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회 - 괴물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피로하고 힘든 시간이 새벽이라고 한다. 특히나 밤에 일을 하는 사람들은 손님들 가운데 유난스러운 인간들이 몇 있다면 그 피로가 몇 배나 된다고 하는데 그 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던 모양이다.
“후…”
현성이 쉬는 날. 때 마침 들어온 진상 손님들에 몸도 마음도 지친 듯 혜주가 오늘만큼은 몸이 축 늘어질 정도로 취한 기분을 느끼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아 진짜… 진상들…”
돈 내면 왕이요, 돈이 제일이라… 치를 떨게 만드는 그네들의 횡포 앞에서 웃음 팔고 자존심 팔고. 물론 그걸 몇 년이나 계속 해왔지만… 돈에 영혼을 팔아버린 사람마냥 계속해서 버텨왔지만 이제는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듯 혜주가 무거운 한숨을 내쉰다. 몸이 무척이나 나른하고 피곤한 것이 오늘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많이 허전했다. 아마 그 든든하고 듬직한 녀석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물 먹은 솜 마냥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우며 혜주가 비틀비틀 걸음을 옮긴다.
그래도 그나마… 한결 나은 게 있다면 일이 끝나고 나서 그가 밖에 그녀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것.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깊은 새벽 시간에, 쉬는 사람에게 연락 먼저 하기가 미안한지 취기 올라 발그레한 얼굴로 혜주가 물끄러미 핸드폰만 바라본다.
“…자나…”
따로 연락 오지 않은 핸드폰을 보고 있자니 보고 싶다 이야긴 했지만 혹시 잠이 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연락 하기가 계속 망설여지는지 혜주가 ‘후…’ 하고 자꾸만 한숨을 내쉰다.
“…치… 뻥쟁이… 보고 싶다 캐놓고…”
왠지 모르게 서운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지만… 그가 오늘 무척이나 많이 힘들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자 혜주가 한숨과 함께 옅은 미소를 짓는다. ‘그냥 내일 보면 되니까…’ 체념한 얼굴로 그녀가 가게 밖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왠지 모르게 투정도 부리고 싶고, 짜증도 부리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될 것만 같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그녀보다 한참 어리니까. 그에게서 어른이 될 때 까지 옆에서 돌봐주고 지켜주겠다 약속한 게 바로 그녀였으니까.
“누나, 오늘은 좀 일찍 나가네요. 오늘 그 진상 쉐리들 때문에 고생 많았죠…?”
그렇게 혜주가 코트를 입고 가방을 챙겨 입구를 나서려 할 때 카운터에서 가게 마무리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범수가 졸린 눈으로 그녀에게 물음을 던진다. 그 물음에 혜주가 괜찮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리다가도 많이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응. 내 이 정도 짬밥이면 퇴근해도 되잖아.”
유난히 힘들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도 까칠한 모습 그대로 대답하는 그녀라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서글퍼 보인단 생각에 범수가 ‘맞아요, 빨리 들어가서 푹 쉬어요.’ 하고 어서 가보라는 듯 손짓을 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혜주가 ‘옹냐…’ 하고 스륵 감기는 눈에 웃음을 띤 채 돌아서 걸음을 옮긴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한 번 더 핸드폰을 꺼내 보고는 다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가게를 나서기 시작한다.
수작 한 번 부려보겠다 술을 퍼다 먹이는 바람에, 기술적으로 빠져나가려고 해도 이 늙은 여우들은 그리 쉬운 상대들이 아니었다. 물론… 그들이 바란대로 아름다운 그녀의 몸까지 가지진 못했지만. 그랬기 때문에 그 난리를 부렸을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우스운 여자라 생각하다 그리 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게 그녀에겐 유일한 자존심이었고.
