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회 - 괴물
“후우…”
깔끔한 단발머리를 쓸어 넘기며 지선이 한숨을 내쉰다. 벌써 석달째 현성이 집 대신 머물고 있는 허름한 모텔. 그 방이 못내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짐을 풀어 놓고도 기분이 개운치 않은 듯… 아니면 그것과는 별개로 기분이 무척이나 이상하던지 그녀가 카메라를 앞에 두고 ‘에휴…’ 하고 다시 또 한숨을 내쉰다.
대체 갑자기 왜 그랬던 것일까?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서 마음대로 이야기를 던져놓고 도망쳐버리듯 나온 것이 자꾸만 맘이 걸리는지… 그리고 이미 혜주와는 연인 사이와 다를 바 없는 그를… 몇 번 보지도 못한 20살의 경상도 남자를 향해 왜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인지 본인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지 지선이 ‘우우우!’ 하고 고개를 흔든다.
“…너무 감정이 이입돼서 그런가…?”
아무래도 첫 프로그램인데다 사연이 보통 사연이 아니다 보니까 잘 해야 된다는 압박감과 동시에… 공을 들인 만큼 감정이 이입되어서 그런 게 아닌가 스스로의 상태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자평을 내려 보던 그녀가 ‘그래서 그런 걸 거야.’ 하고 결론을 내린 채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그렇게 이성적으로 따져 보면 왜 또 혜주 같은 사람을 질투한 건지, 그녀에게 순간적으로나마 왜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인지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 부분들을 알고 있지만 의식적으로 뒤로 밀어놓고선 지선이 그냥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이 그에게도 반영 되었기 때문일 것이라 결론을 내리고는 뺨을 찰싹찰싹 때려본다.
“정신 차려야지… 그래, 이지선. 내가 정신 차려야지 현성씨도 잘 될 수 있고… 내 커리어도…”
엄밀히 말해서 그녀의 프로그램에서 현성은 아주 이상적인 소재였으니까. 사연도 사연이지만 타고난 재능이 있다. 사람들은 항상 천재에 열광한다. 만일 그가 오랫동안 무술을 수련해온, 일반인이 아닌 엘리트 체육인이었다면 그녀의 사촌동생 민욱을 이긴 것이 그렇게 이슈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엘리트는 커녕 아무 것도 배운 적이 없는 일반인이다. 그래서 어느 한 분야만으론 인정받을 수 없는 ‘종합 격투’의 시대 때 아닌 실전 논란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했다. 강한 것은 타고난 것인가,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인가? 그 영원한 논란에, 대다수가 후자라 이야기 하는 부분에 오랜만에 전자의 입장으로 반박을 한 셈이다.
사람들은 드라마틱한 전개를 좋아하고, 강렬함을 사랑한다. 그들에게 장현성이란 남자의 인생은 드라마 그 자체이고, 그가 보여준 재능은 충격적일 정도로 강렬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그를 반드시 띄워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가 잘 될 수도 있고 더러는 그녀도 잘 될 수 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서 지선이 왠지 모르게 서글픈 마음으로 침대 위에 올려둔 6mm 카메라를 바라본다.
“…속물 같다…”
단순히 그런 마음으로 치부해버리기엔… 어딘가 모르게 억울한 구석이 있었다. 연이어 한숨을 내쉬며 지선이 ‘치…’ 하고 괜히 입술을 내밀어 본다. 그렇지만 이 빈 방… 고요한 방. 이곳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도 마음을 헤아려 줄 사람도 없다. 그 수덕한 모습이 자꾸만 맘이 가는 건 무뚝뚝하게 입을 다물고 언제나 성심성의껏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기 때문일까? 순간 내렸던 마음이 다시 또 뒤숭숭하게 흔들리자 지선이 ‘안 돼!’ 하고 고개를 흔든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하고 답답해진 듯 그녀가 한숨과 함께 카메라를 집어 들고는 침대에서 테이블 위로 옮긴 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침대 위로 몸을 던진다. 그리고 올려다 본 천장은… 왠지 모르게 우울한 기분이 밀려오고 있었다. 쉴 수 있는 곳이긴 하지만 정이 가는 곳은 아니다.
“…이런데서… 12월, 1월, 2월… 벌써 석 달째네.”
