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회 - 괴물
“5월 12일! 로드원 FC 미들급 86Kg 데뷔전! 드디어 결정 됐다!”
잠겨 있던 수문이 열리면 그 안에 고여있던 물들은 거침 없이 밖으로 새어나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토네이도 짐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전한 소식에 현성이 ‘아…’ 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본다.
“어제 내 정대표랑 얘기 해가 합의를 봤다! 다들 반대하는 분위기다… 뭐… 그렇다 캐도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가 있다 아이가, 현성아!”
이내 들려온 김관수 관장의 외침에 현성이 잠이 덜 깬 듯 눈을 비비며 그를 다시 한 번 바라본다. 그리고 그게 꿈이거나 잠결에 잘못 들은 소리가 아니란 것을 깨닫고는 조금 멍한 얼굴이 순간 상기된 얼굴로 바뀌며 저도 모르게 현성이 꿀꺽 침을 삼킨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데뷔전이 잡혔고, 그 날짜도 확정이 되었다. 5월 12일…! 약… 3달 뒤.
“그게… 그라면… 진짜로…?”
마냥 트레이닝만 여지껏 해오다 정말로 그 날이 정해진 게 실감이 나지 않는지 현성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음을 던지자 김관수 관장이 ‘이칼 시간 없다!’ 하고 고개를 흔든다.
“우리… 제대로 못 하면 니나 내나 내내 이거 가지고 시달려야 된다. 뭔 말인지 알제?”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현성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드디어 모든 것이 선명해지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정말로…! 두근두근두근 하고 뛰는 가슴이 멈추질 않는지 그가 김관수 관장을 바라보며 어떻게 이야기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김관수 관장이 흠흠 하고 어색하게 헛기침을 한다.
“자세한 얘기는 이따가 욜로 정대표 직접 온다 카니까 그때 함 논의를 나눠 보자. 그때?지… 이제 트레이닝 계획을 따로 잡야 할 낀데…”
음 하고 망설이는 얼굴을 한 그를 바라보며 현성이 ‘아… 예.’ 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지도 조만간 가게 그만둘낍니다.”
그리고 그가 던진 의외의 말에 김관수 관장이 ‘응?’ 하고 그를 바라본다. 혹시라도 그 사이에 스폰서가 구해져서 그런 것인가?
확실히… 방송국과 엠파이트의 후원이 있다면 이번 데뷔전 준비는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 이후의 정기적인 지원을 기대하기가 힘들지만… 데뷔전에 강렬한 임팩트를 남긴다면 충분히 그 후에 서포트를 받는 일도 불가능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데뷔전의 임팩트만큼이나 그에게는 ‘스토리’란 무기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스폰서들이 줄을 설 지도 모른다.
“지선 씨가 그래 하자 얘기 하드나?”
그 물음에 현성이 ‘아… 그거는 아니고요.’ 하고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인다. 그 모습에 김관수 관장이 그럼 방송국 후원 얘기가 아니고 뭐지? 하고 그를 바라보자 현성이 어색한 얼굴로 웃음 짓는다.
“이번 달까지만 일 해가 모아 놓고… 당분간 혜주 누나랑 같이 지내기로 했어예.”
그리고 수줍게 꺼내놓은 그 말에 김관수 관장이 그건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어?’ 하고 그를 바라본다. 혜주라면 이미 그도 알고 있다. 얼굴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으니까…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심상찮다 싶었더니 설마 이런 식으로 그녀가 그를 도와줄 것은 생각도 못했다는 듯 김관수 관장이 ‘그라몬 그 아가씨가 니 먹여 살리는기가?!’ 하고 웃으며 소리친다. 그 말에 현성이 어색하게 웃으며 ‘일단은…’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세상에… 요즘도 그런 아가씨가 다 있단 말이가?”
“저 자리 잡힐 때 까지만…이예.”
이내 그가 어제 밤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웃음 짓는다. 아직은 어리기 때문에 자신이 돌보아줘야 한다고, 사양하는 그를 붙잡고 설득하던 그 목소리. 그게 미안스럽기도 하고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최선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창피하기도 하고, 또 김관수 관장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자니 꺼내놓고서 민망한 듯 그가 어색한 얼굴을 하자 김관수 관장이 허허허허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주례는 내 공짜로 안 서줄끼다.”