“…하…”
이젠 그게 자존심인지, 아니면 뭔지 본인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지만. 애시당초 그녀에게 있어서 남자란 것은 돈이 있거나 없거나 항상 그녀를 탐하는 존재들에 불과했다. 처음엔 그게 뭔지도 모르고 사랑이라 생각해 몸이고 마음이고 모든 걸 내주어 버렸고, 그 다음엔 모든 걸 잃어버리고서 체념하고 말았다. 더러운 몸, 이제는 얼마나 망가진다 해도 상관없단 어린 생각으로 뛰어들었지만 참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괴롭고 힘들어 진다. 지금은 그게 너무 지치고 지쳐서 이제는 역겹기 그지없을 정도니까.
술기운인지 아니면 이상하게 오늘 새벽은 구질구질한 그 신세를 자꾸만 떠오르게 만드는 고약한 기분에 같다는 생각에 혜주가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다시 핸드폰을 바라본다.
“보고 싶다 그캐놓고…”
머리는 이해를 하나 가슴은 이해하지 못한다. 왠지 모를 서운한 기분에 혜주가 입술을 꾹 깨물고는 차가운 바깥 공기를 느끼며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통화 버튼을 꾹 눌러 버린다. 그 아름답고 화려한 용모에 통화 목록에는 수십, 수 백명의 남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을 것 같지만 몇 안 되는 연락엔 ‘못난이♡’라고 적혀진 이름 하나만 보일 뿐.
-뚜르르…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눌러버린 통화에 그녀가 저도 모르게 긴장된 얼굴을 하고서 차가운 벽에 기대서본다. 신호음이 계속 울리기만 할 뿐, 그녀가 그리 듣고 싶어 하는 그의 목소리는 당최 들려오질 않는다.
-전화기가 꺼져 있사오니…
안내원의 기계적인 목소리가 대신 답변을 할 뿐. 자고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머리론 알 것 같은데 가슴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 이상야릇한 감정이 몇 년… 무척이나 오랜만에 찾아와 가슴을 들쑤시자 왠지 모를 서운함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혜주가 핸드폰을 천천히 내려 놓는다. 뚝 끊어진 통화에 홀로 집으로 가고 싶지 않다는 맘이 굴뚝 같이 밀려오지만…
“하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겉으론 강해보여도 속은 무척이나 여린 것이 이런 때에는 어쩔 수 없이 툭 튀어 나오곤 한다.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걸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혜주가 걸음을 내딛는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법이라고… 혹시라도 하는 생각에 핸드폰을 들어보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인 핸드폰. 그 모습만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던 혜주가 괜시리 속상한 마음을 감출 길 없이 입술을 잘끈 깨물고 홀로 걸음을 옮긴다. 술이 깨도록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지만 이상하게 눈가가 아득하다. 이런 괴로운 날은 정말로 혼자란 게 싫어서 차라리 돌아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집으로 갈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그게 또 얼마나 스스로가 초라해보일지 알 겨를이 없어 결국 홀로 걸음을 옮긴다.
축 늘어진 몸이 높은 굽에 의존해 걸으면 온 몸의 체중이 한 곳에 다 쏠려서 발이 괴로울 정도로 아파오곤 했다. 특히나 이렇게 몸이 통제가 되지 않을 정도면… 정말 빨리 들어가서 기절하듯이 잠 들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그 괴로운 심정을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이 그렇게 홀로 돌아가는 서글픈 길. 진짜 사랑 받는 게 그리운 그녀가 ‘나쁜놈…’ 하고 코를 훌쩍이며 이젠 어른스러움을 다 집어 던지고 그에 대한 원망만 꺼내 놓는다.
