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회 - 괴물
어느날 갑자기 행운이 찾아온다면 그것은 극적으로 모든 것을 변화케 할 것만 같은 예감을 주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행운들이나 기회는 그렇게 극적인 변화라기보다는… 단지 달라질 수 있는 여건만을 줄 뿐이다. 그 달라진 여건들 속에서 그걸 잡을 수 있으냐, 없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려 있는 일이었고 그것은 현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성아, 니 요새 뭐 그래 먹고 다니노?”
최근 현성이 운동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범수가 한산한 8시 타임, 프로틴 바를 먹고 있는 그를 보며 물음을 던진다.
일 없이 같이 서있기도 민망한 와중에 부스럭 거리며 바를 먹던 현성이 그 물음에 조금 민망한 듯 자그마한 프로틴 바를 한 입에 쏙 넣고는 우걱 우걱 씹으며 이야기를 하려 하자 범수가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천천히 얘기 해라. 손님도 없는데.’ 하고 그 어깨를 두드린다. 범수의 말에 현성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잠깐 말을 멈추고 프로틴 바를 씹어 삼키곤 어색한 얼굴로 이야기 한다.
“이거… 관장님이 틈틈이 챙겨 먹으라고 하셔가.”
“아… 맞나? 몸 좀 불리고 할라꼬?”
범수도 헬스장은 꽤나 다녀본 경험이 있던지 혹시나 하는 그의 물음에 현성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키는 큰 데 몸이 너무 말랐다 캐가… 적당히 체중 잡을 때 까지는 틈틈이 계속 먹어주라 카더라구요. 그래가지고…”
그 말에 범수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 보니 처음 봤을 때 보다 얼굴이 많이 홀쭉해진 감이 적잖게 있었는데, 처음에도 덩치는 컸지만 그렇게 살집이 있는 모양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것이 소년원에서 나온 이 후 이 일을 하게 되면서 조금 더 살이 많이 빠졌던 모양이다. 원 내에 있을 때에는 그나마 규칙적인 식사라도 가능했지만 웨이터 생활을 하면서 생활 패턴이 망가지고, 수익도 안정이 되지 않다 보니 마음 놓고 식사도 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리고 이런 저런 일로 마음고생이 많다보니 살이 찔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밤 일 하면서 술 살 늘어나는 사람들은 더러 봤지만 이렇게 단기간에 살이 많이 빠진 것 같단 그 모습에 범수가 조금 안타까운 얼굴을 하자 현성이 ‘원래 먹는 거 많이 좀… 안 챙기는 편이라가…’ 하고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인다.
“근데 진짜 빡시게 챙겨 무야 되겠다. 니 운동도 하고 여기 일도 할라 카면… 야, 하나만 올인해야 되는 거 아이가? 그냥 있기만 해도 피곤한데 밤에는.”
걱정스러운 그의 목소리에 현성이 그저 쓴웃음을 띤 채 어깨를 으쓱한다.
“아직은… 아직은 그런 게 안 되니까…”
선수로 데뷔를 결정했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만 했다. 토네이도 짐의 소속 선수가 되고, 엠파이트의 오형석 대표와 지선이 일을 돕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어떤 단체와 계약된 바가 없고, 어디서 데뷔를 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보니 거기에 모든 것을 내던질 수는 없었다.
항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보이는 것 이상으로 세상의 벽은 여전히 높고 각박하다. 방송이란 것을 통해서, 그리고 인터넷 여론이 형성 되면서 모든 일이 순차적으로 풀려나갈 것 같았지만 그 파급효과는 그렇게 크지만은 않았다. 단순한 케이블 프로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그를 이해하도록 만들었지만… 아직까지 그 근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여전히 장현성은 ‘범죄자’ 혹은 ‘살인자’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니까. 아직까지 국내 격투 단체와의 협의가 결정되지 않은 와중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데뷔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일 밖에 없었다.
그리고 혹시나 그 한 여름 밤의 꿈 같은 일들이 현실의 벽에 부딪쳐 사라지고 녹아 내려서… 없어지게 된다면 다시 돌아올 현실에 대한 대비도 필요한 법이었고. 물론 그게 잘 될 것이라는 기대보다는 워낙에 그 인생이 각박하다 보니 어느 정도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지만 현성으로써도 그 일이 초조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말 없이 작은 한숨을 내쉬는 그를 보며 범수가 어깨를 두드리자 현성이 다시 슬쩍 웃음 짓는다.
“암튼 뭐… 요즘 뭐 배우는데? 암바 같은 거 그런 거 배우나?”
범수의 물음에 현성이 ‘아… 그런 거는 아이고예…’ 하고 고개를 흔들자 하나 들어온 룸에 잠깐 서빙을 갔다 온 덕기가 ‘암바? 암바?’ 하고 재빨리 대화에 끼어든다. 동갑 내기 친구의 사정이나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 모습에 현성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그런 거 아이고…’ 하고 고개를 흔든다.