그가 기분 좋은 듯 현성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자 현성이 머리를 긁적이며 ‘아, 아직 그까지는…’ 하고 고개를 흔든다. 그렇지만 좋은 기분은 감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어색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일에 집중해서 준비를 할 수 있다는 것과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진단 것 말이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김관수 관장이 일이 풀려간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흐뭇한 웃음을 짓는다.
“정대표 오면 내가 욕을 먹는 한이 있어도 계약금이랑 파이트 머니 많이 따주께.”
그 말에 현성이 ‘아…’ 하고 그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지금 당장은… 돈이 글클 욕심 안 내도 됩니더, 관장님. 당장이 아니라 나중에 많이 벌면 되니까… 지금은 먹는 거 좀 덜 먹고 하면… 버틸 수 있심다.”
“니 지금 키가 190인데 몸무게가 80킬로도 안 된다 아이가! 니 86킬로가 계약 체중인데 아직 구두 계약이라 캐도 그 몸무게 못 맞추면 어디 그래 쉬운 줄 아나? 니는 안 먹으면 안 되고 꼭 먹어야 된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온 김관수 관장의 불호령에 현성이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확실히… 신기하다고 해야 할까? 자는 시간이 줄고 운동을 하면서 살이 더 빠질 것 같았지만 틈틈이 프로틴 바나 쉐이크 같은 것을 챙겨 먹다 보니 살은 더 이상 빠지지 않았다. 게다가 원래 근육이 잘 붙는 체질이다 보니… 그리고 몸이 원래 그렇게 마를 몸은 아니었던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몸은 이전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골격 자체가 크다보니 그 자체로 위협적인 면모도 있었지만 지금은 점점 그 골격에 살을 붙여가고 있는 입장.
5월 12일까지는 어떻게든 계약 체중을 맞추고 이후에는 라이트 헤비를 거쳐서 내츄럴 헤비급 골격답게 헤비급 체중까지 몸을 키울 계획을 가지고서 김관수 관장이 자신도 그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돈 걱정은 하지 말그라. 니가 그거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거는 내가 어떻게든 처리 할 테니까 니는 내 믿고 따라오그라. 안 그래도 니 오늘 오면 진지하게 이야기 할라 그랬는데 그래 얘기가 됐다니까 다행이네. 방송국이랑 엠파이트 후원 합치고 또 계약금이랑 파이트 머니 하고 그카면 솔직한 말로 장기 후원 없어도 우리 반드시 기회를 잡을 수 있을끼다! 내 약속 안 했나? 진짜… 내가 니 후회하지 않도록 사나이 대 사나이로 다시 한 번 약속 할테니까. 이따가 오후에 정대표 오면 계약 하고 그때부터는 진짜 죽었다고 생각하고 해야 된다. 알겠나?”
그 결의에 찬 목소리에 현성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하루 자고 일어나 다시 또 달라진 것들.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가 걸어나가야 할 길이, 방향이 어디인지 너무나도 명확하다. 처음 내렸던 결심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데뷔전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고… 기필코 잘 되고야 말겠다 다짐을 하며 그가 운동을 위해서 옷을 갈아 입으러 걸음을 옮기는 동안 김관수 관장이 그를 부른다.
“근데 현성아! 지선 씨는 같이 안 왔나?”
그 물음에 현성이 ‘아…’ 하고 멈춰 서서 그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가 이내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든다.
“…어제 밤 새신 거 같던데… 나중에 연락 주시겠다 카데요…”
그녀가 어제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역시나 마냥 밝은 얼굴은 아니다. 답답한 심정은 아직도 해갈되지 않고 있다. 그 애와 지선의 이야기는 잘 풀렸을까? 그리고 이후는 어떻게 될까? 많은 의문들이 자리하고 있고 머리가 다시 복잡해져 온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모두 집어 던지고 나면 그가 해야 할 일은 지금 당장 하나 밖에 없다.