보고 싶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르는데… 이렇게 보지 못하고 홀로 가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나잇값을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도 서운한 감정은 어쩔 수 없나보다. 괜히 혜주가 혼자 있으니… 다른 사람에겐 보여줄 필요 없는 그 약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채 눈시울을 붉히며 차가운 날씨에 잔뜩 움츠러들어 비틀비틀 걸음을 옮긴다. 이제 빨리 들어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한 듯 큰길가로 그녀가 걸음을 옮기다 속이 뒤집어 질 것 같은 기분에 걸음을 멈추고 벽에 손을 짚고서 후우, 후우… 하고 숨을 고른다. 신경성인지 몰라도 스트레스에 민감한 속이 이렇게 술까지 먹으면 무척이나 괴로운 것을…
안 되는 날은 정말 안 되는 것들만 잔뜩 늘어져 있는 걸 알면서도 속 상한 건 어쩔 수 없다. 맘이 있는 만큼 원망도 커지는 법이라고 괜시리 밀려오는 우울한 기분에 ‘나쁜 놈… 거짓말 쟁이…’ 하고 그녀가 원망하는 듯 혼잣말을 늘어 놓는 동안 자꾸만 그 생각을 하자 속이 버티지 못하는 모양이다.
“욱…”
헛구역질을 하며 혜주가 눈을 질끈 감았을 때.
“누나… 괜찮아예..? 와 그래예…?!”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할 법도 하다만… 그랬다면 무척이나 서운했을 것이다. 그것과 달리 그 느릿느릿하고 무뚝뚝한 녀석이 이렇게 다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니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또 좋아진 듯 벽을 잡고 헛구역질을 하던 혜주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든다.
그리고 그 앞에는 화상 자국이 새겨진 얼굴. 큰 덩치. 험상궂지만… 무척이나 따뜻하고 정감 있는 눈을 가진 그가 보인다.
“…몰라! 니 때문이잖아!”
갑자기 눈물이 핑 돌 것 같이 반가우면서도 마음이 어색해 짜증스럽게 소리치는 그녀의 외침에 그가 ‘아…’ 하고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인다. 그러다가도 비틀거리는 그녀를 손으로 잡지도 못하고 꽉 쥔 주먹으로 부축하며 ‘이래 일찍 나올 줄 몰랐어가…’ 하고 미안한 눈빛을 던지는 것을. 그 모습에 혜주가 뭔가가 욱 하고 올라와서 자꾸만 콧잔등이 시큰하고 눈가가 희뿌연 기분을 느끼다 고개를 흔들며 ‘전화를 왜 안 받노!’ 하고 목소리를 높인다.
“아… 미안해요, 누나. 오늘… 밖에 오래 있어가 배터리 다 된 줄 몰라서…”
그 말에 혜주가 ‘몰라…!’ 하고 고개를 홱 돌린다. 머리론 이해가 가도 이상하게 몸이 자꾸만 말을 듣지 않는다. 괜히 속상한 기분이, 남의 사정 모를 정도도 아니건만 잘 따라주지 않아서 짜증 부리고 싶고, 속 상한 마음을 계속… 꺼내고 싶은 그녀를 바라보며 현성이 ‘많이 기다렸어예…?’ 하고 물음을 던진다.
“…내가 전화를 했는데, 전화기 꺼져 있고…! 그러니까 걱정도 되고… 속 상하잖아! 온다 그캐놓고…! 보고 싶다 그캐놓고…!”
화를 내야 할 이유 같은 건 전혀 없는데 내가 왜 이러는 걸까? 꼴 사납다는 생각이 들어서 움츠러 들면서도 그러면 그럴수록 괜히 더 화만 내는 자신의 모습에 혜주가 소리치면서도 움츠러드는 모습을 하자 현성이 어색한 웃음으로 그저 머리만 긁적인다. 그렇게 화를 낼 일도…
“미안해요, 누나.”
사과할 일도 아닌데. 그러나 그 말 한 마디가 속상하고 힘들던 마음을 단 한 번에 녹여 준다. 그 말에 혜주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하고 그를 바라보다 이내 입을 꾹 다물고 토라진 듯 홱 고개를 돌린다. 이 나이를 먹고도 제대로 말 하나 못 하는 멍청한 여자. 이번엔 또 그게 그렇게 속상해져 금방 울 것 같이 위태로운 얼굴을 한 그녀를 보며 현성이 알 수 없는 그녀의 감정에 난처한 웃음과… 한 편으로는 무척이나 기쁜 마음이 든 듯 한 번 더 ‘미안해요…’ 하고 이야기 한다.