자꾸만 그리 생각을 하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짠하게 울리고 만다. 지선이 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척이듯이 등을 돌린 채 ‘이런 곳에서…’ 하고 생각하다 순간 흠칫 하며 고개를 든다.
“…현성씨 생일… 12월 아니었나…”
모르긴 몰라도 아마 그녀가 그에 대해서는 혜주보다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녀는 혜주보다 그에게서 직접 들은 것이나 그와 공유하고 있는 것이 적겠지만… 그 서글픈 사실 너머로 그것보다도 더 가슴 아프게 그녀의 마음을 죄어 오는 건…
“…생일 때도 여기서 혼자 보냈나…?”
이제 20살. 아마 그때는 19살이었을 것이다. 그 생각에 지선이 한숨을 푹 내쉬며 을씨년스러운 모텔 방을 둘러본다. 불을 꺼두어서 그런지 우울하기 짝이 없는 그 분위기 속에서… 생일인 줄도 모르고 잠이 들진 않았을까? 아니… 그가 자신의 생일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다만 그 날은 또 얼마나 괴로웠을까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눈가가 글썽한다. 이쯤 하면 단순한 감정이입을 넘어섰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는지 지선이 흠흠 하고 뒤척이던 몸을 일으킨다.
“…그 여자나 설득 해야지…”
가만히 있으면 자꾸 그래버리고 말 것이다. 차라리 이 시간에 일을 더 하자 생각하며 그녀가 벗어두었던 까만색 가죽 재킷을 다시 걸친다.
“…이제 10시면… 왔겠지…?”
다른 사람들 앞에선 그렇지 않지만 혼자 있으면 유난히 혼잣말이 많다. 괜시리 그게 혼자인 게 싫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여기가 유흥가 근처라서 조금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생각하며 지선이 가방을 챙긴다. 기왕 나갔다 오는 거 이야기도 나누고, 맥주도 사와야겠다 생각하며 그녀가 방을 나서서 모텔 카운터로 걸음을 옮긴다. 현성이 장기투숙하고 있는 211호의 바로 옆인 210호실. 그 길을 혼자 나서며 왠지 모를 갑갑함에 그녀가 쓴웃음을 띤 채 고개를 흔든다.
그는… 매일 이렇게 이곳을 나서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에겐 촬영이 끝나면 돌아갈 집이 있다. 하지만 그에겐 그런 것도 없이 이곳에서 무한정… 기약 없이 머물고 있어야만 한다. 아무리 주변의 사람들이 친절하게, 그리고 전과 달리 거부감 없이 그를 받아준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인 부분은 여전히 같았다. 나아진 구석이 없었다.
“…휴…”
그렇게 생각을 하면 다시 마음이 또 찌릿 하고 아파온다. 부인하려 해도 단순한 감정 이입 이상을 느끼며 그녀가 다시 고개를 흔든다. 이미 그에겐 혜주라는 무척이나 예쁜… 비록 아가씨 출신이긴 하지만 무척이나 근사한 연인이 있지 않은가?
단지 그는… 망해가던 프로그램을 살려준 동시에… 망칠 뻔 한 그녀의 첫 번째 커리어를 살려준 사람과 다름 없으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최소한 그가 이런 곳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번듯한 자기 집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그녀가 씩씩하게 다시 걸음을 옮긴다.
조금은 마음이 허전하기도 하지만 그게 그녀가 해야 할 일이고, 지켜야 할 선이라고 생각하며 편의점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지선이 화려한 네온사인과 거리를 오가는 취객들을 조심스럽게 피해서 걸음을 옮기며 그 안… 가장 밝은 빛이 환한 편의점을 바라본다. 막 들어온 듯 편의점 앞치마를 메만지는 모습이 무척이나 의기소침 해보이는 자그마한 여자애. 너무 앳되어 보여서 혹시 고등학생인가 싶을 정도 작은 체구를 가진 그녀를 보니 지선이 무어라 이야기를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듯 숨이 턱 막힌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다.
