간 아영이를 보러 가야겠다 생각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저벅저벅…

어쩌면 용서 받는다는 것은 짐을 덜어주는 게 아닌지도 몰랐다. 그가 아영을 도와줘야만 한다, 새로운 짐을 짊어진 것처럼… 어쩜 더 큰 짐을 지워주는 일인지도 몰랐다. 다만 그 전보다는 덜 괴로운… 그래, 짊어진 어깨를 한층 더 강하게 만드는 것.

그와 반대로 용서한다는 것은… 이상하게도 마음 한 켠의 짐을 떨쳐낸 것만 같은 시원스러운 기분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뭔가가 걸려서 멈춰버린 시계태엽이… 이제야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다시 움직인다는 기분을 느낀 채 현성이 다시 옅은 미소를 짓는다. 멈춰버린 그 날의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두 손에는 아직도 그 날의 자취가 남아 있지만… 더 이상 그것에 붙잡혀 있지 않으리라.

“바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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