“…몰라.”
코를 훌쩍이며 혜주가 토라진 듯 고개를 숙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그가 무얼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이고 서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단 생각에 저도 모르게 그녀를 꼭 안아본다.
“아…”
그 순간 새어나온 탄성에 혜주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의 품에 얼굴을 기댄다. 술집 여자, 싸구려, 폼 파는 계집애, 화냥년… 수 많은 오명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녀도 다른 여자들과 다를 바 없는 여자인 마냥 그의 품에 얼굴을 기댄 채 너무나도 수줍게 그대로 기대어 있을 뿐이다. 그 너른 품이 의지할 수 있는 품인 마냥 그렇게 기대고 있으면… 아니, 사실은 다시 보았을 때부터 서운한 마음 따위는 눈 녹 듯이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걸 또 제대로 이야기도 못하는 바보 같은 여자.
형편없는 말솜씨를 알기에 혜주가 원망하듯이 쏘아붙이던 전과 달리 두 손으로 그 옷깃을 꼭 안는다. 그 안에서 숨 죽여 훌쩍이는 소리가 그녀의 진심이자, 전부인 마냥… 그 마음을 그가 제발 알아준다면 좋겠다 희망을 가지고서.
“…무슨 일 있었어예…?”
그는 그녀에게 화 내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그녀를 보며 무슨 일이 있었느냐 세상 누구보다도 그녀를 걱정하는 사람이 되어 물음을 던질 뿐.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혜주가 입술을 앙 다물고 고개를 흔든다.
“오늘 많이 힘들었어예…?”
하지만 그는 한 번 더 물음을 던진다. 그 말에 다시 혜주가 훌쩍이며 고개를 흔든다. 그러나 그게 진심이 아니란 것 쯤…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 모습에 그가 옅은 미소를 띤 채 다시 그녀를 안자 혜주가 두 손으로 그 두텁고 든든한 몸을 꼭 끌어 안는다.
“조금 더 일찍 나올 걸 그랬나봐예.”
결코 그녀를 원망하거나, 나무라지 않는… 그저 자신이 조금 더 일찍 나왔다면 좋았을 걸 이야기 하는 그 말에 혜주가 ‘…아이다… 빙시야…’ 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 목소리에 현성이 그녀를 바라보려 하자 뭐가 그리도 창피한지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더욱 더 그를 꼭 안을 뿐이다.
“좀만 더 일찍 나왔으면 좋았을낀데.”
그리고 그 역시… 그녀를 더 세게 안으며 그 아쉬운 마음 그대로를 전할뿐. 그 목소리에 혜주가 아까의 서운함도, 창피함도 모두 사라지고 왠지 모를 안락함과 편안함을 느끼며 그 안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 수줍은 모습에 현성이 저도 모르게 입가에 번지는 미소가 무척이나 기분 좋은 것이란 생각을 하고서 꼭 쥐고 있던 주먹을 펴서 용기를 내어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본다.
“…오늘 많이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역시… 어색하긴 하지만 이 새벽의 아스라함이 말 할 수 있는 본심을 그녀의 앞에서 슬쩍 꺼내 놓는다. 그 순간 혜주가 심장이 쿵쿵 하고 뛰는… 술에 취한 몸이 축 늘어진 것과는 또 다르게 그의 품에 축 늘어지는 자신을 느끼며 부끄러운 낯으로 고개를 든다.
“…거짓말마라… 늦게 와놓고…”
삐진 듯 중얼거리는 수줍은 음성에 현성이 ‘진짠데요.’ 하고 그녀를 바라보자 무어라 또 대답도 못하고 혜주가 다시 그의 품에 얼굴을 묻는다. 그걸 뭐라고 이야기 해야 하는 걸까…? 그 바닥을 치던 기분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마냥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그녀가 그의 얼굴을 양 손으로 감싸 쥔다.
“…진짜…?”