처음엔 대체 어떤 나쁜 년이 그렇게 도움을 받고도 모른 척을 했나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막상 그녀를 보니 그녀는 작고 가냘퍼도 너무 가냘픈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아영이 연상되는 가녀린 모습에 그 악마 같은 인간이 일부러 저렇게 힘 없고 약한 사람들만 골랐단 생각이 오히려 먼저 화를 불러 당긴다. 왠지 모르게 신고를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 그리고 도와주었던 현성을 외면하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니라 무서워서 나서질 못했던 것은 아닌지 연민이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아 정말…”
보통 사람들과는 살아가는 세계가 다르기라도 한 걸까? 그러나 그들 역시 보통 사람들이다. 그 보통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 단지 지선이나… 정말로 평범하게 자라온 사람들이 모르는 어두운 부분이 있는 것일 뿐. 그 날의 또 다른 희생자이자… 목격자이기도 한 그녀를 향해 지선이 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딸랑딸랑…
문을 열자 익숙한 종소리가 울린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사뭇 긴장한 얼굴로 진희가 ‘어,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를 하다 여자 손님인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안녕하세요.”
그 모습에 지선이 정말 이기적인 애라서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하고 생각하며 상냥한 서울말씨로 인사하자 진희가 이곳에서 서울 사람은 처음 본다 싶었던지 힐끔 그녀를 바라본다.
“어머… 혹시 미성년자 아니에요? 너무 어려보인다.”
그리고 지선이 붙임성 있게 싹싹한 서울말씨로 이야기 하자 진희가 ‘네…?’ 하고 그녀를 바라보다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흔든다.
“저… 대학교 2학년이에요.”
낯가림이 있어 보이는 그녀이지만 상냥한 서울말씨를 쓰는 그녀가 그렇게 경계할 대상처럼 보이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도 그런 것이 근처를 오가며 술 취해 고성을 지르거나 추파를 던지는 취객들에 비하면 경계 할래야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 말에 지선이 ‘아…’ 하고 웃음을 띤 채 눈인사를 하곤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정말 아이처럼 앳되어 보이는 외모와 체구. 저런 사람을 이런 유흥가에서 야간 알바생으로 두는 게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지 그녀가 걱정되는 얼굴로 힐끔 그녀를 돌아본다.
왠지 모르게… 그녀도 뭔가 사정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벌써부터 들자 지선이 이제 제발 좀… 다들 잘 됐으면 좋겠네 하고 한숨을 내쉬며 캔 맥주를 하나 꺼내든다. 그러다 그녀가 전의 새벽날이 기억이 난 듯 하나만 사들고 가려다 맥주를 몇 캔 더 꺼내 들고 간단히 안주거리를 할 믹스너트 한 봉지를 들고 카운터로 걸어온다.
“2학년이면 이제 21살…?”
“아… 네…”
진희가 술집 아가씨가 아닌 일반 여자 손님은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지선이 ‘좋은 나이네요.’ 하고 이야기 하자 수줍은 듯 ‘네…’ 하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무척이나 내성적으로 보이는 진희의 모습에 지선이 또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고역이라고 생각한 듯 계산을 다 마치고도 카운터를 떠나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자 진희가 ‘왜 그러시는지…?’ 하고 그녀를 바라본다.
“…혹시 장현성씨 알아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지선이 기왕에 하는 거 총대를 짊어지자 하고 굳은 결심을 하며 돌아가지 않고 그의 이름을 꺼낸다. 그 순간 그 이름을 듣자마자 눈에 띠게 경직된 얼굴로 진희가 그녀를 바라본다.
“…왜…”
떨리는 목소리와 눈빛.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 모습에 지선이 그녀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든다. 그리고 품에서 명함을 꺼내어 그녀에게 내밀며 지선이 이야기 한다.
“X채널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지선 이라고 해요. 현성씨랑… 지금 같이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고… 그래서 꼭… 진희… 씨가 이야기를 해줬으면 하는 게 있어서.”
진희의 명찰을 바라보며 지선이 이름을 이야기 하자 순간 진희의 어깨가 크게 움찔한다. 그리고 그녀가 ‘방송국 PD…’ 하고 멍하니 명함을 받아들고 지선을 바라보자 진희의 눈빛에 지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저는… 저는…”
울먹이며 덜덜 떨고 있는 그 모습에 지선이 ‘진희씨를 나무라는 게 아니에요!’ 하고 고개를 흔든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무슨 사정이 있는지 이야기를 나눠봐야 겠다고 생각하며, 동시에 진실을 전하는 일이란 게… 이다지도 어깨가 무거운 일이란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으며 그녀가 말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 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을 돕고 싶어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진희 씨의 도움이 꼭 필요하구요. 이야기라도 좀… 나눠 보지 않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