“그냥 가면… 기본적으로 체력 훈련 같은 거 그런 거 많이 해요. 아직까지 뭐 딱히… 그런 거는 없고 그냥 간단한 기초 체력 트레이닝 같은 거…”
물론 그로서도 시작하기 전에 많은 염두를 둔 것이 격투기 선수가 되면 어떤 훈련을 하는가였지만 생각과는 다른 구석이 있었다. 아직까지는 몸이 굳어 있기 때문에 몸을 풀어주는 기간이 필요하고, 가장 필요한 부분을 먼저 해야 한다는 김관수 관장의 이야기를 따라서 크로스핏 같은 운동을 하고 있는지라 딱히 이야기 해줄 거리가 없다는 생각에 현성이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인다.
“아… 아직 뭐 하이킥 이런 거는 안 배우나?”
“어… 그런 거는 아직. 낼부터 가면 기초적인 타격 같은 거도 슬슬 시작하자 카던데 잘 모르겠다.”
덕기의 물음에 현성이 고개를 흔들자 덕기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20살 남자에게 프로 파이터란 것은 여전히 환상이 있던지 덕기가 ‘진짜 뭘 해도 니는 거기선 대박 날 거 같다!’ 하고 다시 엄지를 든다. 그 모습에 현성이 민망하기도 하고 부담스러운 듯 어색한 웃음을 짓지만 내심 걱정되는 구석이 있었던지 ‘잘 되면 좋지…’ 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오형석 대표나 지선, 그리고 몇몇 격투 팬들은 그의 사연에 관심을 보였지만 실질적인 격투 단체들이 실질적으로 흥행면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판단을 내린다면 상황은 어려워질 것이다. 물론 ‘주먹이 운다!’라는 프로그램 자체가, 그리고 오 대표의 영향력이 있기 때문에 김관수 관장이 걱정은 하지 말라 했지만 마음이 초조한 듯 그가 발을 구르다 ‘후…’ 하고 숨을 내뱉는다. 이제는 정말 잘 되어야만 했다. 그냥 단순하게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런데 혜주 누나는 근데 오늘 무슨 일 있나? 요즘 자주 쉬네.”
그 와중에 덕기가 물음을 던진다. 아가씨들이야 항상 일이 프리하고, 혜주 정도 되면 그리 많이 나오지 않아도 될만한 상황이라고 하지만 부쩍 보기 힘들어진 그녀의 모습에 ‘누나야 보고 싶네요!’ 하고 덕기가 범수와 현성을 번갈아 바라보자 그저 두 사람이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당사자인 현성이나… 아마 은연중 그 이야기들을 알고 있는 범수가 ‘누나, 이제 다른 일 할라고 준비하는갑지.’ 하고 이야기 하며 현성을 바라보자 그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흠… 내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 같은데요!”
덕기가 눈치를 채고 두 사람을 바라보는 동안 조용하던 가게 입구의 종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이야기를 나누던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현성아!”
현성에게는 그다지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에 순간 범수와 덕기가 움찔하며 ‘오셨습니까, 김 사장님!’ 하고 반사적으로 창호에게 인사를 하자 창호가 그들의 인사는 받는둥 마는둥 한 얼굴로 현성에게 다가와 ‘마!’ 하고 그를 와락 끌어 안는다.
“새끼, 히야 이제 니 방송 봤다! 와 그런 거 찍었음 말을 해야지 와 말을 안 하노?!”
아마 뒤늦게 방송을 본 모양인지 그의 말에 현성이 ‘아…’ 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든다.
“그냥… 히야는 다 아는 거라가지고예.”
그 말에 창호가 ‘하기사, 내는 다 알지!’ 하고 히죽 웃으며 무척이나 친한 척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그 모습에 현성이 순간 다시 불안한 기분을 느끼며 어색하게 웃음 짓는다. 항상 이 가게에서 일을 하면서 느끼고 있던 가장 큰 불안감 중 하나는… 이곳이 창호의 도움을 통해서 들어온 것이란 것이고, 여전히 창호는 그를 자신의 아래로 끌어들이길 원하고 있단 것이다. 선수로 데뷔를 하는 날까지도… 어쩜 하고 나서도 그것이 계속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현성이 ‘후…’ 하고 작은 한숨을 내쉬자 창호가 ‘잘 지냈나?’ 하고 물음을 던진다.
“예… 히야도 잘 지냈심까?”
“마! 내야 얘기하면 아삼륙이지! 아 요즘 너무 바빠가 죽겠다! 빨리 니 와가 같이 내 바쁜 거 좀 덜어줘야 할 낀데…”
내심 그 뜻을 비추는 그의 말에 순간 현성이 가슴을 무겁게 죄는 기분을 느끼곤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그에겐 참 고마운 사람이라지만… 지금에 와서는 고맙단 생각보단 부담스럽고… 어색한 기분이 더 크다. 물론 그 덕분에 이렇게 일을 하고 먹고 살 수 있단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많이 바쁜가봐예?”