그리고 간질간질 하는 입술을 또 어떻게 하지 못하고 그 눈을 바라보며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물음을 던진다. 그 모습에 현성이 마찬가지로 가슴이 세차게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진짜 보고 싶었어요.”
그 목소리가 새어나오기 무섭게 혜주가 다시 그 목을 끌어안으며 발 뒷꿈치를 든다. 그의 입술에 먼저 입술을 맞춘 그녀가 부드럽게 닿은 그 느낌에 괜시리 수줍어하며 금방 입술을 떼고 그를 새초롬한 눈으로 바라보자 현성이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가 올라간 채 그저 쑥스러운 듯 한 미소를 짓는다. 그 하나가 그리 좋을까? 부끄러워 미소 짓는 그 모습에 혜주가 ‘거짓말치지마라…!’ 하고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는다.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바닥을 치다가도, 갑자기 하늘을 날다가… 너무 이상하지만… 그런 게 중요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지금 그와 함께 있단 것이 너무나도 기분이 좋아서, 지금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그녀가 그를 온 힘을 다해서 안고 있는 동안… 현성이 무어라 이야기 하기 힘든 기분을 느끼며 작고 가녀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추븐데 빨리 들어가야죠. 감기 걸리겠다.”
그 목소리에 혜주가 ‘응…’ 하고 무척이나 가늘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천천히 얼굴을 뗀다. 술기운에 몽롱한 그 눈을 바라보며 현성이 옅은 미소를 짓자 다시 부끄러워진 혜주가 ‘뭐 보는데…!’ 하고 새침하게 그를 나무란다. 그 목소리에 현성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자 ‘치…’ 하고 그녀가 그의 팔을 꼭 끌어안고 그의 팔에 얼굴을 기댄다.
“…빨리 드가서 쉬고 싶다…”
그 말에 현성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택시를 잡으러 걸음을 옮기려 하자 혜주가 ‘멀어서 싫다…’ 하고 고개를 흔든다.
“니… 모텔 있자나…”
그 어리광에 현성이 ‘그래도 쉬는 거는 집에서 편히 쉬어야…’ 하고 이야기 하자 혜주가 ‘힘들다꼬…!’ 하고 다시 어리광을 부린다. 7살 연상인 그녀가, 항상 까칠하기 그지없던 그녀가 부리는 어리광에 그가 그저 웃음만 띤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발 조심해요. 와 이래 높은 거 신어요…?”
걱정스러운 그 목소리에 혜주가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을 터뜨리며 ‘뭐가 높은데…’ 하고 힘없는 손을 들어 그의 어깨까지밖에 오지 않는 키를 어필하듯이 그의 팔을 툭툭 친다. 그 모습에 현성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자 혜주가 ‘키 크다고 무시하지마라…!’ 하고 다시 그를 찌릿 하고 째려본다. 그러다가 이도 다시 웃음이 픽 새어나와선 입술을 오므리고 꾹 웃음 참는 모습에 현성이 옅은 미소로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그 미소에 혜주가 완전히 그에게 몸을 기댄 채 다시 ‘피…’ 하고 입술을 내밀고 웃음 띤 얼굴로 함께 걸음을 옮긴다.
“…근데… 오늘 니 어디 그래 갔다 왔어…?”
그리고 피곤에 겨운 얼굴을 하고서도 알고 싶은 게 많은지 그녀가 그에게 물음을 던지자 자신의 숙소라곤 하지만 함께 모텔로 들어가는 게 조금 어색하던지 현성이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한다.
“…피디님이랑… 다른 사람들 만나보고… 맑음터라꼬 다녀왔어요.”
“맑음터…?”
“예. 그 날… 그 사람 딸이 왔다 그캤잖아요…? 가 만나러…”
그제야 혜주가 아… 하고 피로한 얼굴을 들어 다시 그를 바라본다. 그 걱정 가득한 눈빛에 현성이 웃으며 고개를 흔든다.
“…가서 만나보고 잘 해결 됐어예. 그냥… 응. 진짜로요.”