어느 순간인가부터인지는 몰라도 운동을 하고 몸을 움직이다 보면 몸만 개운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도 맑아지는 것만 같았다. 그 복잡한 일들을 모두 내려 놓고 모든 것을 풀어놓고 싶은 듯 현성이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하지요… 관장님.’ 하고 이야기 하자 김관수 관장이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자, 일단 몸 풀고 크로스핏 들어가고 그 다음에 타격 훈련 본격적으로 할끼라! 기철이 지금 예린이랑 같이 장보러 나갔는데 둘이 들어오면 기철이랑 바로 오늘부터 스파링 하면서 실전 위주로 어떻게 풀어갈지 이야기 나눈다. 알겠나? 그카고 오후에 정대표 만나가 대전 상대 확실해지면 가를 우에 잡을 건가 딱 맞춰가 트레이닝 하고.”
그의 말대로 김관수 관장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아만 한다. 그 생각에 김관장이 후후 웃으며 ‘양 껏 굴려 주께!’ 하고 이야기 하자 현성이 ‘아직은 일 다니고 있는데…’ 하고 어색하게 웃음 띤 채 탈의실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그 편이 그로써도 좋았다. 몸이 근질근질하단 생각이 오랜만에 들었던지 현성이 옷을 갈아입으며 몸을 풀어 본다. 잠시간이 부족해서 그런지 몸이 많이 무거운 기분이 든다. 하지만 금방 움직이고 나면 개운해질 것이다. 어제만 하더라도 어떻게 될 지 장담할 수 없었던 내일은… 오늘에 이르러서야 확실해졌다. 5월 12일. 로드원 FC의 대회 날. 그 날 그는 케이지에 오르게 될 것이고,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얼마나 자신이 값어치 있는 사람인가를 보여줘야 한다.
“후우…”
걱정이 되는 동시에 한 편으로는 기대감까지 드는… 싸움과는 또 다른 묘한 기분을 느끼며 현성이 다시 몸을 풀어보고는 옷을 갈아입는다. 그리고 그 와중에 락커 안에 잠깐 넣어둔 핸드폰이 부르르 하고 울리기 시작한다. 그 소리에 뭔가 하고 현성이 핸드폰을 들어 올리자 ‘지선 PD님’ 하고 저장한 이름이 핸드폰 화면에 떠있다.
“여보세요…? 어디시라예? 아직 모텔입니꺼?”
전화를 받자마자 그가 혹시 아직 모텔인가 싶은 생각에 물음을 던지자 막 자다 일어난 듯 지선이 ‘으… 네…’ 하고 무척이나 피로한 음성으로 대답한다.
“아… 그러면 오늘은 좀 쉬시지…”
그 걱정스러운 대답에 지선이 핸드폰 너머로 후후 웃으며 ‘쉴 날은 아닌가봐요.’ 하고 대답한다. 기지개를 펴는지 ‘으응!’ 하고 소리를 내며 그녀가 다시 말을 잇는다.
-오늘 정대표님 대구 온다는 소식 들어서… 그거 꼭 찍어야 되잖아요. 음… 그리고 이렇게 늘어질 시간도 없구요.
수줍게 히힛 웃음 터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현성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왠지 모르게 자신 때문에 지선이 고생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그가 ‘죄송하네예…’ 하고 이야기 하자 지선이 ‘이게 내 일인 걸요!’ 하고 다시 밝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토네이도 짐이죠? 금방 그쪽으로 갈게요.
그리고 그녀가 기운을 차린 듯 밝은 음성으로 이야기 하자 현성이 ‘예, 조심해서 오이소.’ 하고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대답한다. 그 목소리에 지선이 후후 웃으며 ‘알겠어요.’ 하고 대답하다 이내 ‘참!’ 하고 급하게 소리친다.
-어제… 진희 씨 만나봤잖아요, 나.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목소리에 순간 현성이 숨 쉬는 것도 멈춘 채 움찔하다 무거운 목소리로 ‘예…’ 하고 대답한다. 진희… 이름을 알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처음 보고 그 이후론 혜주와 범수가 편의점 들어갔을 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 전부였으니까. 불현듯 또 다시 그 날의 기억과, 다시 만났을 때 보여준 눈물이 떠오른 듯 현성이 한숨을 내쉰다.
“우에 됐심까…?”
마주하고 싶지 않지만 마주해야 한다. 조금 무거워진 마음으로 그가 당장이라도 몸을 움직이고 에너지를 쏟아 붓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동안 한결 밝은 목소리로 지선이 대답한다.
-하겠대요! 그리고… 그 전에 제대로 사과를 하고 싶대요.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