그 물음에 창호가 ‘그래, 자슥아!’ 하고 다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뭐 여는 바쁘면 돈 되는 거 아이가? 니도 단디 준비 해둬레이.”
이미 같이 일을 하기로 한 듯 이야기 하는 그를 보며 현성이 조금 불편한 마음이 커진 듯 살짝 인상을 구긴다.
“히야. 내 아직 결정은…”
“아이, 임마. 좋은 게 좋은 거 아이가? 재운이 행님도 니 방송 보고 눈물 글썽 하시드라. 글고 금마 뭐고? 그 새끼 니가 때리쥑이삐는 거 보고는 진짜 감탄했다, 감탄! 내가 니 자랑한 보람이 있더라!”
박재운이라는 이름 석자를 연상케 하는 그 말에 순간 현성이 멈칫한다. 그 바닥의 사람들이 대체로 그러한 구석이 있었는데,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모든 것이 흘러갈 것이라 생각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무시하는 경향 말이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생각하며 현성이 ‘히야.’ 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창호를 부른다. 창호 역시 가볍게, 들뜬 마음으로 이야기 하다 그가 그를 진지하게 부르자 ‘와? 몬 일 있나?’ 하고 물음을 던진다.
“내… 프로 격투기 선수 데뷔 할라 캅니다.”
그 순간 창호가 ‘어?’ 하고 인상을 구기며 그를 바라본다. 그러다 이내 푸하핫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그 모습에 눈치를 살피던 덕기와 범수가 ‘주방에서 부르네…!’ 하고 자리를 피하자 창호가 현성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현성아!’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른다.
“니 임마. 아직 아네. 뭐 잠깐 그칸다꼬 격투기 선수 될 거 같으면… 그런 거 없다, 임마. 그런 거 해봐야 돈 얼마나 된다고… 에이, 니 원래 그래 유치한 놈 아이잖아?”
그의 결정을 아무래도 한 순간의 치기라고 생각한 듯 한 창호의 말에 현성이 조금 답답한 듯 쓴웃음을 짓는다. 미안하긴 하더라도… 건달이 될 수는 없었다. 아마 창호에게도 확실히 이야기를 한다면 그리 꽉 막히게 굴진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빠른 데뷔가 더욱 시급해지는 감도 있었지만.
“예. 압니다. 근데… 함 해볼라꼬요. 진지하게.”
그 말에 창호가 ‘어? 진짜 할라 카나?’ 하고 그를 바라본다. 들 떠 있던 기분이 내려앉은 그 모습은 자기가 생각한 대로 판이 돌아가지 않아 샘통이 난 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아이와 차이가 있다면 그는 무척이나 덩치가 큰 성인이란 것이고, 아이보단 훨씬 위험하다는 것. 물론 그게 현성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주변 사람들은 아마도 꽤나 괴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주먹질…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근데 내보다 잘하는 놈은 아직 못 봤심다. 그래가… 진짜 목숨 걸고 해볼라꼬요.”
“…니 뭐 그래 주먹질 한다 카는 거 싫어하드만 결국 한다 카는 게 그기가?”
잔뜩 굳은 얼굴의 창호를 바라보며 현성이 ‘그래 됐심다.’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니 뭐 내 깡패 짓 한다 그캐가 그 카는 거 아이고? 어?”
그리고 순간 가시 돋힌 그의 말에 현성이 ‘그런 거 아입니다, 히야!’ 하고 고개를 흔든다.
“내 히야한테 진짜 큰 신세 진 건 압니다… 그래가 어떻게든 갚을라고 생각은 하고 있심다. 근데… 진짜 내 목숨 걸고 그거 함 해볼라 카거든요. 진짜로…”
그 모습에 창호가 조금 굳은 얼굴로 ‘그래… 알았다.’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다곤 하지만 표정이 여전히 개운치 않았다. 그게 조금… 걸린다는 생각에 현성이 조금 울컥하는 기분을 느끼며 다시 그를 바라본다.
“나중에 니 후회나 하지 말그라! 그때 되면 늦는다! 그거 해봐야 돈 얼마나 된다고… 나는 니가 이해가 안 된다, 임마!”
그리고 토라진 듯 화를 팩 내버리고 창호가 가게 밖으로 나서자 현성이 한숨을 내쉬며 그 뒷모습을 바라본다. 난처한 인연이었다. 어떻게 해결하기 힘든… 하지만 그는 그의 인생에 그리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다. 청산해야 할 빚이 남아있단 게 여전히 걸리긴 하지만… 선은 그어야만 했다. 최대한 빨리 일이 해결되기를 바라며 현성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빨리 일이 풀려야 할 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