그리고 그가 아영의 얼굴과 그 날 있었던 긴긴 일들을 떠올리며 대답하자 혜주가 ‘맞나…’ 하고 다시 그의 팔을 꼭 안는다. 무어라고 이야기 해야 할 까? 그는 보통 사람들과 달랐다. 많은 고생을 해보기도 했고… 그리고 보통 사람과는 다른 인생을 살아오고 있단 걸… 그녀보다 7살 어리더라도 마치 오빠 같은 그 분위기에 취해 저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리다 다시 그의 상황을 상기해낸 그녀가 못내 방금 그 행동들이 걸리는지 힐끔 그를 바라보자 현성이 그저 미소 짓는다.
“내… 거기서 울었어요.”
그 말에 혜주가 ‘진짜…?’ 하고 다시 물음을 던진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가 ‘그래가 누나 보고 싶었어요.’ 하고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자 혜주가 걱정하다 푸훗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그래야지…!’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바보 같이 울기는 와 우노… 빙시야…”
그러다 또 그가 울었다니 걱정이 되고 신경이 쓰이는지 퉁명스런 그 한 마디에 현성이 ‘그냥… 좀 그랬어요.’ 하고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가 그와의 시시콜콜 할 지 몰라도 그저 일상과 다름없는 이야기들 하나, 하나를 모두 듣기 원함을 알기에… 어색하게나마 그가 계속 이야기를 꺼낸다.
아영의 이야기, 그리고 아영과 함께 울었던 일, 그녀와 통화하고 나서 내내 계속 겨울 밤 길을 걸었던 것 까지… 그 하나, 하나를 들을 때 마다 ‘바보야! 빙시야! 왜 그랬노!’ 하고 혜주가 그를 나무라지만… 그 이야기를 꺼낼 때 마다 그녀의 표정은 그와 함께 하고 있다. 즐겁고, 행복한 동시에… 누구보다도 장현성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걱정하는 것을.
그 얼굴을 바라보는 게 너무나도 기분이 좋은 듯 현성이 미소 짓자 혜주가 ‘왜 또…’ 하고 부끄러운 낯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 말에 그가 차마 뻔뻔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그냥…’ 하고만 대답하자 다시 픽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가 고개를 돌린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걸어 모텔에 당도했을 때. 그 입구에 서서 혜주가 코를 훌쩍이며 그의 팔을 꼭 안고 그를 바라본다.
“니… 이상한 짓 하면 죽어…”
여전히 까칠한 그 목소리에 현성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그 모습에 혜주가 ‘진짜 이상한 짓 하지마…’ 하고 다시 그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 눈빛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이상한 듯 그가 ‘아… 예.’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팔을 안았던 두 팔을 풀어 다시 그를 안는다.
“…내 쉬운 여자 아이니까… 알겠나…?”
그 모습에 현성이 대체 혜주가 지금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 ‘아…’ 하고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며 ‘치!’ 하고 먼저 모텔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211호 열쇠 줘요…!”
당당하게 그의 방 열쇠를 프론트에서 받아 걸음 옮기는 혜주의 모습에 현성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그리고 그와 그녀가 다시… 그의 방에 도착했을 때. 철컥철컥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간 혜주가 높은 힐을 벗어 던지고 먼저 그의 침대 위로 몸을 던진다.
“아… 힘들어…”
그 목소리에 현성이 천천히 뒤를 따르며 문을 닫고 몸을 굽혀 그녀가 벗어놓은 구두를 가지런히 정리해 놓는다. 이내 그가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 침대 위로 몸을 던졌던 혜주가 어느 샌가 다시 일어나 그의 앞에 서있다.
그리고 그녀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을 때… 현성이 ‘누나…?’ 하고 조금 당황한 듯 그녀를 부르며 온 몸을 그에게 내맡긴 그녀를 안고서 그 등을 천천히 다독인다. 혜주가 떨어지고 싶지 않은 듯 그를 꼭 안고서 ‘내 쉬운 여자 아이니까…’ 하고 속삭이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응. 내 알아요. 누나 그런 사람 아닌 거… 괜찮아요.”
이내 그녀의 등을 다독이는 그 크고 두터운 손에 혜주가 이상하게 더 그를 세게 끌어 안으며 ‘치…! 진짜가…!’ 하고 소리친다. 알기 힘든 여자의 마음에 현성이 사실 잘은 모르겠지만… 그 아이 같이 제멋대로인 모습도 사랑스럽다 생각하며 ‘정말로요…’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내 더러워서 싫은 거 아이고…?”
그리고 그녀가 금방 울 것 같은 얼굴로 천천히 그에게서 떨어져 나와 잔뜩 움츠러든 모습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 두려움 가득한 얼굴은… 마치 현성이 그녀의 앞에서 보여주었던 그 의기소침한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모습에 현성이 ‘아…’ 하고 멈칫하며 고개를 흔든다.
“절대 아니에요.”
단호하게 고개 흔드는 그의 모습에 혜주가 ‘정말…?’ 하고 다시 물음을 던진다. 울 것 같이 훌쩍이는 그 모습에 현성이 ‘정말로요…’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근데 왜 니는… 내 한테 안 캐…? 다른 사람 다 카는데 니는 안 그러잖아…”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는 듯 그녀가 정말로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에게 물음을 던진다. 알고 있어도 그걸 더 확실하게… 그의 입으로 이야기 듣고 싶은 여자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성이 그녀의 물음에 ‘아…’ 하고 그저 잘 모르겠단 미소를 짓는다.
“누나가 싫어 할까봐요.”
그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의 감정 뿐이다. 그래서 그걸 숨기거나, 감출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그녀에게 꺼내는 그의 말에 혜주가 ‘안 싫은데…’ 하고 그를 바라본다. 그 눈빛에 현성이 고개를 흔들며…
“그냥… 싫어 할까봐요.”
“안 싫다고! 바보야!”
다시 그녀가 그를 꼭 끌어안는다. 투정 같은 외마디 오침을 남긴 채 혜주가 다시 그를 안고서 ‘나는 니 안 싫단 말이야…’ 하고 좋아한다는 말 대신 그 마음을 전한다. 그 말에 현성이 무어라 이야기해야 할 지 모를 따스하고도… 두근거리는 기분 좋은 설렘을 느끼며 양 손으로 그녀를 다시 꼭 끌어안는다.
“누나… 이런 거 싫어 하잖아예.”
“…응.”
이내 훌쩍이는 그녀를 다시 그가 다독인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혜주가 다시 고개를 흔든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카면 자기는 안 그런다 그칸다…? 자기는 다르니까 괜찮다고… 그러면 나는 아닌 거 알면서도 다 믿고…”
여지껏 그래왔고, 그래서 많이 다쳤고.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게 무서울 뿐이라는 그녀의 대답에 현성이 다른 말없이 그녀의 등을 다독인다. 혜주가 훌쩍이다 다시 히힛 하고 그 귓가에 옅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 들어 그를 바라본다.
“근데 니는… 다 참잖아… 바보 빙시 해삼 말미잘 멍텅구리…! 그런 말도 안 하고 그냥 참잖아…”
이다지도 요령 없는 남자. 수작부릴 줄 모르는 남자. 그녀의 나무라는 목소리에 현성이 ‘아…’ 하고 어색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다. 대체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얘길 했어야 했던가…? 하지만 그저 그는 그 순간에도 그녀의 등을 다독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니 안 싫은데… 진짜, 진짜 안 싫은데…”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 부끄러워 하지 못해 그리 하는 그녀 역시 그와 다를 바 없는 순둥이였다.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현성이 그 품에서 훌쩍이는 혜주를 다시 포근하게 감싸 어루만진다. 그리고 그 떨림, 그 인생에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진한 첫사랑의 향취를 느끼며 그가 대답한다.
“나는… 서혜주 진짜 진짜 좋아합니더.”